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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주민, 자기운명 시장서 스스로 개척…당국 필요없어”
데일리NK 2016-06-14 11:00:18 원문보기 관리자 465 2016-07-11 09:26:45

민심은 천심이다. 그동안의 역사는 독재정치로 민심을 강요할수록 백성은 오히려 마음을 돌렸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민심을 잃은 군주는 권좌의 생명까지 잃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에게 7차 당(黨) 대회를 통해 자신의 독재시대를 공식 선포한 김정은은 어떤 지도자일까.

이와 관련, 최근 북한 매체들은 1970년대 가요 ‘세상에 부럼 없어라’를 내세우며 민심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도약기가 펼쳐지는 속에 ‘김정은 찬가’가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온다는 선전도 덧붙인다.

특히 수령, 당, 대중이 하나의 사상과 신념, 동지적 사랑과 의리로 굳게 결합되어 온 사회가 생사운명을 같이 해나가는 것이 ‘우리식 사회주의’의 참모습이라고 역설한다. 김일성부터 시작된 이 같은 선전을 70년 넘게 반복하면서 수령사상으로의 세뇌를 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민심은 당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수령보다 시장에 더 관심이다. 겉으로는 처벌이 두려워 수령만세 목청껏 외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체제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최근 주민들은 수십 년 교육받은 주체사상에서 벗어나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수령보다 시장,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에게 있다”고 말한다. “돈 없으면 죽은 목숨이고 장군님(김정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달러를 비롯한 돈”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돈다.

“수령님(김일성) 시대에는 직장에 충실했다. 때문에 그때는 장사하는 사람을 손가락질 하였지만, 지금은 직장 출근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받는다”는 것이 최근 중국에서 기자와 만난 북한 주민(평안북도 출신)의 전언이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국하려고 하니 (중국에) 귀한 금덩이를 두고 가는 것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집엔 가고 싶지만 범의 굴에 들어가는 심정이다”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태어날 때부터 인권과 정보의 자유가 박탈된 북한 주민들의 변화가 느껴진다. 시장의 활력으로 인해 체제의 허구를 깨닫고 있는 주민들은 해외체류 기간 잠재해 있던 불만을 마음껏 늘어놓았다.

[다음은 지난 3월 중국에 사사(私事)여행(친척방문) 나온 한 주민과의 인터뷰 전문]

-김정은 체제 들어 주민생활이 안정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는 어떤가.

장마당 가격은 안정되었지만 생활이 안정된 건 아니다. 도시 주민들은 그래도 시장에 매일 나가면 쌀도 사고 벌이가 잘되는 날에는 조금씩 저축할 돈이 생긴다. 하지만 쌀 가격을 비롯한 농산물 가격이 안정되면 농촌사람들 생활은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농장원들은 양곡을 팔아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쌀 가격이 5000원대로 유지되니 옷을 하나 구매하자고 해도 쌀 수십키로(kg)를 팔아야 한다.

예를 든다면 성인남자들이 좋아하는 유행복 잠바가격이 200위안화이다. 북한 돈으로 24만 원정도인데 강냉이(옥수수) 100키로 정도 팔아야 한다. 농장원들의 경우 텃밭에서 농사지은 옥수수를 시장에 팔아 남편, 자녀들 옷과 신발을 구매하고 나면, 정작 식량이 떨어진다.

도시 주민들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장사를 통제하지 않으니 하루 5천원~만원 벌이는 된다. 그렇지만 석탄도 사야 되고, 기름, 옷도 사야 되고 자녀들 학용품도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버겁다. 때문에 생활안정보다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돈이 돈을 낳는다고 큰돈을 가진 사람들(간부나 돈주(신흥부유층))만 장군님 덕을 본다.

-중국에는 왜 나오게 됐나.

기차역전에서 인조고기밥(콩으로 만든 인조고기 사이에 밥을 넣은 음식)을 비롯한 음식을 팔면서 돈을 벌었다. 하루 종일 열차 보안원들에게 쫒겨다니며 장사를 했다. 열차가 들어오면 손님들에게 달려가 음식을 팔고나면 얼굴은 햇볕에 새까매지고 몸도 나른해진다. 그런 건 참을만 했지만, 음식을 통째로 빼앗길 때는 무척 힘들었다. 공장에 출근하는 남편은 배급도 못타고 월급도 없이 제노릇 못하니 아내가 아무리 벌어도 겨우 옥수수 밥 먹을 정도였다. 어느 날 이렇게 살다 죽을 생각하니 인생이 한스러웠다.

