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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영화배우’라면 김정일은 ‘감독’
Korea, Republic o 관리자 1061 2008-04-19 02:11:31
데일리NK 2008-04-18 18:18

[통치스타일 비교] 위장된 '따뜻함'과 조작된 '카리스마'

북한과 같은 일인지배체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재자 개인의 강력한 통치술이 뒤따라야 한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경우 대(代)를 이어 60여년간 북한을 지배하고 있지만 통치 스타일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출신이라는 경력을 내세워 권력의 정통성에 기반한 통치술을 폈다면, 후계자인 김정일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보완하기 위한 통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북한 독재정권 유지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김 부자(父子)의 통치스타일을 비교·분석했다.

◆ 수령이 모든 ‘정책’ 결정=북한은 일인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 결정도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이뤄진다. 다만 김일성이 공산주의 국가의 시스템을 본 따 형식적이나마 합의적 성격을 정책 결정과정에 포함시켰다면, 김정일은 개인이 독단적인 판단을 더 우선시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허문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일성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하의상달(下意上達. 아랫사람의 뜻을 윗사람에게 전달)식이 많다”며 “각 부서의 합의를 거쳐 정치국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형태는 국가체제 운용에 나름대로 공산주의의 국가들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정치국을 활용하기 보다는 측근들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며 “친위 세력을 통해 보고체계 및 정책집행체계를 장악하고 문제처리시 해당 실무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일성 시대가 형식적이나 합의적 성격이 있는 ‘위계 질서형 양두제 모델’이라면,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더욱 독단적인 ‘종횡무진 제왕형 모델’로 변화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김일성과 김정일 둘 다 지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제 모델(the autocratic model)’”이라면서 “김일성이 정치국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는 편이고 김정일이 더 독단적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말했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김일성의 경우 당과 국가를 창건한 측면에서 카리스마적 통치에 비중을 뒀다면 김정일은 제도적인 지위를 통한 통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간부 기용 스타일 면에서도 두 사람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은 주로 빨치산 출신들을 등용했고, 한 번 등용하면 오랫동안 기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김정일은 측근 중심의 정치를 펴면서도 의도적으로 경쟁구도를 조성하는 용인술을 펼치고 있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 현성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에서 김정일 정권의 대표적인 정책 결정과정을 ‘측근정치’ ‘밀실정치’ ‘비준정치’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간부들 속에서 ‘영원한 측근도, 영원한 비측근도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 지속적인 충성경쟁과 상호견제를 유지하는 것은 김정일의 측근정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관리 수법”이라고 분석했다.

◆ 영화배우VS영화감독=부자지간이긴 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개인적 성향이나 성품 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아버지같고 온화한 리더쉽의 소유자라면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정적들과의 경쟁, 곁가지들과의 투쟁 과정을 거치며 상당히 도전적이고 대담한 리더쉽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허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배우적 성향이 강하다면 김정일은 밖에서보다는 뒤에서 연출을 하는 사람”이라며 “김정일이 노련한 영화감독은 될 수 있지만 따뜻함을 보여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상을 보여줄 수 없는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은 먼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은 없지만 목전의 이해관계를 타산하는 능력은 뛰어나며 대화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하여 공격하는 능력도 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김정일은 특히 권력 승계 이후에도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도의 선전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북한 TV나 라디오에서는 김정일의 육성을 전혀 내보내지 않는다. 김정일을 찍을 때는 카메라를 상향식으로 비추는 경우가 많다. 모두 다 자신을 신비하고 베일에 쌓인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김일성은 수해 지역과 같은 재난 현장에도 직접 방문해 주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김정일은 일반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일성은 외국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자주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망하기 직전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의 회담이 대표적이다. 1979년에는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과 면담을 갖고 이듬해에는 미국 하원의원 스티븐 솔라즈와도 만나는 등 서방권 인사들과도 꾸준히 접촉했다.

한편, 베일에 싸여 연막 전술을 펼치던 김정일이 대외 언론에 가장 많은 모습을 보여준 계기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직접 공항에 나와 비행기 바로 앞에서 손을 맞잡음으로써 파격적인 행보의 첫 장을 열었다. 김정일은 준비된 행사와 멘트를 잘 소화해냈고 임기응변의 유머까지 과시했다.

