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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길 2 - 김영권
동지회 129 11844 2005-11-09 10:47:56
때늦은 후회

나는 뒤늦게야 마야에게 죄를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즉 정치라는 두 글자가 빚어낸 온갖 전쟁과 테러, 탄압, 권력쟁탈전을 너무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여성, 오직 자기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상상의 훌륭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그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낭만적인 행복을 누려가고 싶다는 꿈속에서 살던 여성, 그러한 여성을 기약없는 파도에 밀려가는 운명의 쪽배에 태운 것이다. 나는 언젠가 마야와 주고받던 말들이 생각났다.

『마야, 소련이 자본주의 사회로 변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아이참, 친애하는 김영권씨. 나에게는 그런 문제는 재미없어요. 그것보다도 언제면 당신이 좋은 집을 사고 차도 사고 나를 남보다 옷을 더 잘 입히고 놀러다니겠는지 그거나 말하세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 참, 남은 속이 까맣게 타는데….』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지금 뭐라고 했지요?』

『앞으로 잘 살게 될 거라고 말했어.』

나는 그로부터 그런 문제는 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간수가 소리쳤다.

『김영권, 처녀가 음식을 가져왔는데 받아. 그리고 여기 사진도 한 장 들여보냈어. 애인인가? 참 곱게 생겼는데….』

음식으로는 밥, 국, 김치, 고추장 등 조선음식이다 보니 복잡하게 차려 들여왔다. 사진은 마야의 사진이고 사진 뒷면에 노어로 뭐라고 썼는데 나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혹시 나를 빼돌리기 위한 작전을 하면서 나에게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의 뜻을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내가 아는 노어 단어들을 모조리 생각해 보고 앞뒤로 맞추어 보았지만 종내 결론이 없었다. 혹시 서툰 조선말을 노어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맞추어 보았다. 그래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나는 좀 자야 한다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하여 감방의 자그마한 철창가로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밝아오기 시작한 공기창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슬픈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의 사랑과 꾸지람이 얼마나 깊고 뜨거운 것인지 미처 몰랐는데 이제와서야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하실까. 아니 집 떠난 아들 걱정으로 아마 가슴속에 재가 쌓도록 고심하실거야. 이제라도 집으로 돌아가 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돌아가자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다. 북한에 끌려가 정치범수용소에 가거나 죽는 것, 이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남조선 대사관에 찾아갔다는 것과 리마야와 결혼한 문제를 숨기고, 탈출당시 러시아의 민주주의 정치를 지지하고 북조선 정치를 비방한 문제는 끝까지 부인하면 된다. 이렇게 되는 경우 기껏해서 3~4년 노동교화소에 가게 된다.

(이 방법이 좋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는 없지 않은가. 아니야, 돌아갈 수는 없어. 패배자의 비참한 꼴이 되어 가지고 어떻게 집으로 찾아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어떻게 할까?)

나는 빨리 결론을 내려야 했다. 경찰 측에서는 신분을 밝히라고 심하게 독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운명에 닥쳐올 시련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무러한 마음 속의 준비도 없이 신분을 밝히면 실로 허무하고 맹랑한 운명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좁은 감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마음이 약해져서는 절대로 안 돼. 한번 결심하고 시작한 남행길을 끝까지 걸어야 해. 이러한 각오를 굽히지 않고 방법을 찾을 때만이 인생을 값있게 살 수 있는 거야.)

나는 두 주먹으로 마음 속의 동요를 털어 버리듯이 허공을 내리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탈출, 탈출이 성공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해. 목숨을 끊는 다면 김일성, 김정일에게 조선청년들은 결코 맹목적인 독재체제의 노예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이렇게 결심이 서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심문에서 신분을 밝히리라 마음먹고 나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벌써 아침 일과가 시작되어 옆 감방들에서 화장실로 드나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세수를 하고 심문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찾을 때가 되었는데 왜 찾지 않을까.)

나는 좁은 감방 안을 맴돌며 지겹게 담배만 피웠다.

구류장으로

오전 11시쯤 되었을까. 감방문이 열리며 간수가 소리쳤다.

『김, 나와.』

감방에서 나서는데 경찰 두 명이 나에게 달려들어 팔을 뒤로 비틀어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차에 태우는 것이었다. 나는 호송경찰에게 여기가 어딘가고 묻자 쁘라꾸롤에 왔다는 것이다.

쁘라꾸롤이란 북조선식대로 말하면 안전위원회 위원장 격이다. 북조선에는 각 도, 시, 군에 안전위원회가 있는데 위원장은 당책임 비서이다. 경찰이 나를 끌고 가서 내가 노어를 모른다고 하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문건에 포장을 찍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심문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다. 2월 23일. 오전 10시쯤 되었을까. 간수가 나오라고 한다. 나는 심문이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은근히 기쁜 마음으로 감방에서 나서는데 난데없이 옆방에 있던 죄인들과 같이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었다. 수갑은 매 사람 따로 채우지 않고 다섯 명을 같이 연결하여 채웠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옆에 서 있는 죄인에게 왜 이러는 가고 묻자 잠불(도소재지격)로 호송한다는 것이다.

까파데우에서 잠불까지는 90km인데 우리를 태운 호송차 뒤로 까만 볼가 승용차 한대가 뒤따랐다. 자세히 보니 윅또르가 자가용차에 마야를 태우고 따라오는 것이었다.
마야는 달리는 차에서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손수건으로 계속 눈물을 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마운 생각, 미안한 생각 그리고 그녀에 대한 야릇한 연민의 정이 살아났다.

차는 어느덧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감옥소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이 온 4명의 죄인은 감옥소에 넘겨주고 나는 어디론가 또 차에 태워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나를 데려온 곳은 죄인을 취급하는 곳이 아니고 증명서(공민증) 없는 사람들을 붙잡아다 한달 기한으로 구류시키고 신분을 확인한 다음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곳이었다. 감방에 들어와 보니 까파따우 감방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선 감방의 크기가 거의 두 배나 크고 공기도 건조하였고 세수할 수 있는 수도물과 하수도로 된 변기도 있었고 공기창도 크게 나 있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이틀이 지나갔다. 2월 25일. 이틀 동안 그 누구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매일 마야가 들여보내는 음식을 받으면 끝이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해서인지 눈알이 쓰리고 어지럼증이 났다.

(이 사람들이 왜 찾지 않을까. 혹시 마야가 내 신분을 밝히고 이미 하바로프스크 북조선 안전원들에게 연락이 간 것이나 아닌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수가 오더니 감방에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심문이 시작되었구나.)

이제 신분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간수를 따라 1층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니 난데없이 마야가 음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는데 간수가 옆에서 조선말은 못하고 러시아어로만 말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나는 그러거나 상관없이 그냥 조선말로 사진이야기부터 꺼냈다.

『마야, 사진 뒷면에 뭐라고 썼는지 그것부터 이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게 빨리 말해. 나는 지금까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어.』

마야는 피식 웃으며 그것은 조선말을 러시아어로 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그래 뭐라고 썼어, 빨리 말해봐.』

마야는 한참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게 다예요.』

『후-, 고맙소.』

(여자들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야. 마야가 내 처지를 안다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마야는 북한의 세습적인 독재체제를 이해할 수 없어.)

『김영권, 어떻게 하겠어요. 이젠 빨리 신분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 말이 신분만 확인되면 바로 내놓는다고 해요. 그리고 내가 여기 공민이기 때문에 여기서 살겠다면 여기 공민권을 준대요.』

『마야, 나 역시 소련 땅에서 결혼하고 소련 공민권을 받을 수 있다는 법조항은 알고 있어. 그러나 이 세상엔 꼭 법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야. 마야가 간단히 이해하자면 우선 스탈린 시기의 소련의 정치와 그 당시 정치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계급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는 독재주의도 있고 민주주의도 있고…, 독재주의 대표적인 표현으로서는 소련의 스탈린을 생각하면 마야가 이해할 수 있어. 바로 김일성이 스탈린의 독재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고 현 시기에 맞게 독재방법과 체계를 더욱 계승발전시킨 현대독재주의 괴수이며 원흉이야.』

마야는 내 말을 듣더니 손을 내 저었다.

『아이 됐어요. 김일성이 무슨 상관이예요. 그러니 말하자는 것은 여기 공민권을 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마야, 내가 바로 그걸 말하는 거야.』

마야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듯 까만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소련 공민권이야 소련에서 주는 것이지 김일성이 주는 건 아니지 않아요. 정 안되면 내가 북조선에 따라가 살면 되지요. 우리 소련에서는 미국 공민과 결혼하면 미국에 가서 살 수 있고 그건 자유라고 생각해요.』

나는 아무리 말해도 마야를 이해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마야 여기 공민권은 소련에서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조선 사람들만은 김일성이 주는 거야.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 살자면 북조선 대사관의 승인을 받아야 해결될 수 있어. 그런데 북조선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살겠다고 요청하면 허락은 고사하고 민족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워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게 되어 있어. 그러나 정치망명객으로서 대우를 받을 때 소련측으로부터 공민권을 제공받을 수 있지만 지금 그건 힘든 일이야. 조소 공동목재생산에 관한 협정서에 우리 북조선 사람들의 러시아로의 망명을 허용하지 말 것에 대한 조항이 특별히 밝혀져 있어. 혹시 능력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어. 그러나 마야 혼자 힘으로 옐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올 수 있겠어? 그건 힘든 일이고 또 이미 때가 늦었어.』

마야는 호-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 북조선으로 가면 어떻게 돼요?』

『나는 정치범수용소로 온 가족과 함께 가야 해.』

마야의 두 눈에서는 또 다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망명 신청

이때 출입문이 열리며 사복차림의 두 사람이 들어섰다. 간수가 일어서며 그들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면회중인데 한 3분이면 될 것 같아요.』

그러자 그들은 옆방에서 기다리겠다며 나갔다.

『저 사람들은 김영권때문에 온 KGB(국가보위부) 사람들이예요. 한 5분 더 이야기하시오.』

간수는 노어로 이렇게 말하며 담배를 붙여 물었다.

