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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청하는 바이다> 퍼온 글
중심 2 499 2005-03-03 00:46:37
"한국 언론인들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지나친 표현인 것 같지만 엄밀히 따지든 대강 따지든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난 달 14일부터 16일까지 서강대학교에서는 [제6회 북한인권·난민 국제회의]가 열렸었다. 이 행사는 어린애들 소꿉놀이가 아니다. 굶어죽고 맞아죽고 총샬이나 교수형으로 죽고, 언론자유가 전혀 없는 ― 닭이나 개 수준의 소리 표현밖에 할 수 없는 ― 노예생활을 하는 북한인민을 인간으로 대우해 주자는, 너무나 절실한 주장과 호소를 하기 위한 인류애 토론장이었다.


이 행사 관련기사가 실릴 날짜인 15, 16, 17일자의 중앙종합일간지들을 도서관에 가서 많은 시간을 없애며 뒤져보았다.
제대로 보도한 신문은 조선일보밖에 없었다.
조선일보는
11일자 1면에 사고(社告)로 안내 기사를,
15일자 10면에는 가로 26센티 세로 33센티의 넓은 지면에,
16일자 8면에 가로 27, 세로 24의 지면에,
17일자 2면에는 가로 15, 세로 20의 지면에 컬러사진을 곁들인 기사만 아니라 35면에 관련 사설을 실었다.
이 행사를 후원키로 나선 신문이니까 당연지사이긴 하지만, 한국 언론의 더러운 고질병 상태를 주시해온 사람 중의 한 명으로서 조선일보에 감사(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여덟 신문들은 전혀 싣지 않았다.
* 한국일보는 신문을 못 찾아 미확인.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한국 언론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통일의 상대를 누구로 생각하는가?
노예상태로 살다가 무고하게 죽은 수많은 북한동포 귀신들인가?


3월 1일에는 3.1절 행사와 겹치는 것을 불리한 상황이라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한 듯한 [국민행동본부] 주도의 [북한해방 3.1국민대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있었다. 다른 집회처럼 2, 30명이 모인 소규모 집회가 아니었다.
* 주최측 추산으로는 약 2만명, 경찰 추산으로는 약 5천명.
이 엄청난 사람들이 자기 뜻을 밝힌 행사에 대한 신문들의 보도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이 역시 무시한 신문들이 더 많았다.
3 : 7로.
이 3에 속하는 신문들도 마지못해 게재한 듯, 온전한 보도기사가 아니라 사진 설명문으로 끝난 아주 간단한 기사였다. 조선, 동아, 중앙.


조선일보는 A17면에 "독도 갈등으로 뜨거워진 3.1절"이란 큰 제목에
---울릉 군민 등 전국서 다양한 행사/
국민행동본부 "북한 해방" 촉구---
라는 부제목을 붙인 3종 행사를 종합한 기사에서 200자도 안 되는 문장으로 땜질 형식의 기사로 취급했다. 이 행사를 위해 원고지 한 장 분량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 약 170자.


조선일보 취재 기자와 편집기자들도 그 누군가에 의해 매수당했을까? 마취 당한 것일까?
언론 통제를 즐기는 권력자(당국자)의 은근한 압력에 굴복한 것일까?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신문들 중 대다수는 권양숙이란 여자가 눈꺼풀 수술을 한 기사만은 참 열심히 지면을 아끼지 않고 사진도 크게 넣어 자세히 보도했다.


권양숙이란 여자의 눈꺼풀 수술결과는 국민(독자)들이 알아야 할 중대한 일이고, 북한 동포들의 노예 상태 해방을 촉구하는 시민들은 심심해서 바람쐬러 나온 정도의 시시껄렁한 존재인가?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오늘의 한국의 언론인들아!
당신들은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두려운 힘에 포위 당했는가? 그 정도로 불가피한가?
아니면, 스스로 기꺼이 지렁이보다 못한 자존심을 지니고 살기로 작정한 것인가?
그런 주제에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 타령을 계속할 것인가?


언론인들 중 아무나 대답해 보시라.
권양숙이란 여자의 무게가 더 무거운가?
언론 자유는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는 불쌍한 저 북한동포들의 무게가 더 무거운가?


도대체
오늘의 북한 땅에 사는 우리 형제들이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시대보다 과연 더 행복하다고 보는가?


천만에!
단언컨대
더 비참하다.
명백하게.


일제시대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또한 굶어죽을 처지면 각자 보따리 싸고 만주나 하와이로 갈 수 있었다. 막지 않았다.
오늘의 저 불쌍한 북한 동포는 오로지 먹을 것을 구하려고(살려) 북한 땅을 벗어났을 뿐인데도 짐승처럼 도로 납치 당해 간다. 이 정도로 인류 역사사상 가장 자유가 없는 노예 상태로 하루하루를 슬프게 사는 것이 북한 동포다.


따라서 대한민국이란 곳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족들만 사는 땅이 아닌 한,
어제의 각종 행사 보도 중 일본을 규탄하는 행사보다 김정일 집단을 규탄한 행사 쪽에 비중을 더 둔 보도를 했어야 옳은 것이 아닐까?


대관절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북한 동포를 아프리카나 중동, 동남아의 난민보다 더 외면해도 좋은 이유가 무엇인가?


조선일보만이라도 권양숙씨와 북한의 노예 수준의 동포를 같은 저울로 달지 않기를 바란다. 반세기의 애독자로서 간청하는 바이다. //050302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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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완섭 2005-03-10 22:15:50
    한국인 여러분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중국 이렇게 세 나라밖에 없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다케시마를 일본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이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 불법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같은 한국의 역사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서점들이 모두 판매금지시키고 매장에서 철수시켰기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신판매만이 거의 유일한 판매방법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고자 하시는 분은
    1. 아래 계좌로 책값을 입금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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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값은 1권당 2만원입니다.
    발송료는 무료입니다.

    계좌번호: 농협 093-12-082397 김완섭
    E-mail 주소: <a href=mailto:cosmosws@paran.com>cosmosws@paran.com</a>

    참고삼아 이 책의 보도자료와 서문을 첨부하였습니다.







