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뉴스

탈북자수기

상세
회령보위부 지하감방과 요덕수용소에 겪은 참혹한 고통 - 김광수
REPUBLIC OF KOREA 관리자 3 31880 2007-07-30 11:40:16
- 김광수(가명), 1963년생
-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99.7~'00.4)
- 요덕군 제15호 관리소('00.4~'03.4)
- 2003년 4월 탈북, 2004년 4월 입국

나는 중국 연길에서 태어났지만 7살 때 가족이 북한으로 이주하면서 회령에서 살게 되었다.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요덕 15호 수용소에서 3년을 살게 되어 북한에서 마지막 거주지가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로 되어있다. 강제주거지 이동으로 요덕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거주증을 수용소로 떼어갔다. 3년 형을 선고 받은 후 3년 형 만기 후에 나왔다.

회령시 보위부 수감생활

처음 체포된 것이 1999년 7월 회령에서였다. 술을 마시고 집에서 잠깐 자고 있었는데 보위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알아볼게 있으니 잠시 같이 가자고 했다. 도망갔어야 했는데 큰 죄 지은 게 없으니 따라갔다가 회령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바로 지하감방에 보내져 1주일간 감금되었다. 1주일 후부터 조사가 시작됐는데 보위부원 2명이 들어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관이 회령시 옥산공장 보위부장 지용수였는데, 9개월 동안이나 모질게 고문했다. 나에 대해서는 회령시 보위부가 아닌 상급기관인 함경도 보위부에서 나와서 취급했다.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으로 있던 윤창주와 최상수라는 사람이 기억난다. 이들은 김정일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충성심을 발휘하려고 일을 벌인다. 최상수는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를 잡아서 납치해 북한으로 송환한 인물이기도 했다.

내가 끌려간 곳은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이었다. 처음 들어가서 오승오 각자(5cm×5cm 굵기 나무 몽둥이)로 몸을 마구 두들겨 맞았다. 내가 부인을 해서 2시간 동안 맞았는데 뒤통수를 한번 맞아서 뒤통수 부위가 깨졌다. 지금도 머리에는 세 군데에 상처가 있다. 각목으로 때려 여기 저기 피가 터지자 무릎을 굽히고 손을 뒤로 얹고 앉게 한 다음 발뒤꿈치로 허벅지를 내려찍었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치아가 몽땅 부러져서 4년간 이 없이 살아야했다. 북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나중에 중국에 나와서 거의 5년 만에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보위부에서는 계속 맞고 조사받고, 맞고 조사받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잠 안 재우고 하는 가혹행위 중에 ‘비둘기 고문’이라 것이 있는데 손을 뒤로 묶고 쇠창살에 수갑을 채워놓는데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면 어깨 근육이 굳고 가슴뼈가 새가슴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몸 전체가 굳어버린다.

보위부 지상에도 감옥이 있지만 그곳은 주로 잡혀온 탈북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간첩죄 혐의자나 정치범들은 지하감방에 넣는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었다. 가두어 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라는 식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테니 죽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 점점 감각이 없어져 온 몸이 마비되지만 그래도 똥오줌은 나온다. 하지만 화장실도 안보내주니 똥오줌도 그냥 바지에 질질 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었던 지하감방은 아무리 소리치고 비명을 질러도 위에서는 들리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2명이 지하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조사관들에게 “배가 고프니까 뭐 좀 먹고 나면 사실대로 다 말하겠다”고 했더니 먹을 것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다 먹고 난 다음에는 간첩행위를 부인해버렸더니 더 심하게 맞았다. 내가 체포되었을 때 75kg이었는데 조사를 받으면서 38kg으로 몸무게가 줄었다.

나는 절대로 간첩질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이 맞다보니 그냥 인정해버렸다. 보위원들은 “너는 보위부에서 절대 살아서 못나간다. 인정하지 않으면 죽어서 나가게 될 것”라고 이야기했다. 또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서 “이렇게 살다가 이제 죽는가보다”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나중에는 내가 약해지니까 죽을까봐 때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를 모두 인정해 버렸다.

마지막에 보위부 검사장이 와서 조사를 했다. 검사 동지에게 너무 맞다보니 없는 죄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억울하다고 했더니 나를 조사했던 조사관이 달려와서 “너 똑바로 대답 안 해?”하면서 또 다시 마구 때렸다. 중앙재판부에서 내려온 검사의 역할은 죄를 확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보위부로 내려오면 보위부 조사관들이 검사들에게 허위조사를 한 적이 없으니 잘 봐달라고 부탁을 미리 해두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는다.