『마야, 내 이제 저 사람들에게 신분을 밝히겠어. 그럼 아마 며칠 후면 북한으로 호송되게 될거야.』

마야는 안타까운 듯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니 그래 무슨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처지를 잘 알면서 여권을 하겠다고 경찰서에 찾아간 건 도대체 뭐예요? 죽자고… 죽자고 그랬어요? 아니면… 아니면 내가 미워가지고 도로 가려고 그랬어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됐어. 마야 그러니 이제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해 줘. 그러면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아.』

이렇게 말한 나는 경찰원에게 그 사람들을 만나자고 하였다. 심문은 두 명이 하였는데 한 명은 국가보위부 요원이고 한 명은 중국말 통역원이었다. 통역원은 첫인사부터 중국말로 하였다. 중국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 나는 그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북조선 사람입니다. 그러니 통역은 필요없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보기만 했다.

『아니, 그런데 왜 중국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바로 그걸 대답하려고 합니다. 나는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북조선 임업대표부 노동자입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나는 서툰 노어로 탈출동기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북조선에 끌려가면 정치범수용소에 간다는 것과 소련의 망명을 요청한다는 것까지 다 이야기했다.

전 향 서

나는 북조선의 정치탄압을 피하여 러시아로 탈출한 망명객이다. 정부에서 나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여 줄 것을 희망한다. 김영권.

나는 그들이 나의 정치망명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나로서는 다만 몇 사람에게라도 김일성, 김정일 독재정치에 대하여 알려주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북조선의 현실상까지 무려 두 시간이나 이야기했다. 심문이 끝나고 감방으로 돌아온 나는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날처럼 피곤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단식

3월 10일이다. 그럭저럭 감방에서 20일이 지나갔다. 그동안 마야는 매일 음식을 날라왔고 2~3일에 한번씩 면회할 수 있는 혜택이 베풀어 졌다. 경찰측에서는 면회할 수 없는 날에도 마야의 정성에 감동되어 면회를 시켰고 3월 8일 국제여성명절에는 특별히 방한칸을 30분간 우리에게 마련해 주었다.

마야는 면회할 수 없는 날에는 음식을 넘겨주고 감옥소 담장 너머에서 내가 갇혀 있는 감방의 철창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가곤 하였고 나는 철창 틈으로 손을 흔들어 바래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 기간 하바로프스크 러시아 경찰측으로부터 나를 데리러 온다는 전보문이 두번씩 날아왔고 바로 어제 3월 9일 북조선 경찰들로부터 나는 위험분자이며 잘 단속해 달라는 전보문이 날아 왔다.

나는 이 모든 정부를 조선인 경찰원과 마야를 통하여 즉시 알아내곤 하였다. 북조선 경찰측에서 전보문이 날아온 다음부터는 나를 특별히 감시하고 면회를 단절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물론 북조선 식대로 한다면 나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다. 북조선의 정치를 비방했고 그 정치에 반대하여 탈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경찰측에서는 나를 살인범이 아니면 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경찰측에 북조선의 정치테러 분자들에 대하여 똑똑히 알려주고 싶어 경찰책임자를 만나게 해줄 것과 마야와의 면회를 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경찰책임자는 만나는 것을 거절하였고 마야와의 면회도 금지되었다면 딱 잡아뗐다. 나는 그들의 소행이 괘씸하여 단식으로 넘어갔다.

3월 16일이다. 5일간 음식을 한 그램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당황한 경찰측에서는 구급차를 불러 나를 검진하고 포도당 주사를 놓으려고 하였으나 나는 그것마저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주사보다도 경찰책임자와 마야를 만나게 해주면 나는 건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되어 나는 3월 17일 오전 경찰책임자와 마야를 같이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들에게 북한의 정치테러에 대하여 똑똑히 말해 주었다. 그러자 경찰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역시 당신과 마야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각 방면으로 알아보았는데 북조선측에서 승인하지 않는다니 힘들 것 같다. 당신을 데리러 온다는 전보문은 온지 오래 되었는데 왜 아직 오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해주어 감사합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나는 짐작이 갑니다. 외국인들은 비행기를 타려면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달러가 없지요. 그렇다고 열차를 타려면 7일간, 왕복 15일간이 걸립니다. 그들은 나를 비행기로 호송하려 하는데 여비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자 책임자는 웃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부라면 어느 나라나 그쯤의 자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을 데리러 러시아 경찰들이 오게 되었다. 자, 그럼 나에게 제기할 문제가 있으며 제기하라.』

『고맙습니다. 나는 마야에게 이렇게 고생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마야가 이렇게 매일 찾아오니 죄송스럽습니다. 가능하다면 마야를 생각해서 면회금지를 취소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4일에 한번씩 면회시켜 주겠어.』

이렇게 되니 나는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대표부에서는 나 때문에 김정일한테 달러가 필요하다고 제의서를 올렸고 김정일은 나를 잡아오라고 1500달러를 보냈다. 그런데 달러가 바로 해결되지 않자 그들은 러시아 경찰들에게 값은 후에 치르기로 하고 나를 데리러 보냈다.

나는 그 날 오후 오래간만에 밥 몇 술 먹고 곤히 잠들었다. 세월은 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에게도 봄은 오리라.

탈출 준비

눈을 떠보니 생소한 곳에 누워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았는가?)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결박하여 놓았기 때문에 움직일 수는 없어도 분명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도 숨쉬기가 힘들어 가만히 보니 입에다 산소호흡기를 달아 놓고 목구멍에는 고무호스를 틀어박았다. 나는 너무 답답하여 묶어놓은 한쪽 팔을 뽑고 산소호흡기를 와락 잡아챘다.

간호사과 의사가 급히 달려와 내 손을 다시 묶어놓고 저들끼리 뭐라 수군거리더니 목구멍에서 고무호스를 꺼냈다. 그래도 목구멍에는 뭔가 걸려 있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눈치 빠른 간호사이 재빨리 고무호스로 목구멍에 걸려 있는 가래를 빨아냈다.
그제서야 숨이 나갔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자 간호사 두 명이 내가 누워있는 밀차식으로 된 수술대를 밀고 입원실에 와서는 침대에 옮겨 눕히느라고 덮었던 백포를 벗겼다. 놀랍게도 알몸통이었다. 나는 모진 아픔 속에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덮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목이 콱 쉬었는지 말은 나가지 않고 입만 우물거렸다. 간호사들이 사라져 버렸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도대체 제정신인지 아닌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입원실 간호사인 듯 한 처녀가 들어오더니 수면제 주사를 놓았다. 출입문으로 마야가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그냥 잠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잠에서 깨보니 마야가 의자에 앉은 채로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머리를 푹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잠에서 깨고 보니 또 고통스러웠으나 정신을 좀 맑아진 것 같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가엾게 잠든 마야를 쳐다보니 불쌍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간호사가 또 들어오더니 아픈가고 물었다. 나는 아프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호사는 환자복 한 벌을 내 옆에 놓고는 약을 먹이려고 하였다. 나는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야를 흔들어 깨웠다. 마야가 잠에서 깨자 간호사는 마야에게 약을 먹이라고 주고는 도로 나갔다.

마야는 정신이 든 나를 보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마치 추운 겨울에 어미를 잃은 병아리 같았다. 나는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 몇 시나 되었는가고 물었다. 마야는 목구멍에서 겨우 새나오는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여 내 입에 귀를 갖다 댔다.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 몇 시나 되었어?』

『오늘은 3월 18일 오전 10시. 수술은 어제 저녁에 끝나고 오 늘 새벽 5시경에 김영권는 정신을 차렸어요.』

나는 다시 마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살았으니 또 도망쳐야지….』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마야는 두 눈이 금시 커지며 기겁하여 소리쳤다.

『정신 있어요?! 왜 그렇게 사람이 우둔해요. 김영권가 다 나은 다음 보기 싫어서 같이 못살 것 같아요.』

나는 그러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야는 또 눈물을 흘리며 약을 먹이려고 했다. 나는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약이 수면제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잠들면 언제 깰지 모른다. 때문에 약을 먹기 전에 마야에게 행동방향을 말해 주어야 했다. 나는 다시 마야를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부르고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정신을 완전히 차리면 경찰들이 입원실을 지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북조선으로 가야해. 그러니 나는 오늘 저녁까지는 병원에서 탈출해야 해. 내 걱정은 말고 빨리 가서 택시 한 대와 임시 거처할 데를 알아보라구.』

나는 말하기가 너무 힘들어 진땀이 돋았고 긴장한 눈길로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마야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던지 한참 쳐다보며 그 어떤 비장한 결심을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나를 병원에서 빼낸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이 잘못될 수 있으며 내가 잘못되는 경우 나를 병원에서 빼돌린 마야가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마야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어 안심하라고 웃으며 눈을 껌벅거렸다. 결심이 선 듯 마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어딘가 숨어있던 그녀의 당돌한 성격이 살아난 것이다. 마야는 나에게 약을 먹이고 나는 다시 잠들었다.

오후 4시경 잠에서 깨보니 김와실리가 옆에 와 있었다. 나는 긴장했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지키려고 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정신이 든걸 보자 그가 말했다.

『김 동무, 이게 뭐요. 조선사람들이 이렇게 악종이라니까.』

나는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조선사람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네가 조선사람이 악종이라는 걸 아직도 몰랐어? 조선사람의 가죽을 쓰고 넋은 러시아에 팔아먹은 너 같은 불행한 인간은 알 수도 없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김 동무, 방금 전에 북조선 대사관과 영사관에 전화를 걸고 하바로프스크에도 연락을 했어요. 이런 이야기는 안하고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지요. 그러니 마음을 푹 놓고 치료를 받고 한 열흘 후에 몸이 추스려지면 다시 탈출하던가 하세요.』

그는 은근히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내가 눈을 감아 버리자 그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다음 수술을 담당하였던 의사와 조선인 교포 몇 사람이 나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벌써 온 도시에 소문이 퍼졌다면서 자기네가 어떻게 하든 도와줄 테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들은 나가면서 며칠 후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때 김치랑 고추장이랑 가져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병원 탈출

그 날 저녁 10시경. 나는 같은 병실에 있는 러시아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문을 나섰다. 환자복 차림으로 택시에 올라탄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탈출해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 생각으로 참고 또 참았다. 택시 운전수는 40대 중년의 조선인 교포였는데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의 집은 병원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마침 혼자 사는 홀아비였다.

