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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출신 장관도 나와야’ 조명진 EU안보전문역 인터뷰
뉴시스 2009-11-18 09:01:00 Korea, Republic o 관리자 1087 2009-11-24 01:02:36
노창현 특파원 = “독일통일전 서독에선 동독출신 외무장관이 있었습니다. 통일은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각종 매체를 통해 다양한 특집과 분석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유럽연합 안보전문역(EU) 조명진 박사가 17일(현지시간) “독일 통일은 예상치 못한게 아니라 준비된 것이었다”고 분석해 관심이 일고 있다.

조 박사는 “기민당의 콜 총리는 집권 후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콜 총리는 동독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재임중 동서독 정상회담을 열었고 인적 물적 교류를 확대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동서균형과 화해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겐셔 외무장관은 동독출신으로 1952년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이었다. 겐셔는 동독 외무상을 만날 때마다 허심탄회한 대화를 했고 74년부터 92년까지 무려 18년간 장관직을 역임하면서 정책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반면 한국은 70년대초 박정희 정권이 정권유지차원에서 한 차례 화해 제스처를 했지만 그 이후 단절됐다. 남북정상회담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 2회에 그쳤을뿐더러 대북접촉 실무진도 정권에 따라 바뀌었고 같은 정권내에서도 단명했다”고 지적했다.

조 박사는 “북한의 경우 개방적이었던 동독사회와 크게 다르지만 남북간 정상간의 빈번한 접촉을 통한 지속적인 신뢰회복과 정권에 상관없이 실무진의 일관된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베를린 장벽 붕괴가 급작스러운 사건으로 보고 있지만 ‘예상됐고 준비된 사건’이었다”며 “그럼에도 44년간 분단된 독일의 통합과정은 쉽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분단 65년을 맞는 한반도의 통일 후 통합과정은 훨씬 더 많은 준비와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인 최초로 유럽연합(EU) 안보전문역으로 활동하는 조명진 박사는 스웨덴 국방연구소와 본 국제군축연구원, 독일국제안보연구원 등에서 방위산업 분석가와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항공방산컨설팅회사인 '아디아 컨설턴시(ADIA Consultancy GmbH)'를 설립해 유럽과 아시아 방위산업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 옛 동베를린 지역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는 조 박사와 베를린장벽 붕괴의 역사적 배경과 통일독일이 남북관계에 시사하는 바를 들어보았다.

- 베를린 장벽 붕괴 배경를 '준비된 사건'이라고 보는 이유는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냉전의 관에 박은 마지막 못(the last nail in Cold War’s coffin)’이라고 표현했다. 1985년 소련 지도자 자리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아다시피 소련의 개방 개혁과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하고, 중부유럽에서 소련군을 철군하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가진 4차례 정상회담은 동서대결의 데탕트를 가져 온 구체적인 진전이었고, 동서독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을 주었다. 레이건은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에서, ‘고르바초프 씨, 당신이 평화를 찾고, 소련의 번영을 추구한다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 주시오(tear down this wall)‘라고 호소했다. 이 연설은 TV로 동독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고, 베를린 장벽 붕괴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됐다. 고르바초프 또한 이듬해 12월 7일 UN연설에서 뉴욕의 국제연합 연설에서 무기 감축과 동구에서 철군의 구체적인 이행을 설명하면서 “나는 우리 국민들과 세계에 책임감을 느낀다. 새해(1989)에는 우리 모두가 많은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는 말로 세계의 일대 변혁이 일어날 것을 예고했다.”

