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북한방송국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 공개 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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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민주화위원회의 공식 매체인 자유북한방송이 "김정일위원장의 정치는 김일성주석의 정치"라는 제목의 글을 쓴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개 고소하였다. 아래는 공개 고소문과 자주민보에 실린 문제의 글이다. 김정일위원장의 정치는 김일성주석의 정치 [2007-06-04 ] 아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제작중인 자주민보(www.jajuminbo.net)라는 사이트에 버젓이 나 있는 글이다. 자유북한방송국은 "김정일위원장의 정치는 김일성주석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쓴 이 글의 작성자, 문경환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이란 인물을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공개 고소한다.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 1996년 6월 3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 말은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북한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주목하던 세계 앞에 내놓은 북한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는 근본 사상부터 내용, 형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김일성 주석의 정치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는 김일성 주석의 정치 1.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충효정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서거 직후 제시한 구호)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는 북한 전역을 눈물의 바다로 만들었다. 김일성 주석의 영전은 물론, 만수대언덕, 북한 곳곳에 있는 김일성 주석의 동상과 초상화, 사적비, 추모행사장에는 북한 주민들과 해외의 추모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1994년으로 말하면 영변의 핵시설을 둘러싸고 북미 대결이 절정에 이를 때였다. 당시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극적인 협상 타결이 이루어졌고 동시에 남북 정상회담까지 계획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시시각각 급변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일어난 뜻밖의 김일성 주석 서거는 세계의 관심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향하도록 하였다. ‘북한=김일성’으로 인식되던 당시 김일성 주석을 잃은 북한은 과연 국상의 아픔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다가올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7월 17일까지 설정된 애도기간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더욱 철저히 무장하자!’는 구호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김일성 주석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호소하는 구호라고 분석하는데 북한에서는 ‘충효정치’로 표현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충효정치’는 장례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 ‘수령님의 영구를 여기저기에 옮겨 모실 생각은 없’다며 김일성 주석이 20여 년 동안 집무를 보던 금수산의사당에 영구를 안치, ▲ 웃음과 낙관은 김일성 주석의 천품이며 생활신조였다며 마지막 가는 길에도 웃으며 가도록 환히 웃는 모습의 초상화 ‘태양상’을 영결식 초상화로 삼도록 하며 직접 사진 원본을 선정, ▲ 영구차를 포차나 장갑차 대신 평소에 타고 다니던 눈에 익은 승용차로 하며 명예위병대 대장이 생전과 다름없이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모든 것을 김일성 주석의 생전과 다름없이 진행하도록 한 것인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각은 7월 14일 '태양상' 앞에서 한 이야기에 그대로 담겨있다. “우리 인민들이 환하게 웃으시는 수령님의 초상화를 보면 수령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우리 인민들의 심장속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수령영생위업’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실천은 계속되었다. ▲ ‘만수무강축원탑’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영생탑’으로 교체, ▲ 서사시 ‘영원한 우리 수령 김일성동지’와 노래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네’ 창작과 보급 사업을 직접 지도, ▲ 영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생불멸할 것이다’, ‘위대한 생애의 1994년’ 제작 지도, ▲ 김일성 주석의 영구를 안치하였던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조하고 김일성 주석을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안치하도록 지시하였다. 또 1995년 12월 25일 담화 “혁명선배를 존대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이다”를 발표하여 과거 일부 사회주의 나라에서 새롭게 정권을 쥔 사람들이 자기 입지를 굳히기 위해 과거 지도부를 모욕하고 공격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한 것을 비판하고 도덕과 의리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분석하였다. 이 담화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로동계급의 당은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혁명선렬들이 개척하고 전진시켜온 사회주의위업을 변함없이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하며 혁명선배들을 내세우고 그들의 사상과 업적으로 인민들을 교양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또한 이듬해 6월에는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마지막 부분을 계승본 형식으로 완결, 출판하도록 지도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영생’을 위하여 생전에 하지 못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는 가장 먼저 조선노동당을 영원히 '김일성 주석의 당'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5년 10월 2일 조선노동당 창건 50돌을 앞두고 논문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다’를 발표하였다. 북한은 이 논문의 의의를 ‘혁명의 영도자가 당의 창건자, 수령을 어떤 입장과 자세를 가지고 변함없이 받들어나가야 하는가 하는 숭고한 모범’(‘김정일 지도자 제4부’, 탁진, 김강일, 박홍제 공저)이라고 분석하였다. 