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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戰死장교' 52년만에 돌아왔네
동지회 709 2005-09-02 10:07:49
국립묘지 '戰死장교' 52년만에 돌아왔네


“대한민국 장교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조국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노병(老兵)’의 소원인가. 6·25 전쟁 중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억류됐다가 52년 만에 극비리에 귀환한 장선생(78)씨의 말이다.

그는 일찌감치 전사자로 처리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 51명 중 가장 계급이 높다. 1994년 귀환한 조창호씨는 소위였다.

장씨는 지난 27일 다른 국군포로 3명과 함께 고국의 품에 안겼다.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장씨와 3명의 국군포로들의 귀환은 아무런 환영행사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이뤄졌다.

가족에게도 이틀이 지난 29일에야 이 소식이 알려졌다. 현재 가족을 제외한 일체의 외부 접촉은 차단돼 있다.

“형님이 말도 제대로 못하고 굵은 눈물만 흘리고 계십니다.”

30일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형인 장씨를 상봉한 선광(72)씨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현재 형님은 혼자 힘으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해요.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대·소변도 간호사의 도움 없인 볼 수 없답니다.”

선광씨는 “반갑고도 슬프지요. 장독 위에 정한수 떠놓고 매일 치성을 드렸던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이라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병자가 되어 돌아온 장씨의 인생은 기구하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광주포병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휴전을 12일 앞둔 1953년 7월 15일 중부전선의 심장부 중 하나인 ‘김화(金化)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김화는 철원과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중 하나로 피아(彼我) 간 쟁탈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그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오른쪽 다리 정강이에 관통상을 입었다.

장교로 잡혀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계급장과 명찰을 뜯어내고 하사 출신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머리를 풀고 땅을 치며 “조금만 더 일찍 휴전을 맺었어도 아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늘을 원망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그는 평남 강동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서너 차례 수술을 받고 함북의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져 1976년 50세가 될 때까지 탄광 굴착기계 수리공으로 일했다.

이후엔 함북의 고무산노동자구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60세 때인 1986년 퇴직했다. 31세 때 결혼, 5남 1녀를 뒀다.

그는 5년 전 찾아온 중풍으로 반신이 마비됐고, 영양실조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의 큰아들은 2002년 아버지를 등에 업고 사선(死線)을 넘었다.

“아버지라도 남에 가서 호의호식하시라”며 두만강을 건너 그를 중국 옌지(延吉)에 내려주고 되돌아갔다.

그러나 브로커가 한국으로 가는데 수천만원의 비용을 요구해 결국 귀환에 실패하고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그는 지난 6월 14일 다시 두만강을 건너 옌지에 도착했다.

피랍탈북인권연대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보내 구명을 요청한 그는 7월 7일 선양(瀋陽) 주재 한국영사관에 도착했다.

정부는 그와 함께 귀환한 다른 3명의 국군포로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이들은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고 다시 안가(安家)로 옮겨져 조사를 받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장씨는 북에 남겨둔 아내와 자식들 얘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히는 것으로 전해졌다. /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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