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특권층이 사는 다른 세계. 다른 아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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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병영식 사회라고 하는 것은 업무시스템이나 사생활 시스템이 정권 충성으로 일원화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파트란 개념도 사적 공간이 아니라 조직의 감시와 관리의 영역 안에 늘 속해있는 또 다른 조직생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모든 아파트는 기관아파트인 셈이다. 즉 중앙당 직원이라면 중앙당 사택을 사용하고 무력부 군인이라면 무력부에서 제공하는 군인사택에서 살도록 제도화 되어있다. 그래서 평양시 창광동에 중앙당촌이 있고 평양시 서성구역 석촌동에 인민무력부촌이 있는 것이다. 또한 각 기관마다 자체 아파트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관 아파트들에선 사적 자유가 충분치 않다. 출입자 명단과 주민들의 동향은 경비원을 통해 낱낱이 인민반장에게 전달되고 궁극적으로 동사무소와 구역당을 걸쳐 해당 보위부와 당조직에 보고된다. 인민반 생활도 기관에서와 마찬가지로 강연회와 회의, 각종 사회동원제가 매주 적용되는 당 생활 연장선이다. 이러한 동 인민반 시스템이 정상 가능한 것은 기관아파트란 명목으로 기관의 강제적인 지도와 간섭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퇴직할 경우에는 기관 아파트를 반납하고 대신 제공하는 다른 아파트로 이사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당의 배려개념, 혹은 공로표창 의미로 자기 소유 아파트가 된다. 그러나 그것마저 개인소유제를 법적으로 부정하는 북한이어서 죄를 지으면 언제든 회수 처리한다는 국가재산 전제로, 거주권만 인정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남한과 달리 북한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개인의 거주 선택권은 제도적으로 차단돼 있는 형편이다. 북한 모든 주민들의 현재 소유주택은 이렇듯 공화국 법적으로 엄격히 따지면 기관 근무 경력과 충성도에 따라 보상받은 임시소유에 불과하다. 대를 물려가며 당당히 자기 소유권을 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아파트란 오직 김정일이 준 선물 아파트밖에 없다. 평양시에는 간부들 전용 아파트는 물론 항일투사, 예술인, 작가, 체육인, 과학자, 교수, 박사들, 심지어는 중앙당 소속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직업별 분류와 개인별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이 많다. 이런 호화스런 선물 아파트들과 중앙당 퇴직 간부들을 위한 주택을 전문적으로 건설하는 곳이 바로 중앙당 재정경리부 건설담당 8국이다. 초기 중앙당 건물 보수 관리 전담형태로 시작된 이 8국은 70년대부터 김정일의 선물정치 선두주자로 승격되어 지금은 북한의 대연합기업소와 맞먹는 북한에서 가장 큰 건설업체이다.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은 비록 신분 분리를 통한 충성유도용으로 활용됐지만 한편 사유권이 박탈된 북한에서 주택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개인의식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더욱이 1994년 배급제와 함께 주택공급 시스템도 붕괴되면서 북한 정권은 일반 주민들의 주택소유권도 법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심리적 권리를 상실하고 말았다. 먹을 것이 없어 마지막으로 남은 주택마저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북한에는 주택시장이 형성되게 됐고, 정권은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더 부추긴 것이 북한의 자본 특권층이다. 주택시장에서 지역과 품질에 따라 아파트 가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자 북한 자본 특권층은 국가적인 주택건설 붕괴를 기회로 기관 토지를 빌려 6:4로 나누는 조건에 고급 아파트들을 지어 팔기 시작했다. 기관은 기관 간부들에게 큰 집을 주어 좋고 자본 특권층은 돈을 벌어 좋았다. 그 첫 사례가 조선컴퓨터센터 앞에 1996년 지어진 평양시 만경대구역 선내동 5반 아파트이다. 이 건설업을 시작한 사람은 손경철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 말 김일성의 지시로 마카오에 파견된 당 대외연락부 1세이다. 