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역사 바로 압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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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우리는 고려시대 이전에 우리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역사기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 번은 고구려, 백제가 멸망할 때 당나라 군대에 의해 도서관이 전부 불태워졌다. 고구려 수도 평양을 함락한 당나라 군대 사령관 설인귀는 고구려의 역사기록이 너무 상세한 걸 보고 놀라, 고구려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전부 소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많은 역사기록들이 남아 전해졌는데, 13세기 몽고군대가 쳐들어와 전국에 산재하였던 도서관들을 모두 불태워, 그마저도 사라졌다. 남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이며, 고려시대부터는 사관들이 임금님 곁에서 기록한 왕조실록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상당부분 고대역사를 중국 역사기록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래도 조선과 중국에 남아있던 역사기록들에 의거해 구한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바 있다. 일제식민지 시절 찬란했으며, 일본역사의 원조가 된 우리 고대역사를 왜곡 축소하기 위해 일본 사학자들이 다시 한번 소중한 역사자료들을 없애버렸을 거로 본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나 기타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이라 불리우는 옛조선은 지금의 몽고, 만주, 연해주, 한반도에 걸친 큰 나라였다. 여진족, 몽고족, 흉노족, 거란족, 선비족을 포괄하는 큰 나라였다. 옛조선은 초기에 그들의 수장을 임금이라 불렀는데, 한자로는 왕검이라고 표현된다. 옛조선 후기에 나라가 3국으로 분열되는데, 각 나라의 수장을 한이라고 불렀다. 한은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 살던 민족들이 그들의 수장을 부르는 공통 칭호로써, 칸(Khan)과 동일어이다. 옛조선이 쇠락하였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아민족들의 맹주였다. 중국 역사상 전성기를 맞이한 한나라 무제는 동북지역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공격하였고, 격전끝에 함락되었다. 한무제는 서북지역의 흉노족을 토벌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는데, 자신이 직접 토벌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공격에는 직접 나섰다. 이는 옛조선이 대단히 강력했거나, 아니면 옛조선의 수도 평양이 지금 북한지역이 아닌 중국 북부지역에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 한나라 수도는 중국 남서쪽 장안이나 낙양이었다. 옛조선이 멸망하기도 전에 이미 고구려가 건국되어 있었다. 지금 중국 동북지역에서 시작한 고구려는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부여를 멸망시키고 서서히 발전해갔다. 이때쯤 중국한족은 인구 수천만에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중국한족의 약점은 거대한데 비해 너무 허약하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끊임없이 북방민족들의 침략에 시달리고, 또 정복당해야만 했다. 중국의 과거역사는 북방민족의 지배로 얼룩졌었다. 중국은 주변민족들에 대해 심지어 지금까지도 늘 노이로제 현상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주변 민족들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중국에 대해 평화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늘 확인하려 들었다. 중국이 큰 나라이므로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일단 거만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이 중국황제가 변방민족 수장에게 왕의 칭호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를 수락하면 중국에 반항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수락하지 않으면 적의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왕은 중국황제가 너무 광대한 영토를 다 다스리기 어려워 형제나 공신에게 나누어주고 붙여주는 칭호였다. 일종의 세습되는 총독으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가 왕을 갈아치우기도 하고, 왕들이 타락한 황제에 반란을 일으켜 갈아치우기도 하는 중국내부 관계였다. 