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문제에 대한 완전한 대중의 일치한 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지난기간에 북한이 잘 살았다는 문제도 그 당시 북한에서 언제 ,어디에서,,또는 어떠한 위치와 환경에 처해 있었던 사람인가에 따라서 대답은 천차 만별입니다.
당시에도 북한은 철저한 배급제도였기에 인구 1인당 평균 하루 500 그램 규정이었던만큼
하루 두끼 죽을 먹을 지언정 굶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간부집이나 펴양 사람들은 쌀밥만 먹었던 것만은 사실이며 지역별로 계란과 물고기도 흔한지역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산골 지방의 평민들은 여전히 강냉이 밥을 먹었으며 매달 국가에서 주는
배급에만 매달려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사탕과자, 술, 계란, 과일, 수산물이 좀 풍족하다하게 잘 살았다고 보는 기간은 1970년 최초부터... 1970년대 말 까지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경제의 하강선이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눈에 띄게 하루하루가 달라졌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집에 식구가 단출하거나, 부모가 간부거나, 또는 직업과 직종이 좋거나 ,,평양과 같은지역에서 살아온 분들은 그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겠지만...
지방들에서 부터 점점 고갈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 분들은 옥수수밥을 잘 이해 못하는데 그것도 일리가 잇습니다.
남한은 당시에도 보리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은 사람들은 많지만
옥수수밥을 먹은 사람들은 적습니다.
특히 강원도 이남 지역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모든 곡식도 국가의 계획에 따라 심고 가꾸는데다가 북한은 보리 보다 수확이 많이 나는 옥수수만을 심기 때문에
해마다 옥수수만을 분배와 배급으로 주었습니다니다.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옥수수밥만을 먹었을뿐 보리밥을 먹어본 사람들이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처방전님의 친절하신 설명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북한에서 무상의료가 실질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지금 남한은 북한보다 수십배 높은 경제수준을 이룩했지만, 무상의료란 아직도 꿈도 못꾸고 있는 현실이 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은 대학까지 무상교육도 실시되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70년대의 북한경제는 남한경제에 비해 월등하게 발전되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북한의 복지제도는 유럽 못지 않은 높은 수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탈북자들의 높은 자존심도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날의 북한경제의 파탄 현상은 그러한 복지제도 때문이었을까요?
김정일에게로의 부자세습이 더 큰 원인이 아닐까요?
만약 북한에서 김정일에게로 부자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중국처럼 능력있는 지도자에게 권력이 승계되었더라면 북한경제가 오늘날만큼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친절하고 해박하신 처방전님의 답변에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보세요 ..
북한에서 실시했던 무료교육,, 무상치료 알고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아니며...
공업이 발전된 나라들에서도 왜 무상치료를 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기의 내면에는 한두마디로는 다 설명하기 힘든 북한 정치상의 더러운 내면이 깔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북한이 무상치료와 무료교육을 한것은 무슨 국가의 돈이 많았거나 김일성ㅇ의 재산으로 한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북한 노동자 농민들이 일한 것만큼의 임금을 다 주지 않고 겨우 간장, 된장,소금 이나 사먹고 살아갈 만큼씩 주고는 모두 국가가 착취했기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지금도 북한은 노동자 사무원들에게 한달에 돼지고기 1Kg 살수 있는돈도 노임으로 못주고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가 17인치 짜리 TV 흑색 을 하나 살려면 정상적인 노임을 다서는 10년을 저축해야 살 수 있는 정도의 노임을 줍니다.
그 나머지를가지고 국가의 무상치료 무료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몸값올리기에 이용하였습니다.
솔직히 남한사람들도 그런지 모르지만 북한사람들 웬만해서 병원에 가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큰병 안걸리면 일생에 한두번 가나마나 합니다.
그렇지만 무상치료를 위하여 일생동안 노임을 국가에 착취당합니다.
무상 이라는 그 뒷면에는 항상 정치가들의 모략이 따릅니다.
그다음 북한은 대학도 무료교육임을 겉으로는 선전합니다.
그러나 무상으로 하는 북한은 대학이 수많은 정치대학까지 합하여 100 여개바ㄲ에 안됩니다.
