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두아이 엄마의 수기중..[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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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동지회에는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계시는 분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본 글을 읽으시고 혹 한국정착에 비관을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다시한번 생각을 고치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항상 각자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국인이 됩시다. 동지회 회원여러분 추운 겨울 감기조심하세요. 내가 찾은 성공정착의 왕도 김 현 순 ……… ‘06년 2월 하나원 수료 ‘06년 3월 둘째 딸 해산 ‘06년 6월 “대교”학습지 강사로 채용 ‘06년 8월 3개 학원에서 중어학습반 강사로 채용,’대교“학습지로부터 트로피와 상을 받음 ‘07년 3월 외국어대학 입학 ‘07년 7월 Flex 중어능력시험(최고등급) 패스 ........... △ △ △ 수기를 쓰려고 펜을 잡으니 그동안 해 온 일들이 두루 떠오르며 하나원수료 1년 7개월 차, 두 딸의 엄마이지만 그저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뭘 하고, 뭘 하였다는 자랑보다는 만삭이 된 몸으로 하나원을 나온 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열정은 고사하고 당장 뭘 해먹고 살겠는지 방법조차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불안에 떨었던 내가 이제는 나름대로의 성공적인 정착의 왕도를 찾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내 스스로도 너무 다행스러워 하는 얘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다행스러움은 단순한 다행스러움 이라기보다는 자포자기하고 모든 것에 무기력해 있던 나에게 둘째 딸을 무사히 낳고 새로운 행복을 꾸려갈 수 있도록 아늑한 집도 마련해주고 사회안전망의 혜택으로 여유로운 생계유지와 자녀양육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나를 늘 혈육처럼 아끼고 돌보아 준 고마운 손길과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고마움에 대한 감사이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정부와 국민께 그리고 공릉사회복지관 복지사들을 비롯하여 주변의 고마운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엄마 뱃속에서 하나원을 수료한 둘째 딸은 어느날엔가 기기시작하여 또 어느날엔가는 걷기 시작하였고 요즘엔 “어머니 밥 먹기 싫어요!”라고 이쁜 서울말로 또랑또랑 말까지 잘도 번진다. 아직도 급하면 이북사투리를 막 쏟아내는 엄마보다는 이 얘가 정착을 더 잘하지 않았나 하는 귀여운 생각에 뽀뽀 한 번 더 해 준다. 그래서 따져보니 얘기와 한국사회에도 한 날 한시에 편입하였고 하나원도 함께 들어가 함께 수료한 “동갑내기”인 셈이다. 근데 얘기가 벌써 서울말을 나보다 곧 잘하니 정착이 더 빠르다 할까? 지금은 즐거운 마음에 커가는 딸애를 흐믓하게 바라보지만 하나원에서 갓 나와 남편도 없이 혼자서 병원에서 애를 낳아가지고 집에 자리를 펴고 누웠을 때는 정말 이 얘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지 그것부터 걱정이었다. 애를 처음 낳아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받은 정착금 몇 백 만원을 브로커가 다 가져가다보니 내 손엔 만원짜리 몇 장밖에 남지 않았고, 벌지는 못하고 동사무소에서 주는 생계비를 쪼개야 할 형편이니 정말로 얘기에게 먹이고 싶은 이유식들을 좋은 것으로 살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중국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한국에서 둘째 얘를 혼자서 낳아서 키우면서 나도 셈이 들었는지 정말 엄마, 아빠생각이 간절히 났다. △ △ △ 술이 좀 과해서 어머니에게 조금씩은 꾸증을 들으셨지만 그것 빼고는 정말로 훌륭하신 나의 아버지였고, 자식들이 많으면 편애도 하시련만 모든 자식을 제 목숨보다 더 귀해 여기시고 아끼며 극진하게 사랑해주신 어머니였다. 모든 것이 늘 부족한 세상이라 늘려 먹고 아껴 입고 쓰지 않으면 금방 동이 나는 살림에서도 어떻게도 피가 나게 살림을 하셨는지 지금 생각을 해도 내 엄마는 정말 강인한 분이시었다. 어려서 남보다 무용소질이 있어서인지 유치원 높은반인가 다닐 때 전국 유치원예술축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하루 밤새로 무용복을 만들어 내라고 내가 얼마나 생떼를 썼는지 어머니는 몇 일 지나면 꼭 만들어 주겠다고 달래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였지만 하도 떼를 끊지 않으니 돌아앉으시어 어머니가 안타깝게 눈물을 지으시었다. 그러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장롱을 뒤져 결혼식 첫날에 입으시었다 아까워 입지도 않으시던 한복을 꺼내시어 가위로 자르시어 밤새 옷을 지어주시었다. 