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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행군묘사한 장편소설<삶은어디에>21회
REPUBLIC OF KOREA 북한맨 1 436 2007-11-19 18:30:07
(http://www.alonk.com/) 에 연재하는 장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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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제21회)

리지명


신미가 내민 공민증과 증명서를 들여다 보던 리주열이
"어디가?"
하고 마치 손아래 사람 대하듯 한다.
"ㅎ시까지 가는데요."
언제나 정중한 신미의 대답 소리다.
"뭣 하러."
"출장인데요."
"출장? 흥. 장사겠지. 짐 좀 보여줄 수 있겠어?"
"이게 전부인데요."
작은 손가방을 내미는 신미다.
"이게 다요? 이 안에 뭐가 있소. 손님. 손님 짐도 좀 봅시다."
리주열은 한태규에게도 보여 줄 것을 요구했다.
"난 짐이 없소."
"그렇소?"
신미가 내민 가방 쟈끄를 드륵 열고 이리저리 뒤져보던 리주열이
"이건 뭐요?"
하며 신문지에 싼 것을 꺼낸다. 리영식이 준 뱀술이다.
"풀라구."
아니꼽지만 할 수 없다. 반항할 수도 없는 일이다. 국경을 통한 금속 밀수 때문에 열차 단속이 보통 심하지 않다는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지금 고난의 행군과 더불어 금, 은, 동, 연, 아연 등 유색 금속들이 이 9열차를 통해 중국으로 빠져 들어 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따라서 길주만 지나면 이 9열차에 대한 단속과 검열 사업이 심화된다.
ㅎ시까지 9열차 한번 운행에 회수한 동을 비롯한 금속이 2톤 이상에 이르는 정도다. 짐을 수색하고 몸을 뒤지는 방법으로 회수해 들이는데 미꾸라지 그물망 빠지듯 표하게 새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또 은밀히 승무원들을 끼고 해먹는 사람들도 있다. 신미도 그런 방법으로 아편 운반을 해왔다. 열차 안전원. 여객 전무, 열차원들까지 모두 그를 알지만 그가 아편을 다루는 여자라는 것까지는 모른다.
든 짐 없이 큰 돈 움직이는 큰 장사꾼 정도로 인식이 돼 있는 듯 싶었다. 새로 온 것 같기도 한 경무원한테 이렇게 검열당해 보기는 오늘 처음이다. 그러나 신미는 마음이 든든했다. 오늘은 아무 짐도 가진 것이 없고 더욱이 증명서 자체가 군부대에서 발급한 것이어서 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툭 떨어 먼지 안나는 놈 없다고 아무리 일절 구비된 사람이라 해도 자꾸 따지다보면 반드시 트집 잡을 것이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신미는 '이건 술인데요' 하며 신문지를 풀어 보였다.
상사의 목울대 뼈가 그 순간 오르내렸다.
"짐 가지고 날 따라 오시오."
"예?"
"따라와."
상사가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눈을 굴렸다. 차 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신미에게 집중되었다. 리주열은 신미를 끌고 다시 승무원 실로 들어왔다. 열차원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총을 한 쪽에 벗어 세워 놓고 구석 쪽으로 신미를 몰아세운 리주열은 문쪽 의자에 버티고 앉아 뚫어지게 신미를 쳐다보았다. 정말 빼어나게 잘난 여자다. 용녀(열차원)같은 것은 이 여자에게 비하면 완전 감자알이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생면부지 서너살 이상 위는 되고도 남을 여자를 그냥 지켜본다는 것도 무안한 일이었던지 리주열이 내뱉듯 던지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미가 머리를 들었다.
"전 상사 동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그 무슨 범법자라도 되는 건가요?"
"거야 조사하면 알게 될테지. 출장이라고 했는데 용무가 뭐요?"
"난 무역일꾼이에요. 군부대 외화벌이 단위에서 일하는 직원일 뿐이구요. 용무는 ㅎ시에 도착해야 알게 될거에요."
"흥, 그러니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피스톤 같은 존재다 이 말이겠군. 대체로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왔소, 밀수요, 아니면?…"
"그건 부대에 가서 알아보세요."
"뭐야?"
상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신미 앞으로 다가왔다. 신미는 돌변하는 리주열의 시뻘건 얼굴을 두렵게 쳐다보았다. 군부 시대인 지금의 상황에서 못하는 짓이 없는 군인들이다. 주어진 특권을 그 어떤 기강을 위해 행사하기보다는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는데 더 급급한 군인들이었다. 따라서 상대의 말끝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분고분 하지 않다거나 기분 잡치게 노는 따위들을 절대로 용서 안한다는 식이다.