    도서출판 춘추사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56-2
    전화 02-567-7675
    팩스 0505-567-7675
    E-mail : <a href=mailto:cosmosws@paran.com>cosmosws@paran.com</a>




    [ 보도자료 ]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저자 : 김 완 섭
    변형 신국판 / 452면 / 값 20,000원
    분류 : 인문 / 비소설
    발행일 : 2003년 6월 10일

    ▷이 책에 대한 문의는 춘추사 편집부 (02-567-7675)로 해주십시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과연 한국인가, 일본인가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연하게 한국인들에게는 ‘사실은 거꾸로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일본 내에서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과거사에 관한 한 남북한에 사죄해야 한다는 소위 ‘속죄파’가 대세였으나 최근 들어 한국의 역사날조를 고발하는 출판물들이 줄을 이으면서 속죄파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사실 이제 일본에서 속죄파는 소수로 전락했으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인사로 여겨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최근 1년간 일본 내에서 이같은 ‘역사날조의 한국’의 인식을 급속하게 퍼뜨린 것이 바로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이다. 이 책의 출현으로 인해 일본내에서 역사논쟁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앞으로의 한일관계는 이 전과는 매우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저자는 최근 자주 일본을 방문하여 정재계의 실력자들을 접촉하고 있는데, 그가 만난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이 책을 숙독하였으며 고이즈미 현 총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각료들도 이 책으로 인해 인식의 전환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최근 자민당 정조회장인 아소 타로씨의 창씨개명과 관련된 발언에 대해서도, 예전 같으면 사죄하고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시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야당을 비롯하여 일본 정계의 그 누구도 아소 발언에 대해 그 진위를 문제삼는 인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소 발언 사건은 ‘발언의 내용은 진실이지만 한국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있는 민감한 시기였다는 터져나왔다는 것이 문제다’는 정도로 정리되었으며 아소씨가 ‘발언의 타이밍’에 대해 사죄한 뒤에는 그 누구도 아소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즉 이제 일본 사회에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은 한국이다’는 인식은 점차 상식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분위기다.

    이 책은 작년 2월 한국에서 초판이 발간된 이래 7월에 일본어판이 시판되기 시작해 현재 35만부가 판매되었으며, 일본의 대형서점 대부분에서 2002년 판매실적 10위 안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해진 책이다. 저자가 역사분야에는 문외한인 젊은 한국인이라는 것 이외에도 기존 일본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으로 인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저자에게 가해진 한국 정부의 전방위 탄압으로 인해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알려졌으며, 작년 여름에는 저자가 출국금지되고 검찰의 외환유치선동죄 기소방침이 알려지면서 저자가 일본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구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토히로부미에게 헌정된 책

    이 책이 얼마나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책장을 펼치자마자 드러난다.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의 혁명가인 김옥균과 이등박문에게 헌정되었으며, 저자는 헌시에서 김옥균과 이등박문을 살해한 집단을 ‘원수’로 규정하고 있다. 즉 김옥균을 살해한 민비와 이등박문을 살해한 안중근을 민족의 원수로 규정하면서 강력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같은 인식의 배경은 책 전체를 걸쳐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일본에 의해 시작된 조선의 문명개화,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이 책의 화두는 ‘문명개화’이다.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회를 문명개화시키는 일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앞서는 최우선 과제이며 민족주의나 독립지상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즉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미개했던 조선사회를 문명개화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악덕도 선이 될 수 있으며, 이같은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한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의 은인이며 일본은 조선의 어버이가 될 자격이 있는 국가라는 것이다.

    독도를 우리 땅이라 우기는 것이 애국심인가?
    불법점령하고 있는 독도는 일본에 돌려주어야 한다.

    독도문제에 대한 저자의 인식도 충격적이다. 독도는 국제적인 상식으로 볼 때 1905년 이후 일본의 영토이며, 대한민국은 일본에 주권이 없었던 1951년 독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지금까지 이 섬을 불법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무력사용을 금지한 평화헌법으로 인해 독도를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저자는 독도가 일본 영토임은 미국조차 인정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독립운동 비판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독립운동은 훌륭한 일이었다’는 인식에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독립운동은 매우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구한말의 국제정세를 볼 때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당시에는 일본과 손을 잡고 문명개화를 추진한 친일파들이 옳았으며 독립운동가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회주의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 이 책의 주요 내용

    1. 한국과 중국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과거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은 히틀러의 침략전쟁과는 달리 올바른 명분을 지닌 아시아 해방전쟁이었으며, 따라서 전후 처리도 독일의 경우와는 달라야 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주장하는 일본의 전쟁범죄는 대부분 조작되거나 과장된 것이며, 오히려 과거사를 따져보면 한국이나 중국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 국가들이다. 한국은 과거 베트남 등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추악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중국은 아직도 많은 이민족의 땅을 강제점령하고 있는 침략국이다.

    2.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일본에서는 많은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3. 한일합병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 개항 이후 조선의 혁명세력이 고심 끝에 합병을 추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갑신정변 이래 수차례 시도된 시민혁명의 시도는 고종과 민비, 외세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고 그 결과 동학과 독립협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은 일진회를 통해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이들은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과 연합군을 이루어 참전하였고 러일전쟁이 승리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힘을 빌어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루는 노선을 추진한다. 한일합병은 이같은 조선 혁명세력의 뜻이 관철된 자주적인 선택으로 해석해야 한다.


    ?? 저자 소개: 김완섭

    아나키스트이며,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1963년 광주에서 출생해 1982년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1989년까지 물리학과 천문학,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87년에는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1989년부터는 컴퓨터 분야의 전문 기자로 일하다 이후 프리랜서로 번역 저술 등의 일을 했다. 5.18 국가유공자이며 광주민주화운동과 구로구청 농성사건 등으로 두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6년 이후 2년간 호주에서 거주하였으며 귀국 후 코스닥 신문사를 창간,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현재는 저술과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아인슈타인 원저인 [물리학의 진화](1994)가 있으며 저서로는 [윈도우3](1992) [창녀론](1995) 등이 있다.

