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뉴스

상세
농구광 김정일가족 때문에… 혀를 빼문 대학생들(1)
주성하기자 2009-06-22 21:26:29 원문보기 Korea Republic of 관리자 669 2009-06-22 21:28:29
김정일의 후계자로 책정됐다는 김정운이나 그의 형 정철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너희들, 농구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사실이 맞아?”

정운은 어렸을 때 스위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미국 프로농구 시범경기를 보겠다고 파리까지 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걸 보면 농구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김정일이 농구광이며 마이클 조단 팬이라는 말도 나돈다.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나에게는 농구란 말만 들어도 분노가 솟구치던 떨리던 시절이 있었다.

1996년 김정일이 갑자기 농구를 장려하라는 지시를 하달한 이후였다.

그 이전까지는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내려가면 오늘은 무엇을 할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체육 선생이 옆에 축구공을 끼고 있으면 “오늘 축구하네”하고 좋아했고, 그냥 출석부만 끼고 있으면 “에쿠, 또 철봉이나 평행봉하겠네”하고 인상이 구겨졌고, 초시계를 들고 있으면 “죽도록 달려야 하겠군”하고 절망했다.

그런데 1996년 이후에는 내려만 가면 체육 선생이 농구공을 끼고 있었다. 맨 날 빠지지 않고 농구를 시킨다.

수업 시작 전에는 체육 선생이 “오늘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농구가 알맞은 운동입니다’…”하고 어쩌고저쩌고 한다. 북한에선 수업 시작 전에 김정일의 소위 관련 말씀이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자기 강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저도 모르게 콧방귀가 나갔다.

“아니, 농구는 키가 큰 코배기들이나 하는 것이지, 평균키가 170도 안되는 조선(북한) 사람이 농구가 알맞다는 궤변은 또 뭐냐.”

농구는 정말 운동 강도가 센 운동이다. 90분 수업 시간 동안 적어도 60분은 쉼 없이 달려야 하고, 거기다 지기라도 하면 체벌로 또 달리기다. 체육시간 한번 하고나면 풀 자루가 되고 만다.

1996년은 북한에서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 죽어나갈 때이다. 굶어죽은 시체가 역전에 널려있을 때였다. 그리고 김일성대 기숙사도 무슨 벼 뿌리를 캐서 대용 식량을 한다면서 휴식일이면 학생들이 주변 교외 농장에 나가 논밭을 파내던 때였다.

당연히 기숙사에서 주는 밥 량은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 우리들에겐 언 발에 오줌 누기. 늘 배가 고팠다. 몇 숟가락 들면 밥이 없어졌다.

얼마나 양이 적은가 하면 한번은 휴일에 다른 기숙사 동료들이 다 외출한 뒤에 남은 친구 2명과 기숙사 식당에 가서 동료들의 밥을 모두 비닐봉지에 담아왔던 일이 있다.

기숙사는 식권제인데 외출하면 자기 식권을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주고 나간다. 그 식권 15장을 모아 밥을 타왔으니 이를테면 15인 분인 셈이다.

그 15인 분을 둘이 다 먹고 “배가 부르니 졸리네. 졸리면 혁명 안한다고 늘 배고프게 주는가보네”하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도 난다. 혼자서 7~8인 분을 먹어치울 정도로 밥 양이 적었다. 또 우린 그만큼 굶주려 있었고 돌도 삭힐 나이었다.

그때 기숙사생인 우리들은 “먹고 나면 배가 고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배는 고프다가 일정 시간 지나면 감각도 없어지는데 밥이 조금 들어가면 그때야 배 고픈게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대학은 남녀공학이었는데 나도 여학생과 앉은 적이 많다. 북한에선 한 책상에 두 명이 앉는다. 그 여학생은 평양에 사는 간부집 자식이니 배고픈 걱정이 당연히 없다. 가방 속 도시락에도 이밥에 기름진 반찬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다.

대학생이라고 다 같은 대학생이 아니다. 이들은 다시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평양에서 집에서 다니는 학생들을 ‘자가생’이라고 부르고 기숙사에서 사는 학생들은 ‘기숙사생’, 그리고 평양 친척집에서 다니는 지방학생들을... ‘?’ 뭐였지?

(이런 갑자기 생각나지 않네요. 강산이 변할 시간이니 기억이 가물가물...블로그에 찾아주시는 고향 분들 보충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넘어갑니다.)

