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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제비' 탈북청년 로스쿨생 된다
조선일보 2010-12-23 03:01:00 원문보기 관리자 1529 2010-12-23 03:12:27

연세대 법대 이영수씨… 97년 탈북, 2002년 한국에
"학비 마련 쉽지 않지만 北인권 전문변호사가 꿈"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법학관 1층에서 법대 4학년 이영수(27)씨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합격자 명단이 적힌 벽보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이씨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 합격 소식을 전했다. 이씨 형은 "잘했다", "잘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휴대전화를 든 손도 떨렸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탈북자 이영수씨가 살아온 과정과 향후 계획을 말하고 있다. 이씨는 최근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 합격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198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이씨는 6세 때인 1989년 아버지를 잃었다. 그 뒤 어머니·형과 농사를 짓고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이씨는 90년대 중반에 닥친 식량난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내내 생계를 위해 어머니와 형을 도와야 했다"며 "동생하고는 옥수수빵을 만들어 팔러 다니느라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고 말했다. 배고픔에 기운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식량난이 절정이었던 1996년 중학교 2학년이던 이씨는 식량을 구하러 함흥에서 황해도 사리원으로 무작정 떠났다. 그러나 13세 소년은 불량배들에게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겼다. 그는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꽃제비'들 틈에 끼어 거지 생활을 했다. 잘 곳이 없어 기차역 대합실이나 길가에서 잠을 잤다. 며칠씩 굶다 쓰러지기를 거듭하다 한 달 만에 집에 돌아갔다.
 
1997년 6월 이씨는 식량을 구하려고 외삼촌과 두만강을 건넜다. 외삼촌은 6월 장마로 불은 강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홀로 중국에 건너간 이씨는 공사장 인부 등으로 전전했다. 이씨는 "배움에 대한 갈증이 컸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2002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어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씨는 "중국에서도 일하며 잠시 잠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남한에 와서야 제대로 공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2005년 연세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생활비를 벌려고 대학 도서관 보조, 식당 주방일 같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변호사가 꿈인 이씨는 경북대 로스쿨에 도전해 합격 통보를 받았다.
문제는 학비다. 이씨는 지금 형편으론 로스쿨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도 그는 "공부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며 "북한에서도 맨손으로 나왔듯이 내 꿈을 향해 나아가면 분명히 길이 생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씨는 북한인권 전문 변호사를 꿈꾸고 있다. 그는 "법률 전문가로 제3국에 있는 탈북자의 난민 지위 등에 대해 세계 각국의 관심을 호소하고,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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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죽13 ip1 2010-12-23 21:49:23
    너무 너무 축하합니다. 저도 탈북자의 한사람으로 정말 짐시으로 축하드립니다. 꼭 부모님들과 많은 분들의 기대와 우리가 힘들게 죽을 각오를 하면서 이곳으로 왔을때의 그의지로 꼭 우리탈북자들을 위한 참 법관이 되길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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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실 ip2 2011-02-17 00:08:28
    신문에서 우연히 보게 장학급지원 기사를 보게 되었어요
    축하드려요
    저도 지금 여고 생활을 하고 있는 탈북청소년이구요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열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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