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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사과 - 김옥선
동지회 13 8896 2005-12-15 14:32:10
김옥선 북한인권국제대회 에세이공모 가작

일주일에 두번은 할머니 집에 오는 예쁜 손녀는 밥을 잘먹지 않아 나와 세 살짜리와 늘 싱갱이질이다. "우리 예쁜공주님 밥 먹자요"하면 "시~ 어, 난 오렌지" 하고는 냉장고 문을 열고 오렌지를 꺼낸다. 한알을 꺼내서는 껍질도 참 잘 벗기는데는, 두어쪽 먹고는 "할머니 나 핑크색 사과 먹을래"하면서 사과껍질을 깎아달라고 한다.

북한에서 임신되여서 한국까지 여섯개나라 국경을 걸쳐 오면서 말 못할 고통속에서 어미배속에서 용케도 견디여 준 손녀를 볼때마다 너무나도 귀엽고 행복하다. 하나원을 나와서 두달도 못되여 서울에서 태여난 행복동이인데,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것은 내가 자식들을 키울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다.

밥상에 둘러 앉아 식사할때 아이들은 밥알 한알 흘릴세라 다 먹을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데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밥을 먹다 보니 온통 바닥에 밥알 투성이다.그 뿐이랴,숟가락도 핑크색, 아이스크림 살때도 핑크색, 옷도 핑크색을 더 좋아한다.처음에 핑크색 숟가락, 핑크색 숟가락 할때에 무슨소리인가 하였다. 제 엄마한테 물으니 빨간색이라 한다.색갈뿐 아니라 말씨, 노래부르며 몸 흔드는것까지 분명 한국어린이다.

사과를 찾을때마다 핑크색이라는 접두사를 꼭 앞에 붙여서 찾는다. 시장에 늘어선 과일 매대에서나 혹은 동네슈퍼에서나,지어는 한 자동차씩 싣고 와서 파는 사과를 볼때나, 사과를 먹을때마다 나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이 있다.사과 껍질을 칼로 벗기다가도 내가 매일 이렇게 먹어도 되는가 하는 자책감에 흠칫 놀라 한 동안 과일을 먹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한 아파트에 살면서 서로 아이들 때문에 자연히 친구가 된 철이 엄마를 어느 날 장마당에서 만났는데 19살인 큰딸이 파라티부스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쌀 밥 한 그릇 못해 주는것도 어미로서 속이 탄데 딸은 자꾸만 사과를 찾는다고 한다. 내 손을 붙잡고 울먹이는 철이 엄마를 그냥 보낼 수 없어 내가 슬그머니 그의 손에 사과 한 알이라도 사 먹이라고 10원짜리 한 장을 쥐여 주었다.

나는 그때 어느 귀국자가 운영하는 불고기집에서 식당일을 하였는데 저녁이면 장마당에 나가 야채와 양념류,돼지고기를 사오군 하였는데 그돈에서 잘라 준 셈이다. 무엇을 얼마치 샀는가를 다 기록하는데 내가 결국 조절한 셈이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금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예쁘고 참한딸인데 전달하는 금희 아버지도 듣고 있는 나도 엄연한 현실을 망각한 채 멍하니 서로 쳐다 보았다. 딸 잃은 엄마는 바깥 출입을 못하고 있다며 금희 아버지가 발길을 떼자 나는 넋잃은 사람처럼 흐르는 눈물도 감출 념 못하고 다리 맥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안고 말았다.

말해서 무엇하랴.죽음이란 현실이 우리 옆에 도사리고 있음을, 흐르는 눈물속으로 넋잃고 있을 친구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떠올랐지만 나는 가서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고 죽은 금순의 모습이 자꾸만 얼른거린다. 나는끝내 친구한테 가지 못했다. 빈손이였고 그때 장마당에서 돈을 더 주지 못한것이 후회스러웠다.죽기전에 사과라도 몇개 더 먹였더라면 지금 내 가슴이 이렇게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 운명은 시간 문제라고 했던가.

