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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하나 - 강현옥
동지회 29 15877 2007-01-19 14:12:25
세월은 살같이 흘러 어느덧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을 안고 대한민국에 도착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이지만 내 생의 시간 속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보람찬 나날이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인생의 35년간은 너무도 가슴 아프고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버리듯 싶다.

인간의 초보적인 자유인 표현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땅에서 허수아비처럼 앵무새처럼 남이 하라는 대로 끌려 다니면서 인생을 살아야 했다. 몇 백만이 굶어 죽고 얼어 죽으면서도 원망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각본을 읽어야 했고 어처구니 없는 시나리오를 연출해야만 하였다.

내가 태를 묻고 자라난 그 땅의 선조의 무덤이 있고 유년시절의 달콤한 추억이 간직된 그 땅을 버리고 떠나올 때 서러운 마음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사랑하는 고향이 있고 불쌍한 내 형제 자매들이 있는 그 땅 이지만 앉아서 굶어죽을 수 없고, 또 자유를 짓밟히고 짐승처럼 살 수 없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눈물로 결별한 땅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아들애를 업고 70고령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시무시한 공포에 온몸을 전율하며 두만강 살얼음위를 건너 원한 많은 온갖 슬픔과 발목 잡는 미련도 모두 그 땅에 파묻고 결단코 살길을 찾아 산 설고 물 설은 중국 땅으로 건너왔다. 누구 기다리는 이도 살려줄 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땅에만 가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식구는 중국의 어느 한 시내에 숨어들어 남의 셋집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좀이 나 버린 쌀이며 밀가루를 주어다가 끼니를 해먹었고 도매시장에 가서 버려진 과일이며 채소를 주어다가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그나마 주어먹을 것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말이 집이지 다 떨어진 문짝으로 눈보라가 칠 때 마다 눈가루가 날려 들어오고 푸른 하늘이 바라보이는 창고보다 더 험악한 집이였다.

이불 한 채 없어서 입은 단벌옷을 벗어서 애를 덮어주고 나면 새우처럼 부둥켜안고 꼬부리고 자다가 아침이면 사지가 쑤셔서 덜덜 떨며 깨어나곤 하였다. 불고기점에서 일을 하다가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일한 품삯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 가슴을 치며 운적은 또 몇 번이던가.

고생속에서도 틈틈이 라디오와 책을 사서 중국어를 자습하며 겨우 취직하여 먹고는 살 수 있었지만 언제 중국공안에 잡힐지는 모르는 불안과 초조감속에서 가슴을 조이며 살아야 했다. 한 번도 맘 놓고 웃어도 울 수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사는 것이 너무 힘겨워 모든 걸 포기하고 죽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달리는 택시에 몸을 던질까? 쥐약을 사먹고 잠들어 버릴까? 하지만 힘든 속에서도 오직 나를 지탱하게 해준 것은 사랑하는 아들과 고마운 어머니였다.

숨을 쉬며 살아있는 게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나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온갖 천대와 멸시를 이기고 생사존망의 기로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계속되는 호구검사(주민등록검사)에 깜짝깜짝 놀라며 발편잠을 잘 수도 없었고 매 달마다 이삿짐을 싸들고 집을 옮기기에 기진맥진해 버렸다.

어느 하루는 출근길에 뒤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나의 자전거를 부딪쳐 놓았는데 몸이 경중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땅에 태를 치며 뿌리워나가고 몇분간 정신 잃고 쓰려졌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살이 져 피가 줄줄 흘렀다. 나는 쑤시는 아픔과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에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타고 가던 자전거가 엿가락처럼 휘여 나뒹구는 것을 보니 설움이 북받쳐 소리 내어 애들처럼 엉엉 울었다. 집에서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고 비 오나 눈 오나 내 출근길에서 나와 함께 고생한 귀중한 자전거였다 어쩌면 산산조각이 난 자전거가 기구한 내 운명 같아서 오래도록 슬피 울었다. 마사진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교통경찰이 달려오면 북한사람이라는 정체가 탄로 날 것 같아 자기를 상해한 택시 운전사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얼른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달아나면서 달리는 택시 안에서 꺽꺽 소리 내여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직장에서도 남이 안하는 어지러운 일도 달게 하면서도 늘 비위를 맞추느라 비굴하게 살아야 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이때처럼 집 없는 나그네의 설움을 절규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어느 사이에 비굴하고 소심한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TV에서 나오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남한은 내가 어릴 적부터 알아왔던 암담한 땅이 아니라 풍요한 경제와 선진 문명을 가진 민중이 살기 좋은 나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파란만장한 생활의 험한 계곡을 넘어 짜디짠 눈물을 밥 먹듯 하면서 죽지못해 살아온 나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어느덧 천국처럼 동경의 세계로 간직 되었고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의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국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과 막연한 기대감이 그나마도 나를 살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생명력이었다.