이민족 수장에게 부여되는 왕은 그런 주종관계가 아니고, 단지 국제평화의 형식이었을 뿐이다. 중국황제는 변방국가의 왕이 바뀌면 사신을 보내 왜 바뀌었는가 물었는데, 이는 오로지 새로 등장한 정권이 중국에 쳐들어올 친구는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에 대해서도 중국황제는 심심찮게 왕의 칭호를 선사하곤 했다. 때로는 받기 싫어도 받았고 때로는 직접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여행할 때 처음 만난 사람이 껌을 권할 때, 씹을 마음이 없어도 예의상 받아두는 심리와 비슷하다. 이걸 두고 중국에 굴종했다고 확대해석하면 곤란하다. 역대 중국왕조과 고구려, 신라, 고려, 근세조선은 서로 간섭않는 남남이었을 뿐이다. 중국에게 고구려가 황제 2명이 원정까지 올 정도로 대단했던 이유는 고구려가 한반도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가 싶다. 한반도는 중국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농경지역으로, 고구려는 안정된 식량을 확보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데다 강력한 무사국가였던 고구려는 인근 여진족, 위구르족, 돌궐족 등의 핵심 동맹국으로 중국에 대항했다. 오랜 분열끝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나 당태종은 북방의 안정을 원했다. 초원의 돌궐이나 황야의 말갈족이 완전히 당제국에 복속하지 않는 것은 고구려라는 든든한 세력이 뒤에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래서 몸소 그 멀고 험한 길을 달려 고구려를 공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수당과의 투쟁은 잘 알 것이다. 신라는 삼국중 가장 약했었다. 통일만이 신라가 영원히 살 길이므로, 당나라와 동맹하고자 하였다. 약한 신라는 당나라에 신하의 국가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당나라의 관심은 고구려였는데, 신라군대를 얻기 위해 백제를 친 것이었다. 백제가 멸망당한 후, 당은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고, 신라군대가 남쪽에서 협공하자 천하의 고구려도 이번에는 무너졌던 것이다. 당은 고구려멸망후 백제와 고구려 땅에 총독을 두고 직접 다스리려 했으나, 신라는 민족적 관점에서 이를 용납할 수 없음을 알리고,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더불어 당에 맞섰다. 서울 근방에서 당군을 대규모로 패배시키고 통일신라를 열었다. 고구려 땅에는 곧 대조영 장군의 발해가 들어섰다. 이후 신라는 당에 대한 사대를 버렸다. 통일신라는 황제국가였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을 이어받은 왕건은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당하자,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고구려를 잇기 위해 나라 이름을 고려라 바꾸고 후손들에게 요동회복을 유언으로 남겼다. 고구려는 후반부에 고려라 불리웠다. 이 때 고려는 중국 송나라에 사대하지 않았으며, 황제국가였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불행히도 고려는 오백년 기간동안 너무 강적들만 만났다. 진시황제 이래 다시 한 번 중국을 유럽에 알린 강대국 요나라와 개국초기부터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이는 요나라 최전성기 요나라 정예 10만 대군을 강감찬 장군이하 고려군이 황해도 일대에서 괴멸시킴으로써 끝났다. 다음에는 금나라, 다음에는 세계를 정복한 몽고였다. 몽고군을 맞아 무려 40년간 싸웠으며, 결말은 항복이 아니라 원나라 쿠빌라이칸과의 강화조약 체결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것이었다. 고려임금의 칭호는 황제에서 왕으로 바뀌었고, 원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해마다 미녀 500명을 포함해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고 일본원정에도 동원되었다. 고려세자는 일찍부터 원나라에 가서 세뇌 교육받고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고려군대의 일단인 삼별초군은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도, 제주도에까지 가서 100 여년간 더 싸웠다. 마침내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공민왕은 반격을 시작하였다. 왕께서는 일찌기 원나라에 가서 교육받고 왕비인 원나라 노국공주를 몹시 사랑하셨음에도, 군대를 발하시어 원나라에 점령되었던 함경도와 평안북도 일대를 수복하시었다. 원나라 관료들을 이 땅에서 모두 내쫒았다. 고려말 중국에서는 북방의 황제 주원장과 남방의 또 다른 황제가 막상막하의 패권다툼을 하고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은 양자강 남쪽에서 20여년간 싸워야 했다. 요동은 텅 비어 있었다. 돌궐, 선비, 거란족은 모두 사라지고, 여진족은 몽고의 박해로 요동 산골 깊숙히 지리멸렬하였다. 고려의 왕과 중신들은 이 때야말로 요동수복의 기회라 생각하고 군대를 보냈다. 선봉군 사령관인 이성계는 원나라 점령지였던 함경도에서 원나라 관리 출신이었다. 