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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이야기]충격 고발 北 제22호 교화소…탈북자 리준하 육필수기 연재2 - 리준하
Korea, Republic o 관리자 2 34561 2010-07-27 01:20:20

데일리NK는 중국에서 체류중인 탈북자 리준하씨가 5년간 회령 전거리 제22호 교화소에서 겪은 내용을 엮은 ‘교화소 이야기’(도서출판 시대정신刊)를 연재합니다. 저자 리준하 씨는 이 책 서문에서 “북조선 교화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악행과 인권침해에 대해 같은 민족인 한국 인민들과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는 세계 인민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북한 교화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리준하 씨의 육필 수기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註



[교화소 이야기⑪] 차에 깔려, 나무에 찍혀 죽어

대차란 적재량이 신형 지프차 4대분을 대신하는 쇠수레로 20~30명의 죄인이 몸에 하산바를 걸고 직접 끌어야 하는 수레다. 원래 대차는 구내반에서 전거리 역에 쌀을 실으러 갈 때 사용하던 것인데, 벌목반이나 상하차반에서 대량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일에도 사용됐다.

대차는 길이 2m, 너비 1.5m이고 손잡이 쪽 길이는 2m로 생김새는 평범한 손수레와 같이 생겼지만 화물칸과 손잡이 전체가 쇠로 제작되어 대단히 무거웠다. 대차는 보안원들에게는 연료가 필요 없는 요긴한 운송수단이었으나, 해마다 꼭 사람을 죽이거나 멀쩡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원한’의 대상이었다.

대차는 크기와 무게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보통 나무나 쌀자루를 실으면 대차 바닥에서 3m이상의 높이로 적재하기 때문에 그 무게가 대단했다. 보통 수레는 한 사람이 끌고 다른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지만 대차는 20~30명의 죄인들이 대차에 하산바 고리를 걸어 한꺼번에 끈다. 힘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한 사람이 ‘헤이~’라고 외치면 나머지가 ‘하이~’라고 외치면서 끈다.

대차 때문에 나도 한번 크게 혼났다. 그날 일은 죽어도 잊힐 것 같지 않다. 대체로 우리 벌목반의 경우 겨울철에는 죄인들이 산에서 벤 나무를 교화소 철문 앞까지 직접 끌고 오지만 여름철에는 대차를 갖고 나가서 산에서 벤 나무를 한 번에 모아서 싣고 온다.

나무를 대차에 쌓을 때는 나무가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간에 나무가 떨어지지 않도록 대차 위에 올라서서 나무를 차곡차곡 쌓는 사람이 필요한데, 나중에 대차를 끌 때 이 사람이 방향타 역할을 하는 것이 벌목반의 상식이었다.

그날 나는 평소와 같이 대차 위에 올라가서 나무를 쌓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른쪽 눈에 경련이 왔다. 나는 특별히 미신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오른쪽 눈에 경련에 올 때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담당 지도원이 꾸물거린다며 욕을 해대서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평소보다 나무를 더욱 꼼꼼하게 쌓았고 매듭도 단단히 붙들어 맸다. 대차 위에서 뛰어내려 손잡이 안으로 들어가 뒤를 돌아보니 도끼로 찍은 나무라 앞머리가 모두 뾰족해 당장이라도 내 등을 찌를 것 같이 보였다.

그동안 손잡이 안으로 수백 번을 들어갔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반원들에게 주의를 주며 위험구간들을 하나씩 벗어났다. 경사가 심하거나 움푹 팬 곳을 지날 때 대차 위에 쌓인 나무가 앞으로 쏠려 사람을 덮칠 수도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개울까지 벗어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 교화소 철문까지는 큰길이며 위험한 구간이 없었다. 100m 앞에 오르막이 보였다. 그 직전에는 약간 내리막이었는데 지금부터 달리며 속도를 내야 오르막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반장이 소리쳤다.

“자, 오르막이다. 뛰자!”

손잡이 안에는 내가 들어가 있었고 손잡이 양쪽에는 반장과 2조 조장이 각각 손잡이를 붙잡는 식으로 3명이 방향을 조절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대차에 나무를 너무 많이 쌓아서 그 무게가 대단하여 속도가 다른 때보다 매우 빨랐다.

대차 뒤쪽에는 3명이 하산바를 대차에 연결해서 대차의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대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이들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땅에 넘어져 질질 끌려오게 되었다. 3명이 땅바닥에 뒹굴다보니 대차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미쳐 많은 사람이 자기 위치에서 원만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바닥에 뒹굴던 3명의 하산바가 벗겨져서 제동력을 상실한 대차는 더욱 속도가 빨라졌다. 대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대차 옆에 있던 사람들도 대차를 따라오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앞에 있던 나와 반장, 2조 조장은 대차 뒤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다.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대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대차의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뒤쪽에서 한 사람이 대차에 올라탔다. 내리막에서는 대차의 하중이 앞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나처럼 대차 손잡이에서 방향타 역할을 하는 사람 쪽으로 하중이 가게 된다.

만약 방향타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대차 손잡이를 놓으면 대차가 급정거 하면서 쌓여있던 나무들이 앞쪽에 있는 사람을 덮치게 된다. 뒤에 사람이 올라타 대차의 수평이 뒤쪽으로 기울자 손잡이를 쥐고 있던 내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이제 대차에는 앞에 3명, 양쪽으로 2명, 뒤쪽에 1명만 달라붙어 있는 꼴이었다. 그중에서 나는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라 대차의 속도를 통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못됐다.

“야, 뒤에서 누르지 말라!”

상황을 알아차린 반장이 뒤쪽을 향해 고함을 쳤다. 뒤에 있는 사람이 대차에서 뛰어 내리자 대차의 수평이 다시 앞으로 약간 기울었다. 내 발도 땅에 닿았다. 나는 다시 힘주어 대차 손잡이를 꽉 쥐었다.

출발할 때는 15명 정도가 대차에 달라붙었는데 이제 6명이 이 큰 대차를 통제해야 했다. 만약 여기서 대차가 급정차를 하거나 뒤집히게 되면 내가 죽을 확률은 90% 이상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며 달렸다.

그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손잡이 안에 있는 나였다. 일단 속도를 줄여야 했다. 손잡이를 위로 젖혀서 대차 뒤쪽이 땅에 닿도록 하고 싶었지만 나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설사 내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손잡이를 위로 올려 뒤쪽이 땅에 닿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충격의 반발력 때문에 대차는 급속히 앞으로 꼬꾸라지게 된다. 만약 손잡이를 놓게 되면 분명히 나무가 앞으로 쏠리면서 내 등을 꿰뚫을 것이다.

방법이 없어 마냥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는 경비대 초병들 7~8명이 근무교대를 위해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다. 교화소 규정에 죄인들은 초병들이 보초교대를 할 때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초병들에게 길을 비켜주면서 그들이 죄인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돌아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규정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대차로 그 규정을 밀어버렸다.

“야, 이 새끼들아! 돌아!”

대열 선두에 있던 보초장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우리의 대차는 그들 정면으로 돌진하고 말았다. 나무를 가득 실은 대차에 울상을 짓고 있는 우리 3명만 달랑 매달린 것을 보고는 그들도 겁을 먹었다.

대차는 곧 감옥 담장 옆을 따라 바람처럼 달려 교화소 철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대차가 멈추지 않아 목적지인 교화소 철문을 지나 계속 달린 것이다. 이런 속도라면 10리 아래 차단초소까지 가게 될지도 몰랐다.

우리가 차단초소까지 가게 된다면 담당 보안원이 악을 쓰며 몽둥이질을 해댈 것이다. 교화소 철문을 지나자 대차에 깔려 죽는 것보다는 보안원에게 욕먹을 일이 걱정되었다. 순간 내 눈에는 교화소 담장 밑으로 지어진 온실의 보호막이 보였다.

경사는 60도, 길이는 2m 정도 되는 보호막이 교화소 담을 따라 쭉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방향을 틀자 반장과 2조 조장이 금방 내 뜻을 알아챘다. 순간적으로 오른쪽 바퀴가 경사면을 타고 올라가면서 기우뚱해진 대차가 4~5m 정도 움직였다.

그러다 오른쪽 바퀴가 경사면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자 이제는 대차가 제자리에서 360도로 빠르게 회전하면서 손잡이 안에 있던 나를 대차 밖으로 날려버렸다. 나는 대차가 회전하는 탄력 때문에 온실벽 쪽으로 날아가 교화소 담벼락에 부딪치고 말았다.

부딪친 왼쪽 허리에 통증이 왔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내 오른쪽에 있던 반장은 온실 안으로 떨어졌고, 왼쪽에 있던 2조 조장은 마지막에 손잡이를 놓아 위기를 모면했다. 뒤에 있던 3명도 별다른 부상이 없었다.

“야, 난 너가 죽는가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앉아 있는데 반장이 넋 나간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 자리를 지나던 보안원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를 바라볼 뿐 욕을 하지는 않았다. 대차가 덮친 온실은 말이 온실이지 실제는 아무것도 재배하지 않고 버려진 땅이었다.

대차는 손잡이 부분은 하늘을 향하고, 뒤는 완전히 땅에 닿아 있었다. 뒤늦게 3조 조장이 사람들과 도착해 다시 대차를 제대로 세우고 교화소 철문으로 향했다.

아마 그때 대차가 땅에 고꾸라졌거나 멈추지 못하고 차단초소까지 내려갔더라면 나는 밀리는 나무에 찢겨 죽거나 큰 중상을 당했을 것이다. 대차 바퀴에 깔려 죽은 사람,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 대차에 실은 나무에 찍혀 죽은 사람 등 하여간 이 대차는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거나 불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은 대차를 ‘원한의 대차’라고도 불렀다. 이런 원시적인 노동도구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화소 보안원들은 대차를 ‘연료가 필요 없는 편리한 운송수단’으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교화소 이야기⑫]잘못없어도 욕먹고 매맞기 일쑤

일반적으로 다들 아름답다고 느끼는 봄을 우리 죄인들은 ‘의붓어머니 봄’이라고 부른다. 교화소 죄인들은 여름을 ‘모기 여름’, 가을을 ‘어머니 가을’, 겨울을 ‘목이 없는 겨울’이라고 부른다. ‘목이 없는 겨울’이란 너무 추워서 몸을 움츠리다 보면 꼭 목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화소에서는 담당 보안원의 지시에 따라 당일의 작업과제가 달라진다. 하루는 우리 1조에 나무 찍기 과제가 주어졌다. 2조는 조장이 책임지고 제방공사에 나가고, 3조는 2개 분조로 나눠져 감방 똥 푸기와 돼지우리 짓는 일이 맡겨졌다.

담당 관리는 3조의 1개 분조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고, 고정 초병이었던 영수는 제방공사로, 또 한 명의 초병이었던 정철이는 우리 1조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나는 14명의 조원들과 함께 도끼와 하산바를 착용하고 목적지인 원골로 향했다.

과제는 한 사람당 직경 25cm, 길이 3m 이상의 피나무를 한 대씩 찍는 것이었다. 원골까지는 10리가 조금 넘는 거리였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전날 제방 쌓기 작업에서 너무 과로했기 때문에 나는 조원들에게 내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산 위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침식사 때 뭘 잘못 먹었는지 초병 정철이가 계속 똥 씹은 표정으로 “이런 속도로 언제 일을 끝마치겠나?”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걸음을 알맞게 조절하면서 행군을 진행했다.

“야, 준하 이 새끼야! 뛰라니까? 원골까지 뛰어!”
“선생님, 아이들이 어제 제방공사에서 많이 지쳤습니다. 좀 천천히 가도 됩니다. 어쨌든 입방하는 시간에 맞추면 되지 않습니까?”
“이 새끼 개수작 말고 뛰라면 뛰어!”

나는 입이 써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달릴 때마다 ‘절그럭, 절그럭’ 하고 하산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조원들에게 모두 내 속도에 맞추라고 당부하며 곧 앞으로 나섰다. 나는 구보 속도를 높여 우리와 초병 정철이 사이를 어지간히 벌여 놓은 다음에야 속도를 줄였다.

“석기(‘돌머리’의 은어) 같은 새끼! 자기는 아침에 밥이라두 처먹고 나오니 우리같이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알 리가 없지!”