장사 품목을 바꾸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했다. 생각다 못해 어머니에게 이자돈을 꾸고 중국비자를 신청했다. 3년 전 중국에 갔다 온 어머니는 수산물 도매장사를 했었다. 5000위안을 보위지도원에게 뇌물로 주었지만 여권비자는 일 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중국 사사여행자들이 절반이상 귀국하지 않아 최근에는 비자발급이 제한되고 신청이 어려워져 그만큼 뇌물만 오른  것이다.

1만 위안 가격의 수산물을 사가지고 중국으로 나온 다음날부터 단동(丹東)시 아침시장에 팔기 시작했다. 일주일 사이 수산물을 다 팔고 순 이윤 3000위안을 남겼다. 이 돈으로 다시 중국 상품을 북한에 팔면 (북한시장에서) 장사 할 수 있는 밑천이 생길 수 있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중국에는 도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뭉치를 가방에 넣고 시장 구경하던 중 순식간에 도난당했다. 중국에 인생을 걸고 나온 꿈이 하루아침에 박살이 난 셈이다.

-중국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북한체제와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나.

일단 중국에서는 월급으로 먹고 살 수 있다. 백수도 부지런히 일만 하면 그만큼 보수가 있어 돈을 모을 수 있다. 월급이 있는 일자리가 부럽다. 또 전기걱정 없으니 인간답게 티비(TV)를 보면서 문명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같은 사회주의라고 해도 중국 주민들은 지도자 이름을 멋대로 부르며 평가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수령이나 체제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개방 정책도 부럽다. 누구든지 다른 나라에 갈 수 있고, 또한 마음껏 돈을 벌수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북한은 나이, 사상동향, 가족관계, 해외연고자 등 세 명 이상의 보증인이 있어야 비자 신청이 가능하다. 두 달 비자기일이 늦어도 가족들은 보위부 압박 속에 단련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가정보모를 하면서 짬 시간에 (중국인)집 청소까지 하며 잃어버린 돈을 보충했다. 하지만 귀국하고 싶지 않다. 일하면 돈이 생기는 중국을 떠나 북한에 돌아가려고 생각하니 금덩이를 놓고 가는 심정이다. 집은 가고 싶지만 (북한을) 생각하면 범의 굴에 들어가는 것 같은 마음이다.

-가족이 보위부의 압박을 받는다고 했는데 불안하지 않는가.

내년이면 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이 걱정된다. 일단 1만 달러를 벌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시댁에서는 남편에게 아들에게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며 이혼소송을 냈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엄마가 이혼하면 아버지 핏줄을 따른 아들 발전에 지장이 없다. 강제이혼을 당해야 하는 운명에 가슴 아프다.

그래도 해외로 나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은 돈이 있어야 사람 대접받는다. 수령님(김일성)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공장밖에 몰랐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지금은 공장 일만 하면서 당에 충실한 사람들이 손가락질 받는다. 자력갱생하라는 당의 구호를 주민들은 그대로 시장에 적용한다.

중국 불법체류 때문에 가족이 보위부단련 받는 건 마음 아프지만 불안하지는 않다. 돈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며 장군님보다 더 중요한 건 돈이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 생각난다.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은 자기 자신이라는 철학이 지금은 시장에 맞는다. 믿을 건 내 힘뿐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중국에 있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자꾸 변한다. 장사밑천만 벌면 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 돈을 벌게 되니 더 벌고 싶다. 사람 욕심이 바다도 메우지 못한다는 게 이런 이야기인가 보다. 지금은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구원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우선 셋집살이를 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집 살 돈을 보태주고 싶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돈보다는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 지금 중국학원에 교육비를 내고 발안마를 비롯한 치료 기술을 배우고 있다. 해외 선진적인 기술을 착실히 배워두는 것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설송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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