마카오에 정착하여 카지노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고, 당 대남공작부서의 해외거점 토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공로로 손경철은 귀국 후 자본 특권층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계약 기관에 주고 그 위 7층까지는 재일교포 친인척들에게 한 채당 미화 2만 불에 팔았다. 그리고 8,9층은 자기 개인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한의 건설상식으로는 방이 4개가 있는 50평 정도의 집을 2천만원에 판다면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북한에선 충분히 남는 장사이다. 모든 인력이 공짜나 다름없고 건설자재도 북한 가격으로 따져볼 때 터무니없이 싸기 때문이다. 이후 손경철에 뒤질세라 북한의 큰 손들이 너나없이 당과 군,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들과 아파트 건설을 계약 실행했다. 내가 탈북하기 전 2004년에는 방 한 칸(북한은 평수가 아니라 방개수로 돈을 따진다.)에 만불이 되는 5만불짜리 아파트들도 속출했다. 그런 기관 계약 아파트들은 분배 비율에 맞게 해당 기관의 기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우선 입사하기 때문에 친분목적으로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은 한강이남 쪽인 강남이 부유층 지역이라면 평양은 대동강이북 쪽인 중구역과 보통강구역이 유명하다. 중앙당과 주요 국가기관들이 밀집됐기 때문에 정전이 적은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이런 지역가치 때문에 중앙당재정경리부 8국이 평양시 중심구역들에 짓는 김정일 선물아파트들은 5만불 아파트들도 몹시 부러워한다. 북한의 아파트 가격은 전기 공급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전기 우선공급 대상들인 당 간부 및 군인 거주 단지들과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은 계속 늘어나는데 평양화력발전소 발전 용량은 제한적이었다. 하여 북한은 1989년 세계13차청년학생축전 준비용인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와 함께 동평양화력발전소도 건설했다. 이 동평양화력발전소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굴뚝을 가졌지만 자체 발전시설이 열악한데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석탄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겨울이면 중앙열난방 시스템이 오히려 문제가 돼 관들이 얼어 터지는 등 사고들이 계속 발생했다. 결국 평양시당은 1999년 중앙당 간부 아파트가 밀집된 중구역과 보통강구역, 인민무력부 대단지와 김일성의 금수산기념궁전과 호위사령부 군관 사택들이 모인 대성구역을 제외한 모든 타 구역들의 중앙열난방체계를 끊고 난방문제를 자체로 해결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중앙열난방을 공급받지 못한 평양시내 수십만 일반 가구들은 석탄으로 겨울을 나게 되었고 촛불 밑에서 살게 되었다. 먹지도 못해 땔감을 구할 기력도 없는 홀로 사는 노약자들이 집에서 얼어 죽는 사건이 빈번했다. 임산부들이 있는 가정들은 집 안에 따로 비닐하우스를 치고 그 안에 숯불이나 더운 물을 넣는 방법으로 겨울을 나기도 했다. 가끔 석탄불을 넣은 채 잠들어 질식 돼 죽는 산모와 애기들도 많아 주의를 강조하는 동, 인민반 강연회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전기 공급이 4시간이던 2004년에도 평양시 중심구역과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만은 전기와 더운물이 끊이지 않았다. 암흑의 도시에 권력과 부를 과시하며 환하게 밝히는 그 불빛을 두고 평양시민들이 분노해하자 전시용 등하간제(燈下諫制)로 창문들을 가리면서까지 그 아파트들은 특권을 계속 누렸다. 북한 주민들은 굶어죽는데 부유층들은 아파트 치장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전문 아파트 인테리어 자재만 파는 평양시 광복거리에 있는 제2경제 99호총국 산하 “련봉상점”은 일 년 내내 휴일이 없을 정도였다. 인테리어 경쟁에서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어떤 부유층들은 1여단의 물자 구입 루트를 이용하기도 했다. 1여단이란 김정일 특각이나 초대소 건설만 전담하는 비밀부대이다. 그래서 군복 입은 부대지만 인민무력부가 아니라 당 조직부 직속이며 여기 여단장도 상장(쓰리스타)이다. 1여단 조직비서는 이태리 붉은 대리석과 독일에서 수입한 조명등들, 프랑스 타일 등 각종 고급 외제 인테리어 자재들을 수입하여 부유층들에게 몰래 판매했다. 물론 김정일 초대소나 특각 자재들을 빼돌린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선불한 돈으로 별도 주문한 것일 뿐인데도, 단지 1여단 수입루트를 이용했다는 것이 죄가 되어 1여단 조직비서는 군법으로 총살되었다. 그때 그의 집 가택수색에서 나온 미화만 50만불이 넘었다고 한다. 