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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탈북자라는 사실 알면 동네 개 취급
아시아투데이 2010-06-17 07:30:00 원문보기 Korea, Republic o 관리자 814 2010-06-24 15:25:29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⑮

중국 농촌총각인 신랑을 처음 만났을 때 일이다.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만 그 때는 서로가 고역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서로 벙어리처럼 굴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둘 다 미칠 지경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신랑이 오죽 답답했으면 담배를 시작했고, 나도 답답하기 이를데 없어 무작정 맥주만 마셔댔다.

그러면서도 신랑은 3개월 동안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 아마 배려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언제든 도망칠 궁리만 했다.

같이 사는 동안 3번은 탈출을 시도했다.

결국 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중국말 때문이다.

말이 안 통하니 가는 길을 물어볼 수도 없고 도무지 도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는 수 없이 "일단 살아보자" 하고는 공안에게 들킬까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 덜컥 임신을 하게 돼 1년6개월쯤 됐을 때 애를 낳았다.

나도 그랬지만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고생을 참 많이 한다.

어떨 때는 동네 개 취급하듯 대하기 일쑤다.

그 주된 이유는 말이 안 되는 게 문제다.

어쩌다 시장을 가도 말이 안 통하니 고충이 따라다녔다.

장사꾼이 행색을 보고는 탈북 했다는 걸 알고 물건 값을 더 받아도 아무 말도 못했다.

괜히 따지면 공안한테 불려가고 결국 탈북 했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늘 조심했다.

억울한 측면이 있어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아야 했다.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일이다.

어디가 아프다는 증상을 말해야 하는 데 그게 안 되니 손짓 발짓으로 하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고 비싼 약을 처방해도 그냥 가지고 와야 했다.

더 웃긴 것은 무슨 약인지도 모르면서 몇 번 먹다 안 맞으면 버리는 데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짓을 반복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 있던 탈북자 얘기다.

그 탈북자가 시장에 가서 해바라기씨를 사는 데 무게를 잘못 재고는 돈을 달라고 해 장사꾼과 싸움이 벌어졌다.

한참 말싸움을 하다 장사꾼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공안에 전화해 결국 붙잡혀갔다.

후에 그 탈북자는 북송됐다는 소식만 남기고 없어졌다.

같은 동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언제든 공안에 들킬까 마음을 조아렸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중국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살았다.

요즘도 그런 탈북자가 많아졌으니 더 가관일 것은 뻔한 일이다.

내가 애를 낳으러 갔을 때는 그나마 좀 나았다.

신랑이 옆에 붙어 있고, 말이 조금 늘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또 다른 설움은 혼인신고와 애를 호적에 올리는 문제였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신랑하고 살기는 했지만 혼인신고는 못했다.

탈북자는 신고를 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내가 낳은 딸애도 엄마가 북한사람이니까 호적에 올릴 수 없어 지금도 그대로다.

애가 어느 정도 크면 엄마 없는 애는 신랑 형제 중에 적당한 사람을 골라 거기다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탈북자는 북한을 탈출하는 것도 어렵고 중국에서 마음 조리며 사는 것도 어렵다.

북한에 태어난 죄가 그래서 더 억울하다.

양승진 기자 ysyang@as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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