군복을 입고 완장만 두르면 마치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 방자해 지는 이런 자들 앞에서 처신하기란 참으로 힘에 부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주열은 잡아먹을 듯 신미를 쏘아보았다. 이미 용녀를 통해 대체로 어떤 여자라는 파악은 하고 있는 만큼 뭔가 짜내려면 자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아내야 하는 것이다.
"난 네가 어떤 여자라는 걸 다 알고 있어, 몸 수색 하기전에 순순히 내놓지 그래. 그러는게 네게도 좋을게야."
"뭘 내 놓으라는 건지요."
"시치밀 떼는군. 외화단위에서 일한다면서 빈손으로 국경도시로 간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리구 내 듣기로는 외화벌이라는게 다 합법적인 밀수 단체지. 안그래. 도적놈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다. 이말이지."
주열은 신미의 손에 들린 가방을 다시금 나꿔채듯 가져갔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술병을 내들고 신미에게 다가왔다.
"이게 정말 상표처럼 뱀술인가?"
"그럼 뭐겠어요."
"이건 누구한테 고일(바칠)건가?'
"그렇치도 않아요."
"그럼 내가 한 모금 마셔볼까. 진짜 술이 맞는지."
"정 못 믿겠으면 마셔보시죠."
"흥. 술이야 맞겠지. 그 보다도 난 당신의 몸을 좀 뒤져보고 싶은데 여자니까 제절로 모두 꺼내 놓으라구."
신미는 속이 섬뜩해졌다. 지금 윗몸 안 주머니에는 리영식이 준 돈 만원이 들어 있었다. 자기 몫은 동생 신철에게 주고 왔지만 강기수에게 줄 것은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 돈을 보면 이자가 또 무슨 생트집을 잡을지 알 도리가 없다. 돈 액수가 많다보니 시비를 걸면 변명할 신통한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을 품고 덤벼드는 상사가 몸 뒤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겨 버릴 것 같지는 않다.
구차하게 버티고 있다가 욕을 보는 것보다는 먼저 내놓은 것이 상책이긴 했지만 그에 따를 시비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신미는 주섬주섬 위아래 주머니들 속에있는 모든 잡동사니들을 꺼내 놓았다. 손거울, 수건, 휴지 뭐 기타 여자들에게 필요되는 것까지 다 털어내놓은 것 중에 역시 종이에 싼 그 돈뭉치가 유별나게 눈을 끌었다.
"이게 뭐지?"
리주열은 그것을 손에 쥐며 신미를 쏘아본다.
"돈이에요."
"돈? 얼만데?"
"정확히 만원이에요."
"만원?"
리주열의 눈이 휘등그레지더니 급히 겉에 싼 종이를 풀어냈다. 100원 짜리 지폐들로 묶어진 돈 뭉치가 드러났다.
"허. 대단한 분이시군. 왜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가?"
"ㅎ시에 가면 외화 벌이 단위 지부가 있어요. 거기에 가져다 줄 돈이에요."
"흥. 거짓말에 이골이 든 여자로군. 너 아무래도 안되겠어. 맛 좀 봐야 해."
리주열은 문을 벌컥 열었다. 금방 서있던 열차가 그 순간에 출발 한 듯 덜커덩거리는 바람에 문설주에 머리를 한 번 짓찧은 상사는
"제길. 다들 어디갔어."
하고 투덜거리며 다시 문을 닫아걸었다.
"여 장신미."
마치 제 동무 부르는 듯 하다. 신미는 머리를 들고 리주열을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했다 비로소 잘못 걸렸다는 생각도 든다. 내 놓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자기 일에 대한 비애가 구슬프게 안겨 들었다.
"다시 한번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많지는 않아. 5분 그래도 지금과 같다면 날 원망하지 말구…"
오금을 박듯 주절거린 리주열은 담배를 꺼내 붙혀물고 깊숙이 들이 빨았다. 그러면서도 잠시도 신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조금전까지 기운차게 달리던 열차는 백암령이 가까워지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벌써 어둠이 밀려오듯 날씨가 사나와졌다. 우르릉, 멀지 않은 곳에서 우뢰소리가 났다. 검은 구름장들이 떼지어 몰켜 들더니 순식간에 맑은 하늘을 덮어 버렸다. 송영숙은 불안한 심정을 안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구름장 들이 서서히 밀려가고 밀려오고 있었다. 동풍이 살살 불어오는 것 으로 보아 한 바탕 된 소나기를 퍼부을 것 같다
마치 기는 듯 열차는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여기에 비까지 쏟아지는 날이면 그땐 더는 움직이기 못하게 된다. 지금껏 차바람에 비닐막을 뒤집어쓰고 지붕바닥에 쓰러진듯 웅크리고 앉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푸시시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려서 걸어도 열차보다는 더 빠를 것 같다.
