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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군부-개혁파 파워게임으로 본 ‘남북정상회담 이후’
Korea, Republic o 관리자 526 2008-01-10 02:24:01
신동아 2008-01-09 14:35

“노무현 대통령에게 대단히 감사하고 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그가 수행한 공적이 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도, 조총련 간부의 발언도 아니다. 모(某) 국가의 정보기관 관계자가 이번 정상회담에 관해서 토로한 솔직한 소회다.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여러 경로로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관련국들을 대표해 7년 만에 평양을 ‘문진(問診) 방문’한 것에 감사한다는 뜻이었다.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는 TV 생중계 영상을 통해 세계에 타전됐고, 각국 정보기관은 이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주변국들이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당연한 일이다. 북한은 지금 김정일 체제의 생존을 건 경제재건과 전방위 외교의 추진, ‘선군(先軍)정치’에서 ‘선경(先經)정치’로의 전환이라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바꿔 말하면 나비가 번데기에서 탈피하는 순간처럼 유약하고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체제의 핵심인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나 판단력에 물음표가 붙는다면 관계국 당국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북한 문제의 전체적인 연착륙’이라는 시나리오는 순식간에 백지로 돌아갈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개혁개방’이라는 말에 강하게 반발했다고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표현상의 문제일 뿐, 이를 근거로 북한이 경제재건을 포기했다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중국을 흉내 내어 ‘북한식 사회주의’라고 부르건 혹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건, 장기적으로 북한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과제로 설정하지 않는 한 체제의 생존은 이미 불가능해졌다.

이 글에서 설명할 내용은, 김정일 위원장이 그간의 우유부단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본격적인 경제개혁에 키를 맞추기로 결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7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된 것은 그 징표 가운데 하나다. 이는 북한의 향후 행보를 가늠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을 마중 나간 김 위원장의 기울어진 자세가 상징하는 것처럼, 개혁개방을 향한 북한의 발걸음 역시 아직 불안정하기만 하다.

‘선군정치’는 절대적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선군정치’는 전 분야에서 군을 최우선시하는 특이한 통치형태다. 공식적인 시작은 1999년 6월로, 이는 대포동 미사일 발사시험의 다음해이자 미증유의 대기근이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형식적으로 선군정치는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선군정치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0년 2월경부터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른바 ‘선군파’와 ‘개혁파’의 마찰이 싹트게 됐다고 판단한다.

1인 독재체제 국가에서 심각한 노선투쟁이나 파벌대립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들 모두가 김정일 체제를 수호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굳건히 단결하고 있고, 자주국방이라는 국시(國是)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세력은 없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대전제로 하고 나서, 그 실제적인 경제운영에 관해서는 김정일 체제하에서도 논쟁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선군파와 개혁파, 두 세력은 경제 운영방식을 쟁점으로 대립했다. 대립의 국면은 국제정치적인 외부요인 때문에 잦은 공수 교대가 계속돼왔고, 김 위원장은 두 파벌의 격돌 때문에 권력 중추에 균열이 생기는 상황을 피하려고 조정하는 일에 부심해온 것으로 보인다.

북한 내부의 국가전략·정책 결정구도를 이와 같은 틀로 파악하는 것은 필자뿐이 아니다. 미국 국무부에서 정보조사국(INR) 북한분석관을 지낸 로버트 칼린과 북한담당관을 역임한 조엘 위트는 지난해 ‘북한의 개혁(North Korean Reform)’이라는 공동저술을 내놓은 바 있다. 두 사람은 이 책을 통해 필자와는 다른 방법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필자가 RENK 활동을 통해 확보한 북한의 비공개 문서나 보고서 등을 기초로 한다면, 칼린과 위트는 북한 공개간행 문헌의 행간을 읽어 김정일 정권이 착실하게 경제개혁에 키를 맞춰가고 있다고 확인한다.

이와 함께, 지난 6월 필자는 평양에 대표부를 둔 한 EU 국가 북한담당 대사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선군파와 개혁파 사이의 쟁점이 주로 ‘경제개혁의 속도’ 문제에 있다고 보는 측면에서 그와 필자의 생각이 일치했다. 두 파벌의 대립선이 각 국가조직을 가로지르면서 진행 중이고, 50대를 경계로 하는 세대간 대립의 색채도 짙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여곡절로 점철된 선군파와 개혁파의 대립, 갈등은 다음과 같은 전개과정을 걸어왔다.

