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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수기] 요덕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동지회 669 2006-05-02 10:22:02
국제인권단체들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2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金正日 체제는 끊임없는 숙청과 처형. 연좌제를 통한 강력한 공포통치로 유지된다. 金正日의 폭정을 종식시키는 것이 수용소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요덕수용소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요덕군 룡평지구에 지주·자본가, 6·25 전쟁 때 美軍을 도왔던 악질 반동들을 임시 수용하는 구역이 있었다고 한다.

1965년경 요덕군 5개 리(룡평리·평전리·립석리·대숙리·구읍리) 주민들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수용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의 요덕수용소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1970년부터라고 초창기 수용됐던 탈북자 김영순씨가 증언하고 있다.

요덕수용소에서 룡평리는 산악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름진 논이 있어 요덕군 노른자위로 불리던 곳이다.

때문에 요덕 사람들은 룡평리가 수용소에 편입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룡평리에서 나오는 백미는 수용소 보위원과 인민군 경비대를 먹여 살리는 주요 식량 이다.

1977년 우리 가족이 요덕수용소에 처음 입소할 때에는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요덕수용소를 남북으로 흐르는 립석천을 경계로 동쪽은 「완전통제구역」, 서쪽은 「혁명화구역」이었다. 완전통제구역은 룡평리·평전리이고, 혁명화구역은 구읍리·립석리·대숙리가 속해 있었다.

완전통제구역은 넓은 평야지대여서 수감자가 훨씬 더 많았다. 전체 인원은 1977년 당시 3만~3만5000명 정도였는데 최근에 더 늘어나 5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反動의 씨를 말리는 완전통제구역

수용소에 끌려간 후 羊(양) 방목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양들이 구역 경계선을 넘어 완전통제구역으로 넘어가서 보위원 입회下에 양들을 찾으러 룡평리 지역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작은 아이들과, 노인·부녀자들밖에 안 보이는 그곳에는 혁명화구역보다 기상시간이 한 시간 더 빨랐다.

그곳에서는 움직이는 기계를 연상할 만큼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 있었고, 만 17세가 되는 남자는 땅굴 공사나 위험한 공사장에 끌고 가 그곳에서 모두 죽게 한다고 했다. 남자들을 없애는 것은 반동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완전통제구역에서 과거의 죄가 해명되거나 죄명이 낮아져 혁명화구역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혁명화구역은 완전통제구역에 비해 지상낙원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완전통제구역이란 곳이 얼마나 열악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혁명화구역에 수감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범들의 기상시간은 오전 5시이며 퇴근시간은 보통 오후 8~9시 정도다. 아침 인원 점검은 아주 중요해 보위원이 직접 나와 인원 체크를 한다. 점검에 세 번 빠지면 도주자로 판명나기 때문에 이유 없이 점검에 빠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노동 정량을 마치지 못했을 경우 연장작업을 하는데, 주로 수용소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적응하기 전에 겪게 되는 노역이 바로 연장작업이다.

작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학습회를 가지고 주말에는 週(주) 생활총화를 한다.

월말에는 月(월) 생활총화, 분기별 생활총화, 연말 생활총화를 하는데, 보통 연말 생활총화 때에는 몇 명씩 비판무대에 세워 비판한 후 즉석에서 족쇄를 채워 수용소內에서 운영하는 특별감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정치범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외곽경비와 내부관리로 구분된다. 외곽경비는 인민경비대 산하 군인들이 완전 군장을 갖추고 敵(적)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경비를 선다.

때문에 이들은 3·8선 경비대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수용소 외곽은 전기 철조망과 비밀 함정으로 완벽한 감시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있다.

다대포 생포간첩 이영선의 동생 이영국

내부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직접 관리한다. 각 반마다 두 명의 보위원이 정치범들을 관리하는데, 보위부의 감시전략은 정치범들 간에 서로 감시하도록 한다.

정치범 가운데 건장한 사람을 뽑아 총감독이란 자리를 만들고, 감독은 각 반장들을 통제한다. 반장은 분조장을, 분조장은 5인조를 감시한다.

5인조는 수용소 하부말단 조직이다. 5인조장은 분조장에게 보고하고, 분조장은 작업반장에게 작업반장은 감독에게 보고하는 식이다. 보위부 요원은 감독에게서 모든 상황을 직접 보고받는다.

이 외에도 수용소 내부에 정치범들을 비밀 스파이로 잠입시킨다. 그들에게는 특별 위로금이 지불되고, 담배와 식료품이 비밀리에 공급된다. 스파이들은 감독을 포함해 작업반장·분조장들을 따로 감시한다.

1977년 8월4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9월1일 수용소 학교의 개학식이 있었는데, 그때 나와 함께 수용소에 새로 들어온 학생은 평양 출신의 이룡모와 함흥 출신의 이영국이었다.

이룡모는 중앙당교육부장을 지낸 부친 이성흡이 金正日의 이복동생 김평일을 추종하다 「곁가지 사건」에 걸려 수용소에 수감됐다.

1985년경 부친의 사건이 해명돼 요덕수용소에서 풀려났다가 1991년에 수용소에 再수감됐다. 부친 이성흡은 자신이 가르쳤던 金正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다가 평생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됐다.

최근 요덕수용소에서 풀려난 탈북자들에 따르면 이영국은 지금도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 무려 30년 세월을 수감생활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이영국이 왜 수용소에 수감됐는지는 남한에 와서야 알게 됐다. 1976년 다대포에서 귀순한 무장공비 이영선씨가 바로 그의 형인데,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해 알고 싶다』며 나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영국이가 바로 영선씨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한으로 망명한 형 때문에 30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 세 사람은 입학식 날 강제노동에 동원돼 나무를 나르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친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 모두 난생처음해 본 노역이니 견딜 수 없었다.