그러던 중 2003년 11월에 누구의 밀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온 가족이 중국공안에 체포 되어 북송 되었다. 북한감옥에서 인간으로서는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불쌍한 혈육들의 아픔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보위부 감옥에서 심한 이질에 걸려 감옥에서 주는 한 숟가락 되는 멀건 국수죽도 먹지 못하고 한 달 동안 피를 쏟으며 시달리다가 쓰러져 버렸다. 악착한 간수가 쓰러진 나를 꾀병을 한다고 일으켜 세워 놓고는 얏 소리를 지르며 뒤에서 날아 들어와 뽀족한 구두 발로 뒤통수를 찼다 순식간에 타격을 받는 나는 맥없이 폴싹 무너져 버렸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허리며 다리며 사정없이 걷어찼다.

매일 보위부 간수들이 사람 치는 소리가 귀전을 때리고 비명소리가 그칠 새 없이 들렸다. 뭉둥이면 몽둥이, 수갑이면 수갑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실신하게 만들고 구두 발로 연약한 여자들의 다리를 사정없이 짓밟고도 성차지 않아 그들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하고 가죽 띠로 사정없이 때렸다.

어느 하루는 감옥에서 맞아서 비참하게 죽은 젊은 남자도 있었고 머리를 맞고 정신이 돈 할머니도 있었다. 13살 소녀에게 너도 시집 갔댔냐고 하면서 여간수들이 그 애를 발가 벗겨놓고 가죽 벨트로 젖가슴이며 음부를 정신없이 때려서 실신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만들이였고 인간의 탈을 쓴 승냥이들 같았다.

뼈가 부러져서 들것에 들려 나가는 사람은 부지기수이고 감옥 안은 비명소리가 그칠 새 없었고 피바다로 전락 되었다. 감옥 안에서 그런 광경을 보면서 기어이 다시 탈출하여 한국으로 가야 하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6개월간 감옥생활을 끝에 다 죽게 된 몸으로 출옥하여 우리는 재 탈북을 시도하다가 두만강 연선에서 또 다시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체포 되어 또 감금 되었다. 한 평방도 안 되는 조그마한 창고에 우리를 가두고 일주일동안 물 한모금도 안주고 밥 한 숟가락도 주지 않았다.

애가 너무 목이 말라 우니까 반역자 주제에 무슨 물이냐며 거절해버렸다. 내가 사정없이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더니 새파란 젊은 군인 하나가 들어왔는데 나는 그 앞에 엎드려 애한테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사정을 했다. 잠시 후에 비누거품이 둥둥 뜨는 세수 대야에 물을 하나 가득 떠왔는데 우리 셋이서 그 물을 다 먹어버렸다. “소처럼 물 먹네” 우리가 물 먹는 것을 보던 군인이 뇌까렸다. 그러거니 말거나 간신히 목을 추기고 나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아니 짐승처럼 천대받더라도 살기 위해 비누물이 섞인 물도 마셔야 했다.