거리낌 없이 대놓고 욕을 하는 나를 보고 조원들은 통쾌한 사람이라고 웃고 떠들었다. 교화소 관리들의 살림집 마을을 지나쳐 산 위를 올라가다 교화소 부소장과 마주쳤다. 부소장과 정치부장, 그리고 몇몇 간부들의 살림집은 마을과 약 50m쯤 떨어져 있었다. 밤에 무슨 일을 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듯한 부소장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야, 여기 반장이 누구야?”
“제가 조장입니다. 반장은 제방공사에 나갔습니다.”
“벌목반인 모양인데 초병은 왜 안 보여?”
“뒤에서 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길모퉁이로 초병 정철이가 모자까지 벗어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다가 부소장을 보고는 기겁하여 그 자리에서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정철이구나! 그런데 왜 너 혼자야!”
“예, 저기 영수 동지는 제방공사에…….”
“그러면 경비대에 말하고 경비원을 뽑아가야지 왜 혼자 와?”

짜증이 섞인 부소장의 지시에 초병 정철이는 우리에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에이, 머저리 같은 것이 조장 말대로 걸어왔으면 부소장과 안 만났지!”

조원들이 뒤에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초병 정철이 경비대에 도착하여 경비소대장에게 보고하자 곧 어려보이는 초병이 울상이 되어 무기장 구류를 추슬러 올리며 우리와 동행하였다. 경비대를 떠나자 초병 정철이는 대뜸 나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야 준하, 이 새끼! 너 내가 뛰란다고 그렇게 빨리 뛰면 어떻해?”
“선생님이 빨리 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새끼, 어디에 대고 대답질이야?”

조선말에 “시어머니 역정이 개 옆구리를 차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이 어린 정철 초병이 화를 못 이겨 그 불만을 나에게 퍼붓기로 작정한 것이다. 화가 날 대로 난 그는 여차하면 나에게 발길질을 할 태세였다. 하지만 정철 초병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하면 나를 더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교화소 생활에 익숙한 나는 담당 관리원 외에는 초병들이 죄인들을 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초병들이 나를 때리려고 하면 더욱 더 말로 대들었다. 그렇게 산에 올라 달랑 밥 한 덩어리 먹어가며 힘들게 피나무를 끊어내고 하산길에 나섰다.

진짜 힘든 일은 지금부터였다. 나는 제일 뒤에서 앞 사람의 나무를 내가 끌고 있는 나무 앞머리로 받쳐 주기도 하고, 경사막에서는 하산바를 벗어버리고 같이 끌어올려 주기도 하면서 중간까지 내려왔다.

내리막길에서 내가 끌던 나무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애송이 초병이 내 나무에 올라타서 미끄럼을 타는 어린애 마냥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가? 내 나무는 굵기가 굵어서 가구 재료로 쓰기에 딱 좋았을 뿐만 아니라 올라타도 평평한 매생이처럼 생겼다.

봄철이라 골짜기는 얼음이 녹으면서 땅이 질척거렸다. 내리막이 끝나고 다시 오르막길에 다다랐는데도 이 애송이 초병이 나무에서 내릴 생각을 안 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씨팔 재수 없는 새끼!’라고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악으로 있는 힘을 다해 경사막을 올라서자 나무에 올라타고 있던 애송이 초병이 “너 힘이 장사구나? 교화소 철문 앞까지 나를 한번 끌고 가봐라!” 하며 히히닥거렸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을 애써 참다가 좋은 꾀가 떠올랐다.

그래서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큰 바위에 나무를 충돌시켜 버렸다.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총을 멘 채 까마귀가 날갯짓 하듯 허둥대던 애송이는 바위에 부딪힌 나무와 함께 진흙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서 목의 경동맥을 시퍼렇게 세우며 68자동보총의 개머리판을 내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하산바를 메고 있던 나는 허리를 숙여 애송이 초병의 공격을 피했다. 호걸처럼 멋진 동작으로 68자동보총을 휘두르던 애송이 초병은 내 등에 무릎이 걸리면서 다시 진흙탕으로 곤두박질 쳤다.

어깨에서 하산바를 벗으며 아래를 보니 10m 밑에서는 초병 정철이와 조원들이 서서 나와 애송이 초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진흙탕에서 뒹굴던 애송이 초병이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향해오던 개머리판을 손으로 막았다.

무심결에 총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어느 순간 그 총은 내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총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애송이 초병도 당황하긴 매 한가지였다. 애송이 초병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내손에 쥐어진 총을 한 번 쳐다보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10m 아래에 있던 초병 정철의 격발기 당기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내가 먼저였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애송이 초병 앞에 총을 내던지고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서 주저앉았다. 초병 정철이는 허둥지둥 나무 몽둥이를 찾아들고 올라와서 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고 애송이 초병 또한 이악스러운 발길질을 시작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으로 얼굴을 꼭 싸쥐고 때리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초병 정철이는 한 10번 몽둥이질을 하고 그쳤는데, 애송이 초병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온갖 쌍소리를 내뱉으며 발광을 했다.

그날따라 일이 안 되려고 했는지, 자기 집에 돼지우리를 지으러 갔던 담당 관리원은 목재가 부족하여 자기 집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교화소로 돌아갔다가 부소장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비판받고 우리가 작업하는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담당 관리원은 애송이 초병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나와 그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초병 정철이를 발견했다. 가뜩이나 부소장에게 욕먹은 일로 초병 정철이에게 화가 나있던 담당 관리원은 우선 애송이 초병에게 발길질을 하고 다음으로 초병 정철이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 왜 때립니까?”
“야 임마! 그만큼 올라가면서 간부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제일 사람이 없는 시간에 하필이면 부소장 눈에 걸려? 그리고 뭘 잘했다고 이 아이한테 행패야?”

본인이 두들겨 팰 때는 아까운 줄 모르더니 그래도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자기가 관리하는 죄인을 두들겨 패는 것을 보니 화가 난 모양이다.

“이 새끼가 내 총을 뺏었습니다. 알고나 편드시오. 쳇.”

담당 지도원은 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었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고해 바쳤다.

“그것 봐. 제풀에 제가 놀라가지고. 도적놈들 앞에서 망신스럽지도 않나?”
“아, 지도원 동지! 너무 이 새끼만 감싸고도는 거 아닙니까?”
“됐다 임마. 너는 말할 상대도 안 돼! 야, 너희들 빨리 나무 끌고 입방하라!”

나는 아직도 놀란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우리 조원들에게 혀를 날름거리며 웃어보였다. 보이지 않게 돌아서서 웃음을 참고 킥킥거리던 조원들과 함께 나는 신이 나서 한걸음에 교화소까지 내달렸다.

[교화소 이야기⑬]팔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아(일명 비둘기 고문)

초병과 있었던 사건이 끝난 줄 알았는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 관리원이 내 편을 들지 않고 그냥 초병들을 나무라는 선에서 끝났다면 조용히 일이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애송이 초병이 경비대 소대장에게 울며불며 고자질하는 통에 이 사건은 교화소장에게까지 알려지고 교화소 전체가 들썩거리게 되었다.

일부 보안원들은 내 담당 관리원이 사적인 동정심에 빠져 죄인과 타협하려 했다며 뒷소리를 해댔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 잡부조장이 잔뜩 겁먹은 인상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준하! 보안과 비서선생이 찾소.”
“예?”

보안과라는 말에 나는 살짝 가슴이 떨렸다. 우리 반 반장은 자기 양말과 내복을 벗어 나에게 입혀주느라 수선을 떨었다.

“준하야! 가서 매를 맞을지도 모르니까 아무거나 껴입어라. 그리고 혹시 독방에 갈지도 모르니까 이 양말도 덧신는 것이 좋겠다.”
“너무 걱정마쇼. 어차피 한 번은 당해야 할 일인데 죽기야 하겠소?”

모든 반원들이 동정하는 표정이니 그들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씩씩하게 감방을 나섰지만 막상 보안과 비서실 앞에 서고 보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다리가 춤을 췄다.

나는 긴장감을 수습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다리도 때려 보았지만 다리에서 일어난 경련이 이번에는 속으로 올라와 입술까지 덜덜 떨렸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뿔싸! 태연한 척 자연스럽게 비서실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잊고 그만 벌컥 문을 열고 무작정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이 새끼가 보고도 없이 들어와?”

보안과 비서의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비서의 손에 있던 물컵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날아오는 물컵을 그냥 맞았어야 하는데 내 의도와 상관없이 어느새 내 허리는 숙여져 있었다. 보안과 비서가 아끼던 사제 유리컵은 철문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선생님, 가 282번 리준하 선생님이 불러서…….”
“들어왓!”

나는 엉거주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으려는데 보안과 비서가 고함을 질렀다.

“너, 저기 가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나 골라가지고 와!”

보안과 비서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한 아름도 넘는 나무 몽둥이가 쌓여 있었다. 나는 그중에 넓이가 7cm, 두께가 4cm, 길이가 1m 정도 되는 몽둥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비서 앞에 꿇어앉았다. 몽둥이질을 기다리고 있는데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릎에 끼우라.”

무슨 소리인지 몰라 머뭇했더니 순간 비서의 군홧발이 내 가슴을 걷어찼다. 벌렁 자빠졌다가 후다닥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비서가 또다시 내 가슴을 걷어찼다. 이렇게 열 번도 넘게 오뚝이 놀음을 하고 나니 비서가 입을 열었다.

“무릎에 끼우고 앉으라구. 조선말 몰라? 관절에 끼고 앉으라구!”

그 순간 나는 이 비서가 다른 보안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다른 보안원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쌍욕을 퍼부어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비서는 쌍욕은 하지 않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서운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얼른 몽둥이의 7cm 되는 면을 무릎 뒤에 세워서 살며시 앉았다.

비서는 책장을 한 장 찢어가지고 엉덩이와 종아리 사이에 끼워놓으면서 “종이가 떨어지면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한 5분쯤 지나서 나갔던 비서가 문을 열고 다시 들어섰다.

“종이 몇 번 떨어졌나?”
“안 떨어졌습니다.”

눈에서 불꽃이 피는가 싶더니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비서는 내 뒤편에 있는 고정된 책상 다리에 수갑을 걸어 내 손에 채우고는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종잇장 끝을 발뒤꿈치에 끼워놨으므로 조금만 움직여도 종이가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낑낑거리며 앉아 뭉개고 있었다. 이제는 다리에 느낌도 없어졌다.

종이는 계속해서 떨어졌고 종이가 떨어질 때마다 군홧발로 걷어 채였다. 그렇게 4시간이 지나고 나자 이번에는 나를 꼿꼿이 서 있게 하였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주저앉는 내게 또다시 군홧발이 날아왔다. 맞으면서도 죽을힘을 다해서 일어서니 무릎에서 ‘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겨우 다리를 펴서 섰더니 갑자기 발바닥부터 뜨거운 열기가 다리로 올라오면서 다리의 맥을 모두 풀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비틀대며 책상에 손을 짚었더니 무릎에 끼고 있던 몽둥이를 들고 있던 비서가 벼락처럼 내 손등에 몽둥이질을 해댔다.

그때까지도 나는 외마디 비명만 지르면서 낮은 소리로 “고치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래도 비서는 막무가내였다. 시퍼렇던 손등은 거멓게 되더니 결국 살이 터졌다.

“이제 시작이야. 점심시간이니까 우선 밥부터 먹고 다시 보자!”

비서는 잡부조장을 불러 나를 독방에 넣으라고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잡부조장과 면식소부가 나를 부추겨 2호 독방까지 옮겨줬다.

“울며불며 비명을 지를 줄 알았는데 밖에서 듣자하니 그저 ‘악, 악’ 하는 소리만 나더구만!”
“그러게. 이때까지 보안과 취조 받은 사람들 중에 울고불고 난리치지 않은 사람이 있었나?”

독방 문이 닫히면서 그들의 말이 끊겼다. 사실 나는 기뻤다.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남들처럼 비굴하게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뻤다.

독방에 들어가니 내 밥은 ‘5급 밥’이었다. 직경은 그냥 5cm였지만 높이가 3cm밖에 안 되는 아주 적은 밥이었다. 너무 힘들어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앞으로 고문을 이겨내자면 그거라도 먹어야 했다.

오후 2시쯤 되자 다시 보안과 비서실로 불려갔다.

“흥, 아직 멀었군! 그럼 오전에 했던 것을 그대로 해보지 뭐.”

보안과 비서의 냉랭한 말이 들려왔다. 다시 무릎 뒤에 나무를 끼고 바닥에 앉았다. 곧 다리가 마비되었다.

