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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안하면 굶어죽는건 북(北)과 똑같아
Korea, Republic o 떡만이 0 807 2009-12-15 13:31:52
다음은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자본주의는 정글… 열심히 안하면 굶어죽는건 북(北)과 똑같아"
피나는 노력… 남한에서 정착, 성공한 탈북자들

중고차 딜러 김씨
정착금 4200만원 사기당해 남들이 50만원 남기고 팔 때 저는 5만원 남기고 시작했죠

서울 강서구 자동차매매센터에서 일하는 김영철(가명·40)씨는 '북(北)에서 온 김 부장'으로 통한다. 인맥이 자산인 중고차 매매시장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든 김씨는 7년 만에 누구나 인정해주는 최고의 중고차딜러가 됐다

◆김영철: 일하지 않으면 남한에서도 굶어 죽는다

2002년 12월 한국에 들어온 김씨는 지인의 소개로 강서 자동차매매센터의 딜러가 됐다. 북한에서 고위 사령부의 외화벌이 용도로 일본 중고차를 들여와 몽골·러시아·중국 등으로 밀수출하는 일을 했던 터라 '전공'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정글은 만만치 않았다. 정부에서 받은 정착금 등 4200만원을 밑천 삼아 중고차 매매를 시작했지만 사기꾼들에게 크게 당해 모두 날려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텃세를 부리는 사람들과 주먹 다툼 끝에 벌금을 문 적도 있었고, 남한 사람들이 야속하고 서러워 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김씨는 전략을 바꿨다. 마진이 적어 다른 딜러들이 무시하는 소형·구식 차시장을 공략키로 한 것이었다. 김씨는 "남들이 차 1대 팔아 50만원 이익을 보려 할 때 나는 5만원, 10만원씩 이익을 보더라도 '많이 팔아 회전율을 높이자'는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제는 자본주의가 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자유의 땅이라고 해도 내가 죽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북한에서와 똑같이 굶어 죽을 판국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대신 열심히 하니 그만큼의 보상이 따르더군요."

김씨는 탈북 여성(37)과 결혼을 해 아들과 딸을 낳았고, 발산동에 109㎡(33평)짜리 아파트도 샀다. 직업 덕에 몰고 다니는 자가용은 유명 외제차다.


대우건설 엄 과장
처음엔 용접공 월급 43만원 지금은 사무직 월급 600만원 외로움 떨치려고 일만 했죠

대우건설 엄준호(가명·53) 과장은 회사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5년 탈북자 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나오면서 대우건설에 용접공으로 배치됐지만 남다른 성실함으로 2001년 1월 서울 본사 경영지원팀(사무직)으로 옮겨 왔다. 첫달 월급은 43만원이었지만 지금은 월 600만원을 받는 고액 연봉자다

◆엄준호: 외로움이 최대의 적

엄준호씨는 북한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1995년 하나원 교육을 받고 나오면서 대우건설로 배치됐다. 회사는 엄씨를 강원도 문막읍의 현장으로 보내 용접일을 배우도록 했다.

당시 하나원 동기 18명은 모두 대우·삼성·현대 등 대기업으로 흩어졌다. 한여름에 용접일을 하다 잠시 쉬러 나와 헉헉거리고 있으면 다른 곳에 사무직으로 배치된 동기는 "나는 에어컨 바람에 얼어 죽겠다"고 했다.

엄씨는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18명의 동기 중 1년 넘게 회사에서 버틴 것은 엄씨뿐이다. 에어컨 바람이 춥다고 놀렸던 동기는 카드빚에 허덕이다 잠적한 지 오래다.

2001년 1월 본사에서 "용접일을 그만 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회사는 엄씨를 본사 경영지원팀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생전 처음 컴퓨터 교육을 받고 현재는 회사 차량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엄씨는 "외로움이 가장 큰 적이었다"고 말했다. 혈혈단신의 외로움을 떨치려고 일부러 철야근무를 하고, 등산·봉사활동 등 회사 동아리 활동에도 열심히 나갔다. 그는 "회사가 고향집 같다"고까지 한다. 행복한 가정도 꾸렸고,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 덕이라고 생각한다.

