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에 가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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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떠나온지 곧 5년이 되어온다. 그동안 북한은 어떻게 변했는지,그들의 삶은 어떤지 간간히 이곳 탈북자 동지회를 통해 듣곤한다. 지금은 너무도 많이 변한 내자신의 모습에 어떤모습이 나의 본모습이었는지 조차 까마득하다. 폭력적이고 선동적인 군가와 병영식전체주의사회에서 청춘시절의 절반을 보낸 나에게도 그래도 감성은 남아있었나보다. norah jones의 노래를 좋아하고 가끔씩듣는 dolly parton의 노래에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흘리는 내가 됬으니 말이다. 정말 내가 북한에서 살았는지도 잊어버릴때가 많을만큼 나는 많이변해있다. 이런것을 두고 적응이라 하는것인가? 각설하고 나는 평양출신이고 사물에대한 판단력이나 분별력이 자리잡힐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왔다. 봄이면 살구나무꽃속에 묻혀 아름답던 대동강변의 나의집이 정말로 그립다. 사실 나는 그리 모범생은아니었다. 고등학교시절 범생이처럼 생긴 외모와는 달리 전학첫날 패싸움을 일으켜 부모님들이 학교로 불려와 질책당하는 수모를 겪게 하기도 했었다. 연애를 금지하는 고등학교에서 패거리의 친구들 모두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줬으니 과히 열심히 말안듣는 일진이리라.. 그래도 문학동아리활동을 열심히 하여 문학상도 받은적이 있었지만 그 수상식날 패싸움을 이유로 전교생앞에서 시말서를 읽어야했다. 어찌됬건 졸업날짜는 빠르게 다가왔고 나는 군에 입대하느냐 아니면 대학으로 진학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군에는 죽어도 가고싶지않았다. 내 젊은청춘의 황금기를 군에서 다보낸다는것은 죽는것보다 못하게 느껴졌다. 결국 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봤건만 낙방하고 말았다. 합격자 명단 발표날에 나를 더욱아연하게 한것은 지리시험때 한반도 지도를 돼지심장처럼 그려넣었던 내옆자리 녀석의 이름이 그속에 있는것이었다. 물론 돈으로 졸업증도 팔고사는 시대인건 진즉에 알았지만 참으로 큰 충격이었다.왜나면 나는 꽤 시험을 잘보았다고 자신하고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유야 어찌됬건 이미 떨어졌으니 남은 선택권은 부모님의 인맥을 통한 대학교 뒷문입학이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인텔리이신 나의 아버님은 절대로 그런것을 용납하실수 없으셨으니 나의 사회생활은 이렇게 시작됬다. 아무리 날라리이었던 나에게도 순정은 있었나보다. 2년이 넘게 말한마디 못붙여보고 멀리서 가슴앓이만 하던 첫사랑이 군에가던날 나는 드디어 드라마같은 고백을 했다. 북한은 여성들도 자원입대형식의 징집을 하고있다.(오해하지마시길) 군으로 가던날 그녀는 나에게 자그마한 소형녹음기 하나를 선물로 남겼다. 라디오 기능이있는 그 작은 선물이 나의 인생을 바꿔놓을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 라디오에서 남한방송이 나오고 있었던것이다. 첫 그방송을 들을때의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은 정말로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당시 내기억으론 남한에서 방송하는 대북용라디오라고 기억된다. 자유fm이라고 말하던 아나운서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잊을수가 없다. 밤 10시부터 새벽1시까지 나는 매일 이불밑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부드럽고 친근한 아나운서의 서울말씨가 그토록 멋있고 소리새와 태진아의 노래소리가 그토록 감미로울수가.... 나는 한동안 천국을 노닐었다. 북한당국의 선전처럼 퇴폐적이고 개같은 세상은 라디오에서 나오지않았다. 이북에대한 체제비방이나 자신들의 부유함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간간히 이산가족의 편지사연이나 가슴아픈 분단의사연들이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 눈물흘리게 할뿐이었다. 결국 나의 일탈은 라디오를 넘어서 남한 dvd와 tv시청으로 이어졌고 남한으로 오기전까지 나는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다보고야 말았다. 훗날 인천공항에서 나를 맞이한 국정원 관계자분에게 불멸의 이순신이 몇부까지나왔냐고 물었더니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말했다. 어찌됬건 나의 일탈은 오래가지못했다. 아버지에게 현행이으로 발각된것이다. 문제의 그날 나는 축구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시는것도 몰랐었다. 내뒤에서서 tv를 보시며 패스미스를 질책하시던 아버지가 해설자의 낯선억양에 의아해 하시더니 곧바로 나오는 세탁비누광고에 급기야 깜짝놀라시는것이었다. 결국 그날 나는 20살이 다되어서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옛날같았으면 백번이고 내편을 들었을 어머니마저도 숨소리도 못내고 아버지옆에 서계셨다. 그날 나는 집안을 망하게 할 놈이라고 온가족의 지탄을 받았다. 하기야 만약 이 상황이 딴사람에게 발각이라도 됬을경우 우리가족은 아마도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을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온가족이 남한공영방송을 시청하게 하는데 성공했고 그토록 완고했던 우리아버지도 뉴스시간만큼은 남한방송을 시청하셨다. 물론 구실은 나는 지식인이고 그로인해 세계적인 흐름을 알아야겠다는 논리셨으나 뭐 그거나이거나.... 결국 아버지의 말씀한마디가 기억에 남았다. 당국은 정말로 퇴폐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이고 뭐고 하면서 주민들의 눈과귀를 막는다고,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안좋은것이면 보여주면서 말해야한다고, 이래서 이것을보지말라고 한다고 말이다. 