그의 집에 도착한 나는 금시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 얼마나 급했던지…. 나는 조심스럽게 수술자리에 붙여 놓은 붕대를 뜯어보았다. 약 15cm 찢어진 자리를 실로 드문드문 기웠는데 너무도 끔찍스러워 보기가 무서웠다. 옆에서 보고 있던 마야와 택시 운전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니, 마야. 왜 이렇게 많이 찢어졌어?』

마야가 붕대를 도로 붙여주면서 말했다.

『처음 찢어진 건 3~4cm 정도이고 병원에서 내장기관을 검사하느라고 다시 그렇게 많이 수술했어요. 김영권, 혹시 이제라도 다른 병원으로 가면 안될까요. 약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치료받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야에게는 참으로 힘에 부친 일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조금이나마 의료부문에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마야는 전혀 상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약명을 마야에게 알려주었다. 수면제, 항생제, 소독 알콜.
그러자 마야는 자기 손가방에서 약을 꺼내 놓았다. 놀랍게도 여러 가지 약들이 많이 나왔다.

『이 약들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주었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러면 그들이 알고 있어?』
『아니예요. 그들은 혹시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주었어요.』

그제서야 나는 짐작이 갔다. 병원에서 나올 때 입원실 복도에서 항상 대기 근무를 서던 의사, 간호사들이 한 명도 없었고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병원에서 탈출한 나는 6일간 택시 운전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옛말이 맞는 것 같았다. 택시 운전수의 친누이 류바가 유치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초보적인 위생상식은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두세 번씩 나를 치료하여 주었다.

6일만인 3월 24일 내 손으로 배에서 실을 뽑은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음식도 께피로(우유로 만든 시큼한 것)를 조금씩 마셨다. 우리는 그 날 저녁에 다시 먼 곳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마야는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내가 고집을 부렸다.

황무지 생활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누끄스(까랄까박스딴 공화국 수도)였다. 까랄까박스딴은 우즈벡키스탄에 속해 있는 자치 공화국인데 언제나 땅 위에는 소금이 하얗게 깔려있는 간석지 땅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500여년전에 바다였던 자리라고 한다.

우리는 먼저 버스로 잠불에서 싸마르칸까지 하루 반, 사마르칸에서 누꾸스까지 열차로 2일간 가기로 했다. 여비는 마야 어머니가 해바라기 씨를 조금씩 팔아 모아 둔 돈이라며 3천루블을 가져다 주었다. 떠날 때 류바와 그녀 동생 택시 운전수가 우리를 바래주었다.

『배에서 실을 뽑았는데 나는 어쩐지 믿음이 안가요. 여행길에 배에 힘을 주거나 육체적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리고 급한 경우 서슴치 말고 구급차를 부르세요.』

류바가 마야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우리는 경찰의 눈을 피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경찰측에서는 소동이 일었다. 우선 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올 책임추궁이 두려웠다. 특히 하바로프스크 체크도민 경찰서 책임지도원 김와실리는 내가 수술한 다음날 밤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이 빠진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지고 말도 제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배를 가르고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을 때 급히 나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칼은 어디서 났는가…. 후에 누가 물어 보면 칼로 배를 찔렀다고 하지말고 밖에서 넘어지면서 쇠꼬챙이에 찔렸다고 말해야 한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철직(파면)되었다. 당시 나에 대한 사건으로 서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논쟁이 많았다고 한다. 북조선측에서 항의했기 때문이다. 책임은 김와실리에게 있었다. 그는 나를 업신여기고 거들먹거리며 수갑도 채우지 않았다. 또 호송 당시 몸수색도 하지 않았고, 병원에서 나에 대한 감시근무조를 조직하지도 않았다. 마야의 말에 의하면 김와실리가 감시조를 배치하려고 하자 병원의 의사·간호사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영권의 생명이 지금 대단히 위급한데 경찰이 감시까지 하면 그는 견뎌내지 못할 거요. 그러니 한 며칠 안정이 된 다음 감시해도 될 거예요.』

나는 북조선 안전원들과 김와실리에게 그리고 나를 잡으라고 달러를 보낸 김정일에게 골탕을 먹인 것이 참으로 통쾌하였다. 버스와 열차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누꾸스에 있는 마야의 이모집에 도착하자마자 심하게 앓기 시작하였다.

수술 후 실을 아무런 소독기구도 없이 혼자서 뽑고 어지러운 버스와 열차로 장거리여행을 하면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배 안으로부터 곪기 시작하였다. 바로 명치 끝부분이 안으로부터 곪기 시작하였는데 주먹만한 고름덩어리가 명치 끝부분의 밸을 짓누르면서 나는 몇 차례 정신을 깜박깜박 잃곤 했고 마야는 어쩔 줄 모르고 나를 잡고 울기만 했다.

나는 근 한달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조선인 교포 의사가 밤에 몰래 찾아와서는 주사기로 고름을 뽑아내면서 치료해 주곤 했다.

나는 5월 중순까지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이상 다시 남행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든 할 일을 찾았다. 세계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황무지의 땅 까랄 까박스딴의 누꾸스에서는 의지해 볼 데가 어디에도 없었다. 자유를 찾아 떠나자고 해도 돈이 필요했고 당장 먹고살자고 해도 돈이 필요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황무지 땅에 해바라기 씨를 뿌리기로 결심하고 시골로 찾아갔는데, 아무리 찾아보아야 식물이 자랄만한 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돌멩이 하나 찾아볼 수 없고 뜨거운 햇빛을 피하자고 해도 산도 나무도 없다보니 피할 데가 없었다. 밭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강이 흐르는데 강에는 물이 아니라 감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황무지 땅에 해바라기씨를 뿌렸는데, 심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메마른 감탕이 먼지로 변해버린 땅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꼬챙이로 꾹 누르고 씨를 넣고 손으로 꽁꽁 다지면 그만이었다. 나는 해바라기 씨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금석인 듯 정성을 다하여 심었고,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데다 제대로 먹지 못해 제 몸 하나 겨우 움직이면서도 매일 물을 길어다 주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강에 나가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들이곤 하였는데, 그 감탕물에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매일 3~4시간 정도 잡으면 메고 오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나에게는 먹고 살 식량이 마련된 셈이다. 그 물고기를 가지고 원주민들과 빵, 소금, 기름, 고추가루 등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까랄까박쓰딴의 원주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낚시질도 할 줄 몰랐다. 그 원주민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30대의 사람들이 한국인 50대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이 마시는 음료수는 흐르는 감탕물이었다. 문화 수준도 많이 뒤떨어져 있고, 대체로 목화생산을 하면서 사는데 소연방 자체가 쓸모 없는 불모의 땅으로 여겨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정성이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더니 그 황무지 땅에서 해바라기가 돋아났다. 나는 너무 기뻐 밤낮으로 그 해바라기를 쓸어 만지며 밭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누꾸스 시내로 식료품을 구하러 이틀간 나갔다 왔는데, 겨우 자라난 해바라기들이 6~70% 정도 햇볕에 타 죽어 버렸다. 나는 그때 막막하고 안타까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가꾼 해바라긴데 이렇게 무참히 태워버릴 수 있는가.

해바라기 씨를 팔아 돈을 장만해 자유를 찾아가려던 희망은 하루사이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먹고 살 돈도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물고기를 잡아서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

마야의 정신적 성장

나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마야의 언니들이 무엇 때문에 여권도 없이 숨어 다니는 사람을 따라 다니며 고생하느냐고 하면서 좋은 신랑감(집도 있고 차도 있는)을 찾아놓고 기다린다며 나를 내버리라는 것이었다. 마야는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몰래 울며 지낸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어느 날 나는 마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야, 나 지금까지 이렇게 도와주어 대단히 감사해. 나는 이젠 떠나야 할 것 같아. 나는 마야 때문에 다시 살아났고, 마야는 나 때문에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마야, 이제 조선이 통일되면 신세를 값기로 하고 지금은 떠나야겠어.』

마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손가방에서 언니들한테 온 편지를 찾았다. 편지들이 없어진걸 알자 마야는 웃으며 말했다.

『머저리, 나는 이런 편지를 5년전부터 받아 왔어요. 그런 말은 그만두고 죽을 때까지 내 승인 없이 아무데도 갈 생각을 마세요.』

그리고 나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데 당신은?』

나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마 마야는 나를 따라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움튼 것 같았다. 마야에게 미안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신적으로 몰라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했다.

어느새 마야는 나를 사랑하게 됐고, 내가 자유를 박탈당해야 할 아무러한 이유도 없으며, 북조선의 김일성, 김정일이 얼마나 나쁜가를 나에 대한 사랑 속에서 나를 추적하는 북조선측의 집요한 태도에서 똑똑히 알게된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북조선 경찰에게 체포된 다음 마야는 울며 따라다니지 않았다. 마야는 북조선 국가보위부 요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남의 나라에서 주인행세를 하는가. 당신들이 김영권를 내놓지 않으면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하고 국제적십자사와 옐친 대통령에게 신소하겠다.』

타슈켄트에서 만난 행운

1992년 6월 17일 우리는 짐을 꾸려가지고 누꾸스를 떠났다. 짐이란 옷가지들과 부엌 세간 살이라 할 수 있는 그릇 몇 개였다. 나는 육체적으로 일할 형편이 못되었으나 일을 해야 하며 자기 힘으로 생활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먼저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다.

돈 2천루블을 가지고 떠난 우리는 실로 정처 없이 방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타슈켄트에는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가라따우(마야 어머니집)에는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역 대합실에서 이틀을 자면서 임시거처 할 수 있는 거처지를 찾았는데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우리를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3일만에 우리는 조선인 교포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그 할머니는 풍 만난 반신불수였다.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아 키운 할머니는 늙으막에 불구가 되어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았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고 돈을 받지 않을 테니 같이 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제 손으로 음식도 끓이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가 불쌍하고 우리 역시 갈 곳이 없는 처지여서 같이 살기로 했다. 그런데 경찰서 의사로 근무하는 할머니 맏아들이라는 사람이 우리 처지를 알고 나를 찾아와 말했다.