“준하! 나 기억나?”
“예.”
“그럴 테지. 후회되는 점 없나? 있지!”
“예.”
“무엇이 후회되나?”

나는 질문의 대답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너, 너의 담당 선생에게서 담배 받아 피운 적 있다며?”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일 시킬 때만 “준하야! 준하야!” 하고 평상시에는 ‘개새끼’를 입에 달고 사는 담당 선생이 나에게 담배를 주다니 그런 일은 꿈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비서의 몽둥이질이 이어졌다.

“면회 온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약품 등을 빼앗아서 담당 선생에게 준 일 없어?”
“없습니다!”
“사사로이 담당 선생네 집에 땔감을 해준 적은 없어?”
“없습니다!”
“작년 가을에 감자나 강냉이를 훔쳐서 담당 선생네 집에 갖다 준 일 없어?”
“그런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럼 너는 교화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잘 못합니다.”
“너 담배 피우지?”
“길바닥에 있는 꽁초를 주워서 피운 적은 세 번 있습니다.”

비서는 답변을 할 때마다 몽둥이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울분과 분노를 가까스로 삼키며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속으로 ‘투지, 투지!’를 연방 외치며 오후 고문도 견뎌냈다.

규정상 어느 반에서 독방에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 반에서 독방의 난방에 필요한 땔감을 보장해야 한다. 저녁이 되자 우리 반장이 독방에 나무를 넣어야 한다는 것을 상부에 보고했다.

상부의 승낙이 있었는지 반장이 직접 나무를 메고 들어와 천주머니에 감추어 온 강낭떡을 꺼냈다. 내 몰골이 처참했는지 반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장이 돌아가고 얼마 후에 멀리서부터 반별로 번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화소에서 죄인들이 취침 전에 번호를 외치는 소리는 개 짖는 소리와 똑같이 들렸다.

번호 소리가 끝나자 독감방에도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보안과 비서에게 맞은 부위가 쿡쿡 쑤셔와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다리를 쭉 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교화소 독감방은 가로와 세로 모두 1m밖에 안 되기 때문에 다리를 펴고 누울 수도 없었다.

보안과 비서는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도록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잡부조장이 독감방에 들어와서 목공반장 김혁철과 구내반의 취사조장 량명학을 비롯한 나와 친분 있는 사람 6명을 취조 중이라고 알려줬다.

6명 중에서 김혁철과 량명학은 나와 특별히 친분이 두터웠고, 서로만 알고 있는 비밀이 많았다. 잡부조장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나는 문제가 크게 번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보안과 과장, 보안과 비서, 예심원 명철이와 철국이 이렇게 네 명이 동원되어 검열에 들어갔다. 그들의 잡도리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내 담당 관리원도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우리 죄인들 서로가 동요하지 않고 단합하는 것인데 나는 그들이 이런 고문을 이겨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안과 비서라는 자는 나에 대한 첫 고문과정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자 즉시 방법을 바꾸어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색출하였던 것이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독감방에 들르는 잡부조장으로부터 그들이 나와 같은 고문을 받지만 나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별의별 형식의 고문을 다 경험했다. 보안과 선생들은 등 뒤로 두 손에 수갑을 채워 놓고, 몽둥이로 팔을 비틀기도 하고, 두 팔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발뒤꿈치를 땅에 닿지 못하게 하고 발끝으로 서 있게 하는 고문은 지금도 치가 떨린다.

밤 11시가 되면 피투성이가 되어 독감방으로 돌아와야 했던 우리들은 운 좋게 마주칠 때마다 웃음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그들은 7일 동안 보안과의 고문과 조사를 받아야 했다. 감방의 동료들은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한 셈이지만 내 죄목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과의 고문과 조사는 더욱 악랄했다.

보안과는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감방 동료들에게 죄 같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웠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어 피웠거나 밥덩이와 다른 생활필수품을 교환했다는 내용의 비판서를 쓰게 하고 그들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하지만 나는 쉽게 풀려나지 못했다. 초병의 총을 빼앗았다는 명목으로 나를 굴복시키려고 했으나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에게 제일 악랄하게 굴던 사람은 보안과 비서였는데 원래부터 내 담당 관리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나를 핑계로 내 담당 관리원을 공격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일 만에 보안과 조사에서 풀려났다. 보안과는 결국 나에게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피웠다.”는 진술서밖에 받지 못했다. 독방에서 나오는 길에 담당 관리원과 마주쳤는데 나에게 “독방에 들어가니 살만 하던?”이라며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건넸다.

그는 부식공에게 “야, 준하한테 밥은 먹이지 말고 내가 지시한 대로 죽부터 차례로 먹여라. 알겠지?”라고 전했다. 나는 보안과의 조사와 고문에서 내 양심과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2001년 국가의 ‘대사면’ 명단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교화소이야기⑭] 면회음식 혼자 먹다 끝내 배탈

나는 교화소에서 내로라하는 반장, 티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며 생활했다. 때문에 다른 교화반에서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 보안원들의 악행, 심지어 2과와 4과 등 분소에서 일어나는 실태까지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일반 죄인이었다면 다른 반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화소에서는 다른 반에 고향 친구가 전입을 와도 반장이나 티의 승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일반 죄인들은 남의 일에 관심 갖기보다는 오직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먹는 문제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나는 전거리 교화소에서 많은 일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나름대로 인생수업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들이 현재 중국 생활에서 큰 밑천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전거리 교화소에서 가장 처음 배운 것은 남을 딛고 올라서는 ‘포악성’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포악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화소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딛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 포악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세련되게 되면 교활성을 가진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즈음에서 사람이 두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 부류는 교화소의 나쁜 분위기에 물들지 않고 사회에서 자기가 갖고 있던 가치와 생활 방식에 따라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 사람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풀어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출소해서 사회로 돌아가면 교화소에 다녀왔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타인의 부러움을 사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두 번째 부류는 교화소에서 습득한 너절한 가치를 자신의 인생관으로 확정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출소자 대부분은 사회에 돌아가도 대중의 비난과 조소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교화소에 잡혀온다.

죄인들이 이런 악순환을 겪는 이유는 교화소의 교화 정책에 있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 죄를 반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포악하고 교활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교화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동을 해도 먹는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죄인들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서 면회를 오지 못하는 아내나 가족들을 원망하게 되고, 출소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도 이런 원망들을 가슴속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회에서는 교화소 출신자라고 해서 일자리도 잘 주지 않고 배척하기만 하니까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결국 이들은 도적질이나 협잡질에 빠져 다시 교화소에 붙잡혀온다.

곽만호는 당시 33살로 사기협잡으로 교화소에 세 번째 잡혀온 사람이었다. 말을 기막히게 잘한다는 것이 곽만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곽만호가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온 지 거의 1년 만에 그의 어머니가 첫 면회를 왔다. 나는 취사장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면회 나갔던 곽만호가 면회반장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먼발치에서 보니 면회반장이 곽만호에게 한바탕 욕을 하고 있었다. 면회반장은 함경북도 나진 출신으로 전직 외화벌이 단위에서 소장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말수도 적고, 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 너 같은 것도 아들이라고 찾아온 어머니에게 그게 할 소리야? 이 개 같은 새끼야!”

평소 점잖던 사람이 저렇게 흥분할 정도면 분명 곽만호가 무슨 짓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이유를 물었다.

“아, 이 새끼가 글쎄 늙은 제 엄마 앞에서 뭐라고 지껄였는지 아오? 내가 옆에서 들어보니 ‘노치 어째 이제야 왔소? 씨베, 배고파 죽을 뻔 했소.’ 이러지 않나? 그래도 그 엄마는 ‘그랬니? 글쎄 너가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너무 힘들어서 오늘에서야 왔다. 소토지 농사지은 강냉이 300kg을 팔아서 왔다.’며 달래는데, 이 새끼가 ‘에잇, 이 간나 노치, 됐다. 다음부터 내게 오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오! 에익, 이 사람 같지 않은 개새끼.”

면회반장은 흥분해 있었다. 면회반장의 말을 들은 나도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순간 참을 수가 없어서 10kg이 되나 마나한 속도전가루를 메고 서 있던 곽만호의 얼굴을 걷어찼다.

마치 곽만호가 우리 어머니에게 욕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섭섭한 마음으로 맥없이 집으로 돌아갈 곽만호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대가리를 땅에 박고 코피를 쏟고 있는 곽만호에게 다시 한 번 발길질을 해주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감방에 돌아오니 저녁 배식이 진행 중이었다. 배식이 거의 끝날 때쯤 곽만호가 감방으로 들어왔다. 반장이 곽만호에게 물었다.

“야, 임마! 너 밥 먹겠나?”
“예, 아직 배가 안 차서 먹어야겠습니다.”

원래 죄인들 사이에서는 면회 음식을 먹고 오면 배식된 자기 밥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관습이 있다. 사람들은 면회 음식을 먹고도 자기 밥을 먹겠다는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쏘아봤지만, 반장이라 하더라도 죄인의 밥만은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교화소의 법이었으므로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쯤에 감시창이 열리면서 면회조장이 나를 찾았다.

“준하 조장!”
“무슨 일이오?”
“저 새끼, 방금 면식 칸에서 속도전가루 4kg을 혼자 반죽해서 먹었소. 면식소부에서는 그곳에서 먹을 수 없다고 하니까, 마침 들어온 비서선생에게 먹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더군. 비서선생이 ‘임마 너 얼마나 먹겠나?’ 하니까 ‘예, 한 4kg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 거야. 비서선생이 ‘뭐, 4kg을? 너, 다 못 먹으면 나머지를 몽땅 너희 반 허약자들에게 먹인다.’고 엄포를 놓으니 그 자리에서 그 많은 것을 다 먹어 버렸소.”

뒤에 앉아 있던 곽만호를 쳐다보니 마지막 밥을 입에 넣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짐승 같은 저 인간을 좀 때려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배식이 모두 정리되자 나는 곽만호를 불렀다.

“야, 곽만호!”
“예.”
“너 이쪽으로 오라!”
“예.”

그런데 엉기적 일어서던 곽만호의 입에서 순간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 먹었던 것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그에게 발길질을 하는데, 나는 너무 더러워서 내 옆에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그 인간에게 말도 걸기 싫었다.

새벽 2시. 결국 곽만호의 위가 곽만호 자신은 물론 우리 반 전체를 두들겨 깨웠다. 앓던 소리를 내던 곽만호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면서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벌목! 벌목!”

배식공이었던 현철이 소리를 지르자 술주정뱅이 종학 선생이 가래 낀 소리로 악을 썼다.

“왜 잠도 못 자게 고아대? 빌어먹을 새끼들아!”

종학 선생은 신발을 신은 채 감방 안에 들어와 곽만호를 살펴보더니 위생원 두 명을 불러 곽만호를 데리고 나갔다.

그날 새벽 곽만호는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고야 살아났다. 다음날 아침 교화소에 돌아온 위생원들이 하는 말이 곽만호가 급성 위경련이 일어났는데, 위에서 꺼낸 음식 양이 양동이 하나에 작은 세숫대야 하나였다고 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곽만호를 데리고 갔던 위생원들과 그들을 감시하러 따라갔던 초병들이 한결같이 ‘한 양동이’였다고 해서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람 위가 잘 늘어난다고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나중에 내가 출소해서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에게 곽만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더니 모두가 믿지 않았다. 나는 그때 곽만호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빠져서 그 후로는 ‘만호’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싫어했다.

어쨌든 운이 좋았는지 곽만호는 그날 위경련으로 인해 병보석을 받아 병원에서 석방됐다. 그런데 1년 3개월 후, 곽만호는 또다시 전거리 교화소에 잡혀 왔다.

병보석으로 나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어머니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러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모자라 또 사기협잡질을 해서 붙잡혀 온 것이다. 이번에는 목공반에 배치됐다.

또 죄를 지어 교화소에 들어오면 전에 생활하던 작업반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목공 담당 보안원이 곽만호에게 돈을 받아먹었는지 이번에는 6개월 만에 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6개월 후, 곽만호는 또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왔다. 그의 죄는 역시 또 ‘사기협잡’이었다. 처음에 교화소에 들어왔을 때 사기죄로 교화 6년이었던 그의 형량은 세 번째에 가서는 교화 10년으로 늘었다.

세 번째는 새로 생긴 농장 3반에 배치됐다. 내가 석방될 때 보니 곽만호는 허약 3도로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도 참 불쌍한 인간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어머니와 가족을 귀중히 여길 줄 알며, 더 이상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변모했기를 기원한다.

