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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난 인생 - 김순희
동지회 14 5170 2004-11-18 00:15:34
벌써 겨울의 찬 기운이 사라지고 따뜻한 봄 향기 풍기는 5월이 왔다. 파릇파릇 새싹은 따뜻한 봄 햇살을 머금고 기지개를 펴며 경쟁이나 하듯 세상 밖으로 힘차게 솟구친다. 모든 이들의 마음을 새로운 삶의 희열로 불타게 하는 봄..... 그래서 인가! 서울에서 맞는 봄은 언제 봐도 아름답고 활기에 차있다. 5월은 나 자신을 찾고 자유를 알게 한 행복과 행운이 교차한 계절, 자유 대한민국 품에 안겨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난 뜻 깊은 달이기도 하다.

이제는 남한에 온 지도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처음 남한에 도착했을 때의 나는 차라리 바보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너무도 여린 소녀였다. 북한에서는 국가에서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 지어 주기 때문에 주민들은 잘되던 못되던 국가의 지시에 운명을 맡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순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의사결정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지 처음 남한에서의 생활은 넓은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고 모든 일들이 두렵기만 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서 새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나로서는 스스로 앞날을 개척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겨웠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리게 될 자유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인생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생각 끝에 북한에서 하던 간호학 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하고 모 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이후 첫 수업에 들어갔다. 첫번째 강의를 무사히 마치고 두번째 강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함께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학생들이 들어왔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강의 과목이 간호학에서 약리학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강의 시간에 화장실도 갈 수 없는 북한에서의 습관 때문에 나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 강의를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같은 과 학생들을 아무리 찾아 헤매도 찾을 수가 없어 학과장님을 찾아가 그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학과장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참 웃다가는 "여기서는 강의 시간표에 따라 강의실을 옮겨 다니면서 수업을 듣는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한 강의실에서 계속해서 수업을 받는 북한의 대학과는 너무나도 달라 순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대학생활에 적응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남한에서의 대학 첫 수업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어지는 대학생활은 예상했던 대로 예사롭지가 않았다. 한번은 교수님이 강의를 하러 들어오셨는데 교탁 앞에 서시기도 전에 한 학생이 불쑥 일어나 "교수님, 날씨도 따뜻한데 밖에서 수업하면 어떻겠습니까? " 하고 말했다. 나 보다도 한참 어린 학생이 당당하게 교수님께 말씀드리는 태도에 무척 놀랐다.

북한에서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이와 같은 말이 오가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교수님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밖에 나가라"면서 야외수업을 허락하셨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는 교수님과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딱딱한 울타리가 아닌 자연스러운 생활을 통해 실질적인 교육을 하고 어린 학생들도 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의견을 존중받을 수 있는 교육체계를 가진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후에도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은 많았지만 힘든 가운데에서도 차츰차츰 남한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남한생활 2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때 나는 서울 휘경동에 있는 모 병원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환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도 차이가 많다는 것과 남한의 병원은 의료인 중심이 아니라 환자 중심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의료인들의 행동은 항상 겸손해야 하고 환자 위주로 간호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웠고 긴장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과 병동에 60살정도 되는 목사님 한 분이 입원하셨다. 그 분은 인상도 좋으시고 인자하신 분이셨다. 함께 이야기를 하던 도중 "자식이 몇 분이나 되세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분의 환하던 인상이 갑자기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셨다. 나는 아파서 그러시겠지 생각하고 그냥 무심코 지나쳤다.

다음날 그 분은 남들이 들을까봐 내게 조용히 "어른들에게는 자식이 아니라 자제분이나 자져분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했다. 자제분이나 자녀분이라는 말은 북한에서는 고위층 사람들에게 쓰는 특별한 단어인지라 그 분에게는 자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던 것이다. 아무튼 내 말이 잘못 쓰여진 것을 알고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때처럼 남북이 갈라져 있다는 현실에 대해 뼈저린 아픔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북한에서 그래도 부모님들의 교육을 잘 받고 인사성이 밝다고 칭찬을 받으며 살아왔건만 남북한의 분단으로 인한 언어적 이질감 대문에 오해를 받았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남한 말을 배웠다. 그 덕택으로 지금은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지난 3년간의 세월을 돌이켜 볼 때 힘든 일도 많이 겪었지만 이제는 새롭게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감히 성공했다고는 말 할 수 없으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진정한 자유를 찾은 대한민국 국민 중의 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압박 속에 살던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나를 보면서 당당하고 확실한 자기 주장을 가지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대한민국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나 하나만이 아닌 저 북한에 있는 모든 주민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통일의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시일 안에.........

2000.5 김 순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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