『당신이 살 데가 없다니까 마침 잘 됐어. 우리 어머니를 좀 돌 봐주면서 같이 살겠다면 내가 일자리도 구해주고 잘하면 여권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당신은 아마 이렇게 좋은 집을 아무데서도 얻지 못 할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세상이 복잡하다더니 별 못난 놈 다 보겠다는 생각이 들며 내 처지가 얼마나 가련한지 부끄러웠다. 나는 아무리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어도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당신 어머니를 돌봐주면 돈을 얼마나 주겠어?』

하고 그에게 빈정거렸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들고
『뭐, 뭐, 뭐라구』

하며 기겁해서 소리쳤다. 나는 웃으며 또 한마디했다.

『돈을 내지 못하겠으면 당신이 어머니를 잘 돌보라구.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돈을 주지. 한 달에 얼마면 되겠어?』

그는 이 말을 듣더니 얼마나 화가 났던지 금새 나에게 달려들 어 때릴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마야가 나에게 대들었다.

『아니 싫으면 싫다고 하면 그만이지 남의 집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됐어. 마야 가자구.』

우리는 짐을 끌고 또 길을 떠났다. 어디로…? 마야는 울며 나 는 짐을 끌고 한참을 가고 있는데 어느 한 건물로 조선인 교포할머 니들이 노래를 부르며 밀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아보니 한국인 목사가 차려 놓은 교회란다.

『마야, 우리도 한 번 들어가 볼까?』

마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총알같이 내 쏘았다.

『아니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 꼴을 해가지고 어디로 간다구 그래요.』

아직도 자기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여성으 로서의 특성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마야. 교회는 하나님께 구원해 주십사고 다니는 것 이지 잘 살아서 하나님께 빵조각을 섬기는 데가 아니야.』

마야는 마지못해 교회로 따라 들어갔다. 교회에는 꽤 많은 사 람들이 모여 있었다. 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가 조선말로 설 교를 하였는데 모두 허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젠장, 나에게는 현실적인 구원이 필요하지 이건 모두 허황한 것들 뿐이야.)

설교가 끝난 다음 나는 목사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를 찾아갔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어요. 당신은 미국의 의학박사 가 쓴 책을 읽고 꿈에서 그 내용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건 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혼에서 육체로 돌려 보낸 거예요. 하 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길이 열릴 거예요.』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 겠지」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너무 힘들고 어려웠으며, 또 여기 소련 땅에는 아버 지도, 엄마도, 친척도,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가 마음 속 으로 그 어떤 기둥을 세워놓고 오직 그 기둥의 힘을 믿고 살아나가 야 하며, 바로 그렇게 할 때만이 희망과 포부가 뚜렷해지는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이것이 생명수처럼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역대합실에서 자고 다음날 또 교회로 찾아갔다. 그날 목사는 조국통일을 위해 설교를 했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걸어 주었다. 설교가 끝나고 모두 헤어질 때 한 할머니가 찾아와 갈 곳이 있는가고 물었다. 갈 데가 없다고 하자 할머니는 자기의 가까운 친 척 주소를 적어주며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소대로 찾 아가자 집주인 그리샤는 전화로 연락을 받았다며 대단히 반가와 하 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식사를 권하고 술까지 한잔 부어 주었다. 나는 수술 후 경과가 나쁘기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고 오래간만에 구수 한 장국 한그릇을 다 먹었다.
식사 후 우리는 집주인과 함께 우리가 살게 될 집으로 갔다. 그리샤는 집 두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집은 비어 있었다. 집에 가 보니 난방과 목욕탕까지 모두 가스로 된 현대식 문화주택이었고, 마 당에는 포도넝쿨이 우거진 실로 좋은 집이었다. 집에 들어가 보니 방은 모두 4칸이고 냉장고와 침대까지 다 있었다. 마야는 너무 기 뻐 나에게 매달려 울기까지 하였다.

집주인 그리샤는 53세된 조선인 교포인데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집 값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면 한달에 350루블씩 주고 지금 당장은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쌀, 소금, 기름같은 것을 돈 도 받지 않고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제 집에서 목욕을 하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자리에 누웠다.

『김영권, 이건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엉? 이것 봐라. 교회로 들어가자고 할 때는 당나귀처럼 두 발 을 딱 버티고 안들어 가겠다더니 이제야 알았어?』

우리는 남 몰래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 행복한 밤, 따 뜻한 사랑을 속삭이며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장사를 시작했고 친구들도 사귀었다.
친구들은 돈 5만루블이면 여권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불편한 몸으로 타슈켄트에서 비스께크(게르기즈스딴 수 도)로 다니며 물건을 사서 팔곤 하였다. 밑천은 남에게서 꾼돈 3천 루블이었다. 밑천이 작다 보니 아무리 애를 쓰며 뛰어 다녀도 돈은 불어나지 않았다. 특히 여권이 없기 때문에 시장에서 하루종일 물 건을 팔면서 경찰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타슈켄트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나는 타슈켄트시장에서 물건을 팔다가도 경찰이 나타나면 재 빨리 자리를 피하고 경찰이 사라지면 다시 팔곤 하였다. 이렇게 두 달이 지나갔는데 나는 또 앓기 시작했다. 식사 후 달리기를 할 때처럼 배가 꼬이면서 허리를 펼 수 없 었다. 아는 사람을 통하여 병원에 가 보니 수술 후 안정하면서 영 양보충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너무 과로하였기 때문에 이혈이 들었다고 하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안정하면서 영양을 보충하 라는 것이다.

나는 그때 너무 약해서 뼈에 가죽을 씌워 놓은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한달동안 꼼짝 못하고 앓아 누웠다. 그후 우리는 다시 장사를 시작하여 겨우 1만 5천루블을 모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떠났다.

우리가 떠나게 된 것은 마야의 둘째 언니 와르느가 우리 집에 한번 들렸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나오면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이었 다. 특히 중국 교포 상인들과 같이 장사를 하면 여권을 할 수 있는 돈은 며칠이면 다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북한과의 국경지대이며 하바로프스크와 가깝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므로 안된다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농 사지을 것을 권고하였다. 나는 도저히 농사는 취미가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할 수 없이 11월 중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나는 중국 국경지대인 그라데끄 지역에서 중국 교포 상인들과 장사를 시작했다. 중국 사람들은 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를 할애비처럼 모시고 다니며 대접을 잘 해 주었고 돈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또 다시 뻗어 온 북한의 검은 손

1993년 3월 23일이다. 그날도 나는 그라떼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 10시쯤 되었을까. 러시아 경찰 두명이 오더니 증명서를 보자고 한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나는 증명서를 집에 두고 왔기 때문에 없다고 하자 그들은 좀 알아 볼 것이 있으니 가 자고 하였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뿌리치고 뛰려고 하였으나 두 명의 경 찰이 얼마나 틀어 잡았는지 몸을 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끌려 시장 밖으로 나오자 중절모를 쓰고 색안경을 낀 조선사람이 나에게도 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김영권, 장사가 잘 되나?』

나는 흠칫 놀랐다. 탈출한 후 처음으로 들어 보는 깨끗한 조 선말이다.

『여, 김영권 동무. 러시아 여자하고 그만큼 재미를 보고 돈도 많 이 벌었겠는데 이젠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어!』

그리고 갑자기 표독스럽게 인상이 변하면서 러시아 경찰들에게 소리쳤다.

『밀리제(경찰), 이 놈을 묶으라!』

한순간 당황했다. 얼결에 나는 너는 어디서 온 누군가고 노어로 물었다.

『이 놈의 새끼, 조선말을 못 하겠어!』

하더니 번개같이 그의 주먹이 날아 들었다.

『이 놈아, 내가 대표부 단속지도원이야.』

나는 얼결에 불이 번쩍 나게 얻어맞고 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붙잡고 있던 러시아 경찰 두명을 와락 뿌리치고 그에게 달려들어 땅바닥에 둘러 메쳤다. 러시아 경찰과 북조선의 다른 3명 이 달려드는 통에 나는 꼼짝 못하고 묶였다. 나는 러시아 경찰들에게 노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러시아 공민인데 저것들이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경찰들은 귀도 기울이지 않고 나를 역 분 경찰서로 끌고 갔다. 대표부 단속지도원이 얼마나 흉포하게 날뛰었던지 러시아 경 찰들은 얼떨떨해 가지고 정신도 차리지 못했다.

『야, 이 놈아. 이 악종같은 놈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얼마나 고 생했는지 알아? 네 놈 때문에 1500달러를 썼어. 당과 조국을 반대 해서 칼로 배까지 갈랐어. 이 개새끼.』

또 주먹이 날아 들었다. 묶인 몸이라 나는 또 얻어 맞았다. 나는 젖 먹던 밸까지 다 치 밀어 오르는 것 같아 그를 머리로 힘껏 들이 받았다. 그러나 두 팔 을 뒤로 묶였기 때문에 그를 받지 못하고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그 는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며 한참 야단이었다.

(아, 분하구나. 내가 이렇게 잡히다니!)

나는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일어서며 러시아 경찰을 어깨로 힘껏 떠받으며 소리쳤다.

『이 개새끼야. 나를 풀어라!』

그러자 경찰서 다른 경찰들까지 달려들어 나를 진정시키고 단 속지도원도 진정시켰다. 나는 조선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러시아 공민이라고 항의하자 러시아 경찰들이 머리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급해진 단 속지도원이 앉았던 의자를 쳐들고 달려들며 무작정 나를 끌어내라 고 같이 온 북조선 노동자 3명에게 소리쳤다.

그들이 달려들어 나 를 끌고 나가자 러시아 경찰들은 벙벙히 지켜 보기만 하였다. 내가 계속 발악하자 단속지도원은 내 입에 자갈을 물리라고 소리치며 세워져 있는 택시운전수에게 서툰 노어로 돈을 많이 줄테 니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경찰서에서 생긴 일

이때 러시아 경찰 한 명이 다가 오더니 본 경찰서 책임자가 찾으니 경찰서로 가자고 하여 호송차에 모두 타라는 것이었다. 천 만 다행이었다. 우리가 경찰서 책임자 방에 들어서자 그는 나에게서 수갑을 풀어 주라고 지시하였다. 경찰 책임자는 단속지도원에게 어디서 온 누군가고 물었다. 노어를 모르는 그는 너무 안타까와,

『이렇게 하고 달아난 놈이야. 자, 이거 말이 통해야 어쩌지.』

하면서 칼로 배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책임자가 알아 듣지 못하고 나를 체포하던 러시아 경찰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는데 나를 시장에서 자기는 조선 경 찰이라고 하면서 저 사람을 붙잡아 달라기에 체포하였습니다. 그런 데 본인은 러시아 공민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옆에서 노어로 소리쳤다.