▼ [제1기] 선군정치의 전성기 (1998년 후반~2000년 초)

1994년 제네바에서 1차 핵 위기에 관한 북미간 합의가 이뤄진 직후 김일성 주석은 급사하고 대기근과 대량 탈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내 사정의 급변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이 일종의 긴급 피난책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선군정치’다. 장거리 탄도미사일 대포동1호 발사를 신호로 인민군은 노동당으로부터 핵개발 주도권까지 강제로 빼앗았고, 이 무렵 군수부문의 경제적 비중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국민경제는 오히려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기근의 진행은 막을 수 없었고, 이러한 흐름이 도리어 군수산업에까지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이미 선군정치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 [제2기] 개혁파의 탄생과 공세기 (2000년 초~2002년 연말)

기근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긴급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김정일 정권은 주민이 자연발생적으로 확대시켜온 암시장을 공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개혁파가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000년 초 ‘정치강국, 군사강국은 이미 달성’ ‘수년 내에 경제강국을 목표로 한다’는 개혁파의 정책목표가 등장한다(‘조선중앙통신’ 2월3일). 이러한 정세인식에는 1994년 북미 합의가 초래한 한반도 정세의 대폭적인 긴장완화가 밑받침하고 있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사이에 두고, 김정일 위원장은 반 년 동안 두 번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다(2000년 5월과 2001년 1월). 김 위원장 자신이 선군정치하에서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 길을 닦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때를 즈음해 개혁파는 기세를 올렸고 선군파는 수세로 돌아선다.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의 2002년 2월 ‘악의 축’ 발언이 불러온 역풍 속에서도 개혁파는 더욱 공세를 가한다.

그 상징적인 예가 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을 공식적으로 도모하는 2002년 7월의 ‘경제관리개선조치’였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조치는 임금과 물가를 변경한 소극적인 개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군파가 우위를 점하던 당시의 북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대담한 도전이었다. 개혁파에게 경제관리개선조치는 다음 단계의 본격적 개혁작업으로 이행하는 전초전이자 선군파의 반응을 관측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외부환경을 갖추는 전방위 외교의 일환으로 그해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됐다.

바로 이 시점에서 선군정치의 환골탈태가 시작된다. 주체사상 같은 간판은 결코 내리지 않았지만 그 변질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선군정치와 경제개혁이 공존하는 불안정하고 미묘한 균형상태가 나타났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으로 차디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미국 이외에는 전세계가 (경제개혁을) 지지한다’ ‘경제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2002년 말까지 북한 내부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그 울림은 이어진 국제정서 악화로 금세 허무해지기에 이른다.

▼ [제3기] 선군파의 반전 공세기 (2003~2004년 여름)

선군파에게 대반격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2002년 10월 켈리 차관보의 방북이었다. 당시 켈리 차관보는 북한이 1994년의 북미 합의를 위반하고 파키스탄에서 원심분리기 시제품 20대를 구입한 ‘사실’을 들이댔다. 이른바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 의혹이 터져 나왔다.

주지하다시피 이를 계기로 그간 형성된 평화 무드는 순식간에 끝이 났고, 이른바 ‘제2차 핵 위기’가 불거졌다. 북미 대립 격화와 이라크전쟁 개전으로 선군파의 공세는 급격하게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핵 위기 와중에 일본인 납치사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일 국교정상화의 길이 완전히 멀어진 것 역시 선군파에게는 순풍으로 작용했다.