꾸물, 꾸물, 그 느린 달림덕에 모진 추위에서 해방되기는 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근심이 태산 같았다. 이쯤 되면 로상에서 하루밤 쯤 묵기가 십상이다. 제발 어떡허나 비내리기 전까지 백암역까지 무사히만 달려 주소서. 그것은 차바곤 지붕위 사람들 모두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백암역에서부터는 내리막길로 줄창 ㅎ시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머리를 내밀고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잎담배 부스러기나마 꺼내 말아 물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송영숙은 이젠 너무 지쳐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허리에 띤 동짐이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그의 아랫도리를 압박했다. 허리 감각이 없어진지도 오래다. 허기진 배에서는 연속 꼬르륵 소리가 울려 나왔지만 먹을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자기가 중도에서 쓰러지면 결국 온 가족이 멸살한다. 또다시 마지막 숨을 모으던 남편의 불쌍한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한 평생 그 하나만을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려 했건만 끝내 남편은 이 엄혹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도중 하차 했다.
그 언제건 송영숙은 남편 없는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처럼 의탁했던 아버지가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후 김행우를 만나 남편이라기 보다는 아버지 모습 같아 일일 천추 그의 안녕을 바라며 모든 것을 다 바쳐 공양했건만 그 역시 눈을 뜬 채 자기 앞에서 절명했다.
왜 그럴까. 왜 남자들은 그렇게 일절 자기 마음 하나 헤아려 주지 않고 떠나가는 데만 급급해 하는지 야속한 세상이다. 이제는 다리마저 감각이 없다. 어쩐지 몸은 붙어버린 듯 까딱 움직이지 않아도 저 멀리 웃으며 손짓하는 남편을 향해 그의 영혼은 자유로이 훨훨 날아가는 것만 같다. 사람의 정신력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길재가 삶은 감자 몇알을 들고 자기 곁으로 다가선 줄도 모르고 이래서는 안되는데 당신이 날 그렇게 부르면 아이들은 어쩌려고. 그러니 난 아직 당신 곁에 가면 안 되는데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송영숙은 그만 지붕바닥에 그 해쓱 질린 얼굴을 쓸어 박으며 맥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아주머니"
길재가 비통한 소리를 내질렀다.
손에 들었던 감자 두 알이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아래쪽에 앉았던 꽃제비 같이 보이는 작자가 이게 웬 떡이냐는 듯 굴러오는 감자를 냉큼 집어 볼이 미여지게 쓸어 넣었지만 언제 그걸 나무랄 겨를도 없었다. 웃옷을 올려 머리를 감싸고 죽은 듯 앉았던 문기도 눈을 번쩍 뜨고 쓰러진 여인을 일으켜 세웠다.
길재는 억장이 막힌 듯 달려들어 여인의 눈을 뒤집어 본다.
"하. 이런, 세상에. 하루 한 집안에 주검이 둘씩이라."
"하나는 새벽, 하나는 저녁. 잘한다 잘해. 이걸 어떡하우. 형님."
길재는 마치 문기 탓인듯 눈을 뚝 부릅뜨고 부르짖었다.
"가만 내 좀 보세."
앞에 앉았던 나이 지긋한 사람이 엉금엉금 다가왔다. 문기의 무릎을 베고 누운 여인의 팔을 끌어당겨 맥을 짚어 보던 그 사람은 조금 후.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 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한 마디 던진다.
"거 누구 물 가져가는 사람 없소."
"아니 아직 죽지는 않았소?"
길재가 대번에 기색을 확 바꾸며 그 사람에게 다가 붙었다.
"아, 덤벙대기란. 죽었으면 물 찾겠냐? 그놈 호들갑 때문에 간 다 떨어질뻔 했네."
마윤이 어쩌구니 없다는듯 길재에게 씨부린다.
"네 놈 간 떨어지는게 대수냐. 어이구야 죽지 않았다니 됐다."
"여기 물 있수다."
저쪽에서 중년 여인 하나가 비닐병을 들고 왔다. 나이 지긋한 사내는 그 물병을 받아 여인의 입을 벌리고 조심조심 물을 부어 넣었다.