[교화소이야기⑮]"아무것도 먹이지 말라"…3일 만에 사망

강운호. 이 사람은 함경북도 무산에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33살의 나이에 교화소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강운호는 2과 5반 소속으로 나와는 아무런 인간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다.

2003년 6월 말 2과 5반에서 평죄인으로 생활하던 그가 노력반에 배치된 지 8개월 만에 허약 2도에 걸려 본소에 내려오게 되었다. 본소 허약반에서 생활하던 강운호는 한 달 만에 간염으로 병방 2호실에 입원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군의(軍醫)의 음모에 걸려 죽음을 당했다.

일요일이었다.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정치강연회는 정오가 다 돼서야 끝났다.

장황하고 긴 사설을 귀 아프게 듣고 난 뒤 감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강연회 진행자는 위생원 리학모에 대한 사상투쟁회의*를 선포했다. 강당에 모여 있던 죄인들 모두가 무슨 일로 그러는가 궁금하여 학습시간에 졸던 사람들도 눈을 번쩍 떴다.

보안과 비서와 함께 위생원 리학모가 강당 보안원 출입문을 통해 들어섰다.

“다들 잘 들으라! 이 새끼가 자기 병방에 있던 2과 강운호를 때려죽인 새끼야!”

모든 죄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리학모 위생원이라면 모든 보안원과 죄인들이 다 인정하는 높은 의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람을 때려죽이다니? 나도 상당히 놀라 보안과 비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들 조용히 하라! 병방 2호실에 입원한 강운호가 밥을 안 먹는다면서 ‘고의병으로 병보석 석방되려고 하지 말라.’면서 이 새끼가 허약에 걸려 운신도 못하는 강운호의 아가리를 마구 벌려 강짜로 밥을 쑤셔 넣다 못해 발로 배때기를 밟았다. 그래서 한 시간 전에 강운호가 죽었다. 이 새끼 때문이야!”

보안과 비서는 리학모의 머리를 툭툭 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를 맞으면서도 리학모는 억울한 기색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형기를 받고 힘든 탄광으로 쫓겨 갈 줄 알았던 리학모는 3일 만에 독방에서 풀려나와 다시 위생원으로 복귀하였다. 그제서야 이 사건의 전모가 교화소에 알려지게 되었다.

리학모는 독방에서 나온 다음날 우리 반 휴게실로 찾아와 “준하, 감기약 좀 얻으러 왔소.”라며 내게 말을 건네왔다.

독방에서 풀려난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수심이 가득하였고 나는 그를 휴게실 안에 있는 으슥한 창고로 불러 그가 원하는 담배를 건네주었다. 담배 불을 붙인 리학모는 길게 연기를 품으며 입을 열었다.

“준하, 내가 정말 강운호를 때려 죽였다고 생각하오?”
“어떻게 된 일이오?”

리학모는 묻는 말에 대답 없이 연신 담배만 뻐끔거렸다.

“사실은 내가 죽인 게 아니오. 정학 군의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소.”
“정학 선생이 죽이다니?”

“사실은 강운호가 정학 군의하고 사업을 벌여서 병보석으로 나가게 됐단 말이오.

강운호의 형이 장사를 하는데 돈이 좀 많은 것 같아.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정학 군의가 돈을 받아먹고 강운호를 병보석으로 내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 강운호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말을 다 해버렸으니 정학 군의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하루는 정학 군의가 영 안 좋은 인상으로 나를 찾아왔단 말이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학모, 너네 병방에 강운호란 새끼가 있지? 그 새끼 너에게도 내가 자기를 병보석으로 내보내준다고 개 아가리질을 했나?’ 이러지 않소?

그래서 내가 ‘선생님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까 ‘흥, 너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개새끼가 어디서, 살려줄 수 없겠군. 어디 제 입놀림 덕을 한번 보라지!’라며 투덜대더군.

그러면서 ‘야, 그 새끼 이제부터 밥은 물론 국물도 먹이지 말라! 그 새끼 아가리에 밥 한술이라도 들어갔다가는 너 이 새끼 죽을 줄 알라! 알았나?’ 이러더란 말이오.”

리학모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갔다.

“준하도 알다시피 정학 군의가 어떤 사람이오? 누가 그 사람 말을 거역하오? 그래서 나는 정학 군의가 시키는 대로 한 이틀 강운호에게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는데, 아 글쎄 이 머저리 같은 게 밥을 안 주니까 오늘 내일 병보석으로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단 말이오.

3일째가 되니까 허약병으로 고생하던 제까짓 게 견딜 수 있나? 그냥 정신을 잃고 말았지. 강운호가 정신을 잃자 나는 급한 마음에 밥을 입에 떠 넣어주며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리도록 분주히 움직였는데, 그때 강운호가 기절한 소식을 들은 정학 군의가 나를 자기 방으로 급히 부르더라고.

나를 부른 정학 군의는 자기가 지시할 때까지 강운호에게 밥을 먹이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더란 말이오. 정학 군의에게 불려갔다 다시 병방으로 돌아와 보니 그때는 이미 강운호의 숨이 넘어가고 말았소.

그러고 나니 정학 군의는 내가 자기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강운호를 죽게 했다고 모든 죄를 나에게 덮어씌운 것이오. 먹지 못해 기력이 없는 사람에게 밥을 먹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이오?”

리학모는 나에게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털어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한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중에 보안원들 사이에서 강운호의 죽음에 리학모는 특별한 죄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죄인들은 오랫동안 그를 비난했다.

죄인들은 리학모의 억울한 상황은 모른 채 죄인을 굶겨 죽이고도 별 처벌 없이 계속 위생원질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반년쯤 지나서야 이 사건의 전모가 교화소 내 죄인들에게까지 알려졌고 리학모에 대한 죄인들의 오해도 풀렸다.

정학 군의는 당시 32살로 회령에 가시집*을 두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자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 사람을 굶겨 죽였다.

과연 이 사람에게도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물론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태어날 때부터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태어난다.

이 사람도 역시 어릴 때는 착하고 순수했을 것이며 자기 가족과 처자식에게는 따뜻한 가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굶겨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조선의 교화기관은 사람이 사람을 굶겨 죽이고도 너털웃음을 짓는 포유류 동물원 같은 곳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연피해, 노동재해, 질병 등으로 죽는 것조차도 매우 안타까운 일인데, 다른 사람의 모략에 의해 굶어죽은 일은 너무나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강운호 스스로 입방정만 떨지 않았으면 뇌물의 힘으로 조용히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교화소 간부들이 부정부패와 죄인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태도에 있었다.

애초부터 조선의 교화정책이 바로 서 있었다면 강운호처럼 어이없이 죽어나가는 사람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교화소 이야기-16] 절대로 도주 않고 끝까지 살아 나가야

‘앙~앙~’

규칙적으로 높아졌다 낮아졌다 반복되는 고동소리가 온 교화소 골안에 울려 퍼졌다. 이때는 죄수나 간부나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전시상황을 방불케 하는 비상행동지침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누가 또 도주했구나!’
“작업 중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교화소로 내려간다. 빨리빨리 서두르라!”

담당 보안원과 초병이 산에 흩어져 나무를 찍고 있던 죄인들에게 서두르라고 악을 썼다. 곧장 38명의 죄인들이 모이자 인원점검을 끝내고 산을 내려가 모두 감방 안에 감금되었다.

“잡부조장, 어느 반이오?”

철문을 통과하여 감방으로 들어오던 반장이 반마다 인원점검을 마치고 철문을 잠그던 잡부조장에게 물었다.

“4과에서 도주자가 났소.”

바쁘게 보이는 잡부조장에게 더 이상 말 걸기가 미안했는지 반장은 곧장 감방 안에 들어와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교화소에서 도주자가 생기면 도주자가 붙잡힐 때까지 죄인들 전원이 감방 안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이때는 작업도 없었다.

“모두들 나와 모이라!”

3일 동안 감방 안에 갇혀 있던 죄인들은 본소 마당에 반별로 집결하였다. 나가면서 보니 낙후자 휴게실 앞 공터에 말뚝이 세워져 있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반죽음이 다된 도주자가 거기에 묶여 있었다.

“다들 조용하라!”

보안과장 남병식 보안원의 말에 술렁대던 죄인 대열이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눈깔 뜨고 똑똑히 보라! 도주하는 새끼는 어떻게 되는지! 시작하라!”

남병식 보안원의 말이 끝나자 교화과장이 앞에 나서서 판결문을 펼쳐 들고 엄숙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도주자 ○○○는 사회공민시절 자신의 안락과 이익을 추구하여 귀중한 국가재산을 절치(절도)한 죄로 1999년 ○월 ○일 6년형을 선고 받고 전거리 제12교화소에 입소하였다. 나라와 인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교화소에 들어왔으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교화노동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수용자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하지만 이 자는 공화국의 관대한 법적 제재에 도전하여 도적질로 자기 배나 채우면서 노동을 게을리 하다가 끝내는 자기에게 개전의 길을 열어준 고마운 어머니 조국을 배반하여 도주하였다가 ○월 ○일 경각성 높은 전거리 마을 인민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므로 나라와 인민을 배반하고 도주한 ○○○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교화국 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교화소 마당에서는 죄인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격수 앞으로!”

경비소대장의 구령에 따라 4명의 사격수가 어깨총 자세로 자동보총을 들고 나와 도주자가 묶인 말뚝의 전방 5m 앞에 나란히 섰다.

“우로 돌아!”

경비 초병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교화소 마당에 울려 퍼졌다.

“도주자 ○○○을 향하여 장탄! 단발로 쏴! 쏴! 쏴!”
“탕, 탕, 탕!”

귀를 찢는 총성이 교화소 안에 울려 퍼졌다. 첫 번째 사격으로 이마에는 구멍이 나고 살점과 함께 턱뼈가 튀어나갔으며, 두 번째 사격으로 가슴과 배에 피가 튀겼고, 세 번째 사격으로 허벅지와 무릎 관절이 부서졌다.

말뚝에 묶여 있던 도주자는 다리가 풀리며 무릎 꿇는 자세가 되어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도주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눈깔 크게 뜨고 똑바로 보라!”

보안원들은 죄인들이 일렬종대로 서서 시체 앞을 지나가게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이 전신에 퍼졌다.

총탄에 맞아 사방으로 뿌려진 살점과 핏자국들이 우리들의 눈을 시리게 했다. 우리들은 감방에 들어와서 한참이 지난 후에도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손장난하는 사람조차 없이 조용히 있었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들 왜 말이 없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는 우리야 살아야 될 게 아닌가? 자, 다들 긴장 풀고 위생사업(이잡이) 할 사람들은 위생사업하고 누워 잠잘 사람은 누워!”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반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살 밖에서 잡부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강당에 모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나오라는 보안과장 선생님의 지시요!”

들으나 마나한 보안과장의 강연이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는 보안과장의 강연을 듣기 위해 반원들과 함께 강당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강당 앞에서 보안과장이 일장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는 제목의 강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셨습니다. 나라와 인민 앞에 죄를 짓고 개전 생활(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을수 있는 생활)을 하는 수용자들에게 있어서 노동은…….”이라며 말을 뗀 보안과장은 무려 2시간 반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

보안과장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죄인들의 괴로움은 더해 갔다. 허리는 끊어지는 것 같았고 엉덩이뼈가 배겨서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적을 깨고 교화과장의 욕설이 울려 퍼졌다.

“보안과장 선생이 여기 나와서 말하기 좋아해서 너희 짐승 같은 새끼들에게 입 아프게 연설하는 줄 알아? 개 같은 새끼들이 말이야.”

교화과장은 졸고 있던 한 죄인을 일으켜 세워놓고 악에 찬 욕설을 퍼부었다.

총성으로 시작된 그날 하루는 길고도 길었다. 오후 내내 강당에 앉아 있던 우리 죄인들은 후다닥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상 학습’시간을 갖게 되었다.

당시 나는 벌목방에 전방된 지 세 달밖에 안 된 신참 죄인이었기 때문에 학습시간에는 큰소리로 김정일 명언을 외쳐야 했다. 고참 죄인들은 그저 입만 뻥긋거릴 뿐 소리는 내지 않는다. 나도 나중에 조장이 되고 나서는 학습시간에 입만 뻥긋했다.