식사는 완전 쓰레기를 갖다 주었는데, 보위부원들이 먹다가 남는 퇴식물(잔반)을 줬다. 지하감방에는 간수도 없어서 제대로 주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열이 심하게 나서 형편없었는데 봐주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이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옷도 한 번 갈아입지 못했다. 내가 7월에 끌려갔는데 한겨울에도 잡혔을 때 입고 있던 여름 남방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지금도 치가 떨린다. 회령시 보위부 지하감방에서 죄를 다 인정한 다음에는 재판이나 다른 어떤 절차도 없었다. 지하감방에서 풀려나 일반감옥으로 올라오니 이불짐 같은 보따리만 하나 있었다. 가만 보니 내가 집에서 덮던 이불이었다. 우리 집에 가서 이불을 갖고 온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히 마지막엔 도보위부에 있었던 친구의 도움을 얻어 죽진 않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00년 4월 요덕수용소로 보내져 또 다시 3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요덕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

요덕 수용소에 들어가면 외래(신입)작업반이 있는데, 일반적인 질서와 관리 내용에 대해서 1개월간 교육을 받는다. 교육내용은 하루 일과와 하루 작업량에 대한 것이었다.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이 없다. 하루 노동량은 1인 기준으로 350평 밭에 김을 매는 것인데, 노동량을 다 채우면 하루 기준으로 1인 600g의 배급량이 지급되고, 350평 중 반 절만 채우면 배급량의 반량인 하루 300g의 식량이 배급된다.

350평을 기준으로 하루 작업 분량에 따라서 1일 600g을 기준으로 차등 배급한다. 작업량이 적으면 배급이 안 나가는 경우도 있다. 1달간 외래반에서 작업을 하면서 교육을 받는데, 한마디로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숙소가 따로 있는데 정상적으로 1개월에 30명 정도가 외래반(신입)으로 들어온다.

주로 잡혀온 사람들은 북한에서 큰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이나 체제비판 유학생이나 말반동, 유학생 사건(주로 독일 유학생 - 이전에 유학 갔던 사람들로 주로 전철우 동기들이 현직(인민무력부 정찰국 등)에 있다가 다 잡혀옴, 또는 중국 유학생)등 주로 정치범들이었다.

1달간 외래반에 있다가 작업반에 배치되는데, 일반적으로 보위부원들이 구타를 하거나 폭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직책이나 책임자(반장이나 조장)로 있을 때 잘못을 하면 구타를 당하는 경우는 있다. 집중적으로 마구 때리는 경우는 없었다.

수용소에서는 때리지 않고도 수감자를 죽이는 방법이 있는데, 주로 굶겨서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인다. 누구를 죽이려면 일을 하기 힘든 밭에 보내서 김을 매는 일등 어려운 일을 시켜,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게 해서 배급을 주지 않는다. 배급량이 줄어들면 체력이 약해지고, 힘든 일을 계속 하니 힘이 계속 떨어져 체력저하로 죽는 경우가 많다. 보통, 보름을 못 가서 죽는다. 그 것은 허약으로 죽은 것이지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사유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철저한 약육강식으로 아버지가 아들 밥을 빼앗아 먹는 곳이 요덕 수용소다.

사람이 죽으면 널빤지로 관을 대충 짜서 그냥 묻는데, 묻힌 곳을 평평하게 하고 팻말도 없어서 1년이 지나면 누가 묻혔는지, 그 곳이 묘지였는지도 모르게 된다. 한번은 냇가(하천) 옆에다가 관을 묻었는데 장마철에 파리가 꼬였다. 수용자들을 시키니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거라 대충 묻었기 때문이다.

2003년 4월 30일 북한을 탈출해 2004년 4월 22일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와서도 수용소에 잡혀간 꿈과 악몽을 자주 꾼다.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잠만 자면 또 잡혀가는 꿈꾸는데, 꿈속에서 보는 것이나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친다.

2007년 4월 26일 김광수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좋아하는 회원 : 3
영등포 고담녹월 ket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봄의기쁨 2007-08-01 11:06:39
    전 북한에 있으면서도 요덕 수용소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여기 한국에 와서 탈북자들의 수기를 보면서 우리 북한에 그렇게 끔찍한 곳이 있었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겠습니다. 한국으로 오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도 사회정착한지 75일밖에 안됐습니다.너무 눈물겨운 생활속에 작년 10월달에 드디여 탈북을 결심하고 여기 한국으로 오게 되였습니다.
    힘들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 찾아온 이 땅이기에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아서
    다시는 지난날을 되풀이 되지 않게 행복하게 삽시다.
    님, 이 무더운 여름날에 건강에 조심하시고 항상 좋은 날만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알아용 2007-08-01 15:08:17
    저도 죽을 고생하다 하늘이 도와서 이렇게 왓어용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친구 2007-08-04 20:19:28
    이글은 친구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7-10-29 12:09:15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영등포 2007-08-04 21:57:29
    김광수님 요덕수용소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하였습니까?