『이건 도대체 어떤 놈이야.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되자 책임자는 번역원을 찾았다. 번역원으로는 조선인 교포가 들어 왔는데 공식적인 번역원이 아니고 자기 사업때문에 경 찰서에 며칠째 와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단속지도원은 번역원과 경찰책임자에게 옆 방 에 나가 이야기 하자고 데리고 나갔다. 한참 후에 들어온 그는 나 에게 어디서 온 누구인가고 물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우즈베키스탄 교포 친구 이름을 댔다.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이해 할 수 없다. 이유를 대라!』

그러자 단속지도원은 노어로 말하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나의 배를 보면 알 수 있다며 배를 보자고 하였다.
참으로 긴장한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배 가죽에 15cm나 되는 상처자리가 있다. 나는 책임자에게 다시 말했다.

『저 사람을 내 보내고 당신과 번역원 우리 세 명이 따로 만 나자.』

책임자는 그게 좋겠다며 그를 내보내라고 하였다.

『나는 조선에서 온 사람이 맞다. 나는 러시아에로의 정치망 명을 위해 도망쳤다. 자 사람들은 나를 데려다 죽인다. 우리 부모형 제들도 모두 잘못된다.』

책임자는 자기도 그런 줄 알았다며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통역으로 왔던 교포 역시 나를 지지하였다.

단속지도원이 다시 들어오자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이 당신네 사람이라는걸 증명할 문건이 있습니까?』

그에게는 문건이 없었다.

『이 사람은 우리 사람이다. 카자흐스탄 경찰서에서 배를 가 르고 도망친 사람인데 왜 배를 보여주지 않는가?』

통역원이 책임자에게 번역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차라리 이 사람들에게 문건을 가져오라고 보내는 것이 어떻 습니까?』

경찰 책임자가 그에게 나를 구류시킬테니 가서 문건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궁지에 몰린 단속지도원은 기어코 데리고 가야한다며 앙탈을 부리다 서툰 노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조선 경찰이다.』

나는 그를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들이댔다.

『저 사람은 북조선 사람인데 남조선 경찰이라고 당신들을 속 인다. 신분을 확인해 보라.』

책임자가 그에게 여권을 보자고 하였다. 그의 여권은 공무여권이고 하바로프스크 경찰에서 발급한 경 찰원 카드도 보여 주었다. 번역원이 그에게 당신은 북조선 사람인데 왜 남조선 사람이라 고 속이는 가고 물었다. 그는 참으로 철면피한 인간이었다.

『나는 노어를 전혀 모른다.』

통역원이 책임자에게 번역해 주자 그는 입이 썼던지 더 말도 없이 나를 구류시키라고 지시했다. 나는 우선 마야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포 통역원에게 마야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연락을 받은 마야는 200km나 되는 길을 밤 1시가 지나 택시 를 타고 달려왔다.

하바로브스크로 끌려가는 길

나는 다음날 하루종일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오후 5시경에 감방문이 열리며 나오라고 한다. 내가 나가자 단속지도원과 낯모를 조선사람 몇명이 들어오며 러시아 경찰들에게 감방문을 나서기도 전에 빨리 묶으라고 재촉했다. 러시아 경찰 두 명이 달려들어 팔을 뒤로 비틀어 수갑을 채웠다. 수갑은 러시아 경찰의 것인데 아마 빌려 쓰는 것 같았다.

북조선제 수갑도 있었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인권유린행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이런 장소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일단 하바로 프스크 벌목장 감옥소에서부터 다리 키브스와 수갑을 사용한다. 감방 복도에서 나와 현관에 나서니 마야의 언니 이리니가 와 있고 마야는 없었다.

감방으로 들어갈 때 꺼내 놓았던 소지품과 돈 48만루블을 북 조선 경찰들이 넘겨 받았다. 나는 돈을 마야에게 넘겨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끼 리 수군거리며 돈을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러시아 말로 다시 소리쳤다.

『돈은 내 돈이 아니고 마야 돈이니 모두 넘겨주라!』

이렇게 되자 그들은 러시아 경찰 책임자를 비롯하여 모든 과 장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이리나에게 돈을 넘겨 주었는데 절반만 주고 절반은 자기들의 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내 가 다시 소리치자 그들은 나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이때 마야가 경찰서 안에서 달려 나왔다. 아마 사무실에 붙들 어 놓았던 것 같다.

이미 때가 늦었다. 3명의 북조선 경찰이 나를 차에 떠밀어 넣 고 한 명이 마야를 붙들었다.

『김영권, 김영권, 안돼요- 안-돼요.』

경찰서 앞에는 배웅하러 나온 경찰들과 중국인들, 길가던 러 시아인들이 모여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요동치며 소리쳤다.

『마야 죽을때까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잊지 말라.』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 들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경 찰 두명이 또 달려들어 나를 차에 떠밀어 넣었다. 나는 이렇게 값없이 잡혀가는 것이 너무도 분하여 차창을 머 리로 받았다.

『아- 내가 이렇게 잡히다니.』

차는 벌써 출발하였다. 차는 대표부 책임비서 사업전용차였다(도요다). 차가 경찰서 구내를 벗어나자 밧줄로 두 다리를 꽁꽁 결박하고 팔은 뒤로 수갑 을 채웠는데 그래도 미덥지 않아 밧줄로 양쪽 팔굽을 뒤로 다시 꽁 꽁 묶었다. 러시아 경찰 측에서 벗어났으니 아무 짓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사정없이 주먹이 날아 들었다.

나는 머리를 좌석의 뒤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차가 한참 달리자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놈의 새끼 때문에 하루종일 전투를 했구먼. 죽일 놈의 새 끼.』

하고 대표부 안전부 부부장이 투덜거리자 단속지도원이 조용한 목 소리로 말했다.

『여 김영권, 말 좀 해보라. 너 양심이 있나. 당에서는 그래도 너 같은 배반자를 조국에 데려다 교양해서 부모형제들과 만나게 해주 겠다고 애를 쓰는데 러시아 공민이라고 마지막까지 발악해. 그리고 마얀지 뭔지하는 계집애는 어디서 그따위 생쥐새끼같은 걸 데리고 살았어. 네가 얼마나 북조선에 대하여 악선전을 했는지 그 놈의 계 집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에익 더러워서. 한대 때리려다 겨우 참 았어. 너는 사람 새끼가 아니야. 조국을 배반하고, 당을 배반하고, 자 기 부모 처자를 배반하고, 네가 뛰면 어디로 뛰겠어. 소련땅이 아무 리 넓어도 다 붙잡아. 다-.』

하고는 왜 대답이 없는 가며 담배를 한대 붙여 주는 것이었다.

“그따위 개새끼한테 담배는 무슨 담배야.”

부부장이 아직도 분이 삭지 않았는지 투덜거렸다.

『야, 이 개새끼야. 마야라는 계집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못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마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 김일성은 돼지고기처럼 기계로 갈아서 만두를 빚어 개를 주어야 한다.』

그라데끄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는 1300km 정도인데 시간이 감 에 따라 몹시 고통스러웠다. 팔, 다리를 얼마나 꽉 묶어 놓았던지 피가 통하지 못하여 차 츰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힘들어 차가 좀 빨리 달 려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기를 바랬다. 그런데 운전수는 피곤하였던지 속력을 내지않고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저따위 사람같지 않은 놈 때문에 어제부터 한잠도 자지 못 했더니 피곤해서 못견디겠어.』

어제 단속지도원은 나에 대한 문건을 가져오라고 하자 하바로 프스크에 전화로 연락하고 밤에 혹시 러시아 경찰들이 나를 빼돌릴 것 같아 밤새껏 밖에서 지켰다고 한다.

한편 하바로프스크 대표부에서는 나를 잡았다는 연락을 받고 소동이 있었다.
급히 나에 대한 문건을 준비해야 했고 시간을 절약하자면 열 차보다도 승용차로 가야 했는데 성능이 좋은 차는 대표부 책임비서 차 밖에 없었다. 책임비서는 자기 승용차를 내주었고 그들은 밤새 껏 그라데끄로 달려왔고 오늘은 하루종일 전투를 했다고 한다.

그날 마야의 강력한 항의로 하여 러시아 측에서는 법조항을 따지며 나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했고 북조선 측에서는 억지로 나를 끌고 가려고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궁지에 몰린 북조선 측에서는 급히 대표 부에 연락했고 대표부에서는 북조선에 즉시로 연락하였는데 북조선 에서는 달러를 쓰더라도 기어이 나를 잡아오라는 지시가 내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점심시간에 레스토랑에서 오찬회를 갖고 북조선 측 을 지지하는 몇명의 경찰들을 초청하여 매수공작이 진행되었다. 북한측 책임자였던 부부장은 경찰 책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쁘리모르 주경찰 책임자에게 당장 보고하라. 왜 당신들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정 못하겠다면 우리 조선측에서 직 접 보고하겠다.』

이렇게 되어 책임자는 주경찰 책임자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주경찰 책임자는 군말없이 나를 돌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 바로프스크, 쁘리므르 주경찰 고위간부들은 이미 평양을 방문해 대 접도 잘 받고 선물도 받고 북조선 안전원들의 사업을 적극 협력하 기로 약속이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대표부로 호송한 다음에도 대표부 안전부장이 마야가 사 회적 여론을 환기시킬 것 같아 쁘리모르 주경찰 책임자를 찾아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다시 탈출한 다음인 4월 8일 블라디보 스토크 라디오로 아침 6시 이렇게 방송하였다.