엄씨는 "탈북자들 스스로가 자꾸 압록강을 넘을 때의 마음가짐을 잊는 것 같다"며 "30년을 다른 세상에서 살았으니 적응하려면 당연히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탈북자사회에서 두 사람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죽을 고비를 넘어왔다고 풀어지면 안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은 또 다른 '죽을 고비'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탈북 연예인 1호 김용씨
한때 냉면 체인점 대성공 2000년대 들어 사업 쇠락 이 악물고 유통업 '재기'

◆김용: '피의 대가'로 바꾼 삶

탈북 연예인 1호 김용(49)씨의 한국 생활은 '롤러코스터'였다. 연예인으로 인지도를 높인 뒤 요식업에 진출한 김씨는 '모란각'이라는 냉면 프랜차이즈로 1990년대 말 미국·일본까지 98개의 체인점을 거느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전국의 모란각이 하나씩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5억원 가까운 세금을 못내 출국 금지 조치를 당했고, 신용카드도, 은행 거래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유통업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경기도 일산의 모란각 본점을 기점으로 삼아 프랜차이즈 대신 냉면·만두 등을 홈쇼핑을 통해 포장 판매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김씨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국내 5대 홈쇼핑에서 냉면·만두 매출 1위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저는 '피의 대가(代價)'로 삽니다. 제가 남한에 오면서 북한 가족 수십명이 고통을 받았고, 잘나간다고 멋모르고 사업에 달려들었다 또 피를 봤지요." 김씨는 "돈이 있을 때는 세상 사람들이 따뜻했지만 내 처지가 어려워지니 모두 떠났다"며 "이 땅에서는 역시 이방인인가 하는 설움도 있었다"고 말했다.

누군가 남은 돈을 갖고 외국으로 도망을 가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김씨는 "가족까지 버리고 온 대한민국을 떠나면 또 어디로 가겠느냐"며 프랜차이즈 업주들에게 졌던 수십억원의 빚을 모두 갚았다. "내가 한국에 올 때 돈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잖아요. '김용'과 '모란각'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것은 제 자산이니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죠." 김씨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춰서라도 적응해야 한다"고 했다.


"일자리 구할 수 없으면 우리가 만든다"


탈북자 자활 일터 '행복나눔식당'

20일 늦은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 위치한 '행복나눔식당'. 가게 마당에 놓인 평상에선 40대 남자 2명이 콩대를 벗겨낸 콩을 말리고 있고, 한편에는 박수정(43·경기도 포천)씨가 호박죽을 쑤기 위해 늙은 호박을 손질하고 있었다.

"저 남은 고구마는 어떡합네까? 저번에 받은 홍어도 잘 삭았습네다."

박씨가 북한 사투리가 묻어나는 말투로 한창권(48) 대표에게 물었다. 이곳은 탈북인단체총연합(대표 한창권)이 운영하는 탈북자 자활 일터다. 1994년 한국에 들어온 한 대표는 1998년 최초의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인협회'를 만들어 탈북자 인권 운동을 하다, 지난해 28개 탈북자 단체를 통합해 총연합을 만들었다.

한 대표는 "탈북자들이 '한국인'으로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란 생각에 행복나눔식당을 열었다"고 말했다. 탈북자 10명(남 5명·여 5명)이 이곳에서 반찬 도시락을 만들어 2000원에 교회·학교 등에 납품하고,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직원들은 대부분 한국에 들어온 지 5년 미만으로, 저마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 '동병상련의 탈북자들이 모인다'는 소식에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박수정씨는 이전에는 1년 정도 가죽 공장에서 일했지만, 퇴행성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파서 오래 다니지 못했다.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차량 실내전조등을 조립해 납품하다가 지난 7월 행복나눔식당에 합류했다. 박씨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의지가 된다"고 말했다.

식당 터는 원래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김순애(53) 사장이 후원했다. 가락시장에서 20년간 일한 김 사장이 인맥을 이용해 시장에서 팔고 남은 채소와 생선 등을 공수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 대표는 행복나눔식당이 '1석4조'의 사업이라고 했다. 일자리를 창출하면서도 쓰레기 처리 비용을 아낄 수 있고, 불우이웃을 돕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면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다른 탈북자들도 행복나눔식당을 본보기 삼아 스스로 자활 일터를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매나눔재단이 만든 사회적 기업인 '메자닌 아이팩'(박스 제조 공장), '메자닌 에코원'(블라인드 제조 회사) 등도 탈북자 자활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탈북자 30여명이 근무하는 메자닌 아이팩은 지난 3월 창업 10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고, 지난 1월 문을 연 메자닌 에코원도 올해 안에 흑자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 자격증 5개 따도 소용 없어 북(北)출신 숨기려 이력서·말투 고쳐"


1998년 압록강을 넘어 탈북한 김기철(가명·59·서울 가양동)씨는 5개 자격증을 갖고 있다. 보일러취급기능사·공조냉동기계기능사·방화관리자2급·사용시설안전관리자·전기기능사….하지만 현재 실업 상태다. 실업수당(70만원)에다, 조선족인 아내가 '희망근로'로 벌어오는 돈을 보태 근근이 살고 있다.