군사비 지출 증대를 중지하고 중공업 부문을 민생경제 분야로 서서히 전환하고자 했던 개혁파의 의도는 이로써 좌절된다. ‘제2기’에서 두 파벌이 음으로 양으로 격렬하게 주고받던 신경전, 즉 ‘중공업 군수분야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인가 소비재공업 민수분야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인가’의 논쟁은 선군파의 승리로 기운다. 흡사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오래된 ‘신학논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이제 막 서장을 연 ‘제2기’의 개혁을 중도에 백지화할 수는 없었다. 민수분야의 추가 축소는 기근의 재발과 사회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군이 개혁을 지도, 감독한다’는 일종의 타협책이다. 군부가 박봉주를 내각총리로 밀어올린 것(올해 실각)은 그 상징적 사건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개혁파는 몸을 낮추고 재기할 기회를 엿보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군파가 원하는 만큼 군수산업을 강화하기를, 즉 벽에 부딪힐 때까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기다리는 전술’로 전환했다. 그 구체적인 결과물이 신형 탄도미사일과 플루토늄형 핵무기 개발 프로세스의 진행이었다. 여기에 고농축 우라늄이라는 ‘무리한 계획’까지 덧붙여진다.

▼ [제4기] 개혁파의 반격기 (2004년 6월~2006년 10월)

개혁파가 예측한 바대로, 민생부문을 희생시킨 군수부문의 성장은 ‘제3기’에 이르러 심각한 한계에 부딪힌다. ‘제2기’에 개혁파가 실시한 암시장의 공식화는 기근을 종식시켰다는 뚜렷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제3기’가 제시한 경제회복 기조는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는 식의 겉치레뿐, 실제로는 기근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중공업 부문을 비롯해 공장과 기업소는 조금도 가동되지 않았고, 종업원은 시장 노점상 등의 부업으로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공장과 기업소가 지급하는 급료는 종업원이 필요로 하는 최저생활비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이른바 ‘포장마차 경제’는 순식간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전 국민이 노점상으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차가 확대될 뿐 아니라, 승자 그룹에서 패자 그룹으로 추락하는 경향도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경제의 본격적인 개혁개방 없이는 공업부문의 재생이 불가능하고, 국민생활의 유지·향상도 꾀할 수 없다는 반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공장과 기업소의 간부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이 ‘개혁개방의 단행’이라는 구호의 당위성에 점차 동의하기 시작했다.

이 소리 없는 다수파의 여론을 등에 업고, 개혁파는 그 근거지인 내각의 좁은 테두리를 넘어 당과 군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조직을 가로지르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 중심에 50대 이하 중견 간부들과 젊은 실무관료들이 자리하고 있다.

개혁파는 여세를 몰아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 아래 본격적인 경제개혁 계획을 세우기 위해 움직였다. 2004년 6월 내각에서 채택됐으나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은 ‘신경제발전방안’이 그 결과물이다(표 참조).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단은 국방공업 우선론이나 곡물의 국가전매제 등 기존 북한식 사회주의의 향신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선군파의 반발을 피하고자 하는 표면상의 양보에 불과하고, 개혁파의 주안점은 산업과 무역의 근본적인 구조개혁에 맞춰져 있다. 종래 북한이 추진해온 중공업 중시 노선을 사실상 포기하고,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경공업 부문에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는 ‘수출 지향형 경제발전전략’에 가깝다.

이를 통해 드디어 그동안 대기상태에 머물러 있던 본격적인 개혁작업이 ‘제1기’의 초보적 개혁을 이어가는 수단으로 가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이후 3년이 넘도록 ‘소금에 절여진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개혁파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미 시기가 성숙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시각에서는 아직 모자랐던 것이다.

2005년 10월, 북한 당국은 식량배급제를 일부 부활시켜 북한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이 조치 하나만 보자면 무모한 ‘격세유전(隔世遺傳)’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진의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그러나 필자가 확보한 ‘신경제발전방안’ 문서를 보면 배급제 부활은 대규모 개혁방안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한 항목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급자족의 경제토대 구축’이나 ‘국방공업 우선’론과 마찬가지로 선군파에 대한 일정 수준의 양보인 셈이다. 쉽게 말해 더 큰 이익을 노리고 일부러 내준 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 예상했던 대로, 부활한 배급제는 3개월도 되지 않아 철저히 붕괴하고 만다.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지 않고서는 선군파의 ‘복고주의적 취미’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였다. 이를 통해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식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선군정치의 역할은 오래전에 수명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 내부의 주관적 관점에서 보자면 선군파에게는 아직 이뤄야 할 사명이 남아 있었다. 선군정치하에서 군수산업이 성취한 결과를 과시하는 사건이 바로 2006년 7월의 미사일 실험과 10월의 핵 실험이다.