    ## 이 보도자료와 표지사진은 여산통신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www.ypnn.co.kr)



    서문: 쇼비니즘의 광풍을 뚫고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지속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정부나 민간 할것 없이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양국이 비슷한 기간동안 비슷한 성격의 일본 통치를 거쳤음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까닭은 첫째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가 15년 더 길었다는 것, 둘째 대만에는 일본 이전에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남북한이 일본에 대해 보이고 있는 유별난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북한의 경우 오랫동안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반일정책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독립 이후 친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남한에서는 왜 이토록 반일감정이 심각한 것인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지닌 반일감정의 기저에는 과거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인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져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에는 먼저 역사학자들에 의한 자의적인 자료 조작과 사실왜곡이 자리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강력한 반일 교육과 이데올로기 책동이 깔려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과 대만을 통치함에 있어 대체로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했으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즉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개발과 투자에 있어서는 본토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일본에 있어 조선과 대만 경영은 상점 주인이 옆의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확장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이 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멀리 떨어진 호주에 과일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 그는 호주의 농장에 일정한 돈을 투자해 수익을 발생시킴으로써 그 이윤을 따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상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상인이 힘들게 옆에 있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성을 다해 새로 생긴 가게를 단장하고 기존 점포와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100년 전 강대국들과 힘들게 전쟁을 치르면서 대만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처지는 바로 이런 구멍가게 주인과 비슷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을 두고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혹 장기적인 수탈이나 병참기지 확보의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와서 힘들게 농토를 개량하고 다리와 도로를 만들고 공장을 건설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런 애정과 개척 정신이 없다면 말과 풍습이 다른 낙후된 오지에 삶의 터전을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은 조선에 문명을 전파하고 산업을 일으키고 무지한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따라서 과거 일본이 조선에 행한 선의의 시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즉 한국인들에게 존재하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인 것이다. 이는 또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 등 당시 조선의 모든 혁명세력이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타도하고 문명개화라는 조선혁명의 과제를 이루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어용 사이비 단체 정도로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1904년 초 벌어졌던 러일전쟁에서 동학교도들은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무려 17만여 명이 참전하여 일본과 함께 싸웠다. 이후 동학교도와 보부상들은 진보회를 결성하여 첫해에만 전국에서 38만의 조직원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독립협회 계열의 지식인들과 연합하여 한일 합병과 개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때 100만이 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 외모에서 쉽게 구분이 되었기 때문에 보수 반동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진회는 결성 이후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하였고 그로 인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수많은 회원들이 살해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이 일진회를 친일단체라 하여 비난하고 반동 폭도들을 의병이라 칭송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실수라 하겠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과 일본내 병합파들이 청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에 의한 이토 암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일진회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혁명 조직이자 군사조직이었으며 조선 총독부조차도 그 힘을 두려워하여 합병 이후 강제 해산하였을 정도로 강력한 조직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산업혁명을 이루어 질서정연한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일본 정부와 황실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조선왕조가 존속돼었다면 이같은 천지개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같은 공헌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의 성과물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했던 유교 원리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원리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이 미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유교근본주의가 외세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소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개혁, 그것도 일제에 의한 철저한 청산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으로 남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제시대가 우리에게 행운이었고 축복이었을지언정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불행한 과거일 수는 없다.

    나는 자라면서 전후 한반도가 두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운 좋게도 분단을 피했다고 생각해왔다. 통일을 말할 때에도 남북한의 통일만을 얘기할 뿐 일본이나 대만과의 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패전 후 일본제국이 7개 지역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지 남북한이 분단된 것은 아니다. 승전국들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이들은 구일본에서 남한과 북한, 대만, 사할린, 오키나와, 남양군도를 모두 떼어낸 뒤 각각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할린만이 아직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고 오키나와는 1972년 다시 일본에 반환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여러 개의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획득한 영토를 분리한다는 것은 승전국들의 억지 논리였을 뿐 우리가 선택했던 것은 아니며, 물론 일본이 원했던 것도 아니므로 이는 분명 강제 분단이라 하겠다.

    일본은 조선과의 분단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전후 독립과정에서 사할린과 대만은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한반도와는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 노력하였지만 힘없는 패전국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고 분단은 고정되어 버렸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뒤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대리통치인으로 앉혀 이념대결의 시험장으로 육성했다. 그러므로 조선 분단의 원흉, 더 근원적으로 구일본 분단의 원흉은 멀쩡한 나라를 패전국이라 하여 강제로 갈라놓은 미국 소련인 것이지 분단을 막아보려 애쓴 일본은 아니라 하겠다.

    나는 어린 시절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전쟁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그 영화에서 일본은 하와이의 평화스런 미국인들을 기습 공격한 비겁하고 못된 나라였고, 나는 일본을 저주하면서 제2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국이 멋지게 일본군을 때려잡을 것이라던 도라도라 2탄은 몇 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진주만>>이라는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나는 일본군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60년 전에 엄청난 규모의 항모전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출정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버린 그 위대함에 나는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일본이었으며 우리 선조들은 전쟁의 승리에 내지의 일본인보다 더 열광했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현실은 과거 한 나라였던 한국과 일본이 오늘날까지 미군에 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서, 분명 바람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체계적인 반일교육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반일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남한을 장악한 정치집단은 체제유지를 위해 공산주의 일본이라는 두 개의 증오집단을 조작해 내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오늘날에도 반일 세뇌교육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이라 하겠다.