보통 김씨가 가진 자격증 중 한두 가지만 있어도 빌딩이나 아파트 관리직 취업은 너끈하다. 하지만 김씨에게 화려한 '5종 자격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탈북자라는 신분을 감추었더니, 그렇게도 안 되던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김씨는 지난 8월까지 서울의 한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에서 보일러 설비담당으로 일했다. 이력서를 살짝 손본 덕이었다. 김씨가 찾은 취업정보회사는 "이력서에 탈북자라고 써놓으면 누가 채용하겠느냐. 경력·출생지와 북한 군(軍) 경력을 지우라"고 권유했다.

면접에서 '적당히 둘러대는 방법'도 배웠다. "이전에 뭐했느냐"고 물으면 "자영업 하다 망했다"고, "학교는 어디 나왔느냐"고 물으면 생각나는 대로 "○○공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어렵사리 취업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1년 만에 쫓겨났다. 김씨는 "나중에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온 이후 식당 종업원이며, 일용직 건설 노동자, 택배기사 등으로 전전했다. 그가 지나치달 정도로 자격증에 매달리게 된 것은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제대로 살려면 '기술'과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죠." 김씨의 말투는 투박했지만, 이북 억양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 역시 취업을 하기 위해 연습해가며 필사적으로 익힌 '서울말'이었다.

그가 지원했던 서울 N호텔은 "우리는 서비스직이어서 탈북자는 못 쓴다"고 했다. 지하에서 기계 설비만 다루는 일인데,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고 김씨는 생각한다. 서너 곳의 호텔과 10여 곳의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죄다 떨어졌다.

작년엔 남한 친구와 함께 서울 시내 한 경찰서의 기계실 근무자를 뽑는데 지원했다. 김씨는 떨어졌고, 자격증이 더 적은 남한 친구는 뽑혔다.


경북 대구 소재 한 아파트전문 위탁관리업체는 탈북자 김기철(가명·59)씨를 채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독자 김종구씨는 서울 종로구 소재 건물 관리인을 찾고 있는데 김씨가 적합할 것 같다고 연락처를 물어왔다.



통일부는 9월 말 현재 탈북자 수를 1만7171명으로 추산한다. 매년 3000명씩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직업 없이 정착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조사(2008년 12월)에 따르면,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탈북자는 49.6%에 불과했다.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탈북자들을 조사했더니 57.6%가 취업보다 기초생계급여·의료보호 혜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국감 자료).


탈북자 쪽의 문제도 있다. 구직 의지가 약한 것이다.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안효덕 대외협력부장은 "탈북자들은 국가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눠주는 사회주의 습관에 젖어, 자본주의의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탈북자 중엔 월 60만원 내외의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에 안주해 소득이 드러나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다. 탈북자는 하나원에서 나올 때 600만원을 받고, 그 후 취업 기간에 따라 1년 근속을 하면 450만원, 2년 근속은 500만원, 3년 근속은 550만원의 인센티브를 주지만, 이를 챙겨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방현종 복지사는 전했다.

탈북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통일부는 탈북자를 고용하는 사업주에게 임금의 절반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주는 탈북자가 다른 직원들과 정서가 맞지 않고, 고용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탈북자 고용에 소극적"이라고 북한민주화위원회 도명학 통일교육부장은 말했다. 안효덕 부장은 "탈북자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 이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편입되지 못하면 결국 사회 불만그룹으로 조직화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들을 시혜(施惠)대상이 아니라 '직업인'으로 자리 잡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애란(43)씨는 양강도 혜산시에 사는 대졸(신의주경공업대학) 출신의 북한 인텔리 주부였다. 그러나 1997년 미국의 할머니와 연락이 닿은 것이 발각되면서 당성이 강한 남편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탈북했다.