또 다른 세가지 분류도 있기도 하다. 제대군인(일명 제쌈이라고도 했다), 현직(사회에서 일하다 온 학생들), 직통생(일명 통통생.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대학에 온 학생)으로 구분짓기도 했다.

기숙사생인 내 배는 11시만 되면 쪼르륵 소리가 났다. 그때 옆자리의 여학생에게 창피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런데 쪼르륵 소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왜 그렇게도 계속 나던지...배를 슬슬 쓰다듬으면 더 나는 것 같았다. 점심은 1시 반에야 먹는데 두 시간 반을 어떻게 기다리나...

3번째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학에선 하루에 1시간30분짜리 3강의를 한다)

“점심에 어느 식당에 가서 사먹나. 그런데 지금 집에서 갖고 온 돈은 다 떨어졌네...뭘 저당 맡길까. 누구에게 돈이 있을까. 저번에 내가 아무개 사주었으니 오늘은 걔 옆에 붙어야 겠다.”

김일성대 운동장 사진은 없고 있는 김일성대 사진은 이것 뿐이다. 이것이 출퇴근하는 길인데 오른쪽 빨간 구호판 뒷쪽의 건물이 기숙사 건물이다. 저런 기숙사 건물이 7개 정도 있었다. 지금은 새 기숙사 건물이 건설됐지만 저 건물들도 그대로 쓴다. 기숙사에서 용남산에 들려 김일성동상에 인사하고 교실에 오면 15~20분 걸린다. 빨간 구호판 뒷쪽의 푸른 나무 바로 앞에 지하철 삼흥역이 있고, 역 맞은 편에 손님의 90% 이상이 김일성대 학생들인 룡흥식당이 있다. 국수집인데 국수 맛은 서울 을지면옥과 비슷하다.

그 시간대가 다가오면 온통 이런 생각뿐이다. 지금은 블로그에서 고상한 척 폼을 잡고 있는 나이지만, 그땐 배가 고파 늘 먹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속물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인간의 본연의 바탕이라고 본다.

대학 때 어느 책에선가 맑스(북한에선 마르크스를 이렇게 쓴다)의 추도식에서 한 엥겔스의 조사를 읽고(이것도 북에선 금지도서다) 충격을 받았었다. 하도 강열하게 머리 속에 들어와서 지금도 대략적인 내용이 기억된다.

“맑스는 수많은 사상의 잡초 속에서 하나의 진리, 즉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이 충족될 때에만 정치, 문화, 예술, 언론 등에 종사할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해냈다.”

딱 맞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맑스주의를 혁명의 이론으로 알고 있던 나는 그가 인간 본연의 본성, 즉 먹는 것을 가장 먼저 앞세웠다는 점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럼 도대체 우리 사회는 무엇이란 말인가.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게 만드는 이 망할 김일성주의는 맑스주의의 변종도 아닌 요물이 아닌가. 주체사상이 인간 중심의 사상이라고 하더니 맑스주의의 발바닥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 살생의 사상이네...하면서 분노가 치밀었었다.

그때는 하도 배가 고파서 분노의 강도도 더욱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경험상보면 배가 부르면 사람이 유해지고 부드러워진다. 배가 고파야 혁명이라는 것도 할 수 있다고 본다. 배고픈 좌익이 악착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에 간 뒤에 내 키는 단 0.1mm도 자라지 않았다. 발육이 십대 중반을 조금 넘기고 그만 중지된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자랐으면 지금보다 키가 아무리 적어도 5~6cm는 더 컸으리라...그래도 난 딴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만큼이라도 자란 것이 다행이다.

※여기서 잠깐, 농구로 시작된 글이 왜 먹는 문제를 이리도 길게 늘여놓았지 의문을 품는 분들...농구 쓰면 어떻고, 먹는 것을 쓰면 또 어떻긴 하지만은, 이렇게 배고픈 시절을 회상한 것도 다 농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니 양해 부탁합니다.

이렇게 배고프던 우리에게 떨어진, 농구를 장려하라는 김정일의 지시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다음 글에 계속)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주성하 기자

원문 보기

좋아하는 회원 : 0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6.15의 진실을 북한에서 보다.
다음글
北, “옥수수 벌레, 적들의 ‘모략’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