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추석 “조상님, ‘속도전’ 제사 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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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 왔네요. 추석이 다가 오면 저에게 “추석엔 뭐해?”하는 묻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관심에는 고맙지만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처지에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난처합니다. 그 분에게는 그냥 의미 없이 지나가는 인사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아픈 질문이거든요. 개중에는 “북한에선 추석을 어떻게 쇠지?”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도 북한에서 추석을 어떻게 보내는지 잘 모릅니다. 각 지방별 풍습을 제가 다 알 수가 없거든요. 차례를 지내는 북한 주민. 무덤이 으리으리한 것을 보니 부친이 큰 유공자였던가 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제가 남한의 추석문화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한에 와서 산지 7년 됐지만 추석에 어떻게 보내는지 직접 본 일이 없으니까요. 남북한을 비교해서 대답하면 잘 대답할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네요. 오늘은 제가 체험한 제한된 경험에 의존해 간단히 추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잘 알진 못한다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남한에선 그렇게 하지 않는데”하고 꾸중하진 마십시오. 남한에선 추석에 3일 동안 놀지만 북한에선 단 하루 동안 쉽니다. 남한에서 3일 쉬는 이유는 고향에 내려가서 일가친척들과 모여 추석을 보내라는 의미가 있겠지만, 북한에선 하루 동안 놀다보니 어디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북한에선 가까운 묘에만 갈 수 있지 멀리 갈 수 없습니다. 멀리 가려면 휴가를 내고 다녀와야 겠죠. 그런데 교통이 워낙 불편하니 멀리 가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일가친척이 모여서 추석을 보내는 일도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냥 가족 단위로 묘가 있는 산을 찾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집안에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묘를 멀리 쓰지 않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산소에 가기 전에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올라갑니다. 없는 살림에 오랫동안 ‘요건 추석에 쓸 것’하면서 좋은 재료를 장만해 둡니다. 그리고 추석 전날 밤부터 음식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북한도 그해에 난 과일과 곡식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음식을 차리는 순서에서도 어동육서, 두동미서 등 차례상을 차리는 원칙이 북한에도 존재하긴 하지만 이런 순서를 아는 사람은 이제는 거의 사라져 갑니다. 방송이나 신문 등에서 미신이라면서 이런 순서를 알려주지도 않기 때문에 구전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종가 문화가 없다는 것에 있지 않나 봅니다. 남한에는 종가집이 있어서 추석에 모이면 여자들이 음식을 하고 산소에는 아이들과 여성은 가지 못한다 등의 엄격한 ‘법도’를 따지지만 북한에선 종가집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파평 윤씨 차례 모습. 북한에선 이런 모습은 영화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또 선산이라는 개념도 거의 없죠. 종중의 땅이 있어야 선산도 있겠는데, 북한 땅은 몽땅 국가 땅이니 여기는 우리만 묻을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먼저 가서 묻는 것이 임자죠. 남한에선 조상을 경견하게 뵈려 간다는 의미에서 캐주얼을 입지 않고 대개 양복 정장을 하고 가서 성묘하지만 북한에선 딱히 어떤 옷을 입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옷차림을 깨끗하게 하고 가려고 신경을 쓰긴 합니다. 또 다른 차이는 남한에선 성묘를 일주일 전 쯤 미리 가서 합니다. 당일에 가서 성묘를 하면 아주 조상에게 정성이 부족한, 이를테면 두 번 찾아오기 싫어서 불충을 저지르는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북한은 당일에 올라가서 성묘를 한 뒤 차례를 지냅니다. 차례는 산에 올라가서 유일하게 쇱니다. 그런데 남한에선 아침 일찍 집에서 기본 제사를 지내고 산소에서는 약식 제사를 합니다. 사실 북한에선 절을 하는데 이건 TV에 방영되는거라 묵례를 하는가 봅니다. 묵례 문화는 원래 없었는데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부터 점차 도입되고 있습니다. 절하는 방법도 차이가 많습니다. 물어보니 남한은 두 번 반씩(큰절 두 번에 반절 한번) 모두 8차례나 한다고 하네요. 그러니 큰절 반절 모두 합쳐 24번 하는 셈입니다. 반면 북한에선 한번에 세 번 씩 세 번, 그러니깐 절을 모두 9번 하면 끝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북한의 추석 문화는 하루 동안 다 쇨 수 있도록 간소화된 것이 특징이네요. 