4개월 된 핏덩이를 안고 미국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에 왔다. 그는 “도깨비에 홀린 것 같았어요. 남편에게 미안하고 아들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담당 경찰이 소개해준 호텔 청소원으로 남한에서 첫 직장을 잡았다. 조선족 행세를 했는데, 그에게 맡겨진 것은 하루 20~30개의 화장실 청소였다. 월급은 50만원. 교통비와 식비를 빼고 나면 생활이 안됐다. 아프다는 핑계로 그만두고 여러 곳에서 식당일을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너무 속상해 통일부로 찾아가 직업알선을 부탁했어요. 어느 공기업에 공문을 보냈다기에 찾아갔더니 ‘탈북자라서 만날 필요 없다’고 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펑펑 쏟았다”고 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혼자 직업을 구해보기로 작정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신문광고란에 실린 모 생명보험회사의 보험설계사 모집 공고였다. 그동안 국내에서 알게 된 몇몇 사람들과 상의했지만 모두 반대였다. “그거 남한 사람들도 쉽지 않은 거야” “학연·지연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가 주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마음먹은 그는 보험회사를 찾아갔다. 죽기살기로 해보겠다고 통사정해 어렵사리 보험설계사 명함을 얻었다. 처음 몇 달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문전박대는 예사였다. 설명도 못하면서 무슨 설계사냐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 흘린 눈물은 평생을 흘리고도 남을 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휴일도 잊고 남보다 두 세배 뛰었다. 주변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 성실함에 감동돼 도와주기 시작했다. 탈북자 보험 설계사 1년 6개월 만에 그는 최고등급인 ‘수퍼’급에 이르러 2000년 ‘보험왕’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화여대 한 교수의 끈질긴 권유로 2002년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석사학위에 이어, 지금은 식품영양학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탈북자 2만명시대가 되면서 많은 탈북자들이 다시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이념과 체제가 전혀 다른 남한 사회에서의 생존은 탈북 결심만큼이나 어려웠다.

탈북자 사회에서 가장 유명했던 연예인 겸 사업가 김용(45)씨와 전철우(40)씨는 한국사회에서 큰 좌절을 겪었다.

1991년 탈북한 김용씨는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수기를 낸 뒤 연예계에 진출해 가수와 연예인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북한 코너를 운영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탈북 동료들과 함께 냉면집인 ‘모란각’ 을 설립해 40여 개의 체인점을 거느린 어엿한 기업가가 됐다. 순수 탈북자들의 힘으로 큰 사업을 이끌어 화제가 됐었다. 김씨는 한때 수십억 원의 돈을 모았다. 그는 그러나 사기꾼들의 농간에 속아 재산을 날리고 한때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지경에 몰렸다. 그는 지금 ‘모란식품’ ‘오성물산’ 등 남아있던 모란각 산하 유통업체들을 되살리면서 20대 취향에 맞는 냉면을 개발해 모란각의 재기를 꿈꾸고 있다.

동독(東獨) 유학생으로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전철우(40)씨도 1989년 입국한 뒤 방송을 타면서 화려한 스타가 됐다.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 ‘평양 놀새’(오렌지족)란 말을 소개해 유행을 시키기도 했다. 김용씨의 사업이 성공하자 그도 냉면집에 손을 댔다. ‘전철우의 고향 랭면’이란 상표로 체인점을 모집, 전국적으로 점포를 늘려갔다.

그러나 모란각과 더불어 냉면집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고, 재산관리가 제대로 안되면서 냉면집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에서 결혼했던 부인과 이혼했고, 그 스토리가 모 TV방송에까지 공개돼 또 한번 상처를 받았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지금 그는 한 지인의 격려로 ‘전철우의 고향 국밥’을 개발해 재기를 위해 뛰고 있다.


국밥 프랜차이즈사업 등으로 연매출 400억 원대의 사업가가 된 탈북 방송인 전철우가 방송을 통해 통일에 대한 염원과 사업 비법 등을 전한다.

전철우는 15일 방송되는 KBS 2TV '경제비타민'에서 자신이 벌이는 여러 가지 사업 중 2천9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연매출 80억 원을 올리고 있는 국밥집 창업 성공 비밀을 공개했다.

이날 방송에서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북한 요리와 서비스 비법을 전수한 그는 2007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기대감이 크다. 내가 노숙도 하고 죽기 살기로 돈을 모아 지금 이 자리를 이뤄낸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남북을 하나로 잇는 요리를 만들어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나의 최종목표를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올해 남으로 넘어온 지 1 8년째인 전철우는 탈북자의 신분으로 국밥 사업에서 '대박'을 일궈낸 비결로 "북에 있던 어린 시절부터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어머니 덕에 맛있는 음식을 즐겨 먹었는데 그 요리법을 무심코 적곤 하던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소개했다.