- 동독에서는 어떻게 통일의 불씨가 커지기 시작했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또 다른 이유는 동독 민초들의 항거에 의한 것이었다.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평화기도회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은 정치 집회로 발전한 이 기도회를 차단하기 위해 니콜라이 교회를 봉쇄했고, 참가자를 체포하도록 했지만 되레 커다란 반발로 이어졌다. 그러나 니콜라이 교회의 푸어러 목사는 시위 참여자들의 양 손에 촛불을 들게 하고 끝까지 비폭력 시위를 하도록 했다. 만일 유혈시위가 벌어졌다면 독일 통일은 훨씬 더 뒤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 베를린 장벽붕괴가 남북관계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화해를 위해 당사국 지도자들간의 만남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외적 여건으로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대통령의 관계가 그랬고, 대내적으로 서독과 동독의 지도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 시작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간의 만남이었다. 브란트는 1957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분단의 비극을 누구보다 깊게 경험한 사람이었다. 또한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콜 총리는 전임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동독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재임중 동·서독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 당시 겐셔 서독 외무장관의 역할이 컸다고 하는데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실무주역인 겐셔 장관은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통일독일의 나토 잔류, '2+4' 회담 등을 통해 동서간 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상과 겐셔의 오랜 친분이 독일 통일 전후 난관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1952년 동독에서 탈출한 겐셔는 공산체제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유에 대한 갈급함을 잘 알고 있었다. 카운터파트인 동독 외무상을 만날 때 더 허심탄회한 대화가 가능했다. 또한 외무장관직을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역임했기 때문에 정책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지닐 수 있었다.”

- 독일이 통일된 뒤에 베를린에서 살면서 피부로 경험한 통일의 후유증이 있나?

“독일통일은 1991년에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18년이 지났지만, 통일독일사회의 통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사회주의체제하에서 교육받고 살아온 사람들은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독일은 국민통합의 일환으로 동독교육자들을 일년정도 재교육과정을 거쳐 구 서독지역으로 발령하는 과감한 인사정책을 폈다. 그러나 규율을 강조하는 엄격한 동독출신 교사들은 구 서독학생과 학부모와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북통일 후에 과연 평양에서 보통학교 선생을 했던 북한교사를 서울시의 초등학교 교사로 받아줄 수 있을까? 독일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독일 통일을 보는 부정적 시각중 하나가 통일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것인데

“독일통일의 가장 큰 후유증은 통일부담금이었다. 흡수 통합의 대가로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로 1:1로 바꿔준게 결정적 실책이다. 독일경제가 통일 후에 휘청거리게 만든 주된 원인이 됐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화폐교환의 정보를 미리 입수한 동독지도부가 동독조폐공사의 윤전기가 망가질 정도로 밤낮으로 마르크화를 찍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무모한 거액의 통일 비용이 지출되었다고 비판을 받는다. 물론 한반도 통일후 독일과 같은 화폐교환은 상상하기 힘들다.”

- 20년이 지난 지금 동서독 사람들은 통일독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독일 일간지 베를린 자이퉁의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구 동독국민의 49%가 동독시절이 좋았다고 답했다. 서독 응답자의 25%와 동독 응답자의 12%가 베를린 장벽을 다시 세우자는 말도 했다. 외형적인 통일은 이루어졌지만, 내면적인 통일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44년간 분단된 독일의 통합 과정이 이러한데, 분단 65년이 다 되가는 한반도의 통일 후 통합 과정은 훨씬 더 긴 세월이 걸릴 것이다.”

- 독일 통일을 통해 한국이 배울 점은 무엇인가

“국가간 대화 상대와 대화 채널의 일관성은 신뢰 회복과 신뢰 구축 면에서 중요한 요소다. 독일처럼, 통일의 여건은 위로부터의 변화 추진과 민초들의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갈망이 합치될 때 무르익는 데, 북한의 인민들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정상간의 빈번한 접촉을 통한 지속적인 신뢰회복과 정권에 상관없는 실무진의 일관된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을 공고히 할 것이다.”

robi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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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위 2009-11-24 22:11:40
    독일통일과의 근본적 차이인 동족상잔의 전쟁 문제는 왜 전혀 분석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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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라드1 2009-11-24 23:51:22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또 다른 이유는 동독 민초들의 항거에 의한 것이었다. << "여기서 이미 요덕 정치범 수용소"
    화해를 위해 당사국 지도자들간의 만남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러한 순수한 DJ의 마음을 자신의 체제유지를 위해 이용한 장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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