당시 고려는 오랜 전란과 가뭄으로 민중의 삶이 몹시 어려웠다고 한다. 이성계장군은 민중의 삶을 고려해야 하고, 소국이 대국과 맞서는 건 어리석다고 주장하고 압록강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어느쪽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조선은 중국 명나라에 대해 싸우지 않고 평화롭기를 원했으며, 중국황제의 전통적인 변방국가와의 외교관계인 사대관계를 받아들였다. 조선 왕과 세자 책봉은 중국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매년 양국은 사신을 교환해야 했다. 막대한 조공도 해마다 바쳐야 했다. 물론 형식이었다. 단 한 번도 조선의 세자나 왕의 책봉에 반대를 한 적이 없었다. 단종을 죽인 후 세조의 즉위,연산군과 광해군의 폐위에 대해서도 다 오케이였다. 단지 중국에 우호적이냐 아니냐,혹 정변으로 인해 중국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지는 않을까가 관심이었다. 우린 계속 중국 사랑한다 하면. 그럼 그러냐 잘해봐라였다. 조공도 우리가 보내는 것보다 더 많은 답례품을 주는 게 보통이었다. 큰나라이므로. 문제는 중국의 문화였다. 우리의 10배 이상 되는 인구에 광대한 농경지역을 가진 중국 귀족들은 백성들의 피와 땀위에서 아주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리조상들은 삼국시대이래 이 중국문화에 매료되었으며, 세월이 갈수록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유교문화는 근세조선의 국교가 되었다. 고려가 고구려 영광에서 시작해서 고구려 이름으로 사라졌다면, 근세조선은 중국의 유교에서 시작해 유교속에서 사라졌다. 유교는 질서와 형식적인 예의를 소중히 한다. 단순히 형식적인 외교관계에 불과한 중국과의 사대외교가, 근세조선의 양반들에 의해 중국에 대한 지나친 존경과 의존으로 발전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군대의 원조로 더욱 굳어졌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에 명이 군대를 요청하자 강홍립 장군에게 군사 5만을 주면서, 형세를봐서 처신할 것을 지시하였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에서 명군이 불리해지자. 강홍립 장군은 청나라 군대로 붙어 버렸다. 그러나 인조시대 보수적인 신하들은 공자의 나라 명나라를 위해 청나라와 대결하는 강경책을 선택했다. 조선민족이 같은 조상의 민족임을 누구보다 잘아는 청태종 누르하치였지만,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해 엄격한 복속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고향인 만주를 조선이 공격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근세조선은 특히 조선후기로 갈수록 우리민족 역사상 가장 중국에 사대적인 왕조였다. 정신이 타락하다 보니, 조선말기에 서양문물이 들어올때, 자주성과 역동성을 잃고 희대의 공갈협박 사기꾼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 지금 비록 남북 분단시대를 맞고 있으나, 우리 민족은 단군왕검이래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는 못났던 근세조선과는 이미 결별하였다. 유교는 더이상 우리의 가치의 전부는 아니다. 반만년 역사 내내 우리는 대부분 시대 자주적이었다. 이는 아주 당연한 일인데. 근세조선 말기가 엊그제이므로 혼동할 뿐이다.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는 평화로운 민족이었다,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와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라였다. 전세계에 이런 멋지고 품격있는 건국이념을 가진 민족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보라. 고구려. 신라와 고려에서 보듯이 매우 역동적이고 힘차다. 근세조선은 진취적이지는 못했으나, 대신 한반도에서 안정된 가운데 향기와 품격 높은 문화를 발전시켰다. 대체로 우리 민족이 세계 어디를 가든 품격이 있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행히 남북중 남쪽의 대한민국이 크게 성공하여 막 세계의 선두에 오르고 있다. 거룩한 우리 조상들의 피땀어린 문화유산 위에 반만년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살기좋은 통일조국을 이뤄야 한다. 제발 우리민족이 사대를 했느니, 미국이나 소련 중국에 어찌하느니 하는 자기얼굴에 침뱉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바보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 날려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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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우리를 노리고 들어온 것은 침략이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숙신 읍루 물길족들을 친 것은 '정벌'인가.
