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굼해서요 이렇게 글을 또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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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로 글을 또 올렷다고 욕하지 마세요 ㅎㅎ 궁굼한게 좀 잇어서요 만약에 제가 이제 한국으로 간다면은 하나원에 얼마동안 잇어야 하고 또 나온담에는 어떡게 되는지 어떤 사람들 말을 듣으니 집하고 돈을 준다고 하는뎅 ,, 궁굼해서요 마지막으로 전 한국으로 가면은 공부하고 싶은데 제가 대학시험같은것을 치자면은 어떻게 해야 하는징 , 전 올해에 22살 여자 입니다 아시는분들은 회답을 부탁합니다 그럼 다 좋은 주말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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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국일단 한국가면은 또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럼 파이팅 저도 역시 같은 동포 ㅎㅎ
일단 대한민국에 오신 다음에 추진하셔도 될것 같은데...올수 있는냐가 문제조.
꼭힘을 내서 한국으로 가서 저의 꿈을 키우겟어요 ㅎㅎ
그럼은 좋은 주말이 되세요
- 아 래 -
나에게는 생에 대한 강렬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살아 나가야 한다는 마음, 그것은 생애 대한 애착이었다. 17살 나이에 죽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나는 살고 싶었다. 부모님들이 다 살지 못한 한 많은 나머지 생이라도 끝까지 살고 싶었다. 이대로 한 많고 저주스러운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날 일어서게 했다. 나는 형을 항상 그리며 내가 살아 나가면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김혁 , 북한인권시민연합 탈북자 수기) 북한인권시민연합 인터넷 홈페이지의 탈북자 수기 ‘죄수도 인간이다’의 한 대복이다. 이 글을 쓴 김혁(25)씨는 다음달이면 가톨릭대 인문학부 새내기가 된다. 스물 다섯. 고아로 자라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고 그러다가 정치범으로 잡혀 교화소에 끌려가고, 이후 탈북, 또 다시 목숨을 건 남한행. 이 모든 것을 감당해 내기에 아직 너무 어린 나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캠퍼스에서 제3의 인생을 꿈꾼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 그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진학. 소설같은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들어봤다.
#북에서의 생활
그는 형과 함께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등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97년 알고 지내던 누나네에 얹혀 사는 대신 그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두만강을 넘게 된 계기였다.
“2∼3일에 한번씩 국경을 넘었습니다. 중국에서 옥수수나 쌀 40∼50㎏을 지다가 북 장마당에 갔다 팔았어요. 헌 옷도 가져다 팔고요. 그 당시 가장 인기있는 옷이 ‘아디다스’였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정치범으로 취급되어 잡히면 바로 총살이었지만 굶어죽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계속 두만강을 넘었지요. 그러다가 98년 말에 잡혔습니다.”
그가 보위부에 잡혀 구류장에 들어갔을 때가 만 16세였다. 먹을 것이라곤 옥수수 껍데기에 두부 콩만 주니, 살아서 나오는 사람은 10중 고작 2∼3명 뿐이었다. 그곳에서 11개월을 버티다 교화소(교도소)로 옮겨졌다. 폐, 위, 관절 등 7∼8가지 병이 한꺼번에 겹쳐 몹시 허약했지만 그래도 좋았다고 한다. 햇빛을 볼 수 있어서. 구류장에서는 6개월동안 햇빛을 한 번도 못 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화소는 눈에 보이는 지옥이었다.
“처음 23명이 한 방을 썼습니다. 그 중에 사회에 나온 사람은 저 한 명 뿐이고, 제가 나올 당시 다른 한 명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죽었어요.”
그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중증 환자만 누워있는 3호병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제가 누워있는 양 옆에서 몇 시간에 한 번씩 계속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걸 보면서 죽는것이 너무 두려웠어요. 눈감으면 죽을까봐 눈도 감지 못했죠.”
그렇게 구류장과 교화소에서 꼬박 2년을 지낸 후에야 대사령(특사)로 풀려날 수 있었다. 2000년 12월 24일 그는 마지막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탈북, 그리고 남한으로의 입국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남한사람을 만나면서 남한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중국에 머물러 있다가 공안에게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차피 앉아서 잡힐 바에야 시도라도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탈출 경로는 몽골. 그와 함께 아는 남자 선생분과 누나, 12살 여자아이, 그리고 3살박이 꼬마도 동행했다.
5명의 탈북원정대는 무작정 출발했다. 중국과 몽골 국경이 접한 사막을 걷고 또 걸었다. 낮 기온이 영상 40도까지 올라갔고, 모래바람도 따가웠다. 5시간이면 나온다던 몽골 국경은 18시간 만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살짜리 여자아이는 끝내 일사병으로 숨을 거뒀다. 몽골에서 2달 하고 보름을 기다린 끝에 인천공항에 들어올 수 있었다. 2001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온 날짜와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휘둥글해졌어요. 날아갈 것 같았죠. 이것이 천국이구나 싶었어요.”
#남한사회 적응기
다른 탈북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마냥 좋아보이기만 한 한국이, 점점 모든 게 낯설어만 보였다. 그래서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부터 강원도 속초까지 전국 여행지를 속속들이 찾아 다녔다. 네 달 남짓 여행을 다니면 쓴 경비가 무려 1,000만원에 달했다. 정착금의 3분의 1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여행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여행을 다니면서 남한 사람들의 문화를 빨리 배울 수 있었어요. 남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통해 예의나 공중도덕 등을 보고 느끼는 것이 많았죠. 그런데 주머니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래서 안 되겠다 싶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충남 부여에 정착한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오후 6시까지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일했다. 6시부터 7시30분까지는 학원에서 컴퓨터를 배웠고, 학원이 끝난 후에는 PC방과 박스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새벽 1시까지 했다. 낯설고 외로운 타향살이도 돈 모으는 재미에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꼬박 여덟달을 한결같이 일한 덕분에 1,000만원을 다시 저축했다.