그러나 남한은 대학이 400 개가 넘습니다.
북한은 국가가 무상으로 대학공부를 시키기 어려우므로 중고등 졸업생 5-8% 미만만을 대학에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남한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5%가 모두 대학에 갑니다.
북한은 대학 졸업생이 30만명이지만 남한은 대학 졸업생이 3천만명입니다.
북한의 무상치료 무료교육의 현실에 대하여 겉만보지 말고 내면을 보지 않으면 ...
바보가 됩니다.
무료가 좋다면 김정일이 권력계승을 해서도 변한 것이 없는데 왜 나라가 망했겠습니까.
처방전님의 친절한 답변에 대해 거듭 거듭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테레비 한 대 사는데 10년이 걸린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한국에서 집 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군요.
테레비 사기는 어려웠지만, 무상의료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니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병이 나도 고칠 수 있고 수산물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면 테레비 정도는 안봐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나저나 자유가 없다면 사람이 산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아무튼 친절한 처방전님의 설명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북한이 파동없이 성장하며 일반 백성들이 상품을 구할수 있엇던 시기는 1960년대 중반 부터 1970년대 초 까지 입니다. 1972년 경부터는 상점에서 상품이 사라지였으며 상품을 구하기 위하여 판매원에게 수차례 부탁하거나 뒷거래가 시작되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에는 국가의 외화고가 바닥이 났으며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배급제에서 차질이 발생하고 80년대 초부터 배급을 미루어 주고나 대체식량으로 감자,고구마를 공급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일반적으로 탈북자들이 말하는 북한에도 잘사는 때가 있엇다,,,,는 정확히 60년대 중후반의 시기이며 이후는 북한에서 상품이 전반적으로 사라지는 시기로써 옥수수 밥이라고 먹을수 있엇다는 의미 입니다.
물고기가 많이 났어 좋았던 때도 있엇지요. 70년대,80년대 중반까지 명태가 썩어나도록 많이 났습니다.80년대 초중반에는 정어리가 너무 많이 잡혀 가공하거나 처리하기가 어려운 시점도 있엇지요.
옥수수 밥이라도 먹을수 있엇던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 회고하는 사람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이기에 액면 그대로 평가하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됨니다.
경희님의 질문에 팩트를 좀더 설명하면 ..
"' "84년 수해시 쌀지원" ""
-당시 한강 제방이 터져 일산지역 , 마포구 성산동,합정동 일부가 물에 잠기는 수해가
발생 햇습니다.
-북에서 수재민에게 쌀을 지원 하겟다 하여 남에서 승인을 하였습니다
*북의 지원의도는 인도적인 목적보다 체제우위를 선전. 선동 전략상 제안한 것이고
남에서 덜컥 받겠다고 하니 울며겨자먹기로 보냈습니다
*남 에서는 북보다 못 살아서 받은것이 아니고,남북간 긴장 완화와 교류의 끈을 만들고자
승인 한것입니다.
-당시 남북의 경제력 차이는 남이 북보다 수십배 우위에 있었고,
88올림픽 유치후, 86 아시안게임을 준비중이라 긴장완화도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수재민들은 이번 연평도 포격시 연평도민에게 지원 했던 수준의 보상과, 전국민의성금이
이어 졌었죠//
*그당시에도 남측은 삼겹살과 불고기를 지금같이 먹던시절로 북에서 온 쌀이 수재민에게
분배되었으나 식량 부족용으로 해결 한것이 아니고, 너무 남북 분단이 고착된
상태에서 쌀이 넘어오니 수십년 만의 교류가 신기하고 ,국민들은 쌀을 구경거리로 보고 여겼습니다.
*북에서 쌀을 실은 트럭이 판문점을 넘어 올때 Tv에서 중계 했는데 북에서온 트럭은 낡았
고 운전수들은 초라해보여 지켜보는 시청자들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제가 그당시 월급이 한 30만원 받은것 같은데 5~6년동안 물가관리를 잘해서 돈 쓸게 좀 있었어요.