3개월이 수용소 생활의 최대 고비

처음 들어온 학생들이 으레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3개월 안에 강제노동과 먹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면 영양실조로 모두 사망하게 된다.

처음 먹어 보는 옥수수밥이 소화가 안돼 3개월간 설사를 하고 나면 뼈만 남게 된다.

3개월이 수용소 생활의 최대 고비 인 셈이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자신의 살이라도 뜯어먹고 싶을 정도로 미치기 직전 동료들과 함께 밭에서 쥐굴을 파서 잡아낸 쥐들을 처음 구워 먹었는데, 그 순간이 수용소의 생활에 적응되는 첫 코스이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쥐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것은 고급에 속한다. 지렁이·개구리, 쇠똥에 박힌 옥수수알을 주워 먹을 정도가 돼야 수용소에서 살아남게 된다.

옥수수만 먹고 단백질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생긴 病(병)인 「펠라그라」는 북한에서는 수용소 밖에도 널리 퍼져 있는 영양실조 증세다. 일명 「개병」(개고기를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부른다.

매일같이 죽어 나가는 말라 비틀어진 주검들을 처음 봤을 때에는 끔찍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인 괴로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동네 개가 죽은 것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수용소 보위원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장씨 姓(성)을 가진 한 정치범이 영양실조에 걸렸는데, 정치범들은 그를 먹이지도 않고 날마다 구박을 해 끝내 죽게 만들었다.

나무로 棺(관)을 만들어 시체를 넣다가 관이 작아서 들어가지 않자 팔다리와 목을 꺾어 관 속에 집어넣었다. 『죽은 사람을 왜 그러냐』고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했지만 그에게 해를 당했던 정치범들은 평소의 분노를 죽은 사람을 향해 퍼붓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옷과 신발이 멀쩡하면 모두 벗겨 간다. 수용소에서 사람이 죽기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 중 가장 확실한 징후는 「이」와 「벼룩」의 움직임이다.

죽어 가는 사람의 몸에서는 「이」와 「벼룩」들이 먼저 탈출한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에서 「이」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을 보면 며칠 동안 밥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린다.

수용소의 악몽 가운데 가장 떠올리기 싫은 것은 바로 공개처형이다.일년에 10여 차례 공개처형이 이뤄지는데, 죄목은 모두 「도주죄」다.

수용소가 크게 4개 지구로 나뉘어 있고 공개처형도 지구별로 진행하므로 다른 지구에서 행해지는 공개처형은 알 수 없다. 때문에 더 많은 공개처형이 자행된다고 보면 된다.

사형수는 일단 팔다리 관절을 꺾고, 먹이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해 뼈가 없는 문어처럼 사람을 짓이겨 버린다. 이런 사람을 입에 재갈을 물리고 꽁꽁 묶은 채 군인 두 명이 가볍게 한 팔씩 잡고 사형장으로 끌고 나온다.

말뚝에 눈·가슴·다리를 묶고 사수 세 명이 나와 세 발씩 머리·가슴·다리를 쏜다. 세 발을 맞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을 경우 끊어질 때까지 총을 쏜다. 뒤통수가 터져 뇌수가 튀어나오고 비쩍 마른 다리 밑으로 가는 핏줄기가 흐른다.

죽은 것이 확인되면 가마니에 싸서 어디론가 가져다 묻어 버린다. 공개처형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며칠 동안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나도 몸이 꽁꽁 묶인 채 사형장에 끌려 나가는 꿈을 꾼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끔찍한 공개처형도 몇 번 보고 나면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 가운데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살겠다는 인간의 의지

공개처형으로 죽고, 굶어서 죽고, 강제노역으로 현장에서 죽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보고 있으면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진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짐승처럼 죽고 싶지 않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의지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완전통제구역에 가지 않고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10년 만에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게 됐다.

수용소 소장은 『黨의 큰 배려로 새 생명을 얻게 됐다. 죽어도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무엇이 黨의 배려이고 새 생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옥에서 낙원으로 나온 듯한 느낌, 자유는 수용소 밖의 공기를 마시면서 느끼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출소할 때 안에서 보고 들은 것을 외부에 일절 발설하지 말며, 이를 어길 시에는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을 했다.

金正日이 있는 한 요덕은 계속된다

5년간의 사회생활 후 북한을 탈출해 기적같이 한국에 입국한 나는 요덕수용소의 정체를 폭로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처음으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밝혔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요덕수용소는 없어지기는커녕 더 확장됐다는 소식만 들려온다.

1987년 구읍·립석 지구의 혁명화구역은 모두 완전통제구역으로 바뀌었고, 수용소 맨 끝 대숙리에 혁명화구역이 만들어졌다. 수용소의 90%가 완전통제구역으로 바뀌었고, 살아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국제인권단체들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2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金正日 체제는 끊임없는 숙청과 처형. 연좌제를 통한 강력한 공포통치로 유지된다. 金正日의 폭정을 종식시키는 것이 수용소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2003년 요덕수용소에서 석방된 김수철(가명)씨는 최근 달라진 요덕수용소에 대해 증언했다. 대숙리의 혁명화구역도 없어지고 구읍지구 서림천 지역에 새롭게 수용소를 확장해 거기에 혁명화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요덕수용소 전체가 완전통제구역으로 변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떠들건 말건 金正日 정권은 요덕수용소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 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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