아침에 깨어나 머리맡에 있는 무용복을 입고 좋아라 학교로 달려갔던 일들이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죄송하고 끝없이 감사하다. 모든 가족이 열심히 직장에 다녀 소박했지만 깨끗하고 웃음과 화목이 한 가득했던 우리 집, 북한정권이 빚어낸 “고난의 행군”인가 하는 그처럼 삶이 처절했던 환난기가 없었더라면 이 저녁도 모두들 부모님 곁에 둘러 않아 웃음꽃을 피우련만,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60을 넘기기도 전에 명으로 돌아가시고 보위부에 붙들려 들어가 옥고하시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할수록 피가 갈린다. 우리 아버지처럼 법 없이 살 사람을 중국에 들어간 딸이 보고 싶어 승인 없이 중국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만신창이 되도록 고통을 주어 집도 아닌 감옥의 찬 시멘트바닥에서 보고 싶은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도 못 감고 가신 아버지!! 부모님들을 다 잃고 나서는 더는 어쩔 수 없는 생사귀로의 절벽에서 두서없이 두만강을 건너는 왔어도 “나라 없는 백성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나라는 있어도 변변치 못하니 상갓집 부지깽이보다 모하게 여기는” 인간이하의 민족적인 멸시를 수도 없이 받았다. 이 작은 가슴에 옹이 생기고 지지리도 짓밟히던 저주로운 한족들의 그 인간말세적인 악행을 세상에 대고 속 시원히 고하고 싶은 울분이 이따금씩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지만 나도 한 여자이고 또 자식을 둔 어머니이기에 지금껏 참고만 살고 있다. 밖에서 개 짓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한 줌으로 졸려들어 뒷문으로 뛰쳐 산으로 달아나 오르기를 몇 백 번이었던지.... 정녕 그렇게는 살 수가 없어서, 한 민족, 한 계래로 따듯이 품어 주는 조국 남반부에 가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어 나는 한 올의 미련도 없이 몇 년을 얹혀 살던 중국 땅을 홀연이 떠나왔다. 그렇게 가고 싶고 그립던 한국에, 그곳도 수도 서울의 한 복판에 뻐젓이 내 집을 쓰고 이 땅의 혈육들과 함께 한 하늘을 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에 겨운지... △ △ △ 하지만 처음에는 다행스러움과 성취감은 한 동안, 보는 눈이 어둡다 보니 눈앞의 어려울 것만 같은 현실에 마음만 좁아져서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하는 데만 마음이 써졌다. 그래서 갓난 것을 떨쳐 엎고 꼭두새벽에 김밥집에 나가 김밥을 쌌다. 해산을 하고나서 두 주 일만에 그 일을 했으니 몸은 몸대로 망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건만... 지자체에서 주는 생계비만으로도 최소한 굶거나 한지에 나 앉을 일은 없었는데 왜 그렇게도 마음이 조급해 졌는지 모른다. 주인아주머니는 독신이라던 여자가 몇 일 뒤에는 새벽에 나와 보니 애까지 딸린 산후 몇 주일밖에 안되는 애기엄마라는 걸 알고는 당장 일을 그만 두라고 손을 내 저었다. 하지만 내가 하도 청을 하고 일을 성실히 하니 나중에는 감동이 되어 계속 일하도록 승인하였다. 후에 알고보니 주인 아줌마도 6.25 때 함경도에서 피난 온 실향민 이세였다. 그래서인지 북한에서 온 얘기엄마라 날 이해해 주었고 시간이 있을 때 마다 힘들었지만 근검절약해서 끝내는 자수성가한 실향민들의 생활을 자상하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내가 일하던 김밥집에는 새벽에 함께 나와 깁밥을 싸고는 8시면 대학으로 달려가는 여대생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처음에는 용돈이 필요해서 그러는가 보다고 여겼댔는데 알고 보니 여기서 일해서 모음 돈으로 학비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돈을 많이 버는 직장에라도 들어가 일하면 좋지 않느냐는 북한아줌마에게 그 아가씨는 “일은 후에라도 실컷 할 수 있지만 공부는 지금 해야 하니 어렵지만은 시골에서 이렇게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에서 끓여 먹으면서 고생스럽게 공부를 한다.”고 “지금은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하니 배우지 않고서는 힘으로 해 먹는 일은 점점 없어져 버린다고.”는 뜻 깊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지금 어렵지만은 대학에 다니면서 새로운 능력을 배양하는 정착의 “왕도”를 택한 것도 모름지기 그 아까시의 마음에 꽉 와닿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인 것 같다. 