일본이 한국에 진출했다는 것에는 거품을 뿜으며 쪽바리라고 욕하면서
막상 베트남전에서 따이한군인들의 잔인함과 악랄함에는 어깨으쓱해하고
삼국시대 역사에서 요동 요서를 군사적으로 친 것은 '진출'이라고 미화한다
일본애들과 한국의 역사인식이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인가
차이라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놈이 버티고 있어서 땅을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만약 한국이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같은 고만고만한 녀석들 중간에 위치했다가 힘을 얻으면 제국주의적 행보를 보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까.
힘이 없었을 뿐이지 한민족이 천성이 선한 민족은 아니었다.
우린 중국에 대한 사대를 현재의 못 살고 개발도상국 과정에 있는 "짱꼴라" 중국의 이미지에 빗대어 비판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이 훨씬 경제력 군사력이 강한 미국의 힘을 빌어 동북아에서 한 축을 자리잡고 있는 것도 현대판 사대가 아닌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내정간섭 안 받기는 마찬가지다
당시는 봉건사회였으므로 지금 보기에 굴욕스러워 보이는 문구가 많이 등장했을 뿐...
중국은 당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30%였다 지금의 미국보다도 훨씬 비중있고, 군사적 경제적 모든 면에서 세계 최강국이었다
조선도 결코 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나, 옆에 중국이라는 존재가 너무 강력했으므로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삼국시대는 중국이 혼란스러웠고 수와 당이라는 강력한 대제국이 생기기 전까지 분열되어 힘을 주변 오랑캐(?) 치는 데 결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틈새를 노리고 고구려가 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원래 강했던 중국은 통일제국 만든 이후 더더욱 강해져서
고려나 조선으로서는 그들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왜 그 때 사대를 했느냐. 창피하다. 이런 말을 하려거든
지금 당장 미국과의 수교를 끊어 버리고 독자노선을 걷자.
그래야 합리적이지 않나?
만약 4~500년 후 미국이 멸망하거나 형편없는 약소국으로 갈라졌을 때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역사를 보면?
사대주의 어쩌고 하면서 중국에게 빌빌대던 조선을 우리가 욕하듯이
똑같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왜소함을 욕할 것이다.
한 나라의 외교는 그 시대에 적합한 판단 하에 이루어진 거다
생각만큼 조선이 못난 나라도 아니었으며 단지 너무나 오랜 기간동안 평화시대에 젖어 살다가, 깨어 있던 일본에게 뒤쳐져 버려서 지금의 상황으로 온 것일 뿐이다
지나치게 조선이 폄하되고 못난이 취급을 받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면 한국과 조선 고려를 역사적 시점에 맞게 부르듯이
중국의 과거 역사에 대한 국가명을 확실히 합시다...
그리고 중화사상에 의해 그들식으로 해석하지 맙시다...
경제력은 로마와 한나라가 비등비등했다고 하죠.
전 중국을 미화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못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치우친 편견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못난 유림들과 유생들이 존재했기는 하나 그 당시 명과 청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사대노선을 취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의 미국의 업그레이드판이 바로 우리 옆에 붙어 있었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대한민국, 유사이래 처음으로 중국보다 잘 사는 시대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 역학구도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의미에서 좀 과격하게 썼습니다.
이건 중국식 역사시각으로 물어보는 표현이죠...
고려도 한국인가요라면 말이 안되죠...
중국은 고작 60년이죠...
모두 우리의 력사가 아니세요?
말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우리의 력사가 아니 되고, 말한다고 그것이 우리의 력사가 아니 됩나요?