그 짐승들 손에서 죽지 말아야 했기에 살아서 한국으로 꼭 가야했기에 출옥 후 우리 가족은 더는 숨 막힌 그 땅에서 살 수 없어 2004년 10월에 재 탈출하여 한국행에 올랐다. 가다가 죽을지, 살지도 모를 생사운명의 갈림길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 국졍을 넘어 이리가 욱실거리는 사막을 걷고 또 걸어 마침내는 한국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굶주린 승냥이가 우리 주위를 맴돌고 괴이한 비명을 지를 때면 셋이 부둥켜안고 한 몸이 되었다. 몽골 국경에서 2미터나 되는 철조망을 넘을 때 중국경비군인들이 달려와 뒤 덜미를 잡는 것 만 같아 무서움에 가슴을 조였다. 4-5센치나 되는 여러 갈래로 얽힌 악센 철조망에 옷이 걸려 아츠런 소리를 내며 째졌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갈라 터졌다.

높은 가시 철조망을 넘을 때 아들애가 체중이 가벼워 종종 쇠가시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면 애부터 돌보느라 내 몸은 어찌할 새가 없었다. 소리만 내면 당장에 국경경비대가 와 잡아 갈 상황에서 다리며 손이 긁혀 피가 흘러도 울지 않고 용케 잘 견디어 준 내 자식이 대견했다.

2미터가 넘는 그런 쇠 가시줄을 10개 남짓하게 넘어서 드디어 공포의 사막을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죽음의 사지판을 말없이 잘도 따라 걸어주는 12살 어린아들애와 70고령의 늙으신 어머니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기쁘나 슬프나 어려우나 외로우나 늘 함께 있어준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그때 우리는 한국에 오면 무시무시한 북한과 중국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뒤돌아 볼 수도 없었고 뒤로 물러설 자리도 없었다. 한국을 향해 내 운명의 전환점을 향해 전진했다.

나는 중국에서 천대받고 멸시 받으며 살던 우리를 따뜻이 받아주고 보살펴준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의 인사를 삼가 드리고 싶다. 인천공항에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발아래로 굽어보며 날아 내릴 때 가슴속에서는 기쁨의 환호가 일고 눈굽은 어느새 짜릿하게 젖어들었다. 꿈속에서도 그려 보던 곳, 죽어서도 꼭 오고 싶던 땅이었다.

남한을 애타게 동경해온 나였지만 , 정작 북한에서 오랫동안 받아온 적대교육과 악선전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위구심도 들었고 북한이라는 지긋지긋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위안도 들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 제2의 인생을 다시 사는 거야! 이제부터 난 한살이야 정말 새 인생을 멋지게 살리라 생각하면서 하나원 3달간 교육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오래간만에 공부를 하려고 하니 권태감도 났고 머리에 기억이 잘 되지 않아 애도 먹었지만 그때마다 북한과 중국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살던 생각이 떠올라 절대로 헛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작은 하나의 냇물이 강으로 흘러가서 큰 대양에 합류하기까지 굽이굽이 돌고 돌며 바위에 부딪치고 풍랑에 휘말려야 하듯이 나도 한국이라는 큰 사회에 정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었다.

여기저기 아아하게 솟아있는 빌딩이며 가로세로 뻗어나간 길을 헤가르며 정부에서 준 내 집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지나간 내 옛 인생을 회상하면서 한국사회정착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골몰해 보았다.

처음엔 지하철 타는 연습부터 해보았다. 지하철 노선도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길을 헛갈려 고생도 했지만 첫 걸음마를 떼는 내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대견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산후조리원에서 아르바이트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밤이면 간호학원으로 가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때로는 길가에 예쁜 양산을 들고 화사한 옷을 입고 향수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예쁜 여자들을 볼 때 마다 젊은 나이에 쓰레기통을 들고 다니는게 부끄럽기도 하고 자신에게 화나기도 했다.