핵 실험이 성공했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군부가 두 실험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선군정치의 막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실험을 통해 ‘자위 국방력의 완성’이라는 결과를 공공연히 드러내야만 군수산업에 투입돼온 막대한 역량을 민수산업으로 돌릴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선군정치에 따른 군수공업 우선정책을 펴 나가면 결국은 경제파탄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전망 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이라크전의 수렁에 빠진 미국의 처지를 곁눈질로 지켜보며 실험 강행을 재가했다. 다만 유엔 경제제재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던 만큼 핵 실험의 시기를 가을 수확을 마친 직후로 선택한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경제제재를 가장 길게 견뎌낼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2006년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강행은 개혁개방 노선에 역행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선군정치의 종언을 알리는 ‘불꽃놀이’를 의미하고, 특히 개혁파에는 선군정치가 다 타버리기 직전에 일순간의 빛을 발하는 것으로 비쳤다.

▼ [제5기] 개혁개방 정책으로의 전환기 (2006년 가을~현재)

미사일 발사 이틀 후부터 ‘로동신문’ 등 북한의 공식매체에는 ‘강성대국의 여명’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빈번하게 등한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 ‘강성대국’이라는 용어가 개혁파의 탄생기와 공세기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1999년 가을 ‘제2기’ 직전에 ‘로동신문’은 “우리나라는 이미 ‘정치강국’과 ‘군사강국’을 달성한 것으로, 남은 ‘경제강국’을 달성하면 참된 강성대국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논평을 실은 적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경제강국의 달성을 향해서 매진한다’는, ‘제2기’의 개혁방침을 암시하는 문장이 바로 이어진다. 선군정치 공식선포로부터 불과 3개월 후의 일이다.

돌이켜 보면 이는 이제 막 태어난 선군정치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실상 선군파는 ‘제3기’의 반격과 공세로 그 수명을 대폭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강성대국’이 2006년의 미사일 발사로 ‘여명’을 맞이했다고 ‘로동신문’은 말한다. 여명이란 전환점이며, 강성대국 실현의 최종 단계인 경제강국의 건설로 정책목표가 옮겨가게 됐음을 의미한다.

2006년 말에는 같은 맥락의 또 다른 논평이 게재된다. 핵 실험의 강행과 그에 따른 유엔 안보리 경제제재 등 다사다난했던 1년을 회고하면서, ‘2006년은 여명의 해’이며 ‘불타는 여명은 2007년과 함께 현란한 새벽이 된다’고 쓴 것이다(2006년 12월31일자). 이후 북한 노동당의 ‘신년사’는 ‘경제근대화’를 ‘국방력 강화’보다 앞에 내걸고 ‘경제강국의 건설’을 역설했다. 선군정치의 종언과 경제재건의 시작을 내외에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경제재건에는 청사진이 필요하다. ‘제4기’에 ‘소금에 절여진 상태’가 됐던 ‘신경제발전방안’은 다시 테이블에 올라오게 될 것이다. 이 방안이 해외자본의 유치를 통한 산업육성을 국가목표로 하는 한, 거기에 적합한 국제환경을 만드는 작업이야말로 북한의 필수 불가결한 국가과제가 된다. 구체적으로는 북미관계의 긴장상태를 대폭 완화해 테러지원국 지정 등을 해제하고, 유엔 안보리의 경제제재 결의를 철회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지렛대로 북일관계 정상화를 도모해 배상금을 받아 개혁의 종자돈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 최종목표가 된다.

이상이 북한 권력중추 내부에서 전개돼온 선군파와 개혁파의 경쟁과 대립사(史)다. 두 파벌의 대립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난해 말 잠정적인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행정부 내부의 네오콘을 퇴장시켰고 김정일 위원장은 선군파를 눌렀다. 강경한 신구(新舊) 보수파 때문에 두 사람은 똑같이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이후 미국의 신보수파와 북한의 수구파가 서로 ‘적대적으로 의존하는’ 기묘하면서도 비생산적인 구도는 사라졌다. 그 가시적인 징표가 최근의 북미 관계의 급진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군사비 5% 삭감해 인민경제로 전환”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북한 내부는 불분명하기 이를 데 없지만, RENK를 통해 입수된 내부 정보들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주곤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올해 1월 북미 베를린 회동과 2월의 5차 6자회담 사이에 일어난 두 사건이다.