대기업들을 살벌하게 조져대니 밀가루,설탕 가격등 공산품 가격을 기업들이
감히 올릴 엄두를 못냇죠..ㅎㅎㅎ
-회사직원중에 망원동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반지하 연립에 살다보니 수재를 당해 쌀을
동사무소에서 20kg를 받았다고 하여, 회사 직원들이 호기심이 발동, 성화에 못이겨
쌀을 회사로 가져 왔는데,, 마대에""입쌀""이라고 크게 써있고 밑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고 표기된것이 기억 남니다.
직원들이 신기하여 너도나도 한주먹씩 다 가져가는 해프닝이 발생 했습니다.
60년대 70년대 까지는 무상치료 무료교육 뭐 그래도 살만한 곳이었죠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충성 다할 때니까요.
장애 있는 애들 선생님들이 수년동안 비가오나 눈이 오나 업고 등교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너무도 혼비 백산 할 정도로 나라가 망가졌으니까, 개구리 올챙이 때의 좋은점을 잊었을뿐이죠.
좋은 시절들도 있었습니다. 국민 수준이 거의 비슷했고 차별 없이 살았죠. 죄인들 빼고는 거의가 좋았던 시절이죠.
지금도 생각 나는것은 집집마다 명태 한, 두 톤씩 거의가 걸고, 나무 덕대 없어서 부모님들이 고생했던 생각이 나요,
사탕 과자 가방에 넣도 다니면서 쉬는 시간이면 서로 다른 색갈 모양 맛고 향기를 자랑하며 웃으며 살았던 그 시절!
그때는 도적님들도 거의 없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요. 우리집도 언제 뭐 그리 열쇠 걱정 안하고 살았습니다.
그 비싼 약, 주사, 수술, 장기 환자, 다 무상치료 혜택 받았었죠 사회주의가 한창 잘 나가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사회주의 나라들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해서부터는 저 북한도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처참하게까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게 무너지니까 제일 먼저 사람들이 악습만 늘고 강도 살인은 물론,
도적이 살판치고 순한 양같은 사람들은 많이 죽고 여우와 승냥이만 남았다는 설도 생겼다는게 거의 사실이구요.
악착 같지 않았으면 저도 살아 남지 못했을테니까요. 잘 살았던 시절이 지금 여기서 사는나의 삶에 비기지 못하죠.
열악한 지금의 저땅보다는 천국 이지만 여기는 많이 외롭고, 힘겹고, 3D로 살아야하고, 또 앞이 없으니까요.
지나간 일 전혀 필요가 없지만요. 그래도 다시 한번 뒤돌아 볼수 있는 기회였네요. 지금 젊은 사람들 너무 아파요.
모든것이 무참하게 무너진 후부터 살아 온 세대니까요. 20~ 30 대 너무 너무 가슴이 미어지게 아픕니다.
여기와서라도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너무도 많은 이들이 방향 잃고 헤매는 모습들이 안타 까울뿐입니다.
지난기간에 북한이 잘 살았다는 문제도 그 당시 북한에서 언제 ,어디에서,,또는 어떠한 위치와 환경에 처해 있었던 사람인가에 따라서 대답은 천차 만별입니다.
당시에도 북한은 철저한 배급제도였기에 인구 1인당 평균 하루 500 그램 규정이었던만큼
하루 두끼 죽을 먹을 지언정 굶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간부집이나 펴양 사람들은 쌀밥만 먹었던 것만은 사실이며 지역별로 계란과 물고기도 흔한지역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산골 지방의 평민들은 여전히 강냉이 밥을 먹었으며 매달 국가에서 주는
배급에만 매달려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사탕과자, 술, 계란, 과일, 수산물이 좀 풍족하다하게 잘 살았다고 보는 기간은 1970년 최초부터... 1970년대 말 까지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경제의 하강선이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눈에 띄게 하루하루가 달라졌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집에 식구가 단출하거나, 부모가 간부거나, 또는 직업과 직종이 좋거나 ,,평양과 같은지역에서 살아온 분들은 그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겠지만...
지방들에서 부터 점점 고갈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 분들은 옥수수밥을 잘 이해 못하는데 그것도 일리가 잇습니다.
남한은 당시에도 보리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은 사람들은 많지만
옥수수밥을 먹은 사람들은 적습니다.