그 솜씨가 몹시 세련돼 보였다. 조금 후 몇 모금 물을 받아 마신 송영속의 움푹 꺼진 눈이 반쯤 떠졌다.
"어이구, 이런 몸으로 지붕까지 오르다니, 어쩌자구 이런 탈진 상태의 몸을 가지고. 어서 이 허리에 찬 것부터 끌르게."
문기는 곧장 송영숙이 옷섶을 들치고 배에 띤 것을 풀어냈다.
"이런 참."
길재가 또 다시 혀를 끌끌찬다. 여인의 옆구리가 벌겋게 피로 얼룩져 있었다. 동 모서리에 찔려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냥 차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지식하기는 참 내, 지붕위에 올라 앉았으면 풀어놓을 것이지. 이렇게 답답해 가지고서야 어찌 이 세월을 넘어 가나…"
"아주머니 정신 좀 드세요. 눈을 떠요. 예? 아주머니."
"뭘 좀 먹여야 할텐데…"
나이든 사람이 혼자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든 모양인지 길재가 사방을 훝어 보며 소리쳤다.
"내 감자 어쨌어. 아까 분명 쥐고 왔는데…"
"자식 잘두 논다. 저 아래에 있는 친구 배를 짜개봐라. 그 속에 있을 거다. "
마윤이 껄껄거리자 길재가 악을 쓴다.
"뭐? 벌써 먹어 치웠어? 누구야?"
그러자 감자 두 알을 흐물떡 없애 치운 작자가 목을 잔뜩 움츠리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응대했다.
"난 저 아주니가 죽은 줄 알고…"
"뭐 어쨌다구? 아이구 이런 등신."
"아이구 됐다. 이미 먹어치운 걸 뭘 어떡해."
마윤이 주먹을 번쩍 쳐든 길재를 만류했다.
"뭐 아무것도 없어?"
길재가 마윤이 보고 또 소리쳤다.
"글쎄. 이것 참."
"아까 운흥역에서 산 감자 다 먹어치웠냐? 이런 육실할. 이 놈아. 그러니까 에미나이까지 다 도망치지."
마윤은 화가 나 절부럭 대는 길재를 흘끔흘끔 보면서도 내밀 것 없이 빈 손 뿐인 것이 미안했던지 아뭇소리 못하고 얼굴만 벌개 가지고 쩔쩔맨다.
"여기 빵 한개 있수다."
아까 물병 들구 왔던 여인이 보따릴 뒤지더니 누런 강냉이 빵 한 개를 들고왔다.
"아이구 고맙수다. 아주머니."
"젠장. 마치 제가 서방이라도 되는 듯 싶군."
마윤은 또 옆에서 툴툴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재는 아무 대꾸도 없이 빵 조각을 뜯어 송영속의 입에 넣어 주었다. 송영숙은 사태를 알고 몸을 움직거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눈치코치 볼 것도 없시다. 먹어야 일어나지요. 아이들도 보고. 자. 어서 씹으라구요."
물과 함께 빵 한 개를 축내고서야 여인은 정신이 드는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엉거주춤 일어난다.
"좀 괜찮아요?'
문기가 일어나는 여인을 부축하여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모두 고마워요. 제가 그만."
여인의 눈가에 찔끔 눈물 방울이 맺힌다. 열차는 여전히 숨가쁜 듯 붕- 가냘픈 기적 소리를 내며 우물우물 기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송영숙은 자기 허리를 두 손으로 매만져 보며 당황하여 소리쳤다.
"아니 내 짐… 아저씨 내 짐 몰라요?"
그리고는 사방을 희번덕거리며 살폈다. 금방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같지 않게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대는 그 모양을 보고 길재가 퉁을 놓았다.
"아 여기 있잖소.아니 이게 아주머니 생명쯤 되는 거요?"
송영숙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그것을 받아 안으며 물기어린 눈으로 민망스레 쳐다보는 길재며 마윤에게 사죄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겐 이것이 생명이나 같아요. 나뿐만이 아닌 우리 아이들도 이것 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그래서…"
"어이구. 구리 몇 키로에 인생을 걸었으니. 참 불쌍한 조선 사람들이다."
길재가 먼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하듯 부르짖었다.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침통한 빛이 어렸다.