올해 1월 넷째 주, 조선노동당은 전국 규모로 직장집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당 간부들은 참가자들에게 “핵 보유 덕택으로 올해는 군사비를 5% 삭감할 수 있다. 그 몫을 인민생활에 돌려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니까 기대하라”는 내용을 강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면서 군축예산을 호언한다는 건 김 위원장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곡예행위다. 더욱이 간부들은 “올해는 (북한 최대의) 김책제철소를 시작으로 대규모 기업소를 순차적으로 재가동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인 1월20일부터 2주일 동안 김 위원장은 김책제철소가 있는 함경북도에 현지지도를 나간다. 주욱 늘어선 도(道) 간부와 김책제철소 경영간부들 앞에서 김 위원장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연말에는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각종 기업소의 재가동을 준비하라고 독촉한 것이다.

이 발언이 북미간 대립에 돌파구를 마련한 베를린 회동 직후에 나왔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동에서 합의된 결과가 김 위원장에게 향후 1년간의 상황전개를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논의되는 북한의 테러 지원국 해제와 남북간의 경협 합의가 ‘낙관적 전망’ 속에 들어 있는 ‘연말의 좋은 소식’이라고 해석한다면 과연 무리일까.

물론 반대되는 움직임도 있다. 경제활동의 통제 강화나 탈북자에 대한 집중 단속 등이 그것이다. 특히 군부의 동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7월13일 인민군이 ‘북미 군사회담’ 개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 그 한 징후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앞으로 전개될 평화체제 협의에서 북한이 주도권을 쥐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북한과 미국의 급속한 접근을 방해하기 위한 선군파의 책동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북미 협상이나 6자회담이 북한 주도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 위원장이 경제재건을 서두를 생각이라면 이는 나쁜 사인이 아니다. 오히려 핵 문제의 진전이 빨라질 수 있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선군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핵 문제 등의 진전은 늦어질 수밖에 없고, ‘제5기’에서 ‘제4기’로 후퇴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다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군부의 진의는 ‘개혁을 막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주도권을 획득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개혁파와 벌이는 이권다툼에 가깝다는 것이다. ‘선군정치의 부활’이라는 비현실적인 몽상보다는 실력집단으로서 위력을 발휘해 북미 협상과 북일 협상 과정에 끼어들고, 군복을 신사복으로 갈아입어 개혁의 이권과 개방의 열매를 차지하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이상설의 아이러니

또 한 가지 살펴봐야 할 쟁점이 이른바 후계자 문제다. 이 역시 경제개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안이다. 외부 언론매체들은 이 문제를 떠들썩하게 다루지만, 정작 북한 내에서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북한측 인사들은 김정일 위원장이 “70세가 될 때까지는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겠다”며 후계논의를 향후 5년간 봉쇄했다고 전한다. 누가 후계자가 되건, 이후의 권력체제가 어떻게 구성되건, 일단 ‘경제개혁의 향방을 확인한 후에’ 결정하겠다는 게 김 위원장의 본심이 아닐까 한다.

흔히 본격적인 경제개혁에는 강력한 지도자, 즉 이른바 ‘개발독재’가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김 위원장이 개혁을 두고 달팽이 걸음을 걸으며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인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권력이 세습정권이기 때문이다. 후계 추대는 필연적으로 논공행상을 불러오고, 이는 권력 내부의 대립과 지도력 결여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현재 국면에서 후계 세습이 진행될 경우 개혁파에게는 도리어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도 경제개혁의 속도나 범위를 둘러싸고 대립이 재연될 소지가 있고, 특히 이번 정상회담에서 결정된 대규모 경제협력사업은 파벌 사이에서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대립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다. 남북관계는 까다로운 과제다. 경제협력 문제만 해도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없다. 이 까다로운 과정 속에서 선군과 개혁의 알력을 조정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김 위원장뿐이다. ‘위대한 독재자’의 건강이상이 북한 내 개혁파에게 분명 흉보(凶報)가 되리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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