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좌우합작, 연방제와 비슷 한 점이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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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을 따르다가 패망 제2차세계대전이 거의 연합국의 승리가 될 것이 분명해져 가던 1945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창립총회가 열렸다. 회의장 분위기는 전후의 문제를 소련과 협조해 처리한다는 좌우합작 노선으로 굳어졌음을 보여 주었다.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이미 모택동의 공산당과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들어감으로써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에 동조한 상태였다. 그렇게 된 데는 주로 외교부장으로 좌우합작론자였던 송자문(宋子文)의 공작이었다. 그는 장개석의 처남이었지만 결국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넘겨주는 데 크게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송자문이 샌프랜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 나타나서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 참석자들이 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만은 반대했다. 좌우합작으로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화(共産化)의 길로 가고 있는 마당에, 단순히 미국과 중국에게 잘 보여 해방후에 권력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좌우합작 노선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에게 그것은 정치적 자살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좌우합작 노선을 받아 들일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완강히 반대했다. 공산화로 이끌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아이오와 같은 시골에 가서 닭을 키우며 살겠다고 말했다. #미 군정청, 이승만을 가택감금 미국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해방후 한국으로 돌아올 때 미국무부로부터 귀국 방해를 당했다. 이승만과 같은 반공주의자가 한 반도에 나타나게 되면 소련과의 협조가 방해받을 받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귀국을 서둘렀지만 해방이 된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예상은 들어 맞았다. 1945년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소련을 포함한 4개국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앞으로 좌우합작의 연립정부가 들어 설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탁통치 방식을 통해 소련이 일단 한국 땅에 발을 붙이게 되면, 한반도는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화될 것이 확실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는 한편, 미국에 다시 가서 미국의 정책을 바꾸어 보려고 했다.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의 협조를 얻어 1946년 12월에 워싱톤에 도착했다. 임병직,임영신과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국 국민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는 상당히 성공했지만, 국무부의 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또 다시 귀국 길에 방해를 받아야 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협의에 방해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미 군정청으로부터 가택연금까지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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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3-18 13:00:27
- 뭐여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3-18 13:00:09
내가 입다물 이유를 닥 10가지만 요약해서 보고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