    아마도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정작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인들은 오늘날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에 매우 호의적이다. 또한 과거 51년 간 일제시대를 경험한 대만에서도 반일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한국과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의 경우 공식적인 태도는 공산당의 입장일 뿐이며 중국인들에게서 한국에서와 같은 반일감정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실 많은 중국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한국이나 일본을 중국의 일개 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2년 새해를 맞아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합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이는 한국인들이 적극적인 대일 혐오감정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인들의 염한감정은 한국의 이유 없는 증오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무례하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도 한국의 유별난 반일감정은 국제사회에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에 착수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나는 개항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는 약 70년간을 조선의 시민 혁명기로 설정하고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개항 이후 미개한 조선을 현대적인 시민사회로 개조하는 데 있어 일본은 대체로 혁명의 든든한 지원군이었으며 때로는 주도적으로 개입해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 우호적인 외세였다.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으로 대표되는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3대 세력은 시대에 따라 대결하거나 연합하면서 조선혁명을 이끌어왔으며,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바람직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시각으로 개항기의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혁명은 비록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코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인들도 큰 역할을 담당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선왕실과 그에 빌붙은 수구외세, 매국노들에 대항하면서 30년 동안 끈질기게 개혁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문명개화는 이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성과물인 것이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소동이 한참이던 2001년 여름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 방영한 바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오늘날 일본에 자학사관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가지 자랑스런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인류 발전에도 공헌한 바가 많은 나라이다.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일본이 한차례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때문에 선조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오늘의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이상하게도 한국인을 만나면 으레 몽둥이로 매를 맞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한국인들이 때리지 않자 언제 때리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비록 패전국이지만 오늘날에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국민이 왜 이웃나라에 와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일본 땅이었던 곳에 와서 이처럼 궁색한 처지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도 역사 교사들로부터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패전기념일마다 묵념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문제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청산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다. 일본은 전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그 정신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만난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강대국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이렇게 작은 나라에서...<0x2415> 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에 비하면 땅덩이도 좁고 인구도 적어 여러모로 너무 작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이런 사고방식들은 모두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과 자기비하 작업의 결과 생겨난 것이며, 일본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선결과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은 잘못된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자는 움직임일 뿐 한국에서 말하는 우익의 준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우익도 아니며 그저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일 뿐이다. 최근의 교과서 파동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트집 잡아 분별없는 처신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정부당국자들과 한국민 사이에 팽배해 있는 저열한 역사인식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연유한 것이며, 한국은 일본이 이 같은 무례한 언동에 정면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자기합리화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의 유연한 대응은 정면에서 상대를 적대하지 못하는 일본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자신보다 처지가 좋지 않은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의 의사표현 방식이 차라리 서양식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쯤 한일관계의 갈등은 그 실체라도 드러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관료 체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인은 프랑스 혁명군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어느 쪽이 옳은 입장인가는 자명하다. 허황된 민족주의를 외치는 자들은 대체로 수구세력의 앞잡이들이었으며, 진정한 애국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혁명을 지지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해 마지않았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가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에 찬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통해 전 세계에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복전쟁이 무엇이나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헤겔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의 활동인 것이며, 이들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는 것은 침략이며 악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폐기되어 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민족단위의 자주적인 존립이 정당하다는 논리도 최근 들어 유행하게 된 민족국가의 자기합리화 논리일 뿐 그것이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같은 면에서 볼 때 19세기말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복에서는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겠으나 일본의 아시아 진출에는 분명 세계정신의 자기 구현이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겠다. 혁명을 통해 비유럽 지역 최초로 근대적인 사회제도를 구축하고 자율적으로 시민 혁명을 완성한 일본의 변화는 세계 역사에서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달리 착취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은 조선과 대만에서 압제와 가난을 추방하고 근대적인 법의 통치를 구현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통치 지역의 주민들은 문명개화되어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싱가포르와 일본 사이에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일본 총리는 <<확대 동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두 가지 모두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며,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협력과 공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뉴스라 할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멋진 영상으로 치장된 명성황후 뮤직비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극우 쇼비니즘의 미친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같은 파렴치한 역사왜곡과 반일 책동은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의 외톨이 국가로 만들어갈 수 있으며,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그러한 깨달음의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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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완섭 2005-03-17 23:52:40
    독도는 일본 땅

    1. 현재 상태 - 한국측이 실효적 점령 상태이긴 하지만, 정식 영토로 주장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김대중 정부때 일한 어업협상에서 경제수역과 관련하여 독도는 중간수역으로 어정쩡하게 놔두기로 합의한 것을 보면 알수 있죠. 즉 독도를 중심으로 200해리.. 어쩌고 이렇게까지는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즉 독도가 분쟁수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됩니다.

    2. 국제사법재판소 - 그런데 일본측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투자고 한일협정때부터 제안하고 있으나 한국측에서는 거부하고 있는 상태. 표면적인 논리는 '우리땅이 확실한데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나 내면적으로는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패배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뭐 한국정부에서는 그냥 우리땅이야 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 말고는 제시할만한 논리는 아무것도 없다.

    3. 시간끌기 - SBS 보도에 따르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갈때 실효적인 점령상태가 50년 혹은 100년이 되면 결정적으로 유리하다고 한다. 지금은 막 50년 지났고 아직은 안심할수 없으니 48년만 더 기다려보자는 것 같은데, 하지만 독도 부근을 중간수역으로 합의해놓았기때문에 나중에 100년이 지난다고 해도 그동안 '실효적 지배'를 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4. 무주물 선점 - 국제법상 독도와 같은 무인도나 바위섬에 대한 소유권은 정부문서로 먼저 선언한 국가에 귀속된다. 소유권을 선언해놓고 5년인가.. 그동안 다른 국가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소유권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국가가 나타나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단하게 된다. 독도에 대한 최초의 소유권 선언을 한 것은 일본으로서 1905년 2월 시마네현 고시로 다케시마를 오키 도사의 소관으로 둔다라고 공보하여 현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 뒤 이의를 제기한 국가는 없었으므로 다케시마는 자동으로 일본영토가 되었다. 이것은 을사조약(2차 한일협정)이나 합병 전의 일이므로 이런 사건들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5. 불법 점령 - 그뒤 47년이 흐른 1952년 대한민국이 독도에 대해 소유권 선언을 하는데, 이는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점령. 이 때 일본은 뭘 했는가. 패전국 일본은 이때 미국의 군정 상태로서 주권이 없는 상태였다. 물론 군대도 없고 정부도 없었다. 즉 주인이 없는 사이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도둑질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6. 바보 일본 - 그렇다면 보통의 국가라면 자기 영토를 이웃나라가 점령하고 있는데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보통 국가가 아니다. 거세당한 패전국인 것이다. 일본은 원래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고 국제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영구히 포기한다고 헌법9조에 명시되어 있다. 독도를 둘러싸고 자위대와 한국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무력사용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냥 '침공당한 영토를 방위한다'고 해석하면 그만이겠지만 전쟁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게 길들여져버린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7. 역사적 지리적인 조건 - 독도는 울릉도와 오키 제도 중간에 있지만 울릉도에서 더 가깝다. 하지만 본토에서의 거리는 일본쪽이 더 가깝다. 따라서 지리적인 조건은 1:1로 어느쪽이 유리하다고 말하기 힘든 상태. 역사적으로는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고지도를 내세우며 원래 조선영토였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억지주장임. 독도가 명기된 고지도는 하나도 없다. 사실 조선말까지만 해도 울릉도도 조선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해 아무나 들어와 사는 섬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물개잡이 어선의 기지로 수백년 전부터 사용해오던 섬이었음. 따라서 역사적인 조건은 일본 승.