    탈북에 성공하신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회령사람입니다.


    그리고 친구님이 말하는 철웅오빠란? 누구를 뜻하시는지요?

    나도이름이 철웅인지라 ~~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친구 2007-08-06 15:41:34
    이글은 친구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7-10-29 12:09:33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영등포 2007-08-07 16:12:05
    친구님 정말미안합니다.
    전 요덕수용소에 갔다온적은 없구요 그냥 이름이 철웅이고 또

    내가 한국으로 온다음 고향에는 내가 수용소엘 갔다고 소문났댔어요

    결과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내가 수용소에 가있는줄 알기에 혹시

    친구님도 그런분인줄알고 미안합니다.

    꼭 찾고자하는 사람들을 찾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친구 2007-08-07 16:50:12
    고맙습니다
    함께 고생하시던분들을 여기서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하지만 인연이란 따로 있나봅니다
    함께 있던분들이 몇명은 여기서 만났습니다
    영등포님이 제가 찾는 철웅오빠가 아니라니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갔다오지 않은게 다행이다도 싶습니다
    답변 주셔서 대단히 고맙다는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천하수 2007-08-13 22:44:14
    참으로 수난으로 가득찬 인생역사들을 나름대로 가지고계시니 눈물없이는 읽을수없는 글들을 많이보면서 어떤 위로를 드리면 편한 삶을 살수있을지요?김광수님의 울분과 고통은 우리모두의 아픈상처와도 같을것입니다.우리는 때문에 단결만이 살길임을 명심하고 힘을 합쳐 열심히 살아서 이사회에서는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할것이라생각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비전 2008-01-23 16:49:40
    이글은 비전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8-01-23 16:49:58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비전 2008-01-23 18:20:31
    눈물없인 읽어 갈수없는글~~~ㅜㅠ 저의 오빠가 요덕수용소에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참~~~이사회선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세상~~~선생님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만나뵈웠음 좋겠습니다.현실아닌 현실앞에서 전 도저히 인정하면서도 인정이 안가는 심정~~~오빠한텐 애들이 3명씩이나 있는데요~~그애들은 이제 어떻케 해야되는지요~~속상하고 피가 꺼꾸로 도는것같구요 한반도에서 이렇게 넘 다른 삶이 납득이 않되네요~~~초면에 글을 넘 생동감나게 쓰셨기에 주책없이 이렇게~~~실례가 안되시면 얼굴 좀 꼭~옥~뵈웠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친구 2008-03-06 18:04:46
    요덕수용소에 오빠가 갔다면 ..만약 지방에 사시는 분이라면 아무문제없지만 평양에 사신다면 당연히 함흥이나 함주 이런곳에 추방당합니다
    일반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보내지구요 만약 자식이 출가햇다면 딸은 별문제가 없는데 아들은 좀 걸리드라구요
    오빠가 몇년도에 갔는지만 안다면 혹시 알법도 합니다만 참고로 1994년~1997년도라면 알수도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은정 2008-04-07 11:16:07
    김광수님. 안녕하세요? 님의 수기 정말 넘 가슴 아프네요. 같은 탈북동포로써.. 가슴 아픈 지난날을 생각하시어 꼭 훌륭한 부자되시길 바랍니다. 님의 사업번창하시길 기대하면서 홧팅!!!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정일외에 2010-04-30 00:06:28
    그런짓을 앞장서 해온사람들도 용서가 되는걸까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성호 ip1 2011-03-06 06:45:39
    그래도 묻어 주네요 보안서 교화소만 나은듯
    전거리는 불망산데려가 태워서 재도 없습니다 ~
    겨울에 시체 얼어서 잘 타지도 않았는데
    다음 죽은 사람은 또 그 위에 놓고 태웁니다
    죽어서 땅에 묻히는게 차라리 사람대접이져~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항상Happy ip2 2011-05-13 23:39:37
    진짜 힘들고,억울했겠어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다케노코 ip3 2011-08-24 09:36:31
    얼굴 기억나네요,고생많으셨죠,후유증치료 잘하시길바랍니다,근데 사실과 쪼금 다르네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외유내강 ip4 2014-12-25 23:40:52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저도 회령사람으로 보위부에 갔다온적있는데ㅡㅡ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조선사람님 ip5 2014-12-25 23:50:12
    내두 청진보위부에서 죽도록 매 줏어맞었구먼....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나암 ip6 2016-06-04 03:18:52
    이제는 부디, 부디 행복하게 사세요,,,,악몽을 떨치시고,,,,화이팅 김광수님,,,,,!!!!!!!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탈북자가 본 “이해할 수 없는 한국” - 김운주
다음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