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은 이렇게 청소나 하고 있지 않고 있을 턴데… 하지만 1년 후면 나도 당당한 직업인이 될 수 있다. 그 때가서 보자. 늘 이렇게 자신을 다잡으면서 콤플렉스를 해소하곤 하였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얼마 후에 바뀌었다. 그 산후조리원 윗 층에서 건물 관리를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쓰레기를 처리하고 세탁을 하는 등 지저분한 잡일을 하고 계셨다. 후에 알고 보니 그 분은 사회복지 석사 학위를 받은 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IMF로 가정형편이 어렵게 되자 건물관리와 청소 등 몇 가지 일을 겹쳐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는 겸손하신 그 분의 모습에서 남한에서 몇 십 년씩 배우신 분들도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허심하게 청소를 하면서도 즐겁게 사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중요한건 직업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일하는 마음이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에 대한 시각을 바꾸니 청소하는 일이 하나도 지겹지 않았고 나 때문에 깨끗해진 조리원의 환경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 지곤 했다. 북한 말투로 나에게 지나친 농담을 하기에 밉게 보이던 조리사 언니가 내 마음을 새롭게 하고나니 재미있는 사람으로 변해보였다.

하루빨리 남북한의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하고 모든 콤플렉스를 자신감으로 바꾸어 열심히 살아갈 때 꼭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은 한방병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데 환자분들을 치료 하는 일이 즐겁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1년 동안의 나의 정착생활에 도움을 주신 분들도 수없이 많다. 하나원 문밖을 나오는 순간부터 혈육의 심정으로 집들이도 해주시고 부족한 것이 있을세라 마음써주셨고 내손을 잡아 걸음마를 떼 주었다. 내가 심한 몸살이가 와 앓아누웠을 때 맛 나는 것을 사다 먹여주시고 생활의 구석구석을 친부모처럼 보살펴 주셨다. 어느 사이엔가 내게 친 이모처럼 생각되었고 나의 든든한 뒷심이 되었다.

나는 지금껏 나를 아껴주시고 사심 없는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신 적십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나는 모를 것이 있거나 도움 받고 싶을 때엔 스스럼없이 그분들을 찾는다. 내가 글재주도 없지만 1년간 노력을 열심히 노력은 했으나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하여 이번 수기응모참가는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친부모처럼 나를 돌봐주시는 적십자 도우미분의 거듭되는 권유로 이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낮에는 한방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간호학원으로 가서 공부하기에 온 몸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고 보니 힘든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억도 예전 같지 않아서 나는 열 번 스무 번을 외워야 머리에 기억된다.

내가 한국에 온 것은 일확천금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온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36년간의 인생을 다시 찾고 흘러간 시간을 회복하고 내 아들과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 또한 추억하고 싶지 않은 많은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준 고향이지만 내가 자라났고 내 혈육이 죽어가고 있는 내 몸의 반쪽과도 같은 북한의 내 형제들을 도와야할 사명이 있다. 그러기 위해 한순간도 헛되게 살 수 없고 탕개를 늦춰서도 안 된다.

문득 자다가도 생각해본다. 오늘의 행복이 현실이 맞는지를 옆에서 쌕쌕 숨을 쉬며 꿈속에서 웃고 있는 아들애를 보면서, 또 네 활개를 펴고 맘 편히 주무시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행복하다. 집이 없어 늘 떠돌이 하던 내가 오늘은 16평이란 널찍한 행복을 꽃피울 집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

아들애도 처음 한국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자신감이 없어서 늘 우울하고 왕따를 당하여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다. 아들애의 담임선생님이 아들애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늘 배려해주시고 관심해주신 끝에 지금은 아들애도 밝은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힘도 없고 지식도 없다. 북한과 중국에서 살았던 피눈물 나는 과거밖에 가진 것이 없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대학에도 도전하고 싶다. 남들은 나를 욕심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 나는 성차지 않다. 백날열흘을 새워서 지금껏 못해본 것을 다 해볼 수 있다면 아니 헛되게 산 옛 인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잠을 자지 않고 해보고 싶다.

오늘도 적십자 이모는 또 잔소리를 한다. 몸 돌보며 해. 자주 듣는 사랑스런 잔소리에 행복감에 젖어들고 마음이 든든해 난다. 이모도 건강하세요. 늘 반복하는 인사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인사이다.