특히 강원도 이남 지역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모든 곡식도 국가의 계획에 따라 심고 가꾸는데다가 북한은 보리 보다 수확이 많이 나는 옥수수만을 심기 때문에
해마다 옥수수만을 분배와 배급으로 주었습니다니다.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옥수수밥만을 먹었을뿐 보리밥을 먹어본 사람들이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물론 수입한 밀쌀밥은 먹어 보지요.
보리밥 솔직히 그게 맛입니까? 방귀만 많이 나오지...
전 예전에도 옥수수를 무척 좋아했죠. 지금도요
당시에 인민생활이 좋았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경제가 잘 굴러갔다는것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병원 즉 환자치료 사업도 잘 되엇습니다.
한마디로 무상치료가 차별 없이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북한의 의료 체계만은 남한보다 훨씬 앞서 나갔을 정도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은 경제의 파산이 빈 껍데기만 남은 무상치료의 우월성으로 몰아갔지만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아무리 좋은 정치시책도 경제의 발전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바로 북한이 현실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저 북한의 경제가 무료와 무상이 범람하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탈북자들은 정치가들의 무작위적인 무료,무상,,,노선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무상의료가 실질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지금 남한은 북한보다 수십배 높은 경제수준을 이룩했지만, 무상의료란 아직도 꿈도 못꾸고 있는 현실이 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은 대학까지 무상교육도 실시되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70년대의 북한경제는 남한경제에 비해 월등하게 발전되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북한의 복지제도는 유럽 못지 않은 높은 수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탈북자들의 높은 자존심도 그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날의 북한경제의 파탄 현상은 그러한 복지제도 때문이었을까요?
김정일에게로의 부자세습이 더 큰 원인이 아닐까요?
만약 북한에서 김정일에게로 부자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중국처럼 능력있는 지도자에게 권력이 승계되었더라면 북한경제가 오늘날만큼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친절하고 해박하신 처방전님의 답변에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보세요 ..
북한에서 실시했던 무료교육,, 무상치료 알고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아니며...
공업이 발전된 나라들에서도 왜 무상치료를 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기의 내면에는 한두마디로는 다 설명하기 힘든 북한 정치상의 더러운 내면이 깔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북한이 무상치료와 무료교육을 한것은 무슨 국가의 돈이 많았거나 김일성ㅇ의 재산으로 한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북한 노동자 농민들이 일한 것만큼의 임금을 다 주지 않고 겨우 간장, 된장,소금 이나 사먹고 살아갈 만큼씩 주고는 모두 국가가 착취했기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지금도 북한은 노동자 사무원들에게 한달에 돼지고기 1Kg 살수 있는돈도 노임으로 못주고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가 17인치 짜리 TV 흑색 을 하나 살려면 정상적인 노임을 다서는 10년을 저축해야 살 수 있는 정도의 노임을 줍니다.
그 나머지를가지고 국가의 무상치료 무료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몸값올리기에 이용하였습니다.
솔직히 남한사람들도 그런지 모르지만 북한사람들 웬만해서 병원에 가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큰병 안걸리면 일생에 한두번 가나마나 합니다.
그렇지만 무상치료를 위하여 일생동안 노임을 국가에 착취당합니다.
무상 이라는 그 뒷면에는 항상 정치가들의 모략이 따릅니다.
그다음 북한은 대학도 무료교육임을 겉으로는 선전합니다.
그러나 무상으로 하는 북한은 대학이 수많은 정치대학까지 합하여 100 여개바ㄲ에 안됩니다.
그러나 남한은 대학이 400 개가 넘습니다.
북한은 국가가 무상으로 대학공부를 시키기 어려우므로 중고등 졸업생 5-8% 미만만을 대학에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남한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5%가 모두 대학에 갑니다.
북한은 대학 졸업생이 30만명이지만 남한은 대학 졸업생이 3천만명입니다.
북한의 무상치료 무료교육의 현실에 대하여 겉만보지 말고 내면을 보지 않으면 ...
바보가 됩니다.
무료가 좋다면 김정일이 권력계승을 해서도 변한 것이 없는데 왜 나라가 망했겠습니까.