청바지와 티 몇 장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그 여대생아가씨, 화장도 않고 늘 그렇게 바삐 살지만 마음만은 활짝 열려있고 배움과 미래의 희망에 꽈~악 차있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강한 충격과 자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저 부럽기만 하고 우리하고는 너무나 높은 경지에서 살겠지만 싶었던 여기 사람들, 길가는 사람들의 차림새와 얼굴표정, 주고받는 얘기들이 새로운 눈과 귀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에는 부자도 많았고 또 없는 사람도 많았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의 부자가 게으르고 낭비하면 내일에는 서울역 노숙자로 전락되고 수십년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해 많은 돈을 번 할머니가 대학의 발전에 써달라고 수 억원을 기탁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업는 현실이 주위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세상에서 현재의 빈약한 자기 처지를 한탄만 하면서 털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대로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일하는 여대생아가씨보다 6살밖에 많지 않은 33살 나는 하루가 멀다하게 변하는 이 사회에서 앞으로 무얼 해 먹고 사나? 죽을 때까지 김밥이나 싸다 말아야 하나? 그러니 공부를 해야겠는데 책을 읽어본지 하도 오래전이니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고 혹여 공부를 한다고 해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두 딸은 누가 맡아 키워주나? 공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동안 진로에 대한 선택 때문에 내 머리는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아가씨의 권유대로 대학 캠퍼스로 가는 길을 택했다. 기회비용을 따져보니 지금은 좀 어렵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세상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정신과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현대의 여성들과 어깨 나란히 이 사회의 진정한 경쟁 속에서 더 세련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될 것이며 무엇보다는 우리 얘들에게 최소한 김밥집 아줌마보다는 더 낳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여대생은 학비를 마련하려고 잠도 많고 실컷 사치하고 푼 처녀시절에 이른 새벽부터 고생해야 하지만 난 정부지원으로 무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는데 무엇을 더 주춤거릴게 있는가고 생각하니 벌써 마음은 대학의 수려한 캠퍼스에 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에게 대학으로 가는 달콤한 꿈만 꾸게 놔두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형제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아픈 소식이 인편으로 날아들었고 나는 한 푼이라도 많은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 △ 그러던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안에서 중국어과외를 안내하는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순간 나는 중국어를 전공해서 중국방향 비즈니스나 통상 쪽의 일을 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번뜩 떠 올랐다. 중국어?! 6년 중국에 숨어 사는 동안 한족밖에 살지 않는 동네에서 한족 행세를 하지 않으면 생사가 위태롭기에 나는 죽기내기로 무작정 중국말을 귀로 익혔고 글을 배웠다. 북에서는 한 글자로 모른다면 모를 한자를 외우느라 사전을 6번째로 흩으며 매일 매일 읽고 나니 어느덧 티비에 나오는 뉴스나 드라마의 대사뿐만 아니라 글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끝까지 노력한 끝에 마을의 한족사람에게 한족글로 편지까지 써주는 능사가 되었다. 아마도 역경에 부딧치면 인간은 보통때에는 불가능한 기적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그렇다! 중국어 과외를 해보자 그래서 정말로 중국어가 보통 때인 지금에도 내 장끼임을 확인한다면 중국어 전공의 대학으로 갈 것이다.”고 마음 잡았다. 그래서 들어 간 곳이 학습지전문업체인 “대교”의 중국어교육팀이었다. 중국어 교육팀에서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초•중교생 중국어과외를 지도하는 일이었다. 과외지도에서 사용하는 학습지가 바로 “대교”에서 만들어 낸 중국어교재였다. 중국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을 만난 첫날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첫 도전이 30년을 써 오던 이북사투리를 서울말로 고쳐야 하는 어려운 과제였다. 애들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내 말씨가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말씨이어서인지 공부를 하는 전기간 별로 시쿤 둥해 하였다. 그날부터 나의 서울말 익히기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은 TV를 보면서 아나언사의 공식적인 말씨와 영화나 드라마의 생활말씨를 구별해 녹음을 해가지고 길가에서도 중얼중얼, 버스나 전철에서도 중얼중얼, 취사를 하거나 애기를 재우면서도 중얼중얼거리며 정말로 미친사람처럼 소리를 내어 한국말씨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훈련하여 한 달 정도 지나면서 한 가지 느낌이 딱 들어왔다. 