『대단히 위험한 인물인 북조선 공민 김영권을 찾습니다.』

실로 그들은 나 때문에 두차례나 돈도 많이 쓰고 고생도 많이 했다. 지금 그들은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한 덕분에 러시아의 사회정 치계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고 있다. 앞으로 통일되면 무슨 말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하바로프스크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8시게 도착하였다. 15시간동안 달려왔다. 오는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약 300km를 외 돌아오다 보니 더 늦어졌다. 대표부 문 앞에 와서야 그들은 팔, 다리를 풀어 주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걸음을 떼려다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팔다리가 제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다리를 묶어 놓았기 때문에 두 다리가 시퍼렇게 피 가 죽어 있었고 두 팔은 뒤로 돌아가 붙은 것처럼 앞으로 당길 수 없었다. 나를 호송하던 사람들도 두 다리를 보도니 끔찍하였던지 달려 들어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이젠 다 왔으니 좀 휴식하면 일 없을거야.』

그들이 나를 무릎에 의지시키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는데 대표부 안전부장이 달려 나왔다. 그는 달려 나오며 호송했던 사람 들과 악수를 하더니 나에게 달려 들었다. 안전부 부주장의 무릎에 기대어 있던 나를 그는 사정없이 구 두발로 얼굴을 걷어 찼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서려는데 또 다시 주먹이 날아 들 었다. 나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또다시 달려들어 머리를 사 정없이 짓밟았다. 나는 아프지도 않고, 화 나지도 않고, 생각도 없었다. 안전부장의 씩씩거리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놈의 입에다 자갈을 물리라고 했는데 왜 안 물렸어. 이 놈 을 당장 목을 매달아 죽이라고.』

나는 그 순간 집을 떠날 때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김영권아, 나는 너를 소련으로 보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군복 무를 오래한 네가 사회 진실을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낸다. 네 가 명심해야 할 문제는 소련 벌목장이 군생활하고는 다르다는 것이 다. 나는 너에게 이름을 달아줄 때 언제나 용맹하게 살라는 뜻에서 호랑이를 비유해서 지워주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 아버지의 이 뜻이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처신하기를 바란다.』

나는 차츰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자 대표부 간부들이 차례로 나를 보려고 들어왔다. 대표부 책임비서가 들어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일 어섰다. 나를 호송했던 부부장이 소개했다.

『책임비서 동지, 이 놈이 바로 김영권입니다. 이 놈의 애비는 출 당 당한 사람이고 이 놈은 군관(장교)으로 복무하다 제대한 놈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소리쳤다.

『이 놈아 똑바로 서라!』

책임비서는 나를 한참 쳐다 보더니 점잖게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음, 어떤 놈인가 했더니 쪼고마한 녀석이 그렇게 악바리였군.』

그리고는 내 가슴을 툭툭 치고는 나가 버렸다.

『이 놈의 애비는 출당이고….』

하는 말이 귓가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떠날 줄 몰랐다.

아버지는 북조선 로동당에서 출당 당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가하고 전쟁후 오래동안 인텔리로서 교육부문에서 근무하였고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분이시다. 출당 당하게 된 이유는 아직 젊었을 때 아무러한 지식도 없는 당간부가 아버지에게 당생활을 잘하라, 사업방법을 고치라, 당에서 준 과업을 왜 실천 못했는가 하면서 너무도 심하게 닥달질하는 통 에 자존심이 살아난 아버지는 당원증을 그의 책상에 집어 던졌다. 사실 그때 북한식대로 계간하면 아버지의 죄는 정치범 수용소에 가 야했다.

그러나 당에서 아버지의 실력과 전쟁공로를 평가하고 출당, 파 면, 추방으로 대치했다. 막노동은 해 보지 못한 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골 에 추방되어 온갖 고생을 하고 10년만에 재직되어 교원으로 일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복당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형 하나, 여동생 둘, 막내로써 남동생 하나, 이렇게 5 형제다. 형은 군복무 8년간 당에 입당하고 제대 후 대학으로 진학했다. 여동생들도 하나는 의학대학을 7년, 하나는 사범대학 4년 과정을 마 쳤고, 막내동생은 군에 복무하고 있다. 나 역시 군복무중인 22살의 어린 나이에 당에 입당하고 군관 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의 과거사로 인 하여 발전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아버지의 출당이라는 과거사때문에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내가 소련 벌목장으로 떠난 것도 이러한 인생의 고달픔이 많 이 작용했다.

제대 후 군단위원회에서는 나를 대학으로 추천하였으나 나는 아버지의 출당이라는 과거사때문에 대학을 졸업해도 크게 좋은 결 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으로 들어갔다.

나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비로드쟌 북조선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북조선 벌목장 감옥들은 비로비르쟌에 대표부 감옥, 체크로민 에 1연합기업소 안전부 감옥소, 띈다에 2연합기업소 안전부 감옥소 가 있다.(3연합은 새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리고 매 사업소 마다 안전부에 감옥이 있다.

안전부는 실지 안전부가 아니고 국가보위부 요원들이다. 북한의 국가보위부는 반정부 음모자들, 정치범, 간첩들만 취급 하는 비밀방첩기관이다. 바로 이러한 보위부 요원들이 외부의 여론을 피하여 여권을 일반공무여권, 벌목장내에서는 안전부라는 명칭으로 활동한다. 구체적인 조직형태와 임무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지적하기로 하겠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비로비쟌으로 호송할 때 부터는 그들의 태 도가 달라졌다. 소리치는 사람도, 때리는 사람도 없었으며 호송원들은 흔히 이 렇게 말했다.

『김영권, 딴 생각 하지 말고 자기 비판을 잘 하고 조국에 나가 야지. 우리 당정책은 일사적인 과오를 범했다고 처벌은 좀 할 수 있 어도 다 교양해서 다시 혁명대오에 세워주는 좋은 정책이야. 김영권 가 의식적으로 당과 수령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나는 비로비쟌에 4일간 갇혀 있었는데 그 기간 비판서 한 번 쓰는 것이 끝이었다. 심문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인정있는 계호들은 (국가보위부의 직업적인 간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담배도 한대씩 주었고 철창 사이로 농담도 주고 받았다. 나는 웃으며 그들과 농담을 하면서도 매 순간 순간 탈출할 기 회만 노렸다.

4일만에 나는 다시 체크로민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이 나를 이렇게 깊은 산골로 호송한 것 은 마야가 하바로프스크 대표부에 찾아와서 나를 내놓으라고 항의 했고 내놓지 않으면 유엔인권옹호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옐친 대통령에게 호소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2년전 한천 길 사건처럼 복잡하게 될 것 같아 산골로 빼돌린 것이다.

호송시 4명의 경찰이 호송하였는데 비로비드쟌에서 체코도민 까지의 중간지점인 띄르마에서 북조선 안전원들이 도중 검사까지 하였다. 체코도민 감옥소에 도착하여 감방에 들어서니 놀랍게도 작은 감방에(길이 5m, 너비 3.5m) 10명의 죄인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 다. 맞은 켠에 또 하나의 감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16명이 갇혀 있 다고 한다.

더러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온 몸에 이가 얼마나 많은지 처음엔 더러워서 음식도 못 먹고 잠도 잘 수 없었다.

도착한 다음 날이다.(3월 29일.) 간수가 들어 오더니 특별히 나에게만 다리 키부스를 대고 풀 지 못하게 철사로 결박해 놓는 것이었다.

『아니, 이거. 감방 안에서도 다리에 수갑을 채우는 가요?』

하고 나는 투덜거렸다.

『상부의 특별지시니 할 수 없어. 어쩌겠나 좀 참으라고.』

그리고 옆에 있는 한 죄인에게 내가 불편이 없도록 움직일 때 면 도와주라는 것이다.

3월 30일.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은 1연합안전부 경제감찰 상급지도원이 담당했는데 그는 내 말을 듣고 진술서를 쓰고 나는 나대로 비판서를 썼다. 그는 아주 교활한 사람이었다.

심문할 때는 담배를 주고 나를 불쌍히 생각하는것처럼 도망쳤 으면 잡히지 말아야지 잡히면 되는가 하는 식으로 좋게 심문하였는 데 그가 작성하는 진술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법조항대로 한다면 나에게는 아무 죄도 없기 때문에 사상비판 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남조선 대사관이나 목사들을 만난 일은 없는 가 고 물었다.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가지고 쓴 나의 비판서와 그가 작성한 진 술서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내용을 분석한 각도가 정치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부인하였으나 그가 강박하고 또 나 역시 죽으면 죽었지 북한으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확고했으므로 인정 한다는 손도장을 찍어 버렸다.

심문이 끝나고 감방으로 돌아온 나는 소름끼치는 끔찍한 광경 을 목격하였다. 이가 너무 많아서 소독한다며 간수가 지켜 서서 의약독소를 (살충제의 일종) 매트리스와 이불에 치고 모든 사람의 속옷에 헥사 (역시 살충제의 일종)를 뿌리라는 것이었다. 간수가 나를 보고 헥사를 몸에 치지 않으면 이들이 모두 나에게 모여든다며 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약을 다 친 다음 죄인들이 냄새가 빠질 때까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자고 하자 간수는 간부들이 보면 괜 히 욕만 먹는다며 좀 참으라는 것이었다.

4월 2일 오후 5시경이다. 나더러 옷을 다 입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가자 1연합 안전부장이 나를 보고 오늘 저녁 차로 조국으로 나가게 되었다며 열차에서 주의할 점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김영권 동무. 절대로 걱정하지 마시요. 조국에 나가면 아마 약 1~2년 노동교양소에서 고양을 받게 될 거요. 우리가 김영권 동무의 문건을 그렇게 작성하였소. 그러니 열차로 가는 도중에 호 송안전원들에게 애를 먹인다든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다르게 취급 될 수 있소.』

그리고 나를 호송하게 될 안전원들을 소개하였다. 모두 4명이 었는데 모두 50대의 사람들이었다. 북조선 국경인 하싼까지 나가자면 3일이 걸려야 한다. 나의 운명에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남았다. 나를 죽게 할 수도 있고, 살게 할 수도 있는 바로 그 3일. 나 는 그 3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기도할 줄도 몰랐으나 속으로 이 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나에게 주어진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300년으로 길 게 하여 주십이요. 그리고 그 3일 기간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나에게 저 4명의 경찰을 단번에 제껴버릴 수 있는 장수 힘을 안겨 주십시요.』

안전부장이 시간이 되었으니 나가자고 하자 호송원들이 다리 키부스 상태를 조사하고 한쪽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수갑의 한쪽에 는 30kg 트렁크를 매달았다. 그렇게 트렁크를 달아 놓으니 여행을 떠난 평범한 사람 같았다. 러시아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거짓과 논속임으로 일생을 살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충실 한 개들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다. 안전부장이 역에까지 따라 나와 바래주었다. 어느덧 열차는 출발하였다.

