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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는 포토 스탬프 - 오수형
동지회 22 4303 2004-11-19 20:54:36
뜨거운 감자(?)

한국 땅을 밟은 지도 2년여.
처음에는 서로 사용하는 어휘가 달라 우스운 일화도 많았다.

하루는 조립현장에서 일하다가 옆의 동료가

"어이, 스패너 좀 줘봐"
"스패너가 뭐래요?"
"그 옆에 있잖아. 스패너"
"아하, 나사틀개요"
"하하, 나사틀개라. 그럼 드라이버는 뭔데?"
"그건 나사돌리개요"

그랬더니만 주변의 동료들 모두 깔깔거리며 웃음바다가 되었다. 2002년 정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의 감회가 아직도 생생하다.

살 수 없는 곳에 태어난 죄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가족들을 이끌고 사선을 넘나드는 모험 끝에 찾은 희망의 땅, 대한민국.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 탈북자들은 한국사회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이다. 같은 동족으로서 버릴 수도 없고, 하지만 한국사회에 크게 도움될 것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들을 지켜보며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격려해 준 많은 이웃들에게 정말 잊지 못할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으려면 나도 이제 작은 것이라도 남기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두 번 던진 辭表

「하나원」교육을 통해 사회배출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먼저 몸으로 부딪치는 현장경험이 제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료 며칠만에 쉴 새도 없이 부천의 한 중소기업에 취직하여 출근했다.

그곳은 사원 수십 명의 금형 제조업체였는데 다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북한에서 품질경영을 배운 경력을 인정받아 제품검사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료들과 함께 하기가 영 부담스럽고 주눅도 들던 것이 내가 먼저 나선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대하다보니 곧 친해질 수 있었다. 동료들도 처음에는 나를 호기심 정도로 대했지만 하루하루 현장에서 함께 땀흘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간 서로 마음속에 담아오던 이질감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낙후된 경제체제에서 배워 둔 품질경영인지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잔심부름 정도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이렇게 단순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한달 만에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나니 주변에서 비난하는 소리도 들렸다. 탈북자들은 힘든 일은 안 배우려 한다느니, 끈덕지게 배워 보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느니 하며 웅성거렸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굳이 항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배워 보자는 의지를 가다듬곤 했다.

이튿날 학원에 등록해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접하는 컴퓨터는 정말 신통했다. 한국 사회에서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 한참 재미를 붙이던 중, 처자식을 책임 진 가장으로서 생업을 포기할 수 없어 두 번째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새로운 직장은 핸드폰 부품을 만드는 업체로 레이저 기계를 다루는 일을 맡았다. 첫 직장에서의 시행착오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의욕을 부려 보았으나 모든 일이 의욕만으로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고, 앞으로 일 이 년이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나를 대변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래, 남들이 한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지는 말자."
"늦게 출발했다고, 뒤쳐졌다고 해서 포기하지도 말자."

그렇게 결심한 끝에 두 번째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나만의 일을 찾아서

각종 신문기사와 인터넷을 뒤지며 장차 진로에 대해 골몰하던 차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학교에 가면 저렴하게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반가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강서구에 있는「강서기능정보대학」을 찾아가서 직업상담을 한 끝에 1년 과정의 컴퓨터 출판 디자인을 배워보기로 했다.

출판 디자인은 단순히 책을 만드는 작업 뿐 아니라, 앞으로 다방면에 적용이 가능한 전망이 밝은 분야로 평소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도 맞아 떨어졌다.

갓 스물을 넘긴 젊은 동생들과 어울려 공부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다소 부끄럽기도 했다. 캐릭터 그림 하나를 앞에 놓고 웃고 떠들어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민망한 생각까지 들었지만, 동생 이기 전에 스승이자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더욱 자신을 다그쳤다.

이 무렵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아내였다. 죽을 고생을 하며 사선을 넘어 정착한 땅에서 나이 서른 살을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철없는 남편을 묵묵히 믿고 따라 준 터였다. 직업학교를 거의 마쳐 갈 무렵,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취직보다는 창업을 하기로 했다.

두 번의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정해진 틀에 얽매여 수동적으로 살기보다는 남들이 안 하는 나만의 독창적인 일을 찾고 싶었다. 틈나는 대로 인터넷을 뒤져 사업 아이템을 찾다보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포토 스탬프라는 새로운 사업분야를 알게 되었다.

포토스탬프는 기존의 도장이나 명함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인쇄법으로 도장처럼 찍으면 인물사진이 선명하게 찍혀 나오는 새로운 기술이다. 당장에는 여러 가지로 어렵겠지만 앞으로 유행만 타면 제법 괜찮은 사업이 되겠다 싶어 가맹점 계약을 했다.
변변한 가게를 얻을 여력도 없어 집 베란다에 기계를 들였다.

사업이랍시고 딸랑 기계 한 대만 들여오는 것을 보고,
"이게 과연 잘 될까요?"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아내가 근심 어린 눈빛으로 물어왔다.
"잘 될 거야. 아무렴 예전 고생만이야 하겠소. 우리 한번 믿어보기로 합시다."
두 손을 꼭 잡아 아내를 안심시키고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성공을 다짐하였다.

작은 것이나마 남기는 삶

포토 스탬프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스티커 사진과 도장의 장점을 합쳐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시작단계이지만 인터넷을 타고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즈음은 문의도 많이 들어오고, 주문량도 제법 늘어 이대로만 가면 조만간 어엿한 사업체로 자리 잡을 것 같다. 젊은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이미지다 보니 갈수록 요구사항도 까다로워지는 편인데, 그럴수록 더 정성을 들여 열심히 만들고 있다.

이런 게 자기 사업하는 재미가 아닌가 싶고,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끝없는 자기계발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다.

앞으로 사업이 자리를 잡고 나면 한국사회에서 첫걸음을 내딛는 후배 탈북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볼 생각이다. 탈북자들이 사회에 배출되더라도「하나원」교육 중 받은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은 그대로 남는 법인데, 자신을 드러내는 인감도장만큼은 내 손으로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 주고 싶다.

비록 흔한 것이지만, 한국사회에서 부디 성공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가득 담아 주기에 내게는 큰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작은 것이나마 남기는 삶을 꿈꾸며 오늘도 밀려드는 주문에 손놀림이 바쁘다.

2003. 12. 오수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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