극도로 통제된 대중노출과 그를 통한 신비감 조성, 카리스마의 조작은 바로 김정일을 오랫동안 권좌에 머물게 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 외교 무대에서도 ‘신비주의’=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외교정책 스타일도 꼽을 수 있다. 김일성이 외교 면에서 세련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김정일 은둔적 이면서도 소극적인 외교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김일성은 중국과 옛소련,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 비동맹권과의 교류에 치중했다. 그는 특히 중·소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까지 활발한 외국 순방 기록을 남겼다. 1975년의 경우 4월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하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5월에는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할 정도였다.

1965년에는 수카르노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 인도네시아 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에는 김정일이 김일성을 직접 수행했다.

반면, 국제무대에의 노출도 자신의 국제적 신비감과 가치를 떨어드린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 정도만 방문하는 등 극도로 제한적인 해외 순방 외교를 펼치고 있다. 해외 순방시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김정일만의 특징이다. 그는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왕복 2만km를 넘는 거리를 무려 24일에 걸쳐 열차로 오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김일성에게도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만류했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정일이 테러를 두려워해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을 거론, “김정일이 자꾸 김일성에게 ‘비행기는 위험합니다. 기차타고 다니세요’라면서 자신도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다”며 “김일성은 그렇게 겁이 없었는데도 (김정일의 말을 들은 후) ‘내가 허리가 아파서’라면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고 말했다.

김 부자의 상반된 외교정책 스타일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 집권 시기는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이전이라 이들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가 조성됐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면서 “대표적으로는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비동맹외교의 활성을 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이 당시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던 것에 비해 김정일은 핵문제로 인해 국제적인 제재를 받는 등 국제사회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때였다. 때문에 본인이 할 수 있는 외교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결국 대중·대러 관계에 치중하거나 DJ 정부 이후에는 대남관계에 집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회주의권 붕괴의 영향도 있긴 하지만 북한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비동맹 국가들에게 이전과 같은 경제적·정치적 지원을 할 수 없었다”며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국가들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도 악화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허 연구위원도 “김일성은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경제를 일으켜 세웠지만, 경제난과 외교난 등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한 김정일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인민들 속으로…고도의 ‘자기연출’= ‘현지지도’란 원래 탁상행정을 배격하고 관계자가 직접 현지에 가서 사업실태와 문제점을 파악,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지금은 김일성과 김정일 특유의 정책지도 활동만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수령의 영도를 우상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용어 자체가 신성시 됐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 이교덕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김일성은 생전에 8천650여일 동안 57만8천km를 이동해 총 2만600여개 기관을 방문했다. 또한 김일성의 연평균 현지 지도한 단위 수나 일수는 김정일의 거의 2배에 이른다. 김일성이 평균 이틀에 한 차례 현지지도를 했다면 김정일은 4번에 한번 꼴로 한 셈이다.

현지지도 단위당 체류시간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평균 0.42일과 0.44일로 대체로 비슷하지만, 한 단위를 현지지도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김일성이 평균 28.1km로 김정일의 89.9km보다 훨씬 짧아 김일성이 주로 근거리 위주의 현지지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분야별로는 김일성이 경제사회 등 비군사 분야 위주로 현지지도를 실시한 반면 김정일은 군사 분야에 치중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의 현지지도도 1994년 이전에는 주로 문화예술분야에 치중돼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군사부문에 대한 현지지도가 62.6%를 차지하는 양상이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통해 주민들과의 친근한 이미지를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었다”며 “그러기 위해 경제시설이나 인민생활에 많은 관심을 돌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본인의 정치적인 에너지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지도를 활용하고 있다”며 “김정일이 주로 군부대를 방문하거나 예술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당면한 국제정세의 영향도 있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본인 스스로 활력을 얻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덧붙였다.