    8. 샌프란시스코 조약 - 일본의 독립 조건을 논의한 조약으로서 1952년 발효되었다. 이 조약에서 한국의 영토가 규정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와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및 그 부속도서'이다.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라면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으나 독도와 울릉도는 대륙붕 자체가 완전히 다르고 거리도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제주도와 마라도처럼 '부속도서'라고 하기는 힘들다.

    9. 결론 - 이처럼 여러 측면을 살펴봐도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억지를 뒷받침할만한 논리와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정부가 의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떼와 억지 뿐이다. 그리고 믿을 것은 '100년 채우기'와 일본헌법9조 뿐이다. 해군력은 열세이므로 독도는 일본신헌법이 발효됨과 동시에 일본해군이 점령할 것으로 전망됨.

    10. 해결책 -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일본해군이 점령하기 전에 자진 반납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강도짓한 것을 현 정부가 아직까지 싸안고 있을 이유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두번째 해결책은 미국이 빼앗아 일본에 돌려주는 것이다. 미국은 분명히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로 인해 한국에서 입을 손실을 감안하면 일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른 방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일본정부가 주권을 행사하는 것(무력점령),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는 것 등이 있다. 어느쪽이나 일본영토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11. 사족 - 일본의 영토분쟁은 현재 다케시마(한국) 북방4개섬(러시아), 센가쿠제도(중국대만) 등 3개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세곳 모두 명백한 일본 영토를 주변국에서 강제 점령했거나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센가쿠열도만 일본 해상자위대가 실효적인 점령을 하고 있을 뿐, 나머지 두 곳은 한국과 러시아가 실효적인 점령을 하고 있다.


    일본과 관련해서 한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사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해를 동해라고 주장하고 다케시마(埈島, 한국명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이다. 일본해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국제 사회에서 정착된 표기이며 지리적으로 보아도 정당한 이름인데, 한국 정부는 이것을 동해라고 우기며 세계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도에서 일본해를 동해로 바꾸려는 무모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로 인해 '한국은 뭐든지 생떼를 쓰면서 관철시키려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국제사회에 정착된다면 (이미 그렇게 된 듯하지만) 한국인들은 어딜 가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황해는 서해라고 우기고, 동중국해는 남해라고 우길 것인가?

    지도를 펴놓고 보면, 일본해는 송편 모양의 고립된 내해로서 오른쪽의 대부분을 일본 열도가 감싸 안고 있는 형태이다. 왼쪽은 남한과 북한, 러시아의 연해주가 접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해에 접하고 있는 부분은 전체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며, 한반도 전체를 보아도 채 5분의 1이 안 되는데, 이 바다를 동해로 불러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예전 조선시대 말기 간도(지금의 만주동쪽과 러시아 연해주)가 조선의 영토였던 시절에는 그나마 동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고 하겠지만, 한반도의 남쪽 일부로 영토가 줄어든 지금에 와서 동해를 주장하는 일은 무리가 있다. 설령 남북한이 공동으로 동해를 주장한다 해도 간도를 잃은 지금에 와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건 누가 보나 일본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한 바다인 것이다. 한국의 주장은 마치 일본이 태평양을 동해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이 이를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소속된 영토로 주장하고 있는데, 현재는 한국의 실효적인 점령상태에 놓여 있으며 독도 주변의 바다는 한일공동관리 수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미군정 상태에서 주권조차 없던 시절 독도를 무단 점거하여 아직까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이웃나라가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에서 도둑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도에 대한 한국의 소유권 주장은 이 섬이 한반도와 일본의 본토에서는 중간 지점이지만, 오키 제도보다는 울릉도에서 약간 더 가깝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1905년 1월28일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1905년 2월22일에는 시마네현 고시40호를 발표, 이 섬을 '다케시마'로 부르고 오키 도사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한 바 있다. 이 당시 대한제국의 행정력은 울릉도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공식적인 항의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다케시마는 국제법상 당연히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은 것이다. 다케시마에 대해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가 소유권을 선언한 것은 1952년 1월 18일에 발표된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14호,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고시는 사실상 원인 무효다. 당시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이 14호 고시에 의해 일본해의 공해 상에 마음대로 선을 그은 뒤 평화선이라고 부르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들을 모두 잡아다 부산항에 억류하는 등 일본에 주권이 없는 상태를 악용해 강도짓을 했다. 이승만의 생각은 일본 어부들을 잡아다 이를 인질로 삼아 일한국교협상에서 보다 많은 돈을 받아내려는 것이었으니 당시 이런 짓을 하는 한국이라는 국가는 해적떼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이승만 라인' 사건은 이후 우리 정부도 주장을 철회한 부당한 조치였으므로 그와 함께 선언된 독도주권 선언도 자동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후 일본은 1952년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주권을 되찾게 되었는데 이 평화조약 2조항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 3개의 섬은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는 중요한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한국의 영토에는 이 3개 섬과 부속도서 등 3000여 개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즉 제주도가 한국 영토이므로 거기에 딸린 마라도 또한 한국의 영토로서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으며, 해저 지형을 보아도 전혀 다른 대륙붕에 소속된 섬이어서 어느모로 보나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할 수 는 없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1905년 이래 독도는 일본영토였으므로 이는 한일합병과는 관련 없는 무인도에 대한 무주물 선점이며, 소유권 선언 이전에도 오랜동안 일본 어선들이 강치(물개)잡이의 거점으로 이용하던 해상기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일본 땅이라는 것인데, 이는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독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에서 한국 쪽에 유리한 점은 울릉도에서 다케시마까지의 거리가 오키섬보다 약간 가깝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독도 분쟁에 대한 외국의 시각은 어떠한가. 압도적으로 일본의 입장이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중립적인 미국의 경우에도 지난 1999년 태평양사령부가 발간한 지도를 보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으며 독도를 일본 영토로 분명하게 표기해놓고 있다. 또한 홍콩의 경제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가 지난 1996년 독도문제와 관련해 행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 섬을 한국 영토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고 협상을 통해 일본의 경제수역에 포함된 지역의 어업권을 획득한다거나 하는 실익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일본해의 일본쪽 수역은 팔라우제도에서 시작된 쿠로시오 난류가 북상하다가 북태평양에서 내려오는 한류와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각종 고기떼가 몰리는 황금어장이다. 과거 영해가 12해리였을 때에도 한국 어선들은 일본 쪽에 바짝 붙어서 고기를 잡다가 이 영해를 침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 200해리(360킬로미터)가 독점 경제수역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 한국 어선들은 일본 근해의 황금어장을 모두 상실하게 된 상태이다.