내가 식당에서 일하는로임으로 도저히 네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어 우리 네 식구는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서 팔아서 살기로 합의하고 3월초에 산 속으로 들어 갔다. 뼈마디에 힘이 없으니 걸음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벌써 4년세월 흰 쌀 구경 못해보았으니 말 해 무엇하랴.삼사십리길을 우리는 하루종일 걸어서 겨우 도착하였다. 약초를 많이 캐면 밥도 먹어 볼 수 있고 돈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친다리를 끌고 나무하는 사람들의 지어놓은 불도 없는 집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올때 스물네살된 딸이 "어머니, 나 경도(생리)가 다 없어졌어, 그리고 가슴도 다 작아지고"하던 말이 자꾸되 새겨지며 신경이 씌여졌다. 정녕 우리의 건강이 최악의 상태가 아닌가 겉모습도 다 살이빠지고 몰골이 사람이 아닌데 내부 생리학적 역활도 최후의 시한점에 도달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북 여성들 태반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시기를 지나서는 대부분 가슴이 다 작아지고 없다. 나자신도 30대 후반이 되니 가슴이 남자나 다를 바 없었다. 나 뿐 아니라 주위 여자분 거의 다 같은 현상이였다. 실지 이북에서는 여성들이 시집가기전에 가슴띠를 띤다. 여기 한국에서처럼 앞가슴을 살리기 위한 브래지어가 아닌 앞가슴을 알리지 않게하기 위한 가슴띠다.

어떻게 만든걸가 혹시 한국분들이 모를가봐 주를 달면 띠로 앞가슴을 꽉 동였다고 생각하세요. 한창 처녀로 멋과 류행으로 꽃필 나이에 오십대 후반의 페경기 현상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딸에게 온 것이였다. 나는 속으로 너무 가슴아파 통곡이 나왔으나 어떻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못해 주었다. 영양보충만이 좋은 치료제였으나 그 당시 형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또 거짓말 위로를 해 주기 싫었다.

그런데 일은 또 터지고야 말았다. 6월초에 공장에서 모내기 동원나갔는데(동원나가면 그래도 쌀 죽이라도 먹겠지 하는 생각에 내보냈다.) 일주일도 안되였는데 작업반장이 딸을 데리고 집에 나타났다. "현희가 열이 심해서 삼일째 아무것도 못먹는데 집에서 좀 잘 간호해 주세요"하면서 딸을 데려 왔다.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눕히니 온 몸이 불덩이 같았고 딸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불을 두개씩 덮어 주어도 그냥 떨었다. 체온께로 열을 재니 체온계의 눈금이 42도까지 있는데 눈금이 숫자가 더 없어 못올라가고 있었다.

"파라티부스"구나 이북에서 숱한 생명을 앗아가고 또 그 후유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자로 되였는데 돈 만원은 있어야 병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하랴. 여기 같으면 왱왱하며 앰블런스 차를 부르며 아마 난리가 났을것이다. 내가 병원에 찾아가 입원치료 받겠다고 하니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병원에 파라티부스요. 장티부스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병들이 많이 발생하여 입원하재도 침대가 없으며, 또 치료약도 본인이 구해와야 하며, 식사도 집에서 날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바엔 집에서 치료하지 이게 무슨 병원인가.나는 절망을 안고 힘없는 발길을 집으로 돌리였다. 이래서 금순이도 돈이 없어 약도 온전히 써 보지 못하고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화는 쌍으로 날아든다더니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아서 약 값을 구해 보겠다던 남편이 집 나간지 3일만에 알지도 못하는 분의 부축으로 집 문턱을 들어 서는데 나는 깜짝놀랐다. 사람이 아니라 백골이 들어오고 있었다. 눈확이 확 꺼져 들어간 것이 산 사람이 아니라 산 해골이였다. 나무하러 간 사람이 오지 않기에 근심은 하였으나 산에서 구을러서 의식을 잃은채 3일 동안 아무것도 못먹고 있다가 천행으로 나무하러 왔던 분이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 올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날부터 남편의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환자 둘을 눕혀놓고 나는 정말로 힘든 나날을보내였다.남편은 없어서 더 못먹고 딸은 고열로 입술이 다 마르고 목이 타 들어가 물 넘기기도 힘들어 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옆에 붙어서 환자만 간호 할 수도 없는 형편이였다. 내가 장마당에 나가 아무것이라도 팔아서 약과 먹을 것을 사 와야 했다. 쌀은 비싸서 살 엄두를 못내고 한 그릇에 10원씩 파는 밥한공기를 사다가 다시 물을 넣고 끓여서 멀건 죽을 쑤었다. 미음도 넘기기 힘든 딸에게는 미음을 한 두숟가락씩 더 넣어 주고는 밖에 나갈때는 수건을 찬 물에 적셔 입에 물려 주었다. 수건 물이 줄줄 목구멍으로 흘러들기를 바라면서 나는 옷가지들을 파려고 장마당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는 시집 갈 딸의 혼수감으로 마련했던 물건인데 팔자고 보니 절반값이 아니라 십분의 일에도 팔리면 다행이였다. 혼수 상태에 있는 딸의 옆에도 앉아 있지 못하고 열이 잘 내린다는 "신토미찡"과 중국약을 사먹였건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입안이 쓰거우니 사과만 찾는다. 그런데 금순이 앓을 때는 가을이라 10원하던 사과가 지금은 비철이라 30원을 부른다. 사과 한알 사면 집에 낟알은 못 사가지고 가지. 할 수없이 집에 가서는 딸보고 장마당에 사과 파는것이 없다고 거짓말하고는 아이스크림 한개를 사다가(10원)물려 주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열은 벌써 근 일주일 되는데 내리지 않자 나는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겠고 자꾸 눈물만 쏟아지는 것이였다.