1989년 처음 밟은 남한 땅은 낯설었다. 명문대 졸업 후 동독 드레스덴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전철우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날, 인생의 추를 정반대로 옮겨놓았다. 두려움과 기대를 안고 남한에 온 지 19년째. 깡마른 20대 엘리트 청년이었던 그도 이제는 입가에 넉넉한 괄호 주름이 걸린 중년 사업가가 되었다.


죽음을 생각했던 힘든 시간, 극복하고 재기 성공
“그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마치 여러 인생을 산 것처럼 다양하게 말이죠. 한동안 저 바닥끝까지 실패와 좌절도 겪었지만 이제는 자신감도, 활력도, 행복도 맛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의 비법을 담은 야심작 ‘전철우의 항아리 갈비’가 홈쇼핑에서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다. 식품으로 그것도, 단일 품목으로만 100억원어치를 팔았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의 항아리 갈비가 ‘히트’를 치자 여기저기서 비슷한 제품을 내놓는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사실 저는 실감도 안 날뿐더러 매출액 자체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워낙 고기 종류가 홈쇼핑 채널마다 많이 나오고 몇 달도 못가 금방 없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2년 넘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은 생각밖에요. 홈쇼핑 쪽에서 3만원대 한 가지 상품으로 30만 세트 정도를 판 것은 대단한 기록이라고 하더라구요. 요즘에는 어딜 가도 사람들이 저만 보면 ‘갈비’ 이야기부터 꺼냅니다.”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건 ‘전철우의 고향 랭면’으로 처음 음식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기와 사업 실패를 맞았고, 연이어 이혼의 아픔까지, 계속된 상처 끝에 이를 악물고 일궈낸 재기였다.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너무 철없고 뭘 모르던 때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경영도 잘 모르고 나만의 노하우도 없었죠. 그런 데다 나쁜 마음으로 접근한 사람들을 믿고 너무 가까이 뒀어요.”

피붙이 한 명 없이 외롭게 살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을 쉽게 믿고 정을 붙였다. ‘친형제’가 되자던 사람들은 전철우를 빈털터리로 만든 뒤 떠나버렸고 그는 그냥 그렇게 주저앉는 듯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때는 정말 죽고만 싶었어요. 자살할 궁리도 했죠. 어떤 날은 내가 죽을 게 아니라 나를 팽개친 사람들 집을 찾아가서 불이라도 질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매일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소주만 마셔댔죠. 그러다가 문득 ‘나한테 사람들이 뺏어갈 것이 있을 정도로 내가 가진 것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곳에 맨몸으로 온 사람인데 말이죠.”

그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이 누군가 뺏어갈 마음을 먹을 정도의 물질을 가졌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전철우는 햇빛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당시에는 마음이 아파 얘기도 잘 못했던 건데, 사실 죽고 싶었던 그 시기에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은 너무나 훌륭한 분이셨어요.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부모님께 얼마나 죄송할까,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어떻게 얼굴을 뵙나, 이러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저를 세워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다시 시작한 그의 곁에는 다행히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절친한 친구들이나 그를 도와주던 분들은 변함없이 그에게 응원을 보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사람들이 다 떠난다고 들었죠. 그런데 그 말은 틀린 것 같더군요. 제가 힘을 실을 수 있도록 지지대가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도움보다 ‘철우는 돼, 무조건 잘될 거야’라고 말해준 이들을 잊을 수 없어요.”


전철우의 항아리 갈비’를 가장 애용하는 사람도 바로 아내 표진영씨다. 특히 양념이 맛있기 때문에 프라이팬에 밥이랑 잘게 썬 고기를 넣고 양념을 듬뿍 넣어 볶아 먹는다. 물론 하루 종일 항아리 갈비를 끼고 사는 전 대표에게는 생선구이 같은 반찬을 차려낸다. 그러나 아내 혼자 있을 때나 친척,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탁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항아리 갈비라니, 아내도 이번 매출 달성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이름 걸고 좋은 음식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고 싶어
한때는 개그맨으로 방송에 출연해 인기를 누렸던 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음식 사업을 평생 해야겠다는 확신이 든 이후로 전철우의 모든 촉수는 식품 사업에 고정돼 있다. 하루를 단위별로 쪼개 회의에 참석하고, 시장조사를 다니고, 맛을 개발하고, 상품화를 고민한다. 어설프게 이름만 걸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직접 개발부터 판매까지 책임지고 있다.