중국어에서는 성조가 있다면 이북말과 서울말 사이에도 성조의 차이가 있음이 인지되었고 그러한 성조의 차이를 내가 단어단위가 아니라 어떠한 문장단장 표현에도 적용할 수 있는 공식이나 룰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북말과 서울말을 꼭 같은 문장으로 반복하여 들어보면서 내식대로의 차이를 찾아내기 시작하여 얼마 후에는 내 나름대로 공식을 만들어냈다. 내가 고찰한 데 따르면 함경도에서는 거의나 문장의 첫 시작 그리고 매 단어의 첫 음절부터 높혔다가 점차 내리면서 말을 맺는다. 하지만 서울말에서는 첫음절은 중간톤으로 둘째 음절은 급격하게 높였다가 셋•넷 음절은 점차 내리며 끝에서는 애교스럽게 흔든다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공식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로 말을 해보니 크게 어색한 것이 없이 거의나 들어맞았다. 이렇게 억양을 교정하고 나니 이제는 사투리 대신 여기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모르거나 새롭게 듣는 단어들은 모두 적어서 뇌에 쏘~옥 들어가도록 몇 십번을 반복해서 외웠고 실지로 말할 때,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 무안을 당하더라도 계속해서 입에 많이 올렸다. 내 조금씩 서울말을 하기 시작하고 중국어도 재밌게 배워주자 아이들은 점차 흥미를 가지고 내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정말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하여 성적도 쑥쑥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중국어는 성조와 같은 매우 특이한 언어적요소가 있어 이것을 제대로 구사하는 가가 중국어공부에서 기본이고, 적지 않은 중국어교실들에서 이 성조를 좌시하는 편향이 있어 “코리안-중국어”를 배우주기가 일쑤이다. 나는 중국에서도 발음이 거의 현지인들과 다름이 없이 익혀왔기 때문에 같은 중국말이라도 선생님의 성조를 꼭깥이 따라하다보니 내가 맡은 학습반의 애들의 중국어는 배워주는 범위에서는 정말로 흠잡을데가 없었다.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애들을 맡기면서 학급의 학생수는 많이 늘었고 그에 따라 판매되는 학습지의 양은 늘어만 갔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탁자위 트로피와 상장은 강사채용 5개월 차 “대교”학습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경험 많은 여러 강사들과 경쟁 해, 따낸 생에 첫 트로피라 볼 때마다 긍지스럽고 더 높은 목표에로의 의욕을가진다. △ △ △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대학공부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 났다. 아마 그것은 학습지강사들이 겪는 사회적 편견이나 생활상 어려움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학습지강사를 “보따리장사”라고도 부른다. 교재보따리를 사들고 다니면서 책도 팔고 글도 팔고 한다고 그렇게 불리는 것 같다. 학사모를 쓰고 한국의 최고의 중국어검정시험에 패스하여 어디에도 당당한 자격증을 가지게 되면 같은 “보따리장사”라도 판이 다른 장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중국어를 활용하는 여타 부분에서 활약하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대학공부를 한다면 애는 누가 키우고 가뜩이나 빠듯하게 돌아가는 생계는 무슨 수로 유지한단 말인가?, 고맙게도 국가에서 학비는 보장해준다 쳐도 공부를 하다보면 많은 돈이 들텐데... 글쎄, 돈 문제라면 적게 쓰고 적게 먹고 하면 되겠지만 제일 골치 아픈 것은 젖먹이 애까지 있는 아줌마가 젊은 청년들과 어깨 나란히 하고 한 교정에서 공부를 끝까지 따라 갈 수 있을까? 나의 이런 고민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오랫동안의 번민과 지인들의 조언청취, 친구들의 응원 끝에 대학에로의 진학을 결심하고 대학입학시험장으로 들어갔다. “학생은 우리대학을 정말 끝가지 다닐 수 있습니까?” 구술시험장에서 미혼의 싱글로만 본 내가 갓난아기의 엄마임을 알고 놀라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시험관이 묻는 마지막 질문이었다. “네, 교수님 꿑까지 다니렵니다. 북에서 온 많은 여성들의 명예까지 걸고 다짐하는 대답이니 꼭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그렇게도 고대하던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아든 순간 나는 미칠 듯이 기뻤고 그날의 행복과 자랑을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들과 고향의 형제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설음과 안타까움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한동안 북쪽하늘만 쳐다보았다. 북한에 있었다면 대학은커녕 살아가느라 속이 까맣게 타서 여기저기로 행방을 다니고 있을 내가, 고위간부들의 자식들도 입학하기 어려운 평양외국어대학보다 몇 갑절 유서깊고 훌륭한 한국외국어대학의 학생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그럴수록 이 땅에 감사하고 은혜를 갚고 싶다. 