나는 감방 벽에 붙어 있는 명제카드를 응시하며 입을 뻥긋거렸지만 아침에 목격한 도주자의 사형 장면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취침구호와 함께 자리에 누워서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절대로 도주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반드시 살아 나가서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교화소에서 아무리 총으로 쏴죽이고 입 아프게 연설을 해도 해마다 2~3명이 도주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도주자에 대한 총살이 없어졌다.

도주자는 사형이 아니라 무조건 남은 형기를 포함해 교화 15년형으로 형기가 늘어났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것은 리인모 노인 덕이었다.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는 한국 사람들도 잘 알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34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몇 개의 교화소를 돌아보고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중앙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의 보고 덕분에 그때부터 전거리 교화소에서 사형당한 도주자는 없었다. 여기서 리인모 노인의 말을 놓고 보아도 조선 교화소의 실태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 수 있다.

그래도 리인모 노인이 방문했던 교화소라면 감출 것은 감추고 사전에 잘 꾸며 놓았으련만, 그 정도마저도 34년간 감옥 생활을 한 리인모 노인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쥐처럼 먹이고 소처럼 일시키며,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인식하는 조선의 교화소야말로 지구상에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교화소 이야기-17]아버지가 죽어도 울지도 못해

교화소 생활은 나에게 많은 고통과 가슴 아픈 추억들을 남겨 놓았다. 벌목반 배치 받은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다들 일어나서 무릎 꿇고 앉아서 사 선생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영훈이가 그냥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무심결에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는데 반쯤 몸을 일으키던 그가 털썩하고 쓰러졌다. 속으로는 약간 놀랐지만, 설마 하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영훈아!”

모두 영훈이를 부르며 비통해 하였지만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영훈이 얼굴만 내려 보았다.

아침식사를 할 때에도 영훈이의 시체는 우리 곁에 있었다. 벌목반장은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영훈이의 사망을 담당 선생에게 보고했다. 영훈이 몫의 밥을 다른 허약자에게 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영훈이는 배가 고파서 부대를 탈영한 군인으로 교화 2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곳에 들어온 지 4개월 만에 죽었다.

입소되던 당시에도 허약 1도였던 그가 힘든 교화 생활을 이겨낼 리 만무했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귀여운 누이동생을 남겨둔 채 교화소 감방에서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영웅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던 꿈도, 노동당원이 되어 부모님들 앞에 당당히 서겠다던 희망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훈이는 전거리 교화소의 불망산에서 한 줌의 재로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림일철, 강동섭, 김용남, 박상철 등 여러 사람이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노동재해로 죽거나 대부분은 허약병 때문에 숨졌다.

당시 전거리 교화소에서는 한 달에 평균 30~40구의 시체를 불망산이라고 하는 산에 있는 큰 화로에 넣어 불태워 버렸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 굴에 가서 죽는다는데 하물며 사람들의 죽은 시신조차 고향에 보내주지 않았다.

사망 통지서를 받고 달려온 부모형제들의 통곡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불망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면서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표현 못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가는 그들을 배웅했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들에게 “학습을 잘하자!” “죄를 씻기 위해서 일하자!” 이 말 외에는 다른 말을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만약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감시하던 사람까지 같이 벌을 주었다.

그리고 말을 잘못하면, 예를 들어 어떠한 정치적 발언이나 사회를 비난하는 말, 불만이 섞인 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에 모두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울 수도, 죽은 자들을 위로 할 수도 없었다. 참으로 비극이다.

부자 간에 함께 교화소에 들어왔는데 그만 아버지가 석 달 만에 허약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망산으로 가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던 아들의 심정이 오죽했겠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형, 자기 동생, 자기 아버지를 불망산 불도가니로 보내면서 한마디 추모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면회를 왔다가 아들이 사망하였다는 소리에 땅을 치며 통곡하는 가족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목격할 때면, 나는 속으로 ‘만일 내가 죽는다면 우리 어머니도 꼭 저들 같은 아픔을 당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살아서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리라 굳은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교화소 이야기-18]모닥불도 없이 얼음 주먹밥 한 덩이씩

2001년 1월 7일,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설은 아침에 우리가 일하러 나갈 때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당연히 오늘 작업은 눈치우기라고 생각했는데 교화소 전체적으로 교화반마다 원목을 잘라오라는 과제가 할당됐다. 우리 반은 각자 도끼와 하산바를 착용하고 무릎까지 차는 눈을 헤치며 10리 밖에 떨어진 원골로 향했다.

나무들이 있는 골짜기 안으로 올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무릎까지 차는 눈 때문에 행군이 늦어져 오전 11시 30분이 다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리의 느낌이 이상해서 만져보니 신발과 바지 하단 틈으로 눈이 들어와서 무릎 아래까지 눈덩이가 얼어붙어 있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반시간쯤 지나자 함박눈이 빗방울과 섞인 진눈깨비로 변했다. 삽시에 우리들의 옷이 젖어들었다.

진눈깨비 때문에 모닥불도 피우지 못한 채 덜덜 떨면서 선 자리에서 밥 한 덩이씩 까먹고 계속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데 작업이 끝나고 하산길에 나서자 진눈깨비가 멎더니 갑자기 세찬 칼바람이 마주치면서 우리들의 옷을 삽시간에 빳빳하게 얼려놓았다.

그럭저럭 힘을 쓰면서 원골에 도착하니 온 교화반 죄수들이 골짜기에 꽉 들어차 쉽게 산을 내려갈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면서 산골짜기를 빠져나오니 이미 오후 4시가 넘어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각 교화반 관리들과 초병들이 죄인들을 닦달하며 악을 썼다. 국물도 없는 얼음덩이 주먹밥 하나로 끼니를 때웠던 죄인들은 칼바람을 마주하고 통나무를 끌다보니 모두가 지쳐 있었다.

나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기운이 없어지고 빳빳하게 얼어붙은 바짓가랑이 때문에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웠다. 죄수들은 반을 구별할 수조차 없이 서로 엉키고 엉켜 오합지졸이 되어버렸다.

나무는 바닥에 얼어붙어 끌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나무 위로 자기 나무를 끌고 다니니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초병들의 욕설이 난무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앞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해가 기울어버렸다.

이때부터 탈진한 죄인들이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했다. 교화소까지 아직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해는 떨어지고 죄인들이 주저앉기 시작하니 각 반의 간부들이 모두 반별로 죄인들을 집결시키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 나무를 버리고 그냥 내려가라! 서로 부축하면서 내려가라! 추울수록 서로 팔이라도 껴야 한다!”

벌써 운신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당황한 관리들은 반장과 조장들을 불러 낙오되는 사람들을 업고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나도 하산바를 벗어버리고 얼어서 운신을 못하는 광호를 둘러메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지치면 반장이 광호를 업고, 반장이 지치면 내가 광호를 업으면서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와 반장도 곧 지치고 말았다.

몸이 허약했던 사람들은 몸이 얼어붙어서 걸음걸이가 느렸고, 힘 좀 쓴다는 사람들도 낙오자를 업고 내려가는 바람에 이동속도가 느렸다. 그때 교화소에 남아 있던 관리들과 초병, 위생원, 배식공 및 신입반에서 대기하던 43명의 죄인들이 우리 대열에 도착했다.

그들에게 내가 업고 있던 광호를 넘겨주자 나에게도 탈진 증세가 찾아왔다. 앞서가는 반장의 좌우로 오락가락 비틀거리는 모습은 술에 만취한 것처럼 보였다.

반장도 입이 얼어 말을 못하고 둘이 겨우겨우 의지하여 걸음을 재촉하는데 마침 농장반에서 끌고 올라왔던 얼룩소 한 마리가 임자도 없이 혼자 뚜벅뚜벅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반장과 나는 소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내려왔다.

그렇게 겨우겨우 교화소 철문 앞에 도착하니 반마다 인원 점검을 하는 절차도 생략된 채 오합지졸이 된 죄인들이 꾸역꾸역 교화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방에 들어가니 다른 죄인들이 입에 따뜻한 물을 부어주며 밥을 먹여줬다. 배식해 놓은 지 오래된 밥이라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 밥이라도 뱃속에 밀어 넣으니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7명의 죄인들이 혼수상태였다.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복도에서는 위생원들과 담당 관리들의 발걸음 소리 때문에 몹시 소란했다.

반장과 나는 정신을 차린 사람들과 함께 아직도 꼿꼿하게 얼어있는 7명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감방 안 죄수들 모두가 달려들어 굽어 있는 팔다리를 펴니 여기저기서 ‘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취사장에서 가져온 더운 물을 먹이려고 했지만 얼어붙은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우리 감방 관리가 “야, 이 새끼들아. 이빨을 부수고라도 물을 먹여!”라고 악을 썼다.

나는 숟가락을 이 틈에 끼워 넣고 비틀었다. 이가 깨진 틈으로 겨우겨우 더운 물을 흘려 넣었다. 그렇게 7명에게 더운 물을 먹이며 온몸을 주물러주자 얼굴에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7명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날 교화소 죄인들 총 47명이 추위로 의식을 잃었고 8명이 사망했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린 사람들은 셀 수도 없었다. 나도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발톱이 다 빠지고 말았다.

죽은 8명 중에는 상하차 교화반의 리 모 씨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오후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면회를 왔었다. 죄인들이 모두 산에 갔다가 밤 10시가 돼서야 도착했는데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밤 11시까지 교화소 철문 앞에서 리 모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 모 씨가 동사(凍死)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하고 말았다. 죽은 남편의 시신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아내의 요청에 면회 담당자는 “어디 와서 감히 죽은 죄인을 놓고 우는가? 당장 돌아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실신해서 쓰러진 시어머니를 품에 안고 죽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여인의 모습은 면회 나갔다가 돌아온 죄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직접 목격은 못했지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능히 짐작된다.

그 후로 허약병에 걸려 죽었거나 동사했던 죄인들의 부모형제들이 면회를 왔다가 교화소 철문 앞에서 울며 나가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몇십 번씩 교화소 철문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며 발걸음을 돌리던 그들을 보면서 죄인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 같은 죄인을 동정해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교화소 죄인들 중에는 사기꾼, 살인자, 강간범, 강도, 좀도둑처럼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70% 이상은 교통사고를 비롯한 과실에 의해 죄를 짓게 된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죄를 짓자고 결심하고 죄를 짓는 사람은 불과 5%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하여 죽어서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인민의 안전을 지키는 법이 존재했으며, 그 법을 지키는 사람들도 인민의 아들과 딸이고, 법적 제재를 받는 죄인도 역시 인민의 아들과 딸이었다.

죽어서라도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들, 형제들과 친구들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죄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죽을죄도 아닌 죄 때문에 교화소에 들어와서 허약병이나 노동재해로 죽어가는 것도 억울한 일인데 시신마저 불망산 화로에 태워져 두 번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교화소 이야기-19]짐승같은 보안원에 굴복하지 않겠다

마일.

특이한 이름 때문에 교화소에서 유명했던 이 사람은 2004년 여름, 같은 감방 사람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서 죽은 사람이다.

마일은 고향이 무산이다. 그의 키는 160cm 정도의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성질이 사납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죄인들 속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또한 인간성도 교활하여 웬만한 보안원들을 슬슬 가지고 노는 정도였다.

한마디로 똑똑한 사람이었으나 교화소에서는 지나치게 똑똑해도 오래 살지 못한다. 죄인들은 물론 보안원들까지 갖고 놀던 마일은 결국 보안원들의 음모로 허약병에 걸려 공무반으로 전방되었다가 그곳 반원들에게 맞아죽고 말았다.

특이한 이름과 포악한 성격 때문에 교화소 내에서 마일을 모르는 죄인들은 거의 없었다. 죄인들에게는 그가 허약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마일은 본래 차 수리반 소속이었다. 마일은 나와 신입반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티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동생 취급을 해서 그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2002년 마일이 낙후자반으로 쫓겨 갔을 때 우리 둘의 관계는 조금 풀렸다.

마일은 차 수리반에서 반장을 뒤에서 조정하며 반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공무반에서 일반 죄인으로 생활을 하던 무산 출신 장송식이 차 수리반장으로 오면서 마일의 생활은 순탄치 않게 되었다.

장송식은 키가 170cm가 넘고, 체격이 좋았으며, 부모가 돈이 많았기 때문에 교화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 수리반장이 됐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서로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았으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장송식은 마일을 자기 밑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고, 마일은 장송식의 약점을 잡아 계속 담당 보안원에게 고자질을 하였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껄끄럽게 여기던 차 수리반 담당 보안원은 마일을 낙후자반으로 쫓아냈다.