“이제 식품 사업을 한 햇수가 10년이 훨씬 넘습니다. 그동안 노하우도 많이 익혔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노력해왔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는 자신감도 있고 계속 마르지 않는 애정도 솟아납니다. 항아리 갈비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식품 출시도 해야 하고 제 이름을 걸고 음식 사업을 하는 만큼 저를 믿고 구입해주시는 소비자들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게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재료값이 오르면 판매량을 줄일망정 재료를 아끼지 않는 것이 원칙이죠.”

요즘 전철우의 관심은 온통 상품화 연구에 쏠려 있다. 냉면, 만두, 국밥, 갈비 등 지금 판매하고 있는 식품의 해외 진출을 모색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진출은 상당히 많이 진척된 상태다. 재일교포 식당이 아닌 일본 현지 유통업체를 통해 곧 그의 음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망하는 가게는 왜 그렇고 잘되는 음식은 왜 그럴까를 분석하고 시장 흐름을 읽으려 꾸준히 노력합니다. 요즘은 양보다는 몸에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만들어 예쁘게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격이 비싸더라도 조금씩 다양하게 담아낸 제품이 사랑받는 것을 보세요. 어떻게 상품화 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많습니다.”



김일성대생 꿈꾸던 소년 서울대생 됐다
탈북 3년9개월 만에 사회과학대 합격한 김성철씨
방송인으로 유명한 전철우(40)씨가 그의 외삼촌이다

2005년 4월 열일곱 살 김성철은 조선인민군에 자원 입대했다. 평양 인근 강서군에서 최고 명문인 ‘영웅강서 제1고등중학교’를 전교 3등으로 졸업했지만 대학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다. 외삼촌이 탈북을 했다는 게 이유였다. 방송인으로 유명한 전철우(40)씨가 그의 외삼촌이다. 소년은 다음해 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는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3년9개월 만에 서울대생이 됐다.

김성철(21)씨는 지난 13일 “탈영까지 감행하며 국경을 넘을 때 세웠던 목표를 이제야 이뤘다”고 했다. 그는 최근 북한이탈주민 특별전형으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합격했다. 북한의 서울대라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지망하던 그였다.

“기회의 땅일 줄 알았는데, 처음엔 혼란의 땅이었어요.” 2006년 9월 서울 용산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하며 혼란은 시작됐다. “삼국통일은 고려가 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선 신라가 했다는 거예요. 알고 있던 모든 게 뒤바뀌었어요.” 윤리·사회 과목에서 북한 체제에 대해 배울 때면 괴로움은 더욱 커졌다. 김씨는 “두만강을 건너며 보았던 거지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며 “스무 해 가까이 정의(正義)라고 믿었던 신념이 허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한 반 30명 중에서 그의 성적은 늘 25등 밖이었다.


달라진 환경도 그를 괴롭혔다. 평양에서 김씨는 식료품 가게 아들이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해 본 적이 없었다. 한 학년에 120명만 뽑는 영웅강서 제1고등학교에 두 형제가 차례로 입학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입학한 뒤에도 ‘모내기 지원활동’ 등 강제 동원에서 제외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서울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막노동을 나갔고 어머니는 식당일로 손 마를 날이 없었다. “더 잘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왔고, 가족 모두 열심히 일하는데 삶은 오히려 더 궁핍해졌죠. 그걸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그는 부모님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님은 서울에 정착한 지 3년 만에 10년은 늙은 듯했다. “언제까지 혼란스러워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의(正義)라는 게 결국 한 사회가 정의(定意)하는 것뿐이라면, 일단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3년이 걸렸다.

재수를 시작한 김씨는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경기 용인시의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자정이면 불이 꺼졌지만, 손전등을 켜고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특히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푸는 연습과 객관식 문제 풀기에 공을 들였다. “북한에선 모든 문제가 주관식이었거든요. 대부분 제 수준보다 쉽게 나와서 시간이 부족해 본 적도 없었고요.” 그 결과 지난 9월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상위 2% 안에 들기도 했다.

서울대 합격의 비결을 묻자 그는 “수능 당일 몸이 아파 그리 성적이 좋진 않다”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가난을 해결하고 싶어요. 북한엔 절대적 빈곤이, 남한엔 상대적 빈곤이 있듯 가난은 모든 사회에 있어요.” 그래서 경제학과를 지망한다는 그는 “캠퍼스에서 그 답을 찾아 통일이 되면 꼭 활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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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범한주부 2009-12-29 14:50:09
    맞는 말이죠.상대적 빈곤감은 서울이 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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