이렇듯 북한 부유층들 속에서 아파트 사치열풍이 부는 것은 시장의 확대와도 관계가 있지만 보다는 측근들에게 주는 김정일 선물 아파트들이 유행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호화아파트가 평양시 대동강구역 의암동 조선중앙TV총국 바로 앞에 위치한 은덕촌이다. 이 아파트들에는 김정일의 최측근들이 거주해있다. 김정일은 자기의 유일독재 편리를 위해 업무 측근과 실제 측근을 분명히 갈라놓고 차별적인 우대로 충성경쟁을 조장한다. 업무 측근은 해당 부서장의 직함을 주어 종적 체계를 구축하고 실제 측근에겐 필수 직함을 주어 횡적 체계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김정일의 십자형 통치 기술이다. 실제 측근들 중에서도 김정일은 이 아파트 선물 명단 첫 이름으로 오극렬을 직접 써넣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어렸을 때 말버릇처럼 자기는 당 총비서, 오극렬은 인민무력부장, 최룡해(항일투사 최현의 아들)는 당 조직비서, 이렇게 권력약속을 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오극렬의 어머니 백세 기념잔치를 외국국가수반급만 머무는 백화원에서 하도록 했고, 과거 김일성이 인민군 총참모장직에서 해임시켰을 때에는 집을 찾아가 온 밤 위로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일성 사후 내각 재구성 안건에 오극렬의 인민무력부장 임명권이 빠졌을 때에는 나에겐 인민무력부장이 아니라 당 대남공작 작전부장 오극렬이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 밤중에 부인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오극렬의 가족은 물론 사위들까지도 세심히 챙겨준다. 셋째 딸 오혜선의 남편 장혜명(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졸업, 북한 유명시인)을 통전부 101연락소 5국 국장으로, 4째 딸 오영희의 남편 최태영(평양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 졸업)을 평양시청년동맹1비서로 직접 임명하기도 했다. 5명의 딸들과 사위까지 모두 기자, 작가였던 이유로 오극렬 일가와 가까이 지냈던 나는 은덕촌을 구경할 기회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은덕촌처럼 생각하고 남한에 온 이후 강남에서 부의 상징이라는 타워팰리스에 들어가보고 크게 실망한적 있다. 오극렬, 강관주를 비롯하여 당과 軍 최고 장성들이 거주한 이 아파트는 총 6동으로 돼 있다. 2동은 조선노동당 측근들로, 4동은 군 측근들로 채워졌다. 인민무력부 청사경무부 한 개 소대가 주 교대제로 경호하고 있는 이 은덕촌의 출입일지는 매일 당조직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보고된다. 1동이 6층짜리(1층은 차고)인데 방12개와 부엌 2개, 화장실 세 개를 갖춘 한개 층이 통째로 한 세대이다. 마당처럼 넓은 거실은 두 면이 통째로 유리로 이어져 있어 햇볕이 잘 들게 했고,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 옆에 방들이 있다. 서재에는 업무 전화와 깜빡이 안테나가 달린 김정일 직통전화가 있다. 이 전화들은 김정일 서기실 교환과만 연결돼 있는데 버튼식이 아니라 다이얼 수동식 전화기이다. 김정일과 관련해선 조금의 빈틈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반도체 부품에서 발생하는 파도 차단하고 고장이 적은 수동식을 놓는 것이 원칙이란 것이다. 다이얼 가운데에 빨간 당 마크가 박힌 이 물건은 가족 중 누구도 감히 만져선 안 되는 오직 수신용전화기이다. 또한 은덕촌 모든 세대의 가구는 한국 에이스 침대회사 제품들이다. 한국 에이스침대회사 안유수회장이 김정일에게 행운의 숫자라며 선물한 333점의 가구들 중 일부를 은덕촌에 보낸 것이다. 구글 위성사진으로 이 지역을 살펴보면 총 7개의 건물이 있다. 그 중 한 건물은 주변에 대남공작부서 수장들과 인민무력부 초대소가 밀집된 정부관리 구역이라 좀처럼 정전이 없는데도 만약 경우를 감안하여 6동을 위해 설치된 디젤발전시설 건물이다. 서울 강남의 그 어느 아파트보다 더 호화스러운 이 은덕촌 같은 측근용 선물아파트는 그 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과 보통강구역 신원동, 대성구역에 총 100채가 건설됐다. (내일 계속) 장진성의 블로그 http://blog.daum.net/nk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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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체가 매끄럽고 이야기 진행형이 좋습니다.
좋은글 자주 올려주세요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세요
연락하며 지네고 싶네요
일설에 의하면 오극렬의 장남 오세옥이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까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