장송식과의 기싸움에서 패한 마일은 낙후자반으로 쫓겨 갔지만 계속해서 보안과와 교화과 보안원들에게 장송식의 생활을 고자질했다. 결국 장송식은 2과 2반으로 쫓겨 갔다가 훗날 부모님이 돈을 써서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장송식이 차 수리반장에서 쫓겨 난 후에도 마일은 차 수리반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나 낙후자반에서는 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티 자리에 오른 마일은 다시 거들먹거리며 못된 짓을 일삼았다.

마일은 우연히 교화소 철문으로 들어온 개를 잡아먹은 일로 자기 형기에서 3년이 더해졌다. 또한 다른 죄인과 동성연애를 하는 것이 들통이 나 9년이 추가돼 총 형기가 15년으로 늘었다.

교화소에서 살아나갈 희망을 잃은 마일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구잡이 생활을 시작했다. 보안원들에게 대놓고 욕을 퍼붓거나 툭하면 자기 반 죄인들을 구타해 일주일에 한 번씩 독방에 끌려갔다.

독방 출입이 잦아지니 당연히 허약병에 걸리게 되었다. 잡부조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마일이 좀 거칠긴 해도 남자다운 기질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자다운 기질이 도를 넘어서 수십 년간 죄인들을 다루어 온 교활한 보안원들의 상상조차 뛰어넘게 된 것이다.

하루는 독방에 갇혀 있던 마일이 자기에게 욕을 해대는 교화과 보안원의 얼굴에 침을 뱉은 적도 있었다. 화가 난 보안원이 권총을 뽑아 들고 쏴 죽이겠다고 하자 마일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쏴라, 쏴라, 이 개새끼야!” 하면서 보안원을 조롱했다.

전거리 교화소가 생긴 이후로 마일처럼 대놓고 보안원들을 조롱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교화소에서는 사람의 정신이 망가지는 순간, 그틈을 비집고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일이 공무반으로 전방됐다. 공무반 담당 보안원은 보안원들도 도리질을 할 만큼 성격이 거칠고 포악한 사람이었다.

보안과와 교화과가 토론한 끝에 마일을 공무반 담당 보안원에게 맡겨 버린 것이다. 마일은 공무반으로 전방된 첫날부터 반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아마 공무반 보안원의 지시였을 것이다. 보안원들에게도 기가 꺾이지 않았던 마일이 반원들의 집단폭행에 기가 꺾인 것을 보면 공무반 담당 보안원의 교활성이 마일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나 보다.

마일이 보안원들을 조롱하며 대들었던 태도는 보안원 자신이 직접 손찌검을 하지 않고서는 분이 풀릴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공무반 담당 보안원은 자신이 직접 마일을 때리거나 욕하는 일 없이 감방 죄인들을 동원하여 집단폭행을 가했다.

아마 공무반에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죄인들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마일이 같은 죄인들에게 맞아서 처참하게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일 역시 쌓이고 쌓인 분노와 원한 때문에 선택했던 자기의 죽음이 같은 감방 동료들에게 맞아죽는 개죽음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무반에서 보안원들의 집중 감시대상이 된 마일이 하루 종일 똥지게를 나르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잊혀지 않는다. 그에게 밥 한 덩이라도 갖다주고 싶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약 3도에 들어 거의 해골이 다 된 그의 얼굴에는 그래도 자신만만한 기색이 넘쳤고 가끔 나와 마주칠 때마다 의미 있는 미소를 보여주곤 했다. 나는 그의 미소 속에서 죽기 직전까지도 짐승 같은 보안원 새끼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배짱을 읽을 수 있었다.

교화소의 죄인들은 대부분 죽는 것보다 힘든 노동과 굶주림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악’만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들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버텼다. 한마디로 자신의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짐승우리 같은 교화소에서 죽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개죽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일은 결국 개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그 이후로 공무반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교활한 공무 담당의 음모에 부화뇌동해서 같은 죄인을 자기 손으로 때려죽인 그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반장들과 티들은 공무반장과 그 반원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하니 반원들도 공무반장이 찾아오면 “개새끼야, 우리 반장 없다는데 왜 자꾸 찾아와서 지랄이야?”라며 박대했다.

일요일에 강당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일이 있으면 반장 딱지를 단 사람들은 앞쪽 의자에 앉게 되는데 공무반장만은 반장 딱지를 달고도 구석에 앉아서 봐야 했으며, 공무반의 자리는 늘 가장 뒷자리였다. 공부반 죄인들은 온 교화소 죄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속으로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마일!

그가 만약 일본제국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큰 영웅이나 독립투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결국 교화소에서 죄인들의 몰매로 사망했다.

2009년 11월 리준하

자료제공 : 데일리NK

[교도소이야기]충격 고발 北 제22호 교화소…탈북자 리준하 육필수기 연재1 - 리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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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핑크공주 2010-07-27 14:35:41
    참 교도소사연은 볼때마다 눈물이 나네요 새삶을 찾으신 분께 좋은일만있기를 기대할게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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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2010-07-28 11:59:11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7-28 16: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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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kwlfkddl 2010-07-29 09:31:49
    글을보니 너무가슴아파서 무엇이라고 하였으면좋을지모르겠어요 인간으로태어나서 왜 그렇케억압을당하면서살아야되는지 세계어느나라가북한같은나라가존재하는지북한백성들은모를거애요 하루빨리북한백성들이 잘사는 그런날이왔으면좋을겁니다 한줌만한위도 채우지못해서 허약에굶어죽는 그런나라는 지구상에단하나북조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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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놈아 2010-07-31 01:22:35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8-02 23: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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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고 2010-08-03 05:57:15
    사실을 말해야 하는것입니다.
    북한 인권문제라고 하지만 절대적인 고의적 살인을 하고 온 자들까지도 억지로 미화 한다면 이것은 남한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되려 역효과를 가져 올수 있습니다.

    이 글을 썻다는 사람도 본의던 아니던 살인을 한 자이고 이 글에서 나오는 마일본

    마일(본명 허일)이라는 자는 고의적 살인과 지독한 사회불량자로 들어온 자입니다. 교화소에서도 고치치 못하고 악한 짖거리만 하고 다니다가 너무도 나태해져서 북한 문화 개념에서는 상상할수도 없는 동성연애를 하다가 보안원들의 처벌을 받게 되니 그 처벌을 면해 보려고 내놓은 여죄가 순천비날론공장 건설에 가서 강간 살인 한것을 두건 내놓은 자입니다.

    강간 살인의 목적은 성관계중 여성을 목졸라 죽일때의 쾌감을 위해서라고 한 변태적인 악마입니다.하기에 이 자의 고향 사람들도 그를 본명 허일이 아니라 마일로 통했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 까지도 무슨 영웅될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미화하련다면 동지회는 본분을 망각한 집단으로 되며 안그래도 그리 좋치않은 탈북자 이미지에 더욱 큰 허물을 만들어 놓습니다.

    나는 이준하의 육필수기를 정제하여 내길 바라며 이글이 그냥 존재 한다면 강력한 항의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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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갤럭시s 2010-08-12 12:51:09
    김정일, 김정남 이 있는 이상 절대 북한은 잘살수가 없는 나라임
    나도 북한에 함 살아보고 싶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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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사람 2010-08-22 14:26:38
    경고님아 뭐그리 꼬집을게 있기에 그러나 글쓴이가 우리에게 알려주자고하는것이 있지않느냐 너무좁쌀처럼 안하면한다 글쓴이는 그나라 인권문제에대해 세상에 없는나라이다.라고표현하잤니?지난시기 안좋은관계 있었다면 너회끼리 따로해결보도록하라.여기와서 또복잡하게 놀지않으면해서다.그리고 좀더구체적인자료 있으면 니가또 글올리고 ..그러는게 이싸이트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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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한양 2010-08-24 02:36:50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거 같네요... 우연하게 이 사이트를 알게 되서 글을 몇시간동안 읽은거 같네요... 잘사는 형편은 아니지만... 이 글을 읽어보니 참... 그래도... 남한에 태어나 복받으며 산거 같아서 죄송스럽군요 ..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셨으면 하고 댓글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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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사람아 2010-08-27 02:48:58
    이 팔삭둥이야. 이런 살인자들 때문에 탈북자 이미지 흐려진다. 이놈아 . 네 놈도 살인자이냐. 그 어떤환경 이던 살인자는 정당할수가 없어. 이 팔삭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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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 2010-08-29 19:42:30
    이런 싸이트에 올린 글들은 책 원고를 수정하고 출판한 출판사 기자들이 올린 글입니다. 또한 원고를 쓴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수정하고 출판한 부분이 상당히 많은걸로 압니다. 결코 저자는 자기처럼 본의든 본의 아니든 살인죄로 교화생활을 하는 죄인들을 동정해달라거나 억울하니 이해해달라.는 식의 글이 아닌걸로 압니다. 댓글 (경고)님 당신은 태어나서 남에게 귀뺨한대라도, 혹은 주먹질 한번이라도 해본 경험이 없습니까? 만약에 있다면 무턱대고 살인자들은 용서할수 없다는 식의 댓글은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정당화 될수는 없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 만약 님이 누군가에게 귀뺨을 날렷는데 그로 인해 맞은사람이 넘어지면서 땅에 박힌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살인자구요 무턱대고 비난의 글은 삼가하심이 옳은 처사라 생각 합니다. 만약에 당신 아들이 친구에게 귀뺨을 때렷는데 그로 인해 아들 친구가 사망하였다면 .. 그랬다고 하면 그때도 당신은 자기의 친아들을 지금처럼 용납할수 없는 살인자로 규탄할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군요. 살인자를 동정해달라는 글도 아니고 단지 체제를 규탄하는 글인데 그렇게 까지 악담을 퍼부을 필요 가 없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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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님들 2010-09-04 08:34:48
    바른 내용을 쓰세요. 저도 때린적도 있고 맞은적도 있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자라는 분들이 등장 인물에 대한 파악이 없이 서술한다면 기자를 왜 하며 그 글의 외곡되어 전해져서 생길수 있는 파장에 대햐여서는 누가 책임집니까? 그 때에 가서 난 몰랐소. 하는것이 기자일가요.그 글을 그대로 계재한 싸이트는 책임이 없을가요.
    그러지 않아도 북에서는 탈북자들을 쓰레기라고 말하는데 정말 자신들을 쓰레기 반렬에 스스로 올려 놓는것인가요?
    쓰세요. 쓰고 올리세요. 그러나 옳바른것을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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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델 2010-09-04 23:41:58
    여러분들이 한 말씀은 이것도 저것도 맞는 말이입니다.그러나 여기에서 핵이 무엇이나 그것은 북한땅에선 일단 별치않게 죄를 지어 교화소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는것지요.보안원들의 얼굴을쳐다봐다고 하여. 그들에게 말을 건네다고 하여 군화발에 채이고 배가 고파 똥통에 떨어뜨린 배추.무우 시래기를 그것도 보안원들의 눈치를 봐가며 주어먹고 쥐고기 구워먹고 허약으로 맞아서 죽어나가는 사체는 하루에만도2~3구씩 그것마저 죽으면 부모형제들의 손에 전달되여 땅에 묵히는것이 아니라 죄를 벗지 못한 역적이라고 불에 타 굴뚝의 한점의 연기로 사라져야 합니다.물론 거기에는 인간의 탈을 쓴 살인자도 있지만 그반면에 생계유지를 위해 정권과 법에 맞서 싸우다 죄를 진 사람들이 대다수이지요.물론 죄를 규정하는데서 고의인가 아니면 과실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게지요.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철저히 인간이 아니지요.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옳고 누가 나쁘다를 론하는게 옳은건야.서로가 탈북자들의 이미지에 흙물을 뿌리려고 하지말고 인간의 본성적요구마저 유린하는 현 북한 김정일의 독재정치 단죄할때가 아닌가요.당신들도 인간의 본성적요구를 그땅에서 빼앗겼기에 그땅을 등지고 인간의 본성인 잘먹고 잘사는 자유민주주의 이땅을 찾아오지않아나요.저도 그생활을 해봐서 잘아는데요 정말 북한은 인권유린의 불모지이고 우리가 그땅에서 듣던거와 달리 이 남한에 오니 여기가 그래도 사람사는 세상같구려 하루빨리 인권이 철저히 보장되는 내고향땅을 위해 더욱 힘차게 살아나가자구요.꽁이야 팥이야 따지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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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왠만하면 2010-10-01 22:39:44
    북에서 사시지........남한 살기 어려운 가난한 국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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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ee 2010-10-02 05:28:09
    아무 능력없고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자네에게는 남한이 살기어려운 나라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니 대야에 물떠놓고 유서써놓고 삶을 마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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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사람 2010-10-02 00:33:46
    위의 너 <왠만하면> 북한에서 한달만 살아봐라, 인생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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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복 2010-10-09 11:35:32
    여기에 씌여지는 글은 나만 보는것이 아니라 전세계가 보고 있습니다.그러니 좋은글만 써주었으면 좋겠네요.힘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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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 2010-10-10 04:41:37
    글을 보고 넘 가슴 아팠어요 그땅에서 죄없이 많은 생명들이 죽어나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쓴 수기를 보니 넘무도 가슴이 아프네요 언제면 한민족이 통일되여 웃으며 마음껏 살수 있는 날이 올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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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kdrh 2010-10-10 14:30:57
    마일< 고의적살인이지만 당연히 교화소 가야 합니다
    근데 교화소 가는게 문제가 아니지요
    한국에서 교화소 갔다면 그렇게 맞아죽고 허약오고 하진 않겠죠?
    마일이 죽기전에 매일맞아서 울고 소리치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네요
    저도 2005년 8월에 대사로 나왔거든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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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국뮌 2010-11-04 16:47:30
    이상하군요 남한만큼 살기 힘든곳이 어딨다고 남한으로 올려고 하는지;;