장마다에서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왜 자꾸 우는가 물어보기에 내가 울먹거리며 딸이 파라티부스로 사경을 헤매인다고 하니 그 아주머니가 자기도 그 병에 걸렸댔는데 민간요법으로 고쳤다며 방법을 알려주었다. 긴가민가 하며 나는 녹두 한홉과 오징어 세 마리를 사가지고 와서 푹 끓여서 그 물을 먹이였다. 이튿날 저녁까지 네번에 먹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더니. 코피를 쏟기 시작하였다. 이불을 미처 치우지 못해 이불에도 숱한 코피를 쏟았다. 나는 속으로 코피가 나왔으니 인제는 열이 내리겠구나.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쉬였다.

코피가 얼마나 나오는지 마지막에는 선지피 덩어리가 물컹물컹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혹시 나쁜병이 걸린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머리에 언뜻 스쳐진다. 다행이도 열은 내리기 시작했다. 인제는 입맛을 돋구어야 살겠는데 하는 생각에 장마당으로 나가면서 남편보고 뭘먹고 싶은가 물어보니 된장국이란다.딸에게 물어보니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사과 사달라던 것을 안 사주어 삐젔는가 생각하고 딸을 흔들면서 뭘 먹고 싶은가 물으니 "엄마 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아" 하는것이였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딸을 와락 끓어안고 통곡하였다."이 세월에 어떻게 귀먹어리로 살아가겠니, 옛날부터벙어리보다 귀머거리가 더 머저리란데 시집은 어떻게 가며 에미 죽은후에는 누가 너를 돌봐주겠느냐,차라리 죽는게 낫지 살아선 무엇하리"하며 둘이 대성통곡하였다. 생각해 봐도 앞날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가질 것이 없었다. 자랑은 아니여도 남다른 미모와 총명으로 외국인 호텔에서 데리려 온것도 보내지 않고, 경공대 다니는 사귀는 총각이있는 것을 알고도 내가 아직 만나주지 않았는데 딸을 이렇게 내가 만들어 놓고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하는 절망감으로 정말로 죽고만 싶었다. 그날 하루종일 장마당에 앉아 넋나간 모양으로 혼자 중얼거리기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정말 세상탓이 아니고 내탓인가, 누구에게 이 고통을 전하고 위로받아야 하는가. 이렇게 다 죽어야 하는가.나는 이 글에서 아들의 죽음은 쓰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가슴찟기기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북한어린이돕기 등이런 문구들은 보아와도 여성들의 고통과 그들의 건강에 대하여 언급하는것은 보지 못하였다. 여성이 건강해야 건강한 후대가 나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거늘 처녀 시절에 벌써 생리가 없어지고 가슴이 다 작아져 붙은것이 오늘의 북한여성들의 모습이다.

우리딸도 중국에 들어와서 한달동안 밥을 먹으니 약 하나 쓰지않고 귀도 열리고 생리도 정상으로 가슴도 살아나고, 더우기 놀라운것은 오라지않아 육십을 바라보는 나도 가슴이 봉긋하게 살아난 것이다. 한끼 밥 한공기 밥도 백성들에게 먹이지 못해 300만이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강건너다 죽고, 붙잡혀가 총살당하고 이런나라에 무슨 인권이 있다고 유엔에서 북한 인권 결의안 가결시 한국정부는 기권하는가 의문스럽다. 우리를 남쪽에서 또 죽이는 것이 아닌지. 핑크색 사과만을 골라먹는 우리 행복동이 손녀를 바라보면서.

2005년 12월 김옥선

자료제공 : 데일리엔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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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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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미 2006-03-02 22:16:01
    행복님 디게 철이 없으시네요. 아무튼 탈북자분들 너무너무 ㅠㅠ 수고 하신거같고 ㅠㅠㅠㅠㅠㅠㅠ넘 슬퍼요. 글고 원래 북한여자들이 이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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