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악몽 - 리순녀
REPUBLIC OF KOREA 관리자 3 18967 2007-07-27 14:36:15
어제도 한잠도 자지 못하고 비몽사몽 뚠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괴롭히거나 나에게 고통을 줄 사람도 없건만 나는 늘 밤이 되면 불안하다. 밤이 되면 왼지 모를 두려움과 환청에 시달린다.

얼굴을 딱히 알수 없는 사람들이 목을 매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며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마지막 괴로움을 당하는 이그러진 얼굴들이 마치도 내가 아는 그 누구의 얼굴로 바뀌어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독재 정권이 슬하에서 사형을 목격한 것은 13살적이다.

그날 허허벌판 공지에서 사형을 한다고 했다. 그때는 철없던 마음에 궁금하기도 하고... 애들을 따라 형장에 가봤다. 사형수의 죄명은 흔히 말하는 " 무직, 사기"등등 기억은 별루 나질 않는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사형수의 양편엔 안전원들이 겨드랑이를 끼고 서 있었고, 입은 무언가에 싸여있는 흰 천에 틀어 막혀 있었다. 당연히 얼굴은 알 수 없는 상태이고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간부”가 나와 죄명을 조목조목 밝히더니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미리 설치한 나무 기둥에 사형수를 묶더니 7명가량 되는 안전원들이 한사람을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처음에는 머리...가슴...많이도 쏘더니 “죄수”가 푹~꼬꾸라지자 풍차를 두른 차에가 나타나더니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당시, 어린 마음에 죄명은 딱히 몰랐지만 죽을죄임에는 틀림이 없을테고, 그래도 어쩐지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몇해후, 열다섯 살 나던 해에는 교수형을 목격하기도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청년공원에서 교수형을 하니 다 가서 보라고 선생님이 지시 했었다. 그때역시 죄명은 기억이 안 난다. 당시의 북한에서는 무직이나 사기 같은 것이 사형수가 되고 교수형을 당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었다. 어른들은 애들이 더 잘 볼 수 있게 한다고 맨 앞으로 자리를 잡아 주었다. 한참 있다가 그네들이 말하는 죄명을 불러대고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귀에 익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가려 놓았던 풍막(천막)을 확~ 치우자 안에서 목이 졸려있던 사람이 괴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의...그, 밖으로 툭 튀어나와 괴로워하던 눈빛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 모진 모습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라고 12시간이나 내리지 않았었다.

그 후에도 나는 본의 아니게 서너 차례 사형장을 더 다녀온듯 싶다. 당시만 해도 사형집행이 허다하게 발생하고, 그런 날, 시장에 가면 안전원들은 장 보러 온 사람들을 반 강제적으로 사형장으로 유도하군 했었다.

언제인가는 나도 평소에 안면이 있던 두 20대 형제를, 광산 부속품에서 구리를 뜯어 팔았다고 나란히 세워놓고 사형을 언도했고, 또 언제인가는 중국으로 도망치다 잡힌 전 안전원이라는 사람을 지난날의 동지들이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회지에(청진에) 때마다 너무나 자주,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시장 근처에서 붙어있던 포고며, 사형 전단 따위들을 목격하군 하던 지난날을 잊을 수 없다.

* 에필로그 *

어제, 집에서 기르던 금붕어 한마리가 죽었다. 아마 먹이를 많이 준 탓인지 배가 볼록해 가지고 죽었다. 7살 난 아들이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내가 다 안쓰러웠다.

슬피 울던 아들이 울음을 뚝 그치고, 죽은 금붕어를 풀밭에 묻어주잔다. 공연히 슬퍼진 나도, 코물을 훌쩍 거리며 아들과 함께 아파트의 화단에 금붕어를 묻어 주었다.

금붕어를 묻고 층계를 오르는데 속이 울컥했다.