대학에 첫 발을 들여놓아서 생소한 캠퍼스문화에 익숙하고 강의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엄청난 어려움과 자포자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엔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귀에 들어 본 적도 없는 레포트를 쓰느라고 제대로 되지 않아 혼자 울기를 몇 번이나 했던지 모른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전철타고 버스를 타고 늦어가지고 캠퍼스에 도착 해, 강의를 하고 나서는 곧장 학습지 강의실에 가서 애들을 가르치고 애기를 찾아 가지고 돌아와 밥 지어먹고 과외공부를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잠이 몰려들어 눈조차 뜨기 어렵다. 하지만 이를 깨물며 졸음을 쫓아내고 공부를 한다. 어떤 때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한 창 나이 때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상책 이라면서 오늘은 어딜가서 몇 십만원을 벌었고, 어제는 또 어딜가서 얼마를 벌어 얼마를 저축했고, 가장집기들도 최신형으로 다 바꾸었고...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손에서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는 때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나는 돈을 쫓아 인생을 살려고 한 나의 어리석음과 암울함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오늘 보다 더 늘어나는 “지식창고”, “능력의 창고”를 느끼면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만끽한다. 지금은 좀 어렵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세상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정신과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현대의 여성들과 어깨 나란히 이 사회의 진정한 경쟁 속에서 더 세련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될 것이며 무엇보다는 우리 얘들에게 최소한 김밥집 아줌마나 학습지강사보다는 더 낳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포부를 안고 산다. 한 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캠퍼스에 정이 흠뻑 들었다. 대학생활이 나에게 정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어 나의 언행도 어딘지 한 셈 든 것 같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지혜와 논리에 의거한다. 그리고 중국어실력은 비약적으로 높아져 전 달에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중국어검정시험인 플렉스(FLEX)의 최고등급을 따냈다. 자신 만만하고 여유로워진 모든 결실들은 나에게 더 높은 곳으로 톱아오르기를 추동한다. 북한에서 자주 외우던 구호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오늘은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은 위한 오늘에 살자!” 이 슬로건을 외우면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은 북에서와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 배고프고 고달프기만 한 인생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내일 내 자식들, 내 손자들 대에서 굶지 않고 떨지 않게 내 속의 힘을 오늘 다 내 뱉자는 이런 식의 허구는 나에게 더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의 향락이나 즐거움도 좋지만 큰 꿈을 가지고 젊은 한 시절을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열심히 갈고 닦으면 내일에는 보다 큰 것을 얻고 영달을 누리며 자식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7년 10월 1일 서울시 노원구 거주 김 현 순(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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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현재 저는 6살난 아이를 데리고 중앙대학교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남들이 애데리고 뭔공부냐고 해도 저만은 님가시는길애ㅔ 축하의 꽃다발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화이팅입니다.
궁굼한점이 있으면 메일 주세요
hanakjl0102@naver.com
항상 바쁘다는 관계로 하고싶지만 미루고 밀렀던 공부를 저도 다시 하고싶습니다.
님의 좋은 경험이 우리 탈북민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될것입니다.
앞으로도 신심을 잃지말고 화이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