여행 노정은 다음과 같았다. 4월 2일 저녁 9시경 우르갈(체크도민에서 40km)에서 띈다-블 라디보스토크행 열차로 우스리스크까지(4월 4일 정오 12시 도착), 우 스리스크에서 3시간 후인 15시경 블라디보스토크-하싼행 열차를 갈 아 타면 4월 5일 새벽 1시경에 도착하고 바로 4월 5일 그날로 국경 을 넘게 되었다. 나는 탈출계획을 이미 세웠다.

1. 열차에서 화장실에 들어 갔다가 창문을 깨고 달리는 열차 에서 뛰어 내린다.
2. 수갑을 푸는데 성공하면 밤에 당직 근무를 때려 눕히고 열 차에서 뛰어 내린다.
3. 우쓰리스크에서 갈아타는 기회와 하싼에서 세관검사를 받 기전까지 기회를 이용한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마지막 최종계획을 세웠다.
1. 탈출이 실패하면 마지막 하싼역에서 홈으로 들어서는 열차 를 머리로 들이 받는다.
2. 일단 세관검열이 끝나면 러시아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감 시한다. 그때 러시아 군인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빼앗는 것처럼 하 면 그들은 나에게 사격할 것이다.

열차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호송원들에게 담배 한대 피울 수 있는 가고 하자 두 명이 열차 승강대에 따라 나와 같이 피웠고, 변 소에 들어가자 변소문을 닫지 못하게 하고 한 명이 변소에 따라 들 어왔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또 변소에 들어온 호송원의 감시로 첫번째 탈출계획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두 명이 변소에 들어가 문도 닫지 않고 대소변을 보는 꼴을 본 러시아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자리에 눕자 호송원들도 2명은 자리에 눕고 2명이 앉아 서 나를 지켰다. 한두시간 지나서 내가 자는 척 하자 세명이 잠들 고 한명만 당직근무로 남았다.
나는 감방에 있을 때 탈출준비로 바늘 한개, 빈침 한개, 50mm 못 한개를 준비하였는데 바늘과 빈침은 수갑을 열기 위한 것이었고, 못은 다리 키부스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감추었던 바늘과 빈침으로 수갑을 열기 시작했는데 날 밝을때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열 수 없었다. 날이 밝으며 열차 안 이 훤해지면서 나는 잠들었다가 오전 11시경 경찰들이 깨워서야 자 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될수록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이야기를 자연스럽 게, 그리고 탈출하여 남의 나라에서 살아보니 제 나라 제 땅이 제 일 좋더라는 식으로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처럼 말하자 그들도 긴장을 좀 늦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희들끼리 조국에 대한 은근한 불평을 부리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말을 통하여 최근에 김정일이 새로운 체제수호 구루빠 《비사회주의 구루빠》를 조직하였으며 그 구루빠는 이전에 많은 통제구루빠들이 조직되었던 다른 것들 보다 비할 바 없이 큰 권한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감독, 통제한다는 것이다.
북조선에서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그의 미래에 이상이 생길 때 마다 이러한 광신적인 놀음이 벌어진다.

나는 그날도 저녁식사후 바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날은 확실히 감시가 덜 하였다. 당직근무를 서면서 자리를 비우고 승강기에 나가 담배를 피우 기까지 하였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 무진 애를 쓴 끝에 나는 수갑을 푸는데 성공하였다.

수갑의 열쇠 구멍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었는데 걸턱짬 으로 빈침을 밀어 넣고 걸턱 3칸을 넘겼다. 나는 너무 기뻐 함성을 지를뻔 했다. 수갑에서 가만히 손을 뽑아 보았다. 손이 힘들게 빠져 나왔다.

이젠 다리에 건 키부스가 문제였는데 10mm 철근으로 되었기 때문에 힘을 주어 구부려 놓으면 불편하기는 하나 뛸 수는 있었다. 나는 날 밝기 전에 두번째 계획대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하 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당직근무가 근무교대하고 잠 이 오지 않았던지 맥주를 꺼내 놓고 둘이서 같이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 그가 얼마나 미웠던지….

내가 자는 줄 알고 그들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김영권 저 놈은 날쌘 놈이야. 카자흐스탄에서 얻은 색시도 참 곱게 생겼다는 거야. 그리고 돈 두 많이 벌었다면서? 도망친 놈들 은 대체로 남의 집에서 일해 주면서 산다는데 저 놈은 다르거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옆에 사람이 맥주를 쭉 들이 마시며 말했다.

『도망쳤으면 집히지 말아야지. 잡힌 다음에 그게 필요 있어? 그런걸 보면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머저리야. 소문은 저 놈이 소련 여권까지 다 만들었다고 하던데 허튼 소린것 같아. 여권만 있으면 잡지 못하게 되어 있거든.』

그러자 이 쪽 사람이 반박했다.

『여, 여, 붙잡지 못할게 뭐야. 한천걸이는 붙잡아다가 원래 계 획은 참통(벌목정 사람들이 3년간 일하고 귀국할때 번돈으로 상품 을 사서 포장하는 두꺼운 판자로 만든 통)에 넣어가지고 조국에 내 가자고 했어. 그런데 세관검열할때 탄로나면 그건 큰 일이거든. 그 래서 비행기로 호송하려다 잡혀서 러시아측에 빼앗겼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북조선측) 뭘 하는 것 보면 좀 우둔해. 사람을 어떻 게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도망칠 수 밖에 있어. 지금 노동자들이 한 달에 70루불 밖에 못 탄다는 거야. 한달 생활 비가 담배한갑 살 돈도 안되는데 누가 좋다고 하겠어. 그래서 일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가는 초께르(묶어서 조국으 로 소환한다는 것) 될까봐 무서워서 돌아오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 는 거지.』

하면서 투덜거렸다.

어느덧 날 밝기 시작했다. 열차는 우쓰리쓰크에 거의 도착하였다. 호송을 책임졌던 안전원이 트렁크를 매달았던 수갑을 풀어 양 손을 다 수갑에 채웠다. 왼쪽 팔목의 수갑 상태를 검열할까봐 긴장하였으나 검열하지 않고 다리에서 키부스 상태만 검열하였다.

열차는 어느덧 우쑤리쓰크에 도착하여 우리는 열차에서 내렸 다. 여기서 3시간 후에 국경역인 하싼으로 나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우리 일행은 역대합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 다. 호송을 책임진 안전원이 열차표 사러 가자고 하며 다른 한 명 을 데리고 갔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좀 앉고 싶다고 말하고 지함 위에 걸터 앉았다. 내가 앉 자 그들은 담배를 피우라며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별 다른 의심은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김영권, 러시아 사람들이 수갑을 보지 않게 저쪽으로 돌아 앉 아 피우라구.』

나는 돌아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하여 바지 가랑이를 뜯 었다. 왜냐하면 다리 키부스를 발목과 허벅다리에 원형으로 된 철 근을 대고 발목과 허벅다리 사이에 10mm 철근으로 잡아 주었기 때 문에 다리를 구부릴 수 없었다. 때문에 뛰자면 철근을 구부리면 되 는데 바지 가랑이가 좁아서 대단히 불편한 것이다.

준비는 다 되었다. 열차표를 사러 갔던 두 명의 호송원들이 오 기 전에 빨리 행동해야 했다. 나는 슬그머니 솜옷의 쟈크를 벌려놓 고 호송원에서 말했다.

『지도원 동지, 솜옷 자크를 좀 채워주십시오. 밖에 나오니 좀 추운데요.』

그러자 호송원이 웃으며 투덜거렸다.

『김영권, 나는 너 때문에 고생이 많아. 변소에 따라 다녀야 하 지. 쟈크를 채워 달라, 벗겨 달라, 그러나 괜찮아. 이건 농담이고 한 대 더 피울래?』

그가 자크를 한 반쯤 올려 채웠을까. 수갑에서 한쪽 손을 재 빨리 뽑아 그의 두 어깨를 잡고 힘껏 머리로 받았다. 제대로 명중 한 것 같았다. 그는 윽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싸 쥐고 비틀거렸다. 두번째 호송원이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 어- 야 김영권- 김영권.』

하며 달려들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나는 팔목의 수갑을 쳐들어 보이며 달려 들기만 하면 죽인다 고 하며 뛰려고 하는데 그가 달려 들었다. 나는 발로 힘껏 걷어 찼 는데 똑바로 맞지 않았는지 또 달려 든다.

나는 한쪽 팔목에 걸려 있는 수갑을 휘둘러 그의 머리를 힘껏 들이쳤다. 그리고 발로 다시 한번 걷어 차자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힘을 주어 다리를 굽혀 키부스 철근을 구부린 다음 달리 기 시작했다. 불과 3~4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등 뒤에서 서라는 고함이 들렸다. 한 100m 달렸을까. 뒤를 돌 아 보니 한 50m 뒤에서 한 사람이 따라오며 소리쳤다. 나는 장난이 심했던 어린시절처럼 주먹을 쳐들고

『이거나 먹어라』

하고 소리치고 그냥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에 닫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골목길로 한참 달리다 돌아보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못으로 키부스를 풀었다. 그리고 또 달렸다.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러시아 제1텔레비젼 방송국 기자 와씰린 우뚜 낀이었다.