당장 한 판 퍼부을 듯 검은 구름장들이 어지럽게 밀려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비단 하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풀어 낼 수 없는 이 시대의 아픔이 그리고 그 속에서 몸부림 쳐야만 하는 자신들의 운명이 마치 밀려오는 비구름처럼 어쩔 수 없이 내려앉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송영숙은 다시 그 가냘픈 허리에 파동을 넣은 짐을 띠려고 서둘렀다. 보다 못해 길재가 와락 그걸 나꿔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아주머니 피멍이 든 허리에 그건 왜 자꾸 차지 못해 몸살이요."
"그러다 누가 보면…"
"일없소. 이 지붕에 앉은 사람 모두 다 같은 처지 사람들이니까 아무 걱정 말구 이대로 앉아 있으라구요. 검열 같은거 할 때 슬그머니 띠면 되잖소. 허리두 사람 믿구 사는데…"
"글쎄. 그랬으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어쩐지 안심되지 않아서…"
"안심되지 않다니, 그럼 누가 빼앗기라도 한다는 거요?"
"그래도. 눈 감으면 자꾸 이걸 뺏기는 환영이 나타나서…"
"환영? 허허참. 그건 아주머니 지나친 경계심 때문일거요. 하기야 장담은 못하지. 아직도 무사히 빠지자면 넘어야 할 고개가 많으니까. 그렇다구 피 벌건 허리에 그냥 차구 있으면 어떡허우. 가기두 전에 지레 진해 죽겠시다."
"에이구. 그래 죽으나 이래 죽으나 마찬가지에요."
"예에?"
"이걸 빼앗기면 그땐 다죠. 살긴 어떻게 살겠어요?"
"아니 그럼 검열에 걸려 회수라도 당하면 그땐 이 열차에서 내리 뛰어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야 그놈 정말 말 많다. 말을 쪼개 듣는 멋이라곤 벼룩 간 만큼도 없어,"
마윤이 듣다못해 한 마디 내 비치자 여기 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벼룩 간이라니? 네 놈 벼룩이 간 보기나 했어"
"이 놈아. 뜻풀이도 몰라. 말속에 말이 있고 말 뒤에 여운이 있다구. 네 놈처럼 답답해서야…"
"어랍쇼. 이 놈이 제법 먹물 튀는 소릴하네, 갑자기 까마귀가 백로 됐나?"
"내라구 백로 되지 말란 법 있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이러다 돈벼락이라두 콱 뒤집어 쓸지 알게 뭐야?"
"어이구 호야 백석 누룽지 같은 놈이 그래두 속은 살아서?'
"호야 백석? 누룽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들판에서 호미 쥐고 땀 뚝뚝 떨구며 백석 지기 농사 지어봐야 차려지는 건 누룽지 밖에 없는 구질구질한 몸이다 이런 소리야."
"뭐야. 무식한 놈이 떡 함지박에 엎어졌네.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구. 가만 있자, 그럼. 내가 그런 놈이란 뜻이야?"
"이제 알겠는 모양이지. 대가린 천천히 돌아두 지나친 석두는 아니구만, 너 옛날 방송국에 나오던 돌대가리 그 석두 기억나? 그래두 남편이라구 생각해서 제 색시가 이 밥 떠주구 저는 누룽질 차지하고 먹으려니까 이 놈이 한다는 소리가 '힝. 그 까마치두 내거야 히잉. 그걸 먹어야 큰댔어.' 흐음."
길재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그 흉내까지 내는 바람에 와- 하고 웃음보가 터졌다.
배를 두드리며 웃는 마윤의 머리가 전기줄 밑에서 위태롭게 우쭐거리자 길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놈아 대가리가 전기줄에 닿을라, 큰일 나겠네 정말."
칙칙한 분위기만 서려있던 열차 지붕 위에 잠시나마 웃음기가 돌다가 다시 긴장감으로 이어졌다. 하늘이 용케도 참아주는 바람에 열차는 드디어 백암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용한 것은 하늘만이 아니다. 열차 역시 헉헉거리며 끝내 가파로운 고개길을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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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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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로 2007-11-20 00:35:40
    익숙한 말들이 있늘걸보니 재밋겠네요. 너무 길어서 나중에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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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의기쁨 2007-11-20 13:50:39
    너무 오랜만에 고향 소설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고향의 현실이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남녀 노소 할것 없이 먹고 살겠다고 허우덕 거리며 뛰여다니던 그 시절이 멀지도 않은 지난날이였으니까요...
    지금쯤 소설속에 나오는 주인공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계시는지...
    그저 모든 분들 이를 악물고 굳세게 살아서 건강하신 몸으로 통일의 그 날을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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