    남한만큼 거지가 많은 국가도 없습니다;;

    북한은 거지가 없죠? 북한이 더 살기 좋아요;;안내려와도 되요

    아 그리고;;중국은 진짜 잘살던데;;중국은 3끼 밥 먹는데요 놀랬음;;

    중국 가세요 ㅎㅎ;;북한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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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넌진짜 2010-12-04 03:37:03
    더대체 뭐하는놈이냐 우리나라 사람맞냐
    너도 좌빨이냐? 남남갈등이나 일으키고 북한체제옹호나 하고 자빠져있는? 남한만큼 거지가 많은 국가도 없다고? 넌 미친넘아 전세계에 거지들이 얼마나 많이있는줄 알고 씨부려대냐? 아 이런새키들 때문에 우리나라 이미지 깎아먹는다 깝치지말고 자삭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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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래 ip1 2011-03-02 14:21:04
    븅신 또라이. 나가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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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민 ip2 2011-05-01 19:51:43
    남한사람맞냐? 북좃선놈아니고?
    의심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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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sa 2010-11-08 22:19:18
    남한여러분 이곳은 북한분들을 위해서 개설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비난이나 비방하는 글은 자제해주세요.

    북한에대한 비리와 악행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본 바입니다.

    북한은 아마 다른공산국가들처럼 망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만행은 계속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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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나 ip3 2010-12-10 00:33:53
    이것들 보세요.. 현실적으로 판단합시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거지새끼 조차도 배불리 먹는 나라입니다...


    북한은.. 거지고 뭐고 없고.. 그냥 다 남한거지만도 못하게 살고요..

    북한은.. 김씨왕조의 북조선이라는 말입니다..



    21C에 김씨왕조가 북조선을 통치하며 북조선 인민들에 등꼴을 빼먹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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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합시다 ip4 2010-12-11 23:20:19
    ㅠ.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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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는자 ip5 2010-12-15 12:45:38
    한국 사람들한테 백날 이런 슬픈 이야기 해줘봤자
    자기가 겪은일 아니기때문에
    들었을때만 아 불쌍하다.... 라고 말하고선
    뒤돌아서면 다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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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시미살자 ip6 2010-12-18 12:15:24
    참 여긴 별별 내용을 보고 서로 의견충돌이 많으네..사공이 많으면 배는어디로 가나..일본 쪽바리들 한테 이러니까 억눌려살고 쪽발이 앞잡이하고 살고 했겠지..이 두나라가 같은 나라인데 지금도 같이..지럴들을 하고있으니..그냥 자기 자신은 자유국가인데 지꼴리는 데로 하고들 사세요..관섭말고.. ㅋㅋㅋ 즐거운 주말..보내세요들..싸우지들 마시고..읽은건 읽는데로 이런넘도 있네 저런넘도 있네 하고 생각하고 그냥...살아요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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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범 ip7 2011-01-13 08:51:27
    난 미국에서 돈아낄려고 요새 딸딸자전거를 도입했는데 (석유값이 비싸지면서 미국에서 중국제 딸딸자전거 지금 대유행)
    이 도로들이 다 자동차용이라서 딸딸자전거는 좀 많이 위험하죠. 자전거 사고로도 많이 죽고 그러죠. 직장에 가까운집은 너무비싸서 지금 멀리다 집을 사려하는데 이것을 딸딸자전거로 왔다리 갔다리 할려고 계획중. 어떤 사람들은 물론 차를 이용하고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두 있소. 근데 참고로 이런 비행기,자전거, 차를 이용해서 장거리를 매일 왔다리 갔다리 하는게 얼마나 위험한것인줄 아는지? 내보기엔 대차 끄는정도는 어린애수준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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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재범 ip8 2011-01-13 10:55:51
    재범아, 자랑이냐? 그지새키, 경차에 만땅 채우는데 $30도 안되는 기름값싼 미국에서 석유 비싸다고 우는 소리 해대는 멍청한 놈...
    나는 뱃살이 나올가봐 운동하느라 가끔씩 자전거 타고 다닌다.
    그것도 $1000짜리 자전거 ...
    나이 40되도록 그렇게 구질구질 살거면 차라리 한국에 가라. 한국인 망신시키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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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재범 ip8 2011-01-13 11:04:44
    재범아, 너 분명히 북한 인터넷 알바인 것 같은데...내가 미국에서도 자동차여행을 즐겨해서 동부, 서부 거의 다 돌아다녔는데, 딸딸이 자전거라는 것 구경못해봤다??
    너 미국와봤냐? 미국같이 넓은 땅에서 레저용으로 자전거 타면 탔지, 운송용으로 자전거 타고 다닌 다는 것이 말 되냐? 하긴 가끔씩 본다. 중국유학생들이 자동차 살 돈 없어서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것 가끔씩 봤다. 근데 요즘은 중국학생들도 자가용차 다 사서 타고 다니더라....
    거짓말도 비슷하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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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재범 ip8 2011-01-13 11:10:58
    왔다리 갔다리-> 이 표현은 남한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데~~~ 딸딸 자전거도 처음 듣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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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헐퀴 ip2 2011-05-01 19:50:30
    왔다리갔다리 안쓰나? 우린 쓰는디 ㅋㅋㅋ 딸딸자전거는 처음들음 ㅋㅋㅋ
    그나저나 재범이좀 정신 이상한듯? ㅋㅋㅋ
    미국에서 기름값아낄려고 자전거를산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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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에선 ip9 2011-07-29 00:25:29
    딸딸이 자전거라는 말 많이 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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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인가 ip10 2011-02-07 22:43:52
    글쓴이가 용기를 내서 과거를 후회하면서 북의 실정을 알리려고 사실대로 쓴글을 정제하고 각색하라니 무슨 영화 시나리오 쓰^^냐?
    탈북자들의 이미지 때문에 정제해서 글을 올린다면 그것이 무슨 수기인가 걍 소설일 뿐이지.
    위 댓글중 몇분은 정제나 미화를 하라고 댓글을 올렸는데 다음에 뒷분들이 글을 쓰는데
    무서워서 글을 쓰겠나. 있는 사실 그대로 글을 쓸것을 권장하지는 못할망정 오히여 정제나 하라니 그렇게해서 글을 올린다면 탈북자들도 글의 진실을 믿지 않을것이고 여기와서 눈팅 하는 분들도 수기를 믿지않게 될것임. 짜증나게 모^^하자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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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휘바람 ip11 2011-03-30 13:20:43
    회령 전거리 교화소는 북한에선 12 교화소라고 부르거든요. 22 교화소는 아님 저두 거기 출신이거든요. 자랑은 아니지만 탈북자 아줌마 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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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잉아이 ip12 2011-06-20 13:12:16
    저도 탈북자입니다. 님들의 말들 다 맞고 참고도 하셔야 겠지만 남한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면 잘 믿지 않고 지어서 낸 이야기 라고 생각하시던데... 설사 지어서 냈다해도 눈에 본것이 없다면 그 정도로 지어서 낼 수 없고요, 또 감옥에 들어가면 2명도 말 맞추기 힘든데 2만 3천명이 거진 한 목소리 낼 때에는 남한 사람들도 귀를 기울여 진실을 느껴야 합니다.

    제가 겪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콩이니 팥이니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북송당했거나, 교화소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 거기서 거기로 이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거죠.
    정말로 북한에서 살아 못 본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 몰라도 살아본 저희로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또 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남한 국민들은 정말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선전용 포스터나 글을 보고, 평양의 눈가림 건물 몇개를 보고 머리를 끄덕이지 마시고 직접 평범한 인간으로 산 꾸밈없는 탈북자들의 증언이야 말로 사실임을 아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북한에 배고파서 나무껍질 다 벗겨먹고 풀 다 뜯어먹었다해도 비행기 타고 평양이나 금강산, 묘향산 한번 갔다와서는 북한의 산림이 푸르싱싱하고 풀도 많고 환경도 좋던데 탈북자들 말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요. 그 비행기 길도 당신들 보는데만 특별관리 한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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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좌죄 ip13 2011-07-28 23:14:54
    지금 이시대에 연좌죄가 있는 나라는 북조선뿐이 아닌가요?
    그리고 북조선과 남조선 비기지 마세요! 비길대상이 아닙니다.
    북조선은 평양과 개발도시하나빼고는 독재로 인해 온천지가 굶주림으로 죽은 영혼들과 이제도 죽어야할 영혼들로 21C지금도 몸서리치고있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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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요미양 ip14 2011-08-05 17:07:25
    참 넘 안타깝네요 ,,,왜 글쓰는 사람의 마음을 읽지못합니까,,,북이요 남이요 탈북자요 하고 싸우지마세요 나라를 떠나서 정치를 떠나서 그냥 우리 같은 사람으로써 생각하고 이해하고 읽어주시면 안됩니까,,,우리는 다 같은 사람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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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512 ip15 2011-10-25 04:49:04