『시베리아 북조선 벌목장에 갔던 기자 조사단이 도착하였습 니다. 오늘 오후 3시에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장소는 당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당신이 선택하는 임의의 장소로 우리가 찾아가겠 습니다.』

나는 탈출한 후 러시아 옐친 대통령에게 정치망명을 신청하고 인권옹호위원회, 법률가협회에 시베리아 북조선 벌목장에서의 인권 유린행위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기자 조사단이 조직되어 벌목장 취재를 진행하였고 나의 고발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약속대로 오후 3시 인터뷰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러시아 땅에 서 북조선 경찰들이 러시아 경찰들을 개별적으로 돈으로 매수하여 러시아 공민들의 인권까지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탈출 후 있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나 :『4월 4일 나는 탈출하여 택시를 타고 불라디보스토크에 있 는 마야에게로 찾아 갔습니다.』

기자 :『돈이 없었을텐데 택시를 어떻게 탔습니까?』

나 :『예, 저는 집에 가사 돈을 물기로 하였지요. 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는데 마야는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제 가 들어서자 꿈인지 생신지 분간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자 :『참으로 그때는 감격적인 상봉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 :『그 다음날 오전 11시경에 북한 경찰들이 러시아 경찰을 데 리고 마야가 살고 있는 와로느(마야 언니)네 집에 와서 가택수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지요. 나를 찾지 못한 북 한경찰들은 무려 45일간 그 집과 마야의 맏 언니 이리나의 집, 이 리나의 딸 나시쨔 집을 포위하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마야와 친 척들의 뒤를 미행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마야를 만날 수 없기 때문 에 전화로 마야에게 빨리 경찰서에 찾아가 항의하고 옐친 대통령과 인권위원회에 고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찰측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러 시아 경찰을 마야 언니 와란네 집으로 보낸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 다. 그후 4, 8일 두 번째로 그들이 찾아왔는데 그때 와란이 러시아 경찰에게 이름을 대 줄 것과 합법적으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문 건이 있는 가고 따지자 그는 황급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 자 그들은 이리나의 딸 나시쨔 집에 찾아 갔는데 그때 나시쨔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썩 사라져라. 어디서 이따위 사람들이 나에게 왔는가.
그러나 그들의 감시와 미행을 계속 되었습니다. 미야가 두번째로 경찰에 찾아가 항의하자 북조선 경찰들은 더 는 합법적으로 감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어 그들은 아파 트에 자리를 잡고 러시아 인을 돈으로 매수하여 개인 자가용차를 대기시키고 차안에서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한달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숨어 있다가 모스크 바에 와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였습니다.』

기자 : 『한달 동안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숨어 있었습니까?』

나 :『물론 있었지요. 남조선에서 오신 목사 이강수, 정득수 님 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처지였으나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나를 친형제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뜨거운 민족애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자 :『앞으로 망명이 승인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 :『고마운 러시아를 위해서 일할 것이고 조국의 통일을 위해 서 일할 생각입니다.』

기자는 그날 통일이 왜 안되는가? 핵사찰문제를 어떻게 생각 하는가? 심지어 13차 세계(평양)청년학생축전때 자기 친구가 참가하였 는데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평영은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더라고 하던데 그 문제들까지 질문하였다. 끝으로 그는 나의 앞길에 기쁨과 행복, 영광이 있기를 빌었다. (러시아 제1텔리비젼 방송) 정치 국 프로그램으로 7월 2일, 7월 9일 두번 방영하고, 러시아 라디오도 6월 18일, 러시아 주간정치잡지 『(새소식) 27호도 나에 대한 실기가 실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이 불행한 청년의 운명은 옐친 대통령의 손에 달려있다.』라고….

나는 모스크바 어느 한 대학의 기숙사에서 한동안 숙박하였는 데 우연히 남조선 유학생 권세운을 알게 되어 그와 친구가 되었고 그의 소개로 동부유럽 학생연수단을 오늘까지 4번 만나 간담회를 가졌다.

그들은 모두 20대의 청춘들이었고 보고 싶어 했고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젊음과 낭만에 넘친 그들의 얼굴에서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보았고 산 좋고 물 맑은 삼천리 금수강산의 신선함을 느꼈다.

파란 곡절의 언덕과 언덕을 넘은 나의 남행길. 남행길의 저 한 끝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한 여름의 동 트는 새벽! 차분히 내려앉은 청신한 이슬방울들이 희미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조만간에 아침은 오리라!!


2001년 12월 5일 김영권(가명)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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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뭔지 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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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2005-11-10 16:05:33
    동지회님
    이글을 이젠 끝이난겁니까?
    아니면 계속 되는겁니까?
    답변을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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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연 2005-11-10 19:07:43
    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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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지회 2005-11-11 09:47:45
    네 여기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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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2005-11-11 12:14:34
    그래요
    그럼 이사람은 지금 한국에 계시는겁니까?
    아니면 그냥 로씨아 게시는겁니까?
    동지회님
    답변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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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2005-11-11 12:27:11
    동지회님,
    전 이땟껏 님이 올려준 글 많이 보아왔습니다.
    여기서 전 모르고있던 많은 사실을 명백하게 또 알게되였구요.
    정말 사실이라고 믿을수 없는 현실 앞에서 또 많은 눈믈을 흘려구요.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면서 지난날 장군아닌 장군을 장군이라 모셔오고 어버이 아닌 어버이를 어버이라 불러야 했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더욱 똑똑히 명백히 알게되였습니다.
    지금도 저 이북에 이름모를 이전에 우리와같은 순민들은 북한의 어리석은 지도 정책에 순종하며,자기의 운명을 다바쳐 살아갈 생각을 하면 가슴아파 옵니다.
    동지회님,
    앞으로 더 좋고 힘이 될 그런 글, 력사가 가지고있는 진실한 그러한글을 많이 올려주길 바람니다.
    환상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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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지회 2005-11-11 12:59:40
    수기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영권님은 90년대에 한국으로 입국하셔서 잘 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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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2005-11-12 15:51:51
    아~~ 그렇군요.
    잘되였어요.
    파란만장의 고생이 많은 운명, 드디여 봄을 안겨주었군요
    김영권님께 축하들이고 싶어집니다.
    '북한 정권과 이기고 성공한 김영권님,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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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 2005-11-13 11:15:44
    김영권님 고맙습니다
    님의 글을 잘보았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였어요.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살고 계신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당연하게 그렇게 되리라 믿었어요.
    의지가 강한 우리 탈북자들을 그누구도 막지 못할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탈북자들은 단합되여야 합니다.
    그럼 님의 앞으로의 건강에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앓지말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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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 2005-11-13 19:53:24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극적인 내용에 감동적인 마야의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는군요.
    남행길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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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n h s 2005-11-26 19:03:51
    김영권님! 고생 많이 하셧읍니다. 감동스토리입니다.영화로 만들면 좋겠는데...? 지금은 한국에도 빨갱이가 하도 많다고 하니... may be,다음 정권에서나,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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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동^^ 2005-12-10 00:15:35
    정말 영화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한테 알릴 수 있으면 딱이겠네요... 요즘 한국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보니 잘만 만들면 국제적인 여론도 환기시킬 수 있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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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름 2005-12-10 17:20:42
    마야로 부르셨던 당시 소련국적의 분과는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하군요 함게 한국으로 오셨는지 아님 또 이별하여 사셔야만 하는 처지신지..
    우리 형제를 돌봐주고 사랑으로 돌봐준 마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동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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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자 2005-12-31 20:56:54
    마야도 조선교포 잖아요?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조선말을 할줄 모른줄 알았는데 수기를 보니 조선말을 잘 하는군요..
    어려운 상황에서 몇번씩이나 탈출한 김영권님 참으로 용맹하고 두뇌가 명석한 분이시군요
    북한의 안해와 자식은 한국에서의 안착이 편해진담에 천천히 해결하시기 바라며 마야와의 사랑도 결과가 있었음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부디 평생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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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수유 2006-01-07 14:26:07
    길고긴 터널을 빠져 나오셨군요.
    님의 고난의 행군의 끝자락에서 만난 찬란한 태양이 님을 미래를 밝혀주리라 확신 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시길 두손 모아 빌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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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카축카 2006-07-29 17:34:00
    감동깊은 글 잘읽었습니다. 또한 님의 의지에 감탄하였고요. 한국에 오셨다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벌써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군요.
    마야라는 여인의 사랑에 대해서도 대단하단 말밖에는 할말이 없군요.
    모쪼록 행복하게 사시고 개정일이 죽어 통일되는 그날에 북의 부모형제들 만나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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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동 2006-08-30 23:28:37
    저역시 비슷한경로 를 통해입국햇지만 한번도 위기를 경험핮못했습니다. 짜릿한기분을 대신느끼 며 이글을 시간가는줄 모르게 보았습니다. 여건이되면 만나뵙고 싶습니다. 촉결이라는단어 를읽을때 정말 전률했습니다.띈다,비르비잔,,,,정말오래만에 들어봅니다.님이허락하시면 제주소를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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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안 아빠★ 2006-08-31 19:16:56
    동지회님 !! 저는 중국에 잇는탈북자 인데요 현재 22살이고요 여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으로 가는길이 없을가요 듣자니 지금은 이전가 달라서 한국으로 탈출하다가 잡혀 북한으로 돌아가는길에는 형벌이 이전보다 백배로 더 험해 졋다는데 ㅠㅠ 무섭네요 ,, 어떻게 무사히 하나원까지 갈수 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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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2-06 22:13:51
    김영권 님 파란곡절많이격으셧네요 지금은--한국에서잘살구잇다니맘이놓이구요 두분의깊은사랑에 많은감동을받앗어요 그런데지금도마야님과같이행복하게살구잇는지궁금하네요 두분의사랑영원하길기도하면서 이글을보냅니다 부디부디행복하세요 중국 조선족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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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2-06 22:22:06
    미안아빠님 저의소견을들어보세요 꼭한국으로가야살길열리는게아닙니다 만약에---성공못하면---한국에가서라도 생각과는달리현실은 무정합니다 대우도이전과달리 최하층취급하구요 그사회적응하려면 너무힘들겁니다 어디간들타향인데 안전하게 중국어디선가조용히살다보면 따스한봄날은꼭올거입니다 너무성급해마세요 그대에게도 행복이이찾아올겁니다 하늘이사람을죽으라는법이 없잖습니까 그대도가족과함께모여사는행복한날은올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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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는게뭔지 2007-06-25 10:32:46
    김영권님의 인생사 잘 읽었습니다. 쉽지않은 도망길이었네요. 저는 중국교포입니다. 옆에 온다면 도와드리고 싶군요. 몽골쪽으로 한번 나가보시죠. 그쪽으로는 망명이 쉽게 이뤄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님 이미 한국에 가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통일은 이뤄질겁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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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정 ip1 2011-06-11 14:15:14
    고생참많으솄습니다.영화를본것갔습니다.당신은명이참긴사람이예요.고생끝에락이온다고당신은이제부터행복하실겁니다.마야관게는엇떻게되였는지.마야를있지마세요.
    당신이소원대로실현하였으니힘내요행복하게잘살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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