허 연구위원도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이자 한국전쟁을 이끈 지도자로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존경을 얻을 수 있었다”며 “또한 스스로의 품성이 따듯하다는 것을 잘 위장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역사적 경륜이 없기도 할뿐더러, 성격적으로도 김일성보다는 차가운 편”이라며 “이러한 품성의 차이가 현지지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이 대민(對民) 접촉에 좀 더 치중한 반면, 김정일은 군부대 방문 등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상을 심는데 주력했다”고 분석했다.

양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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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공투사 2008-04-19 23:19:57
    김일성,김정일부자가 유례없는 폭압독재자라는것은 세상이다아는일이다.
    김일성이 중국항일련군에서 사단장으로 지낸경력이 후에 친중관계에 많은영향을 받았으며 대동아 전쟁말에 러시아에피해있을때의 인연이 후에친소의 인연이되였다.백두산에서 태여낳다고 자신의 출생을신비한 사화처럼 만들어 국민을현혹시킨 김정일도 이당시 러,중,북,삼각국경지역의 자그마한 소도시 하산에서출생하였다.김일성의 중국,러시아의지지세력들은 이미이때에 구축되였으며 그후김일성의 정치사에서 김일성측근세력들이 결집되는 과도적단계라고 해야할것이다.
    그후김정일이 성장하여1970년대 북한정계에 등장하면서 북한정계에서는 보이지않는 권력다툼이 피비린내를 풍기기시작하였다.
    김정일은 강력한권력 지반을 구축하기위하여 하나님의 성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당의유일 사상체계수립의 10대원칙)이라는 강력한실지독재법을 만들었다. 코에걸면코걸이,귀에걸면귀걸이 눈에걸면눈걸이인악법으로 대대적숙청이 시작되였다.
    김정일은 아비김일성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지인들도 눈에거스르면 단호이 처형하였다. 일단김정일의 눈에나면 지난업적이 어떻든,직위가어떻든 여하를 불문하고 처형,추방하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위에는 80년대중반까지 최고의 충성과아첨을하는 눔외는 일제청산되였다.이당시는 김일성도 노화기에 들어김정일의 독기에눌려 지내였다.김정일은 측근청산과함께 평양시에서도 불순한층들을 추려서 대량 추방하는일까지 끝내였다.
    만약비상사태시 지방에서수도로공격하는 반군세력을 수도에남겨진 충성을 맹세한세력에 의해격퇴할수있다는 계산으로부터 행해진거사였다.
    성격이괴벽하고 광적인김정일은 자기심보에 맞지않거나 눈에거슬린다면 그누구도 용서하는일이 없었다.70-80년대 북한정치범관리소에는 간부출신과 조총련계북송동포.평소에 체제를 비판하는 말한마디로 강금된 사람들로 정원이 늘초과되였다.
    죄악으로 얼룩진독재자는 제스스로도 자신의 죄의식에 외국에함부로 나다니지 못하며 어쩌다간다면 보복테러가 두려워 비행기를 타지않고 수십일간을 열차에 시달리는 고생도 감수한다.
    명색이 국가원수라는자가 보복이두려워 수십일간을 여행에소모한다는것부터가 정상국가에서는 이해할수없는일이다.
    끝으로 우리는민족사에 가장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시대에 산불행한사람들이라는것이다 생각하면 가증스럽고 치가떨리는 독재자를 흠모하고 숭배하는 세력이 이남한에서 뻐젖이 활개치며 반국가,반역행위를 내놓고 하면서 아무런 제제도받지아니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힘들게하고있다.
    만약한반도 유사시사태가 발생한다면 어떤사태가 일어날지는 각자의 상상에 맞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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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nghun1971717 2008-04-20 04:27:11
    웃분 목에너무힘주지마.감독님성나면 납북당한다
    이남주사파 북에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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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련 2008-04-20 17:24:22
    김일성이는 개아바이...
    김정숙이는 개간나...
    김정일이는 개새끼..

    감독이나 영화배우나 뭐 다른게있나요?..
    몽땅 개배때기에서 나온것들인데,,
    그애비 그아들 그에미겠죠?,,,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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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이복잡해 2008-04-23 00:25:59

    - 풍인아파트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04-12 02: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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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타기꾼 2008-04-23 20:50:02
    정일이새키는 씹만 밝히지 할줄아는게 뭐가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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