대학생활을 앞두고 서울로 상경한 그는 지금도 손에서 일을 놓고 있지 않다.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또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음식배달을 한다. 하루 24시간 중 무려 17시간이다. 나머지는 잠자는 시간이다.
“대학에 다니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교육비야 지원 받을 수 있지만, 생활비나 용돈은 누가 주나요? 공부하려면 돈을 벌어야지요. 이게 바로 대학생활을 위한 제 나름대로의 준비입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어떤 준비를 하고 있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교양도서를 읽고, 미팅을 꿈꾸는 여느 새내기들과 그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막연한 캠퍼스에 대한 동경보다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제 3의 인생, 대학생활
탈북자들의 대학에 진학하면 열의 예닐곱은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를 선택한다. 그 나머지는 중국어학과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경영학과를 선택하고, ‘중국에서 살던 경험이 있어서’ 중국어과를 지원한다.
김혁씨는 올해 3월 가톨릭대 인문학부 새내기 대학생이 된다. 2학년이 되면 국어국문과에 지원할 예정이다. 책읽기를 즐겨하는 그는 특히 실화나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
“작가가 되고 싶어요. 노력하면 작가까지는 못 되도 보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제가 살아온 삶을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사실 지금도 글쓰기가 취미예요.”
그는 현재 북한인권시민연합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거리 교화소에서 겪는 일화를 담은 ‘죄수도 인간이다’를 연재하고 있으니, 작가지망생에 입문한 셈이다. 대학 4년간 가장 해보고 싶은 일로 친구 사귀는 것을 첫번째로 꼽았다.
“06학번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어요. 탈북자 친구들이 아닌 이쪽 친구들과 모임도 만들어 북쪽 사회에 대해서 알려주려 합니다. 그러면 피붙이 하나 없는 이쪽 생활이 더 이상 힘들지 않겠지요. 물론 다 동생들이라 서먹서먹할까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대학생활 동안 또 한가지 숙제는 ‘영어배우기’. “대한민국에서 영어 모르면 눈뜬 소경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그는 “영어실력을 반드시 다져놓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른 탈북자들이 대체로 가명을 쓰는 반면 김혁씨는 본명을 고집하고 있다. 혹시 북에 있는 하나뿐인 혈육인 형이 연락이 닿을까 하는 심정에서다. 그 때문에 그 역시도 여느 누구 못지않게 통일을 기다린다. 김혁씨는 자신이 작가가 되고, 통일이 이루어질 미래에 그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날을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 탈북자 대학교육지원 어떻게…
북에서 못 다 이룬 학업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탈북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사회의 적응을 위해, 또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캠퍼스를 찾는다. 그렇다면 과연 만만치 않은 등록금을 어떻게 충당할까.
탈북자는 고등학교 이하의 학교에 편입학한 경우는 만 25세 미만인 자 및 전문대 이상의 학교에 편입학한 경우는 만35세 미만인 자에 한하여 교육지원을 받을 수 있다.
교육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통일부장관이 재북학력을 확인한 학력확인서를 발급받고, 교육부장관이 재북 수학기간 및 수학능력을 고려한 학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학력인정은 전문대학 이상은 수학기간과 수학능력을 함께 고려하여 학력을 인정 하나, 고등학교 이하는 수학기간에 따라 인정된다.
예컨대, 북한에서 고등중하교 5년과정을 수료한 경우 남한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할 수 있다. 단,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경우, 대학입학 허가여부는 대학당국에서 판단하여 결정하고 있다.
교육청 및 대학당국의 편입학 규정과 절차에 따라 학력확인서와 교육보호대상자증명서 등을 첨부하여 신청하면 된다. 이때 일반적으로 면접만을 치르게 되며, 대학에 따라 기초학력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교육보호대상자의 편입학이 결정되면 해당학교가 면제 시키거나 본인의 신청을 받아 통일부에 공납금 지급신청을 하게 된다. 국공립대학의 경우 해당 학교가 입학금, 기성회비, 수업료 등을 전맥면제하고, 사립학교는 해당학교가 50%에 대한 국고보조금 교부를 신청하며 나머지 50%는 학교에서 지원한다. 이때 성적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평균학업성적이 연속 2회이상 만점의 70% 미만일 때는 공납금 지원이 제한되는 까다로운 규칙도 있다.
또한 대학에서의 수학기간이 총 4년을 초과하면 공납금 면제혜택을 받을 수 없다. 북한이탈주민지원법 시행령 제46조 제3항에는 편입학한 날로부터 4년(8학기)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단 의학계통은 6년 12학기)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안효덕 사무국장은 “대학에 진학하려는 탈북자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북에서 경험하지 못한 대학생활에 대한 동경과 특례입학으로 소위 명문대 진학이 쉽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3명중 1명 꼴로 자퇴하고 있다”며 “영어나 한자 등 기초학력이 부족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넘 복잡해서 이해는 잘안가지만 ,, 잘보앗어요 그럼 안녕
글구 중국에서 이렇게 인터넷도 맘대로 할수있고 그런가요? 궁금해요 이렇게 자유로운대 한국으로 못온다는게 안타갑군요..
그냥 중국에서는 김은정이라구 부르고 있음니다
정말 한국으로 가길 원합니다 꼭 좀 도와주세요,,,,,,,,,,,,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