    200해리가 독점 수역으로 인정받게 됨으로써 일본은 세계에서 5번째로 넓은 해양영토를 보유한 자원강국이 되었다. 태평양에 점점이 널려 있는 일본령 무인도들로 인해 북태평양의 상당부분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200해리 경제수역이라는 것은, 큰 바다에서 바위섬 하나만 갖고 있으면 무려 35만 평방킬로미터, 일본열도 전체 넓이에 해당하는 바다에 대해 독점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 각국은 바다에 잠겨있는 암초 주변에 엄청난 돌을 쏟아 부어서 섬으로 만든 뒤 소유권을 주장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태평양에 무인도 하나 갖고 있지 못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 비해 20배가 넘는 해양영토를 가진 일본이 이런 조그만 섬 하나 양보해주면 어떤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차원이라면 일단 일본에 돌려준 다음에 부탁을 해야 할 문제이지 다짜고짜 점령해놓고 억지를 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 땅이 아닌 다케시마는 하루빨리 일본에 돌려주어야 한다.




    한국인 여러분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한국과 북한, 중국 이렇게 세 나라밖에 없답니다.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는 다케시마를 일본땅으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이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 불법점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습니다.
    역사를 날조해 착한 일본인들을 마치 강도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 민족의 황금기였던 일제시대를 마치 지옥이라도 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역사에 관한한 국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세뇌당해 있습니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 속아 살아온 것이 너무도 분해서
    며칠동안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이같은 한국의 역사날조와 반일세뇌교육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진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한국 정부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는 반일단체들의 잇따른 고소고발과 경검찰의 편파적인 수사, 테러
    등으로 인해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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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도자료 ]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저자 : 김 완 섭
    변형 신국판 / 452면 / 값 20,000원
    분류 : 인문 / 비소설
    발행일 : 2003년 6월 10일

    ▷이 책에 대한 문의는 춘추사 편집부 (02-567-7675)로 해주십시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과연 한국인가, 일본인가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연하게 한국인들에게는 ‘사실은 거꾸로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일본 내에서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과거사에 관한 한 남북한에 사죄해야 한다는 소위 ‘속죄파’가 대세였으나 최근 들어 한국의 역사날조를 고발하는 출판물들이 줄을 이으면서 속죄파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사실 이제 일본에서 속죄파는 소수로 전락했으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인사로 여겨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최근 1년간 일본 내에서 이같은 ‘역사날조의 한국’의 인식을 급속하게 퍼뜨린 것이 바로 이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이다. 이 책의 출현으로 인해 일본내에서 역사논쟁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앞으로의 한일관계는 이 전과는 매우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저자는 최근 자주 일본을 방문하여 정재계의 실력자들을 접촉하고 있는데, 그가 만난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이 책을 숙독하였으며 고이즈미 현 총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각료들도 이 책으로 인해 인식의 전환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최근 자민당 정조회장인 아소 타로씨의 창씨개명과 관련된 발언에 대해서도, 예전 같으면 사죄하고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시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야당을 비롯하여 일본 정계의 그 누구도 아소 발언에 대해 그 진위를 문제삼는 인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소 발언 사건은 ‘발언의 내용은 진실이지만 한국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있는 민감한 시기였다는 터져나왔다는 것이 문제다’는 정도로 정리되었으며 아소씨가 ‘발언의 타이밍’에 대해 사죄한 뒤에는 그 누구도 아소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즉 이제 일본 사회에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은 한국이다’는 인식은 점차 상식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분위기다.

    이 책은 작년 2월 한국에서 초판이 발간된 이래 7월에 일본어판이 시판되기 시작해 현재 35만부가 판매되었으며, 일본의 대형서점 대부분에서 2002년 판매실적 10위 안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해진 책이다. 저자가 역사분야에는 문외한인 젊은 한국인이라는 것 이외에도 기존 일본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으로 인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저자에게 가해진 한국 정부의 전방위 탄압으로 인해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알려졌으며, 작년 여름에는 저자가 출국금지되고 검찰의 외환유치선동죄 기소방침이 알려지면서 저자가 일본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구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토히로부미에게 헌정된 책

    이 책이 얼마나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책장을 펼치자마자 드러난다.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의 혁명가인 김옥균과 이등박문에게 헌정되었으며, 저자는 헌시에서 김옥균과 이등박문을 살해한 집단을 ‘원수’로 규정하고 있다. 즉 김옥균을 살해한 민비와 이등박문을 살해한 안중근을 민족의 원수로 규정하면서 강력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같은 인식의 배경은 책 전체를 걸쳐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일본에 의해 시작된 조선의 문명개화,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이 책의 화두는 ‘문명개화’이다.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회를 문명개화시키는 일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앞서는 최우선 과제이며 민족주의나 독립지상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즉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미개했던 조선사회를 문명개화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악덕도 선이 될 수 있으며, 이같은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한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의 은인이며 일본은 조선의 어버이가 될 자격이 있는 국가라는 것이다.

    독도를 우리 땅이라 우기는 것이 애국심인가?
    불법점령하고 있는 독도는 일본에 돌려주어야 한다.

