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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나는 결코 평화주의자 아니다"
동지회 742 2005-04-28 09:45:16
"김정일, 나는 결코 평화주의자 아니다"


2002년 3월 13일자 노동신문 2면에는 갑자기 10년 전 얘기가 실렸다.

“1991년 위대한 수령님(김일성 주석)께서는 몇몇 중요 군사일꾼들을 불러 ‘만약 우리가 (미국과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질문하시였다.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때 ‘수령님 제가 대답하겠습니다’라며 일어서신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는 ‘수령님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 공화국이 지는 경우에는 지구가 깨어져 망할 때입니다’라고 말씀드리시였다”

이후 평양 서성구역 연못동 3대혁명전시관 제2관에는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없습니다. 김정일’이라고 쓰여진 대형 휘장이 걸렸다.

2004년 9월 11일 야영훈련이 계속되던 이른 아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은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군사제일주의를 주장합니다. 나는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무모한 칼부림에 끝까지 총대로 맞설 것입니다”라고.(2004.9 천리마 잡지)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일상은 이처럼 군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래서 군인들의 사상 문제만큼은 철저히 관리한다.

정치적 색깔을 띠는 사소한 동향이라도 있으면 군부에서만큼은 용납이 안 된다. 이른바 6군단 사건(군이 외화벌이한 돈을 떼먹은 사건인데 점차 쿠데타 시도처럼 비화됐다)이란 것이 있다. 군단 지휘부가 순식간에 무력화됐다.

사건 관련자들은 48시간도 안 돼 비밀 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쫓겨갔다. 이도 모자라 군단 전체를 교방(건물·시설은 물론 침구류까지 그대로 두고 무기·장구류만 소지한 군인들을 타 군단 병력과 전원 교체)해 버렸다.

반면 사상과 관련 없으면 통 크게 봐주기도 한다. 94년 2군단에서다. 군단정치위원과 정치·선전·조직부장 등이 노동당 집중검열에 걸렸다. 이들은 주둔지역이었던 개성시 한복판에 군단 외화벌이 출장소며 초대소를 만들어 놓고 연일 파티를 벌였다. 여군은 물론 지역의 예쁘다는 여성들이 모두 동원됐다.

김정일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2∼3간의 강등 처벌이나 주고 다시 쓰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일의 지시를 어긴 군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아직도 영창이란 제도를 운영하기도 한다. 의식적인 명령 불복종은 사형이지만 사소하거나 무의식적인 군율 위반은 10일 내지 한 달 정도 영창에 갇힌다. 장성이건 일반 군관이건 예외가 아니다.

장성들의 정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도 실시된다. 93년 12월 1일의 일이다. 갑자기 나이 많은 군인들이 새 학년도 첫 군사훈련이 실시되던 북한군 중대에 나타났다. 북한군 장성들이다.

이들은 사병 복장을 했다. 매년 ‘상하일치’라는 명목으로 50일간 반복되는 장성들의 사병생활이다.(이영국, ‘나는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다’).

그런가 하면 군에 대한 김정일의 애정, 신뢰 또한 각별하다. 특별히 신경쓰고 있으니 딴 맘 먹지 말고 잘하라는 식이다.

조선인민군 창건일인 92년 4월 25일에는 북한의 전체 군인들이 환호했다. 김정일로부터 “혁명의 무기를 잡고 조국보위 초소를 튼튼히 지켜가고 있는 인민군 군인들을 위해서라면 천만금을 들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감동의 말과 함께 전체 인민군이 외제 손목시계를 하나씩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의 현역군인들은 인민무력부 170만명,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및 국가안전보위부 30만명이었다. 합쳐서 200만명(황장엽, 자유북한방송 증언)이나 됐는데 이들에게 시계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에는 오랜 경제난으로 인해 식량배급위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95년 1월 1일에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김정일과 김정일의 처 고영희(2004년 사망. 김정일의 후계를 다툰다는 김정철·김정운의 어머니)가 평양고사포사령부 예하 중대인 다박솔 초소에 이어 강원도의 한 여성중대를 방문했다.

이에 앞서 이 여성중대가 속한 사단에서는 소고기, 돼지고기, 생선 등을 중대 식당에 갖다 놓았다.

김정일은 그러나 식당이 아니라 돌연 병실(내무반)에 들어가 세면도구를 풀어보라고 했다. 치약·비누는 미공급이었고, 칫솔은 몽당치솔이었다. 여군들의 손등은 바닷바람에 터 있었다.

고영희가 이를 보고 한 여군 병사에게 자기가 쓰던 크림(로션)을 줬다. 김정일은 이를 보고 있다가 “한 사람에게만 주지 말고 전체 여성군인들에게 고급 크림을 주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이후 김정일이 찾아가는 여성중대에서는 화장품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됐다.

전국 곳곳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여전하고, 체제 불만 세력까지 나타나는 지금 김정일에게 믿을 집단은 군 이외에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갈수록 군을 자주 방문하고 군대의 물리력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면 그는 군사독재형이라 할 만하다. 이제 주민들도 모두 이렇게 말한다. “지금 조선에서는 군대가 전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식량과 채소 일체도 군인이 다 감시하면서 보초를 서고, 농민들은 농사만 짓고 아무 권한이 없게 되었다. 철도부문에서도 군대에서 파견 나간 사람이 안전원처럼 증명서 검사를 하고 역전에서 꽃제비 단속도 하고 쫓아내기도 한다.”(좋은 벗들 엮음.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 2000년 발간)고.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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