또한 1996년 1월에는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사로청) 대표자회에 참석, 사로청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개칭하도록 하고 8월에는 청년절 5돌에 즈음하여 “김일성동지의 청년운동 사상과 령도업적을 빛내여나가자”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북한은 이에 대해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김일성 주석이 시작한 ‘주체의 혁명위업’을 계속 해야 한다는 의미로 분석하였다. 김일성 주석 서거 후 3년이 지난 1997년 7월 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결정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혁명업적을 길이 빛내일데 대하여’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 김일성 주석의 출생 년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 제정, ▲ 김일성 주석의 출생일인 4월 15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인 ‘태양절’로 제정할 것을 결정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어서 1998년 9월 5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기존 헌법을 수정, 보충하였는데 주된 내용으로 ▲ 김일성 주석의 사상을 법제화, ▲ 김일성 주석을 북한의 영원한 주석으로 법제화, ▲ 북한 사회주의 헌법을 김일성 헌법으로 규정 등이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 최고지도자의 유고시에는 혼란을 막기 위하여 최대한 빨리 후계자를 최고지도자로 세우기 마련이다. 이는 모든 나라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또 역사적으로도 그래왔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김일성 주석 서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석직 승계를 예상하였다. 이는 북한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물론 조선노동당과 내각, 인민위원회의 간부들,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이들까지 나서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석직 승계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삼년상 이후로 논의를 미루었다. “수령님께서 우리곁을 떠나셨으니 당과 국가 지도기관을 새로 구성하는 추대사업을 빨리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들이 제기되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수 없으며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애도기간을 100일이나 1년, 3년으로 하였습니다.” “수령님의 령구앞에서 인민들이 목놓아울던 비분이 아직도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당과 국가 지도기관을 새로 선거하고 만세를 부르는것은 전사의 도리가 아닙니다.”(1994년 10월 1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위대한 수령님을 영원히 높이 모시고 수령님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 중에서) 삼년상이 끝나는 1996년이 되자 주석직 승계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원래 우리 풍습에 따르면 고인의 사망 2주기가 되는, 햇수로 3년째가 되는 날을 삼년상이 되는 날로 따진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추모기간을 늘려야 한다며 김일성 주석 서거 3돌이 되는 1997년 7월 8일을 삼년상이 되는 날로 정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삼년상이라고 하면 해수로가 아니라 옹근 3년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지 3돐이 되는 다음해 7월 8일이 실지로 삼년상이 되는날입니다.” “력사에 전무후무한 위인이신 우리 수령님에 대한 추모를 삼년상으로 계선을 긋는 조상전래의 풍속에 맞추어 할수는 없습니다.”(1996년 2월 1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 인민과 함께 계신다’ 중에서) 이렇게 하여 1997년이 되어서야 국가수반 추대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주석직이 아닌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에 추대되었다. 주석직은 영원히 김일성 주석을 위한 자리로 헌법에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었고 이듬해인 1998년 9월 5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나타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치적 판단과 결정은 기존의 관례와 경험에 구애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0년에 있었던 역사적인 평양방문 자리에서 “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래 우리 민족 전래의 윤리에 따라 3년상을 치른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습니다”(6월 14일 저녁 평양 목란관 만찬사에서)라고 이야기하였다. 2.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정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구상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유훈 관철’에 모든 힘을 집중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오직 수령님께서 걸어오신 혁명의 한길로만 변함없이 걸어가야 하며 수령님의 위업을 수행해나가는데 모든 힘을 집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수령님께서 생존해계실 때처럼 수령님의 위대한 혁명업적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빛내여나가야 하며 혁명과 건설을 철두철미 수령님의 뜻대로, 수령님식으로 해나가야 합니다.”(1994년 10월 1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위대한 수령님을 영원히 높이 모시고 수령님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 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 관철 의지는 1994년 11월 9일 발표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0051호 ‘평양시에 청류다리(2단계)와 금릉2동굴을 건설할데 대하여’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청류다리와 금릉2동굴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에 따라 진행하는 공사였다. 당시 아침부터 최고사령관 명령이 중대 발표된다는 소식이 나오자 미국 등 북한을 예의주시하던 나라들에서는 군사적으로 중대한 변화나 문제가 발표될 것으로 생각하고 긴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낮 12시가 되어 발표된 명령은 군사문제와는 관계없는 뜻밖의 명령이었다. 군사적 긴장관계가 첨예한 시기에 비군사적 중대 발표를 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 전반적 무상치료제 실시에 대한 내각결정을 발표한 것과 유사하다. 이 밖에도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 담긴 여러 토목건축들이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기간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며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때였다. 