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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로커였다(6) - 유상준
Korea, Republic o 관리자 3 12493 2008-05-14 22:40:16
먼동이 푸름푸름 밝아오자 수감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복도에서 나름대로의 맨손 체조를 하고 있었다. 손을 머리위에 올리고 앉아 토끼뜀을 하는 사람, 몸통을 한껏 비틀면서 온 밤 싸인 잠기운을 다 털어내려는듯 운동하는 것을 보면 오래 동안 몸에 배여 온 동작들이었다.

드디어 아침 기상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자 잠을 자고 있거나 누워있던 수감자들이 군인들과 같은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 침구정돈을 하고 한쪽에서는 순번대로 세면을 하고 있다.

침구정돈과 감방 안 청소가 끝나자 조금 있으니 간수가 커다란 바께쯔(양동이)에 죽물을 가져다 수감자들의 죽 그릇에 한 컵 정도씩의 죽물을 나누어 주었다. 죽물이라야 쌀알이 2-30알정도 들어있는 말 그대로 죽물인 것이다.

나는 나의 옆에 앉아있는 쫭족(티베트인)인 위표에게 죽물을 넘겨주었다. 위표는 광서 자치구 사람으로서 시린호터에 돈 벌려 왔다가 어느 여관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자기가 일하는 여관과 주변의 송전소등 3곳의 경리실 금고를 털어 인민폐 4000원을 도적질 한 것이 하루 만에 들켜 경찰에 잡혀 지금은 기소 중에 있는 인물이었다.

내가 속한 감방 안에서 위표는 가장 경한 범죄자이고 성품이 비교적 온화하고 한어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여 무리에 휩쓸리지 못하였으며 내가 다른 감방으로 옮겨갈 때 그도 함께 옮기여 석방될 때 까지 함께 생활해온 사이였다.

나는 석방되기 전에 위표에게 만약 내가 석방 되여 다시 중국에 오면 너를 찾겠으니 그때 나를 도와 탈북자들을 미얀마나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말을 하였고 위표는 자기 동생과 자기친구들이 베트남 밀수를 하기에 잘 도와줄 수 있다고 하였다.

감방에서 하루 일과는 쭤발( 감방안의 침대위에 한 줄로 질서 있게 앉아서 자기의 잘못을 회게 하는 시간)로 시작된다. 쭤발 시간이 되여 내가 제일 뒤쪽에 앉아 막 하나님께 기도 드리려고 하는데 출입문이 열리면서 “위썅쥔”(유상준)하고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니 조사국장 수잉지와 간수소 부소장, 그리고 몇 명의 군인들이 문 앞에 서서 나를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군인들의 뒤를 따라 조사실로 가게 되었다. 조사실이라야 두 평 남짓한 방안에 작은 책상하나와 걸상두개 수감자용 걸상이 놓여 있었다. 수감자용 걸상은 사람이 앉으면 두발을 족쇄로 묶고 두 팔을 걸치대 위에 놓으면 손목을 묶을수 있었고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 가슴 아래 부분을 걸상에 고정되어 있는 판자형의 띠로 몸 상체부분을 묶어 놓을수 있게 되여 있었다.

내가 조사실에 들어가자 두 명의 경찰관이 나를 수감자용 걸상에 앉히고 두발과 손을 묶으려고 하는 것을 수잉지가 무엇이라고 말하자 발은 묶지 않고 손목만 대충 묶고 가슴부분을 묶어놓았다. 수잉지는 처음 내가 보았을 때처럼 얼굴에 노기가 어려 있었으며 통역하는 여자가 나의 앞에 와서 몇 장의 서류를 주면서 읽어보란다. 대충 흩어 보니 외국인은 구류(구속)되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자기나라 말로 조사에 응할 수가 있으며 조사나 통역과정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거나 통역의 교체를 요구할 수 있으며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는 등 간단한 중국의 법률을 중국어와 한국어로 번역하여 쓰인 종이였다.