더우기 분단시기에 더욱 력사적 돌질성을 찾아야 하고, 력사적 교훈을 섭취해야만 빨리 통일할수 있고, 정확하게 통일할수 있는것이 아니세요?
력사를 말하는데, 그것이 왜 조상을 욕하는것입니까?
또한 조상들이 욕먹을짓을 했으면 욕을 먹어야 하는것이 마땅한것이 아니신지?
조상을 욕먹이지 않으려면, 왜 분단이 되였는가 하는 원인도 뭇지 말고, 분단된것을 숙명으로 받아드려라는 말인지? 숙명으로 받아드리면 통일이 저절로 되나요?
결론부분이 너무 감정적입니다.
중국이 막대한 강대국이어서 우리가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 기분나쁘신가요?
불쾌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었거든요.
지금 우리가 미국에게 굽신거리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야 지금 이 상황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국에게 굽신거렸던 과거<<<수치스러운 역사
미국에게 굽신거리는 지금<<<현명한 외교적 행동
이렇게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말씀드리지만
중국찬양, 중화주의적 시각과
과거 중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그런데 중국하고 미국하고는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남을 존중해줄줄 아는 국가에요. 힘으로 남들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공평함을 추구합니다. 지금 우리가 미국에게 굽신거리고 있나요? 미국을 압도하고 있지는 않지요, 그쪽이 힘이 더 강한데. 미국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굽히지는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상하관계는 없어요. 미국이 원한다면 만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안 합니다. 페어정신을 추구하거든요. 둘이 공통점이라면 강대국이라는 것 하나와 우리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었고, 맺고 있다는 것뿐일까.
우리가 요동을 수복할 기회가 발해이후 2번 있었다. 1번은 명, 청 교체기에 요동이 텅 비어 있을 때였고, 두번째는 조선말기였다. 중국한족이 만주에 대규모로 들어와 살게 된 건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여 대대적으로 개발한 이후이다. 우리가 똑똑했으면 지금쯤 요동과 한반도에 걸친 나라가 되었다. 덕분에 식민지에, 분단에, 동족상잔에, 이제는 북한동포들 애타는 소식까지.....이제 요동은 아예 중국인들 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조선이 아주 평화롭고 안정되었기 때문에 품격높은 문화를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조선의 좋은 점은 취하지만, 조선의 민족적 이단성은 버려야 한다. 남대문이 불탄 건 아쉽지만, 근세조선의 영혼이 수도 서울을 떠난 걸로 해석하며, 대한민국의 앞날에 서운이 비친다고 생각한다.
진취성을 잃어버렸다고 평하는 것은 좀 아리송한 것 같은데? 그리고 계급 사회라면 유럽이나 어디에나 있었어. 너무 끔찍하다는 듯이 말하지 마, 그 시절에는 그랬으니까.
"말기로 가면 타락하고 고루한 양반들의 자존심만 남았다."
말기로 가면서 양반들의 숫자를 대폭 늘리기는 했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이성계가 애초부터 진취적 민족혼을 버렸으니, 조선의 종말은 밀려오는 외세에 대하여 자주적 민족주의 자체가 상실된 채 일본식민지가 되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지. ㅡㅡ 일본이 제국주의에 환장해서 먹힌 것 뿐이지 유능한 사람들은 많았어. 을사5적에게 권력이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고종도 꽤 유능했는데 헤이안 밀사 사건 후 독살당했고...이성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말 저말 하기는 하는데, 민족혼을 버렸느니 어쨌느니 너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설사 그 개인이 버렸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버리게 된 것은 아니니. 그리고 조선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일본과 우리와 다른 점은 하나, 일본은 그 당시에는 제국 욕심이 없었던 미국이 일찍 문을 열고 문명을 나눠줘서 더 일찍 서구화로 문과 무를 업그레이드 했었다는 것 뿐.
뉴욕 광장 성조기 앞에 무릎꿇려놓고 미국인들에게 구경시키고 싶다. Here is a very interesting ani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