그런데 사탕 발림에 감동받지 마시고 알고 싶으면 끝까지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남한은 그와 다릅니다.
테레비 한 대 사는데 10년이 걸린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한국에서 집 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군요.
테레비 사기는 어려웠지만, 무상의료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니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병이 나도 고칠 수 있고 수산물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면 테레비 정도는 안봐도 사는데 큰 지장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나저나 자유가 없다면 사람이 산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아무튼 친절한 처방전님의 설명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1970년대 후반부에는 국가의 외화고가 바닥이 났으며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배급제에서 차질이 발생하고 80년대 초부터 배급을 미루어 주고나 대체식량으로 감자,고구마를 공급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일반적으로 탈북자들이 말하는 북한에도 잘사는 때가 있엇다,,,,는 정확히 60년대 중후반의 시기이며 이후는 북한에서 상품이 전반적으로 사라지는 시기로써 옥수수 밥이라고 먹을수 있엇다는 의미 입니다.
물고기가 많이 났어 좋았던 때도 있엇지요. 70년대,80년대 중반까지 명태가 썩어나도록 많이 났습니다.80년대 초중반에는 정어리가 너무 많이 잡혀 가공하거나 처리하기가 어려운 시점도 있엇지요.
옥수수 밥이라도 먹을수 있엇던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 회고하는 사람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이기에 액면 그대로 평가하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됨니다.
- Vanilla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08-22 13:28:56
"' "84년 수해시 쌀지원" ""
-당시 한강 제방이 터져 일산지역 , 마포구 성산동,합정동 일부가 물에 잠기는 수해가
발생 햇습니다.
-북에서 수재민에게 쌀을 지원 하겟다 하여 남에서 승인을 하였습니다
*북의 지원의도는 인도적인 목적보다 체제우위를 선전. 선동 전략상 제안한 것이고
남에서 덜컥 받겠다고 하니 울며겨자먹기로 보냈습니다
*남 에서는 북보다 못 살아서 받은것이 아니고,남북간 긴장 완화와 교류의 끈을 만들고자
승인 한것입니다.
-당시 남북의 경제력 차이는 남이 북보다 수십배 우위에 있었고,
88올림픽 유치후, 86 아시안게임을 준비중이라 긴장완화도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수재민들은 이번 연평도 포격시 연평도민에게 지원 했던 수준의 보상과, 전국민의성금이
이어 졌었죠//
*그당시에도 남측은 삼겹살과 불고기를 지금같이 먹던시절로 북에서 온 쌀이 수재민에게
분배되었으나 식량 부족용으로 해결 한것이 아니고, 너무 남북 분단이 고착된
상태에서 쌀이 넘어오니 수십년 만의 교류가 신기하고 ,국민들은 쌀을 구경거리로 보고 여겼습니다.
*북에서 쌀을 실은 트럭이 판문점을 넘어 올때 Tv에서 중계 했는데 북에서온 트럭은 낡았
고 운전수들은 초라해보여 지켜보는 시청자들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당시에 남한은 대북외교에서 능동적이였고 승리한 외교엿습니다.
사실 김일성은 ,,북측이 지원을 주겠다고 하면 남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고 그것을
남한정부를 전세계앞에서 몰아 부치는데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측은 한치 앞을 더 나아가서 조건없이 북측의 지원을 받겠다고 수긍하였던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북에서는 전국이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도무지 쌀 1만톤도 안되는 7,500톤을 10분도미로 정미하는 문제와 수송때문에 온나라가 벌둥지 쑤셔놓은듯 했죠.
그리고 그당시에도 북한의 경제가 크게 흔들릴때인데 천은 어데서 나오며 약품이래야 뭐 얼마나 나올 것이 있겠는가....
오히려 물자수송에 동원되는 운전사 선원 보위원들 단체복 (유니폼) 만들고 뒷바라지 하는데 더 많은 돈이 들어갔죠.
그리구 남에 나갔던 배에다 실어보냈던 고급 물자들은 귀신도 모르게 처리됬고...
그것을 입막음하느라 퍼그나 수고를 했죠...