아침에 10시 쯤에 산에 올라가 성묘를 하고 차례상도 산에 올라가 한번만 펼치고 밥을 먹고 12시 전에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사천리식 방식을 북한 식으로 표현하면 '속도전'식 제사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에선 허례허식을 타파한다면서 계속 ‘투쟁’해 와서 그렇습니다. 가까운 산에는 여성들이 이렇게 머리에 음식을 담은 대야를 이고 올라갑니다. 반면 남한은 아직 전통 격식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찾아가 벌초를 하고 다시 당일 새벽엔 집에서 제를 지내고, 산에 올라가 또 절을 하고 합니다. 절도 북한보다 남한이 엄청 많이 하구요. 남한에선 추석에 고향에 한번 갔다 오느라 전쟁을 치르죠. 차가 꽉 막혀도 고향에 가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저는 겪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북한에도 추석 당일 대도시 주변에서 살짝 교통체증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추석 당일에는 모두 12시 전에 올라가려 하는데 기업소 차를 쓸 수 있는 높은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고, 대다수는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이 자전거 행렬이 늘어서는 시간이 9시~10시 경인데 좀 부지런한 사람이 아침 일찍 산소에 갔다 내려오면서 이 행렬과 마주치면 많이 피곤합니다. 그래서 남이 다 올라갈 때 그 흐름에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면 편안합니다. 남들은 추석에 외롭겠다고 저를 동정하지만 저는 그날 뉴스를 보면서 저기 차에 타고 있는 분들을 동정합니다.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는 길에 반대 차로는 뻥 뚫려 있어 부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죠. 그 비슷한 경우인데 북한 도로는 상행선, 하행선 이렇게 따로 구분된 곳이 드물어서 내려오는 길에 올라가는 행렬과 마주치면 자기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리 저리 피해 내려와야 하거든요. 그러면 북한에선 자전거를 타고 모두 어디로 향할 까요. 남한에는 시립묘지, 추모공원 뭐 이런 식으로 매장구역이 지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엔 그렇지 않습니다. 농촌에선 마음대로 묻는 것은 당연하고 대도시 주변에는 알아서 가까운 곳에 묻습니다. 물론 그러다보니 대도시 야산들에는 거대한 공동묘지 구역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런데 대도시 주변 북한의 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거든요. 거기에 묘지들만 널려있으니 참 보기가 안 좋습니다. 김정일이 이것이 보기 싫다고 2002년에 묘지 높이를 절대 20㎝ 높이지 말고 비석도 모두 가로로 눕히라고 지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묘지를 다 깎느라 고생했죠. 대도시 주변에 매장을 하지 말라는 지시도 하달됐지만 별로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멀리 묻으면 추석날마다 다녀오는 것이 너무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뇌물을 주거나 몰래 다 가까운 곳에 산소를 씁니다.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 남한에서 묘지는 참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그래서 화장을 장려하죠. 북한은 인구밀도가 남한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묘지들이 계속 늘어서는 것이 반갑진 않죠. 그래서 김일성 때부터 화장을 도입하려 했는데 의외로 이 지시는 집행되지 않습니다. 김일성이 1970년대 고향에 가서 노인들에게 화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노인들이 “이 땅에서 모든 것이 다 수령님 지시대로 돼도 화장은 절대 안됩니다”고 강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김일성은 화장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독재가 강화된 상황에선 밀어붙이면 화장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화장에 필요한 연료가 없어 화장을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또 화장을 했다고 해도 납골당이 없어서 뼈 가루를 담은 단지를 집에 보관하는데, 집이 습기 많고 하니 거기서 벌레가 나온다는 소문도 돕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북한에선 숨이 넘어가기 전에 “날 화장하진 말라”고 유언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면 북한의 추석 문화는 다시 옛 풍습대로 돌아가겠죠. 생명이 유한한 통치자가 자기 뜻대로 민족의 유구한 전통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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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4-22 14: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