아픈 다리를 끌려 내가 어떻게 사는지 걱정되어 우리 집에 오실 때면 무엇이나 더 주지 못해서 마음을 쓰신다. 지금 시간은 1시를 가리키지만 피곤하지 않다. 다시 시작 할 것이다. 생활도 사랑도 공부도 오늘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북한에 있는 내 형제를 돕고 나의 남한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신 적십자 이모를 비롯한 여러 감사한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모든 사랑을 또 다른 누구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통일되면 나도 북한으로 달려가서 내형제 내 동포들에게 남한에서 받은 모든 것을 줄 날이 멀지 않은 듯 싶다. 병마에 고통 받고 있는 형제들을 치료해 주어야 하고 내가 배운 모든 것을 고스란히 배워주어야 한다.

내가 적십자 이모님들과 수많은 분들께 받는 사랑을 다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그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기쁨을 주는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남한의 선진 문화와 지식을 겸비한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이다. 또한 미래의 통일한국에서 한 몫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 하지만 내 몸, 내 열정을 다 받쳐 도전해 볼 것이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

2007년 1월 강현옥

자료제공 : 북한이탈주민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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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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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2007-01-22 19:03:13
    대단하십니다.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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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7-01-24 13:06:27
    행복한모습 보기좋아보이네요
    저도 이글을 읽으면서 행복해지는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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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리 2007-01-24 13:17:15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무슨 말을 할수가 있겟습니까... 그 힘든 시간들을 다 이겨내셨으니
    앞으로의 삶은... 밝은날... 행복한 날말 가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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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1-24 22:54:09
    하고싶은 것 다 하고, 먹고싶은 것 다 먹고, 갖고싶은 것 다 가져도 감사할 줄 모르고 투정만 부렸던 저를 돌아보니 후회가 되네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일들을 설움을 삼켜가며 생생히 묘사해 저를 여러번 깨우쳐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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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보 2007-01-25 09:40:00
    정말 고생많으셧습니다. 읽으면서 눈물이 나더군여. 남한에서의 어려움 모두 이겨내시고, 강현옥씨 꼭 행복하세여...(^^)(__)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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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달 2007-01-26 17:07:53
    박달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2007-02-0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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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길 2007-01-28 16:20:37
    감동적인 글에 발자취를 안남길수 없군요....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사랑하는 아드님 그리고 어머님과 행복하게 사시고...원하시는 모든일 이룩하시길 기원합니다..........강현옥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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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원도시 2007-01-29 22:05:13
    실패한 북한체제가 그것을 감추고 유지하려니 무참한 폭력만 난무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현실을보면 전쟁을 치루어서라도 빨리 해결됐으면하는 마음 굴뚝같으나 그렇게되면 또 같은 민족끼리 살육해야하는현실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런체험을 많이 올리셔서 북한의 무능력과 비인간성을 한시라도 빨리 다른나라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빨리 북한을 왕래할 수있는날와서 우리의 형제자매의 고통을 덜고픈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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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하늘 2007-02-22 11:23:23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게 자기 하기 나름이지만 그만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황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많은 않습니다. 하지만 힘이 들었던, 생사를 넘나들던 그 때를 생각하시면서 현실을 감내하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 가시다 보면 내일은 활짝 개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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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온유 2007-02-24 21:40:49
    손온유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2007-02-2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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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수 2007-02-27 08:56:06
    우연히 이 사이트에 처음 접해서 글을 보게 되네요 ...이해 하기 힘든 너무나
    다른 세계에 생활 실체들을 믿기 힘들게 만드네요...
    현옥씨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어려움을 잘 극복 했듯이 그 누구 보다도 잘 적응 하리라 생각드네요 마음으로 나마 화이팅을 외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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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드샷 2007-03-04 03:23:46