    독도문제에 대한 저자의 인식도 충격적이다. 독도는 국제적인 상식으로 볼 때 1905년 이후 일본의 영토이며, 대한민국은 일본에 주권이 없었던 1951년 독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지금까지 이 섬을 불법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무력사용을 금지한 평화헌법으로 인해 독도를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저자는 독도가 일본 영토임은 미국조차 인정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독립운동 비판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독립운동은 훌륭한 일이었다’는 인식에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독립운동은 매우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구한말의 국제정세를 볼 때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당시에는 일본과 손을 잡고 문명개화를 추진한 친일파들이 옳았으며 독립운동가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회주의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 이 책의 주요 내용

    1. 한국과 중국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과거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은 히틀러의 침략전쟁과는 달리 올바른 명분을 지닌 아시아 해방전쟁이었으며, 따라서 전후 처리도 독일의 경우와는 달라야 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주장하는 일본의 전쟁범죄는 대부분 조작되거나 과장된 것이며, 오히려 과거사를 따져보면 한국이나 중국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 국가들이다. 한국은 과거 베트남 등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추악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중국은 아직도 많은 이민족의 땅을 강제점령하고 있는 침략국이다.

    2.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일본에서는 많은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3. 한일합병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 개항 이후 조선의 혁명세력이 고심 끝에 합병을 추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갑신정변 이래 수차례 시도된 시민혁명의 시도는 고종과 민비, 외세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고 그 결과 동학과 독립협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은 일진회를 통해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이들은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과 연합군을 이루어 참전하였고 러일전쟁이 승리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힘을 빌어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루는 노선을 추진한다. 한일합병은 이같은 조선 혁명세력의 뜻이 관철된 자주적인 선택으로 해석해야 한다.


    ?? 저자 소개: 김완섭

    아나키스트이며,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1963년 광주에서 출생해 1982년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1989년까지 물리학과 천문학,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87년에는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1989년부터는 컴퓨터 분야의 전문 기자로 일하다 이후 프리랜서로 번역 저술 등의 일을 했다. 5.18 국가유공자이며 광주민주화운동과 구로구청 농성사건 등으로 두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6년 이후 2년간 호주에서 거주하였으며 귀국 후 코스닥 신문사를 창간,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현재는 저술과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아인슈타인 원저인 [물리학의 진화](1994)가 있으며 저서로는 [윈도우3](1992) [창녀론](1995) 등이 있다.

    ## 이 보도자료와 표지사진은 여산통신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www.ypnn.co.kr)



    서문: 쇼비니즘의 광풍을 뚫고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지속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정부나 민간 할것 없이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양국이 비슷한 기간동안 비슷한 성격의 일본 통치를 거쳤음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까닭은 첫째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가 15년 더 길었다는 것, 둘째 대만에는 일본 이전에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남북한이 일본에 대해 보이고 있는 유별난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북한의 경우 오랫동안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반일정책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독립 이후 친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남한에서는 왜 이토록 반일감정이 심각한 것인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지닌 반일감정의 기저에는 과거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인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져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에는 먼저 역사학자들에 의한 자의적인 자료 조작과 사실왜곡이 자리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강력한 반일 교육과 이데올로기 책동이 깔려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과 대만을 통치함에 있어 대체로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했으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즉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개발과 투자에 있어서는 본토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일본에 있어 조선과 대만 경영은 상점 주인이 옆의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확장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이 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멀리 떨어진 호주에 과일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 그는 호주의 농장에 일정한 돈을 투자해 수익을 발생시킴으로써 그 이윤을 따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상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상인이 힘들게 옆에 있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성을 다해 새로 생긴 가게를 단장하고 기존 점포와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100년 전 강대국들과 힘들게 전쟁을 치르면서 대만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처지는 바로 이런 구멍가게 주인과 비슷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을 두고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혹 장기적인 수탈이나 병참기지 확보의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와서 힘들게 농토를 개량하고 다리와 도로를 만들고 공장을 건설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런 애정과 개척 정신이 없다면 말과 풍습이 다른 낙후된 오지에 삶의 터전을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은 조선에 문명을 전파하고 산업을 일으키고 무지한 사람들을 교육시켰다. 따라서 과거 일본이 조선에 행한 선의의 시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즉 한국인들에게 존재하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인 것이다. 이는 또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장 유력한 증거가 바로 1904년 결성된 일진회다. 이 단체는 동학과 독립협회 등 당시 조선의 모든 혁명세력이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타도하고 문명개화라는 조선혁명의 과제를 이루기 위해 결성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은폐되어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진회에 대해 일본이 소수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어용 사이비 단체 정도로 왜곡하여 교육하고 있다.

    1904년 초 벌어졌던 러일전쟁에서 동학교도들은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무려 17만여 명이 참전하여 일본과 함께 싸웠다. 이후 동학교도와 보부상들은 진보회를 결성하여 첫해에만 전국에서 38만의 조직원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독립협회 계열의 지식인들과 연합하여 한일 합병과 개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때 100만이 넘는 방대한 조직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 외모에서 쉽게 구분이 되었기 때문에 보수 반동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진회는 결성 이후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하였고 그로 인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수많은 회원들이 살해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이 일진회를 친일단체라 하여 비난하고 반동 폭도들을 의병이라 칭송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해석하는 실수라 하겠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과 일본내 병합파들이 청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에 의한 이토 암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일진회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혁명 조직이자 군사조직이었으며 조선 총독부조차도 그 힘을 두려워하여 합병 이후 강제 해산하였을 정도로 강력한 조직이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산업혁명을 이루어 질서정연한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일본 정부와 황실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조선왕조가 존속돼었다면 이같은 천지개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같은 공헌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의 성과물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했던 유교 원리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원리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이 미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유교근본주의가 외세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소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개혁, 그것도 일제에 의한 철저한 청산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으로 남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제시대가 우리에게 행운이었고 축복이었을지언정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불행한 과거일 수는 없다.

