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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탈북한 귀순용사다"
시민일보 2010-08-22 09:53:57 원문보기 Korea, Republic o 관리자 827 2010-08-23 13:17:44
해마다 8월이 오면 북녘땅에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은 고향과 혈육을 남겨둔 채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 찾아 남하하던 그때를 생각한다.

36년전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아 목숨걸고 북한을 탈출하여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대한민국으로 왔다.

사선을 넘다가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는가 북한의 폭정과 싸우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선택된 사람이다. 때문에 신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다.

자유찾아 귀순하던 1974년 당시 최근 찬안함 사건이 보여주듯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어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다.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 남침용 땅굴사건, 남파간첩사건등 북한의 계속되는 군사적 도발로 정부와 국민이 우왕좌왕하고 있을떄 북한의 고급군사 정보를 댜수 제공하여 국가안보에 크게 기여한바도 있다.

또한 지난30년 동안 약 5천여회에 걸쳐 시민, 학생등 150만명에게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진행하여 국가안보와 국민화합에 한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댜해왔다.

1998년에는 안보교육장으로 향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지체쟁애인이 되면서까지 안보교육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헌신하면서 국가안보에 기여하였다. 40살이던 귀순당시 한강하류를 7시간동안 거친 바닷물과의 죽기를 각오로 한 사투끝에 자유의 품에 안착한 후 남한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김일성 부자에게만 절대적인 충성을 다했던 삶이 개성을 존중히 하는 남한사회의 가치관과 뒤엉켜 혼란을 야기해 갈등이 심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시련과 좌절이 있었고 문제는 이것을 극복하는 용기와 인내력이 필요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좌절하지 말고 슬기롭게 극복해야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남쪽을 향해던 그떄의 그결단으로 새로운 도약을 위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했다. 요즘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 일부 탈북자들의 사회적응 문제는 심각하다. 약 2만여명의 탈북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남한사회의 적응과 정착이다.

적응을 못한 일부 탈북자들은 법제도, 풍습등을 몰라 자신도 모르게 벌이는 범법, 고민과 소외감을 달래기 위해 술, 도박등을 일삼고 있으며 거기다 탈북자 약 60%가 북측의 테러위험을 느낀다는 통계까지 나왔다.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은 남한사람으로 사회화에 성공해야 한다. 탈북자들의 사회적응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나 무엇보다 자신부터 부단히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나는 남한사회의 적응을 위해 안보교육에도 지역봉사 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1990년 7월 안산시 단원구 와동 일대에 수해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하였을때 주민 40여명을 대피시켜 인명과 재산보호에 앞장섰으며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수해떄는 부인과 함께 수해복구에 참여하는등 경로당 위문, 낟도주민 생활용발전기 수리, 선착장 보수자금 확보, 낙도어린이 서울초청등 월평균 소득 50여만원의 강사료로 가정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불우이웃과 함께 살아왔다.

사선 넘어 30여년동안 국민안보 교육을 진행하여 1998년 경기도가 시행하는 경기문화상 시상에서 사회이념 교육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 숨은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 목련장등을 수상했다.

1974년 8월까지 인민군 중대장(대위)으로 근무하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월남 귀순하여 지금까지 사심을 버리고 오직 국민안보의식 고취에 최선을 다해온 것처럼 남은여생도 변함없는 길을 걸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바이다.

통일안보강사 김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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