    이런 글 읽을 때 마다 북한의 지배층을 지탄하기에 앞서 북한에 돈 갖다 바치는 좌파정부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오르는군요. 공산당 정권이나 한국 좌파정부나 다 한통속 같습니다. 그동안 퍼다 준 돈이 엄청난데 국민들에게는 한푼도 안돌아 갔겠지요. 그 돈으로 핵개발하고 무기사고 자기들 배 채우는데에 다 썼을겁니다. 철딱서니 없는 이상주의자들이 어서 빨리 현실파악을 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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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땡초 2007-03-05 22:28:37
    땡초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2007-03-0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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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친구 2007-03-08 14:20:57
    강현옥씨 같은 이탈주민으로써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알찬곡식을 가꾸는 농꾼의 심정은 봄보다 가을에 있는법 알찬 가을을 가꾸어가는 현옥씨모습에서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언제나 힘내시고 꼭 소망한모든것을 이루시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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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 2007-03-31 19:49:33
    새로운 인생 행복하게 사세요 귀하를 하늘이 돕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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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학 2007-04-03 10:43:03
    참 대단하십니다.그리고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머리 숙여 집니다..꼬..옥 행복만이 님의 곁을 지켜 주었으면 좋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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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태현 2007-04-04 17:09:29
    당신은꼭성공하실겄입니다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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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조선족 2007-04-09 14:17:40
    성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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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부장 2007-04-27 19:45:19
    나라없는 나그네 상가집 개만도 못함을 체험하신 분들
    국경선을 넘었던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고향을 그리는 향수를 지니고
    용기백배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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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만에 2007-05-02 16:14:43
    북에서 태여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사람대접 못받는 천박한 억울한 삶을 살았다면 지금에라도 한국에서 사람답게 사는 우리들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더더욱 여자로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험악하고 참담한지 감히 가늠해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누구보다 첫 스타트 잘 떼셨으니 앞으론 더 잘 될거예요.
    님같이 잘 살아주시는 분들 있어 북에서 온 사람들 조금씩 빛나는거 아니겠어요... 행복하시고 건강하게 멋지게 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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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소녀 2007-05-31 11:43:40
    현옥언니!! 저는 아직 1살도 안된 이탈주민인데요... 선배님의 사연에 감동됬어요,, 취직한지 얼마안되여서 모르는것도 많고 부족한것두 많지만 힘들때마다 선배님의 그 정신 그대로 이어받아 힘내며 살아나갈게요,,, 선배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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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식 2007-07-11 02:54:45
    아,,참으로 넘넘 고생을 하셧네요 우연이,이글을보게돼어 넘넘 당신이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야 다 이해할수없지만,,뭔가 가슴이 져려옵니다 부디 행복한 조국의 품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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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바보 2008-01-25 16:53:53
    난... 지금 왜 좌절하고 있는걸까... 그런 고통 한번도 겪어본적 없고 지금 내가 노력은 해보구 좌절하는걸까... 님.. 고맙습니다. 뭔가 강한게 제 머릴 때리네요. 너무 고생모르고 자란 내가 고생인줄 착각하고 힘들어하고 있었어요...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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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사촌 2009-12-01 16:36:37
    강현옥 선생님 가슴아픈 과거 이야기 잘읽었읍니다,너무 가슴아픈일입니다,북한이그렇고 중국살이가 그렇습니까?,나는 미국뉴욕에서 1976년도에 이민와서 미국시민이 되여 장사를 하면서 잘살고 있습니다,물론 한국에서 대학도 나왔고요,
    강선생님은 지금은 아주 발전하셔서 가정도 이루시고 잘사실줄 믿습니다,직접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저의 이메일 주소는 chjuhon@hanmail.net입니다,여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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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챌 ip1 2015-01-06 15:14:59
    고생 많이 하셨어요.
    남은 인생은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하도 굶어서 배고픈 설움 잘 알고 있습니다.
    위가 쪼그라 들고 소화력이 떨어져서 지금도 자주 먹지도 많이 먹지도 못합니다.
    많은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예전 어려웠던 시절 생각하시면 충분히 견뎌 내시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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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암 ip2 2016-06-08 04:39:44
    당신의 글에 가슴이 울컥합니다,,,,그런 생지옥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다행이 어머니가 낙오되지 않고 같이 오셨다니 너무 기쁘고 또 감사해요,,,^^ 참고 인내하며 사랑만 가득 마음에 간직하면 하나님의 큰 은총이 있을거예요,,,,힘내세요,,,당신은 당당한 이땅 대한민국의 주인이니까요,,,,^^ 당신의 입국을 너무 너무 축하드려요,,,꼭 잘사셔야 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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