그건 그렇고 그 당시의 남한 외교는 항상 북한보다 한수 위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왜 말도 제대로 못하거나 대가리가 전혀 돌지 않는자들만 대북부서에 들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런자들만 골라서 않치는지도 모르겠고...
북한하면 그저 허리부터 굽히고 보는....
뭔가 북측에 먼저 주동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전혀 없는....
아!!!1 하나만은 주동적이군요..
조건없는대북지원주겠다!!!!
엇는지 아니면 오타가 생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30만이라고 적었네요.
지금은 웰빙이다 뭐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보다 오히려 더 잘 먹고 지낼 때였죠.
북한 쌀 못 먹을 정도였어요.
참고로 84년 2월 남한에선 정주영 회장이 '유조선 공법'을 이용해 물막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기도 했지요.
아무튼 그냥 신기하게 받았지요. 쌀 포대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량곡수출회사’라고 쓰여 있더군요.
그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깨소금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김현희 일행을 시켜 대한민국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특수훈련을 시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죠. 그때 김현희 일행은 이미 마카오에 다녀왔을 때였습니다.
-제가 그당시 월급이 한 30만원 받은것 같은데 5~6년동안 물가관리를 잘해서 돈 쓸게 좀 있었어요.
대기업들을 살벌하게 조져대니 밀가루,설탕 가격등 공산품 가격을 기업들이
감히 올릴 엄두를 못냇죠..ㅎㅎㅎ
-회사직원중에 망원동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반지하 연립에 살다보니 수재를 당해 쌀을
동사무소에서 20kg를 받았다고 하여, 회사 직원들이 호기심이 발동, 성화에 못이겨
쌀을 회사로 가져 왔는데,, 마대에""입쌀""이라고 크게 써있고 밑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고 표기된것이 기억 남니다.
직원들이 신기하여 너도나도 한주먹씩 다 가져가는 해프닝이 발생 했습니다.
- 처방전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07-29 12:25:37
북한에는 개정일을 비롯한 멍청한 지도부가 물러나고 중국처럼 실용주의 노선으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가 북한을 경영해야 주민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장애 있는 애들 선생님들이 수년동안 비가오나 눈이 오나 업고 등교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너무도 혼비 백산 할 정도로 나라가 망가졌으니까, 개구리 올챙이 때의 좋은점을 잊었을뿐이죠.
좋은 시절들도 있었습니다. 국민 수준이 거의 비슷했고 차별 없이 살았죠. 죄인들 빼고는 거의가 좋았던 시절이죠.
지금도 생각 나는것은 집집마다 명태 한, 두 톤씩 거의가 걸고, 나무 덕대 없어서 부모님들이 고생했던 생각이 나요,
사탕 과자 가방에 넣도 다니면서 쉬는 시간이면 서로 다른 색갈 모양 맛고 향기를 자랑하며 웃으며 살았던 그 시절!
그때는 도적님들도 거의 없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요. 우리집도 언제 뭐 그리 열쇠 걱정 안하고 살았습니다.
그 비싼 약, 주사, 수술, 장기 환자, 다 무상치료 혜택 받았었죠 사회주의가 한창 잘 나가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사회주의 나라들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해서부터는 저 북한도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처참하게까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게 무너지니까 제일 먼저 사람들이 악습만 늘고 강도 살인은 물론,
도적이 살판치고 순한 양같은 사람들은 많이 죽고 여우와 승냥이만 남았다는 설도 생겼다는게 거의 사실이구요.
악착 같지 않았으면 저도 살아 남지 못했을테니까요. 잘 살았던 시절이 지금 여기서 사는나의 삶에 비기지 못하죠.
열악한 지금의 저땅보다는 천국 이지만 여기는 많이 외롭고, 힘겹고, 3D로 살아야하고, 또 앞이 없으니까요.
지나간 일 전혀 필요가 없지만요. 그래도 다시 한번 뒤돌아 볼수 있는 기회였네요. 지금 젊은 사람들 너무 아파요.
모든것이 무참하게 무너진 후부터 살아 온 세대니까요. 20~ 30 대 너무 너무 가슴이 미어지게 아픕니다.
여기와서라도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너무도 많은 이들이 방향 잃고 헤매는 모습들이 안타 까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