    - ceo512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1-10-25 04: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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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자꿈가지고 ip16 2012-01-05 11:45:40
    2007년도 부터는 전거리 교화소에 여자들까지 입소시켜서 지금은 가관입니다. 암튼 넘 고생많으셨어요...그 생활경험못한 사람들이 남의 일처럼 입맛만 다시는 소리에 넘 신경쓰지 마시고 어렵게 찾은 자유를 맘껏 누리며 행복하세요 ^*^ 글구 그 티 생활 여자들두 통하구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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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0:50:27
    안전거리 교화소를 말하시는거군요 제가 살던데가 전거리에요 그 죄수들이 많이 나와서 선로반 옆에서 일 많이 했는데 죄수들이 배고파서 석탄두 막 먹고 근데 청진에서 안전원들이 안전거리 교화소로 호송할때 때리지 않던데요 많이 먹으라구 밥싸온거 막 주던데 그때 우리 전거리 농장 분조장이 여자였는데 강냉이랑 콩 많이 집에다가 쌓아놔가지구 풍산 분주소에 가서 일주일동안 똥수깐에 앉아 있었다던데~반론 좀 해야겠습니다 북에서 살아 안봤으면 개소리 지껄이지마 북한사람들이 제일 힘들게 일한다 알어 순수 인력으루 다 하잖아 한국은 다 기계로 하는데 뭔 일이 힘들어 일이 힘든게 아니라 스트레스 받아서 힘들지 북에서 농장 내놓구 역전이나 변전소 선로반 이런데서 일하는 사람들 일하면 배급을 줘야 되는데 배급을 안주니깐 3일이면 3일 4일이면 4일 꼬딱 굾는거야 나이 많은 사람들은 폴싹 주저 앉드라 젊은 사람들은 어찌해서 살지만 우리 밀린배급이 일년 반치가 됬는데 그런데두 배급을 못줘 일년치면 소달구지루 한달구지야 심지어 학생들까지두 노동에 참여한다 알어 허구한날 농장에 가서 모내기 하구 가을에는 강냉이 콩을 걷어들이구 또 이삭주이까지 해야되 잘먹다가 3일 굶는거 하고 잘 못먹다가 매일 1끼 푸대죽 겨우 먹다가 (푸대죽은 후루룩 마시면 되는 물처럼 멀뚝한 죽)3일 굶잖아 눈알이 핑 돌아 중국영화 풍운 봤지 검성이 계단위에 서니깐 계단이 꿈틀대며 움직이는거 실제루 그래요 막 빙빙 돕니다 돌아요 겨울에는 3일 굶어두 좀 낳은데 여름에 3일 굶으면 핑핑 돌아요 해가 쬐니깐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 순진한 사람들 다 죽는거야 어린아이들은 훔쳐먹구서라두 살지 나두 큰아버지 큰어머니 다 굶어서 돌아가셨다 근데 얼마나 이상한지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울음이 안나와 더 이상한건 인민반에서 조금씩 모아서 상 차려주면 고고 얻어 먹는 생각부터 한다는거야 지금 생각하면 피를 토할일이지 상상초자 할수 없어 어케 사람이 그것두 가족이 죽었는데 울지두 않고 제사상 차리고 나오는 음식을 먹을생각만 한다는게 너무 부끄럽고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내과거 정말 부끄럽고 돌아가신 큰아버지 큰어머니한테 정말 할말이 없고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언제면 북에가서 제사상 차려줄수 있을지 늘 그생각만 하고있다 아버지의 산소에 가서 술두 부어드려야 하는데 늘 미안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밖에 없다~우리아버지 산소 회령 뱀골짜기에 있거든 풀이나 누가 베어 줬는지 모르겠다 ............................이것두 지어낸말처럼 보여요 이건 실제 제가 겪은 일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분들 해외 교포 여러분 아무말 하지마세요 당신들이 북에가서 살아보고 할말 있으면 하세요 아마 당신들 북에 가면 바로 무직자에 도둑질하다가 감옥에 갈겁니다 거기서 굶어죽던 맞아죽던 어케해서든지 죽겠지 일해봤자 배급두 안주는데 도둑질해서래두 먹구 살어야지 그러다가 맞아죽는거지뭐~그러니 지옥에서 살다온 저희 북한사람들한테 뭐라 하시면 안되요 물론 몇몇분들 질이 안좋은 사람들 있어요 하지만 그걸루 북한사람들 전체를 매도하시면 안됩니다~한국사람들두 중국에와서 행실이 곱지많은 않아요 사기꾼도 있고 별별 사람 많아요 반면에 열심히 선교하시면서 좋은일 많이 하시는분들도 많습니다~그럼 북한이 왜 지옥이냐 먹을게 없어서 영양실조루 죽는다 지금 이 살기 좋은 시대에 그리고 안전원한테 잡히면 개쌍욕에 매 죽도록 맞는다 검열대에 잡혔을때 그리고 구호소에 잡히면 남자여자 상관없이 한곳에 집어넣고 목욕을 시킨다 청진 해얀려관 3~4층 구호소 전용 그리구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게 산다 내가 중국에 처음 왔을때는 중국이 천국이였습니다 음식두 막 버리구 거리에 거리에 차들이 빼곡히 줄서서 다니고 아파트가 줄지어 있고 밤에는 불이 반짝반짝하고 정말 중국은 천국이였어요 태어나서 처음보는 광경이였거든요 물론 7살때 평양에 2달가서 있은적두 있지만 그땐 자동차가 그리 많이 없었어요 버스 무퀘도전차가 좀 있었지 내가 그때 어머니랑 창공원인가 어딘가 여자전용 목용탕 갔는데 안들여보내던데 유치원가서 다 말한다구 6살까지만 들어갈수 있다나 지금 생각하면 참 웃겨요 그땐 몰랐죠 뭘 유치원에 가서 다 말한다는거지 생각했죠 요즘애들은 7살이면 알거 다 알던데 요즘 애들은 무서워요 애들 같지가 않아서~~~~~~한국분들 해외 동포 여러분 생각을 좀 하고 말하세요 북한은 님들이 생각하는것보다 더 비참합니다 내가 98년도에 나왔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있은일을 말하면 뭐 거짓이라는둥 동정받을려고 하는짓이라는둥 막말하지 마세요 그리구 뭐 일하기 싫으면 가서죽구 뭐 그런말두 일하기 싫은 사람이 어디있어요 일해서 돈벌면 좋은거지 해외에 가서 잘사는 한국분들 당신들이 한국에서두 그렇게 잘살수 있었을까요 물론 능력이 되서 이민간 분들두 많겠지만 능력이 안되서 좀 더 잘살아볼려구 간 분들두 수두룩 할거에요~누워서 침뱉는 일들 하지마시고 북한에 대해서 직접 겪어보지 않으셨으면 아무말이나 막 지껄이지 마십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 북에대해서 잘알아 하는놈들 아갈리 찢어죽이구 싶다 제가 경험한건 이정도지만 저보다 어려움을 많이 경험하신 분들두 많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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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0:57:00
    나무껍질 풀 나와서 하는말인데요 저희 솔나무 껍질 벳껴다가 양재물에 담궜다가 송진떡을 해먹었고 가루가 많이 안들어가서 송진 껍질밖에 안씹히는 떡 그리구 봄에는 풀을 뜯어먹어요 그풀의 이름을 다 말하재두 이름이 다 생각 안나네요 대채로는 민들레,뽕꾸대,쑥,밥조개 등등 쑥을 잘못우려 먹으면 얼굴이 팅팅 붓겨요 그래서 얼굴이 몸이 전체가 팅팅 부어서 죽는사람들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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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1:03:21
    안전거리 교회소 들어가는데 54호 군부대가 있지 소문에 의하면 그기 산이 창고라던데 산밑에 창고 있는데 비상용 식량으루 꽉찼다고 문제는 일반인이 함부로 얼씬두 못한다는거 얼씬했다간 바로 총맞고 뒤짐 창고가 무기고인지 식량고인지 잘 모르겠지만 군대들이 총들구 경비서는거 보면 뭔가 있는게 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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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1:19:33
    남한국뮌 점마 개 싸이코구나 점마를 안전거리 교화소에 보내서 한 1년 살게 해봐야 하는데 1년동안 살아나 있을지 의문이다 죽지않으면 다행이지 교화소가 아니라두 그냥 북한가서 살게해두 1년안에 뒤질걸 일해도 배급을 안줘 도둑질해서 먹구살다가 맞아죽겠지 너무 굶어서 도둑질할 힘두 없어서 강냉이 밭에서 강냉이 붙들구 죽을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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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패 ip18 2012-03-08 11:28:23
    산에서 캐온 약초를 물에 푹 우려야 독이 ㅇ빠지고 먹으면 얼굴도 안붇고 쌉디한 맛도 없는데 .그걸 그냥 먹다니.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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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1:29:45
    청진 해안려관에서 매일 4~5명씩 죽어서 당가에 실려나가고 굶어 죽는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처럼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루에 푸대죽 한사발씩 마시면서도 3일씩 굶어도 죽지않고 다시 일어서서 중국에 올수 있지 동정심 같은거 바라지 않고 원하지두 않습니다 그냥 겪어보지 않았으면 아무 막말 하지마세요 솔직히 중국에 한국분들 없으면 북한사람들 살기 아주 힘듭니다 아마 노예취급 당할지도 모르죠 중국에서 저희를 도와주시고 또 도와주시는 한국분들과 조선족분들에게 정말 감사합나다~내 중국에가서 날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까지 보내주신 조선족 어머니에게 인사해야되는데 내 꼭 만나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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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1:38:21
    쑥이 6월달 되면 독이 너무 쎄서 하루종일 우려도 좀 그래요 먹었을때 쓴맛 속도전가루 조금 넣어서 먹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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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고수 ip17 2012-03-08 11:56:33
    조선족어머니 다른데 이사간거 같애서 찾을 방법이 없네요 교회를 다니셔서 교회를 찾아다니면 찾을수 있을것 같기두 한데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알아야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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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테 ip19 2012-06-14 16:50:24
    북한의 감호소 이야기를 모두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북한사람들이 공산당 간부 및 잘 나가는 몇몇 상위권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90%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피를 짜는 고생을 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 눈물 겹도록 슬프고 마음 아픕니다.
    그들을 무슨 수로 구출이 가능할까요??
    둘째, 그 지옥 굴에서 이렇게 살아서 말씀을 전해 주신 '준하'님..정말 존경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이렇게 탈출을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앞으로라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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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글 ip20 2012-06-14 21:12:39
    아주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
    눈물이 막 흘러내리고 꺼억 꺼억 울다가 키보드 두드림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죄인이래도 초보적인 인권은 보장되여야 합니다.

    저 역시 강제로동수용소에서 허리뼈가 부서지고 온 발과 손이 동상을 입고 허약 2단까지 아니 3단초까지 갔을때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께서 저에게 감옥문을 열어주시여 탈출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있습니까?
    자유의 나라로 불리우는 여기 남한,
    사실은 자유민주주의인것이 아니라 도적놈민주주의이며 서로 끼리끼리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해가면서 살아가는것이 현실이며 저 역시 그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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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론 ip20 2012-06-14 21:29:36
    저의 댓글을 보고 그러면 왜 남한으로 왔냐?고 저를 욕하시겠지만 지금의 남한의 현실을 가지고 서는 북한인권에 대해 론할 자격조차 없는것이 이곳 남한의 현실입니다.
    어떤때는 도끼로 그 도적놈들의 대가리를 쳐죽이고싶지만 저는 마음이 그렇게 모질지못하여 그냥 그냥 넘긴것이 어느덧 5년이 되였습니다.

    제가 이 남한이 싫어서 욕하는것이 아니라 이런 결함을 극복하고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나와같은 전철을 밟지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키보드 두드리니 ............................

    그리고 이 글을 쓰신 리준하씨.
    그냥 중국에 계시는것이 어쩌면 더 나울수도 있습니다.
    중국이나 아니면 제3국으로 가시면 가셨지 남한으로는 오지마세요.
    같은 언어와 말을 쓴다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님니다.

    이 나라 사람들 정신세계가 교화소사람들 정신세계입니다. 남을 희생하지않으면 반드시 자기가 죽거나 고통받기때문에 반드시 남을 짓밟고 희생시켜야 한다는 그런 사상으로 꽉 찬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10번이고 1000번이고 부탁드리는데 한국에는 오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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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며칠전에도 ip20 2012-06-14 21:48:47
    또 도적놈들에게 당했습니다.
    이제는 더는 참을수 없다. 이렇게 결심하고 철물점에 가서 함마값을 물어보고 날이 어두우면 함마를 사가지고 함마를 둘러메고 한달음에 달려가 박살내려고 결심했는데 하나님께서 보셨는지 저를 술에 취하게 하여 잠들게 하였습니다.
    그다음날 깨여나 너무 억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니 약간 마음이 진정은 되여 며칠만에 인터넷에 들어와보니 이 글을 보게 되여 지난날 강제로동수용소에서 당한 저의 일고 똑같아서 꺼억꺼억 울다가 남한에서 겪은 나의 생활상을 이렇게라도 알리고 싶고 다시는 나같은 피해자들이 없기를 바라며 키보드를 두드림니다.

    저의 댓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시여!

    저를 욕하시겠으면 욕하시고 마음대로 하십시요.

    그러나 이 기회를 통해 이 나라, 이 사회에 남아있는 온갖 악행을 철저히 뿌리빼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때야만이 북한인권문제도 해결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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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고 ip21 2014-10-05 20:22:54

    - 먼고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10-06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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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라스케즈 ip22 2015-07-02 11:25:26

    - 벨라스케즈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5-07-03 0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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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라스케즈 ip22 2015-07-02 11: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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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라스케즈 ip22 2015-07-02 11:26:38

    - 벨라스케즈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5-07-03 0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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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라스케즈 ip22 2015-07-03 03:04:05
    살인자나 폭력배같은 놈들은 전거리교화소에서 당해도 싼놈들이지...
    누구는 사람 죽이고 싶지 않아서 안죽이고 때리고 싶지 않아서 안때리는 줄 아냐?
    인간이기에 그런 본능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거야!
    고로 탈북하거나 연좌제로 붙잡힌 분들이야 불쌍하고 구제해 드려야 겠지만 살인,강간,폭력 등 쓰레기같은 짓을 하고 전거리교화소에서 개고생하는 놈들에게는 동정할 가치조차 없다!!
    니들이 저지른 죄를 북한정권 나쁘다 김정은이 쓰레기다라면서 미화시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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