보잘 것 없는 금붕어 한 마리도 죽으면 울어주는 사람이 있고 풀밭에 묻히는데 내 고향땅에서는 얼마나 많은 귀한 젊은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죽어서도 버림을 받는 것인지...

슬프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리고 쓰려서 가슴 깊은 곳에서 자꾸만 뭉클한 것이 치밀어 오른다. 저도 죽을 목숨을 타고난 사람임에, 우리 "장군님"은 어쩌려고 그 많은 생명들을 무참히 짓밟았을까.

소위 인민의 어버이시라는 사람이,
백성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째서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을 그리도 무참히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자식들을 아프지 않고, 남 못지않게 잘 키워는 것이 소원인 이 세상 어머니들 중 한 사람이다. 이 세상 어느 어머니에겐들 그런 소원이 없으랴. 먼저 간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심정이 과연 어떨까 싶어 가슴이 떨린다.

저 북녘땅에서...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악몽들이 다시는 되 물림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슴깊이 품는다.

2007년 7월 27일 리순녀(2003년 입국)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좋아하는 회원 : 3
김영아 고담녹월 이민복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봄의기쁨 2007-07-27 14:59:01
    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보니 이전의 북한에서 살떄 보았던 공개처형들이 생각나네요. 정말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악몽입니다. 우리 모두 이 남한사회에서 열심히 살아서 다시는 지난날이 되풀이 되지 않게 잘삽시다. 항상 건강하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보라색 2007-07-27 19:37:28
    님의 글을보니 먹지못해숨져가는 자식을 살리기위해 부모의 마지막 선택은용접기에 붙어있는 동 그것때문에 처와 어린두자식을 남겨두고 30대 젊은나이에 가슴에 원한을 품고 사형당한 한동네살고있던 동생 생각이나네요 한독재 밑에서 지금도먹지못해 숨져가는 형제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아갑시다 지난악몽같은 추억을잊으시고 좋은추억만 기억하면서 건강하시기를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희망이 2007-08-03 18:44:22
    정신적인 충격을 우선 치료하셔야 할것같애서 걱정이되지만 종교의 힘을 빌리심이 어떨까하네요 기회가닿으면 가까운 성당을 찿아가시어 신부님께 상담하시면 좋은 길이 열 릴거에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고향고향 2007-09-14 22:27:38
    우선 병원을 찿아 정신적 치료를 받기바랍니다. 치료가 가장 우선입니다 ,악목을 버리려면 우선 치료를 받으십시요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잘 적응하여 ,,자유민주 주의 국가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남한은 그누구도 님을 괴롭히지 않읍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하늘구름 2007-11-23 11:21:30
    힘내세요.. 탈북인들ㅇ 가운데.. 누구나 어려운 처지에서 남한에 오지 않으신 분들이 없습니다. 건강히 오래사셔서..북한의 김돼지가... 그 일당들이 망하는 것들을 꼭 보셔야지요..희망을 가지세요.. 그리고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신앙 생활을 해도 좋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동자몽 ip1 2015-02-17 17:15:04
    어린 나이에 목격하는 끔찍한 공개처형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무서울까요?
    무서운 기억 빨리 치료 받고 즐겁고 행복한 삶 사시기를
    바래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나암 ip2 2016-06-04 03:25:14
    맞아요,,,, 미움없는 사랑으로 가득해야 행복해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허참 ip2 2016-07-17 14:05:59
    사형수의 마지막 순간 김정일에게 쌍욕을 못하도록 입안에 돌이나 재갈을 물리는것 같네요,,,, 자유의 땅에 잘오셨으니 부디 행복하세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김지선 ip3 2017-10-09 01:12:26
    글 쓸곳이 없어요ㅜㅜ 저는 서울사람. 입니다.아버지가 33년생 북이 고향이에요 아버지가 위암투병 중이에요.가자미식혜를 직접 만들어드리고싶어서요ㅜㅜ 한수 부탁 드려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 김철민
다음글
탈북자가 본 “이해할 수 없는 한국” - 김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