주요 건설 결과를 보면 청류다리와 금릉2동굴 외에도 ▲ 단군릉 개건, ▲ 평양-향산간 관광도로, ▲ 안변청년발전소, ▲ 당창건기념탑 등 다양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통일 유훈’ 실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었으며 김일성 주석이 서거 직전인 7월 7일 마지막으로 비준한 문건도 조국통일과 관련된 문건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1994.7.7’이란 서명을 기념비로 만들어 판문점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또한 1997년 8월 4일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조국통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필생의 위업이였으며 절절한 념원이였다.”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의 숭고한 뜻을 이어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것은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의무이고 의리이며 우리 세대에 맡겨 진 성스러운 민족적임무이다. 조국통일의 앞길에 그 어떤 난관과 장애가 가로 놓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여야 하며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우리 세대의 책임과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국제 사회주의 운동도 계승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4년 11월 1일 노동신문에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논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발표하여 우리는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고수하고 완성해나갈 것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결국 나의 사상이 붉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나 같습니다.” 즉, 동구권 몰락 이후 사회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 김일성 주석의 서거 이후 북한이 어떤 변화를 보일 것인가 주목하고 있는 세계 앞에 자신의 변함없는 입장을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모든 교시를 ‘유훈 교시’로 규정하고 김일성 주석의 뜻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정치 활동을 진행하였다.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권력 승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분석하기도 하지만 모두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김일성 주석과 현지지도를 함께 다녔고, 대학 졸업 후인 1964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4년에는 김일성 주석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추대되고, 1991년에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정치’는 ‘충효정치’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있다. 3. ‘김정일 시대’는 ‘김일성 시대’와 다르지 않을 것 1997년 총비서 추대, 1998년 국방위원장 추대 당시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새로운 김정일 시대가 개막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물론 국가 최고지도자가 바뀐 것에 대하여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내용상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노선이나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김일성 주석의 뜻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기본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이 ‘선군정치’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는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선군정치’라는 표현이 공식 문서에 나타난 것은 1997년이 처음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선군혁명노선’, ‘선군혁명영도’, ‘선군사상’과 같은 표현들도 등장하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선군’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발한 독창적인 사상이자 정치방식이며 이것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하였다. 물론 ‘선군정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이를 체계화, 정식화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두고 김일성 주석과 다른 노선, 정치방식이라고 분석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3년 1월 2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나눈 담화 ‘선군혁명로선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혁명로선이며 우리 혁명의 백전백승의 기치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내놓으시고 일관하게 견지하신 총대중시, 군사중시사상과 로선은 우리 당 선군정치의 기초이며 출발점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활동의 첫시기 무장대오부터 조직하시고 총대에 의거하여 조국광복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하시였으며 조국을 광복한 다음에 당도 국가도 창건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광복후에도 혁명의 매 시기, 매 단계마다 언제나 군사문제에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시고 혁명무력을 끊임없이 강화하여 혁명과 건설의 승리적전진을 군사적으로 확고히 담보할수 있게 하시였습니다.” “우리 당의 선군정치는 위대한 수령님의 총대중시, 군사중시사상과 로선을 계승하고 변화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심화발전시켜 내놓은 우리 시대의 위력한 정치방식입니다.” 1999년 6월 16일 발표된 노동신문, ‘근로자’(잡지 형태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공동논설 ‘우리 당의 선군정치는 필승불패이다’에서도 ‘우리 당의 선군정치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혁명의 개척기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사회주의정치사전반이 곧 선군령도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독특한 선군정치의 위력이 성스러운 혁명실록이 엮어진 지난 5년간에 최상의 경지에서 발휘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가 김일성 주석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이후에도 북한은 외부에서 이야기하는 ‘개혁, 개방’의 길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즉, 김정일 시대는 ‘새로운’ 시대이면서 ‘김일성=김정일’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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