    나는 자라면서 전후 한반도가 두개의 나라로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운 좋게도 분단을 피했다고 생각해왔다. 통일을 말할 때에도 남북한의 통일만을 얘기할 뿐 일본이나 대만과의 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패전 후 일본제국이 7개 지역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지 남북한이 분단된 것은 아니다. 승전국들에게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이들은 구일본에서 남한과 북한, 대만, 사할린, 오키나와, 남양군도를 모두 떼어낸 뒤 각각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할린만이 아직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고 오키나와는 1972년 다시 일본에 반환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여러 개의 독립국이 되었다. 일본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획득한 영토를 분리한다는 것은 승전국들의 억지 논리였을 뿐 우리가 선택했던 것은 아니며, 물론 일본이 원했던 것도 아니므로 이는 분명 강제 분단이라 하겠다.

    일본은 조선과의 분단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전후 독립과정에서 사할린과 대만은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한반도와는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 노력하였지만 힘없는 패전국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고 분단은 고정되어 버렸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뒤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대리통치인으로 앉혀 이념대결의 시험장으로 육성했다. 그러므로 조선 분단의 원흉, 더 근원적으로 구일본 분단의 원흉은 멀쩡한 나라를 패전국이라 하여 강제로 갈라놓은 미국 소련인 것이지 분단을 막아보려 애쓴 일본은 아니라 하겠다.

    나는 어린 시절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전쟁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그 영화에서 일본은 하와이의 평화스런 미국인들을 기습 공격한 비겁하고 못된 나라였고, 나는 일본을 저주하면서 제2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국이 멋지게 일본군을 때려잡을 것이라던 도라도라 2탄은 몇 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진주만>>이라는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나는 일본군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60년 전에 엄청난 규모의 항모전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출정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버린 그 위대함에 나는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일본이었으며 우리 선조들은 전쟁의 승리에 내지의 일본인보다 더 열광했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현실은 과거 한 나라였던 한국과 일본이 오늘날까지 미군에 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서, 분명 바람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체계적인 반일교육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반일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남한을 장악한 정치집단은 체제유지를 위해 공산주의 일본이라는 두 개의 증오집단을 조작해 내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오늘날에도 반일 세뇌교육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이라 하겠다.

    아마도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정작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인들은 오늘날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에 매우 호의적이다. 또한 과거 51년 간 일제시대를 경험한 대만에서도 반일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한국과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의 경우 공식적인 태도는 공산당의 입장일 뿐이며 중국인들에게서 한국에서와 같은 반일감정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실 많은 중국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한국이나 일본을 중국의 일개 성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2년 새해를 맞아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합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이는 한국인들이 적극적인 대일 혐오감정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인들의 염한감정은 한국의 이유 없는 증오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무례하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도 한국의 유별난 반일감정은 국제사회에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에 착수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나는 개항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는 약 70년간을 조선의 시민 혁명기로 설정하고 근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개항 이후 미개한 조선을 현대적인 시민사회로 개조하는 데 있어 일본은 대체로 혁명의 든든한 지원군이었으며 때로는 주도적으로 개입해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 우호적인 외세였다.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으로 대표되는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3대 세력은 시대에 따라 대결하거나 연합하면서 조선혁명을 이끌어왔으며,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바람직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시각으로 개항기의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혁명은 비록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코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인들도 큰 역할을 담당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선왕실과 그에 빌붙은 수구외세, 매국노들에 대항하면서 30년 동안 끈질기게 개혁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문명개화는 이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성과물인 것이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소동이 한참이던 2001년 여름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 방영한 바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오늘날 일본에 자학사관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가지 자랑스런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인류 발전에도 공헌한 바가 많은 나라이다.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일본이 한차례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때문에 선조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오늘의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이상하게도 한국인을 만나면 으레 몽둥이로 매를 맞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한국인들이 때리지 않자 언제 때리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비록 패전국이지만 오늘날에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국민이 왜 이웃나라에 와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일본 땅이었던 곳에 와서 이처럼 궁색한 처지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도 역사 교사들로부터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패전기념일마다 묵념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문제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청산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다. 일본은 전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그 정신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만난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강대국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이렇게 작은 나라에서...<0x2415> 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에 비하면 땅덩이도 좁고 인구도 적어 여러모로 너무 작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이런 사고방식들은 모두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과 자기비하 작업의 결과 생겨난 것이며, 일본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선결과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은 잘못된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자는 움직임일 뿐 한국에서 말하는 우익의 준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우익도 아니며 그저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일 뿐이다. 최근의 교과서 파동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트집 잡아 분별없는 처신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정부당국자들과 한국민 사이에 팽배해 있는 저열한 역사인식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연유한 것이며, 한국은 일본이 이 같은 무례한 언동에 정면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자기합리화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의 유연한 대응은 정면에서 상대를 적대하지 못하는 일본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자신보다 처지가 좋지 않은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의 의사표현 방식이 차라리 서양식이었다면 최소한 지금쯤 한일관계의 갈등은 그 실체라도 드러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관료 체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인은 프랑스 혁명군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어느 쪽이 옳은 입장인가는 자명하다. 허황된 민족주의를 외치는 자들은 대체로 수구세력의 앞잡이들이었으며, 진정한 애국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혁명을 지지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해 마지않았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가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에 찬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통해 전 세계에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복전쟁이 무엇이나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헤겔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의 활동인 것이며, 이들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는 것은 침략이며 악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폐기되어 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민족단위의 자주적인 존립이 정당하다는 논리도 최근 들어 유행하게 된 민족국가의 자기합리화 논리일 뿐 그것이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같은 면에서 볼 때 19세기말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복에서는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겠으나 일본의 아시아 진출에는 분명 세계정신의 자기 구현이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겠다. 혁명을 통해 비유럽 지역 최초로 근대적인 사회제도를 구축하고 자율적으로 시민 혁명을 완성한 일본의 변화는 세계 역사에서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달리 착취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과 근대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은 조선과 대만에서 압제와 가난을 추방하고 근대적인 법의 통치를 구현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통치 지역의 주민들은 문명개화되어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싱가포르와 일본 사이에 자유무역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일본 총리는 <<확대 동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두 가지 모두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이며,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협력과 공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뉴스라 할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멋진 영상으로 치장된 명성황후 뮤직비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극우 쇼비니즘의 미친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같은 파렴치한 역사왜곡과 반일 책동은 결국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의 외톨이 국가로 만들어갈 수 있으며,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그러한 깨달음의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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