수잉지는 내가 변호사를 선임할 수가 있으니 변호사를 선임하란다. 나는 공산주의 국가의 법률체계가 다 일률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어서 신뢰할 수 없기에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자 조사가 시작되었다. 수잉지의 첫 질문은 “국가의 일을 하고 있는가?”였다. 나는 개인이며 한국은 3국에 있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거나 보호, 3국에로의 탈출을 돕지 않는다고 했다. 계속해서 탈북자 지원과 보호, 3국 탈출은 개인이거나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단체에서 산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내가 이용한 항공편과 시간, 여관과 열차의 이용 등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계속되는 질문은 은심이와 영옥이, 갈량이를 어떻게 알게 되였고 어떤 방법으로 어느 장소에서 만났는가? 그들을 한국에 데려가려고 유혹 했는가? 등으로 내가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이 연속 날아들었다.

조사는 처음 잡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깐깐하고 끈질겼으며, 집요하게 질문하고 의심 하면서 기존에 기록했던 것을 수차례 수정 보완하는 그런 것이었다.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캐어물은 것은 은심이를 알게 된 경위와 은심이를 나에게 데려온 여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룡지방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어떤 여인이 자기가 아는 탈북자가 있는데 어린것이 불쌍하다고 도와달라고 하여 나의 연락처를 주어서 은심을 알게 되였고 나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지로 나는 문제의 그 여인이 은심이를 도와준 사람이라 생각했고 이후로는 그에 대해 전혀 아는바가 없던 상황이었다. 나는 그 여인의 전화번호나 이름도 모르고 은심이와 함께 만나자고 하여 연길에서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 내가 아무리 주장해도 그들은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으며 며칠을 두고 은심이 보호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어물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조사는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경찰관들이 대기 하고 있었던 듯 나를 감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감방 안에 들어서자 수감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중국어로 이것저것 묻는다. 그들에게도 궁금한 것이 많았던 듯싶다. 유일하게 통역이라도 하여 줄 수 있었던 공영호가 보이지 않는다. 그(공영호)가 어디 갔는가, 고 물으니 오늘은 재판 날이어서 법원에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공영호는 한족 택시기사들에게 인민폐 1000원씩 주고 탈북자들을 몽고 국경으로 넘겨 보냈으며 한명, 한명 잡힌 것이 9명, 한국인 장미숙 등 장춘역에서 변방대 군인들에게 붙잡힌 11명에 관련된 재판을 받아야 하기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취침을 앞두고 공영호가 들어왔다. 공영호는 자기가 대체로 몇 년을 판결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국사람 좋은 노릇만 해 주다가 자기가 형을 살게 되였다고 불만을 내뿜으며 잠자리에 들었고, 한참이 지나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공영호는 한국 사람들과 함께 탈북자 일인당 한화 400~450만원씩 받기로 하고 탈북자들을 중-몽 국경을 넘겨주는 일을 하다가 통화내역 추적에 걸려 안도현 명월구 민주촌의 자기 집에서 이련호특 변방대 군인들에게 체포 되었으며 체포될 당시 공영호의 아내는 해산 한지 7일밖에 안된 상태였다.

공영호는 2007년 3월 16일 체포되었고 이른바 “죄”를 덜어보려고 장춘역에서 한국국적의 탈북자 장미숙을 유인할데대한 변방대 군인들의 조종에 응했고, 그로 인해 3국 탈출을 시도하던 장미숙 외 탈북자 6명이 체포되었다.

공영호는 장미숙을 체포하는데 협조한 대가로 립공죄가 성립되어 시린호터시 중급 인민법원에서 판결 7년 10개월을 받았으며 공영호의 형 공광호는 11년 3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한 공영호를 바라보며 나는 잠자리에 누웠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일지라도 이 땅에 죄인은 아니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시옵소서" 인간은 어려울 때 본능적으로 신에게 매여 달리는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

2008년 5월 11일 유상준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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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 일반인 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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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람자 2008-06-25 19:29:41
    이글은 관람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8-06-25 19: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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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뚱표 ip1 2013-08-09 20:15:12
    연락이 가능한가요? 도움 받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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