사실그랬다. 그정도로 안좋은것이고 정신건강에 해로운것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선동을 해야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진실의 위력을 너무도 잘알고있었고 그것이 정말도 두려웠을것이다. 한국으로 오기전까지 나는 가까운친구들과 자유를 보았고 희망을보았으며 그것을 나누었다. 그들이 비록 북한에 있지만 희망은 늘 존재하는것이니까.. 태어나서부터 받아온 세뇌교육은 몇일,몇달간의 진실앞에서 물거품처럼사라졌고 나는 분노했다. 그러나 솔직한 말로 나는 그모든 죄악의 원흉이 김일성과 김정일이라고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왜냐고? 적어도 나는 세뇌교육을 가장 기본적으로 받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신격화된 세상에서 살았으니까... 중국으로 왔을때 못생기고 깡마른 마약증독쟁이 브러커가 김정일의 이름을 개이름 부르듯할때 나는솔직히 놀랐었다. 세기의 태양이니 위대한 영도자니하는온갖 미사려구에 익숙해온 내가 그의 이름을 아들이름 부르듯하는 가난뱅이 브러커의 입에서 들으니 참으로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잠깐이었고 결국 김정일의 악행을 알게됬을때는 정말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비로써 깨달은것이 바로 인생은 불공평하다는것이었다. 다시 삐딱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하실수도 있으나 정말로 내눈의 세상은 불공평했다. 내가 12살나던 겨울 우리아파트앞에 양지에 누워있는 10살정도로 나보이는 거지애를 만난적이 있었다. 때국물이 흐르는 야윌대로야윈 열굴에 호빵처럼 부푼 배를 가진소년은 15살이나 된 나에게는 형이었다. 내 점심밥을 모두 가지고 나와 그와 나눠먹으면서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사회에 불합리성을 깨달았다. 그는 못먹어본것이 없었단다. 쉰 밥을 치약에 섞어먹으면 식중독에 걸리지않는다는 독약같은 요법도 알고있었고 굶어죽은 여동생이 너무 불쌍해서 시체곁에서 사흘을 같이 보내기도 한 마음씨 착한오빠이기도했다. 호빵처럼 부푼 배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 나 곧 죽을거야. 간복수가 왔거든> 죽음이 마치 감기이인양 감정없이 말하는 그에게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살아있는 삶보다 편안한 그무엇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보낸 3일동안 나는 참으로많이도 울었었고 많은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올때처럼 바람처럼 사라진 소년을 생각할때면 나는 그가 꼭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생명들이 이땅에 넘치는데 김정일은 수십개의 별장을 지으며 주지육림에 꽃다운 여자들속에서 살고있다니... 가끔 신이 버린 대륙이라고 불리우는 아프리카를 보면서 생각한다. 신이버린곳은 아프리카만이 아니라고... 자신을 신으로 가장하고 악행을 일삼는 북한역시 신은 존재하지않는다고... 뭐 그래도 나는 기도를 한다. 한국에서 만난 신실한 친구들의 덕분으로 교회도 다녔고 절대자를 통해 원하는것을 얻고자하기도한다. 인간은 역시 나약하고 이기적인동물이가 보다. 실제로 북한에서 기독교를 믿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을 목격한적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금식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주위의 모든이가 그들의 성스러움에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들은 오랬동안 미쳐버린 종교인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전동화처럼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정말로 북한은 거기서살아본적이 없는 사람은 알수도 없고 상상할수도 없다. 북한의 해방을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두만강을건넜더 로버트 박의 소식을 들었다. 북한에서 죽음을 맞겠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러지 못했다. 충격으로 한동안 정상생활도 못했다고... 그를 보면서 성서의 베드로가 생각이났다. 그는 예수님을 본 증인이었음에도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다. 끔찍한 고통앞에 견딘다는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너무나 두서없는 이야기 여기서 마쳐야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북한에 너무도 많은것을 남겨두고 왔다. 고향 떠나온 사람들 치고 그렇치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나는 너무도 북한에 가고싶다. 생이별한 나의 아버지,친구들,늘 보고싶은 첫사랑... 인권이 꽃이피고 사람들이 잘사는 낙원, 이것이 내가 꿈꾸는 북한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진실을 보여주어야한다. 그것이 그들이 잘사는 길이고 그들이 해방을 맞는길이다. 진실만이 김절일이 뇌졸증을 다시일으켜 자신이 매달릴 교수대를 볼수있게하는 날이고 신장투석을 일주일에 한번씩으로 앞당기는 날이다. 아울러 대북풍선운동을 하시는 모든 분들과 모든탈북자단체의 관계자분들은 우리모두의 희망이고 고마움이다. 이모든분들에게 행운과 축복만이 있기를 바라고 바란다. 북한이 열리면 내가 이들을 업고 내고향으로 가리라. 그들에게 대동강변에서 평양소주와 옥류관냉면을 대접하리라.. 꼭 그날이 빨리오도록 노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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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부락 사람들은 옆집이 무서워 많이는못보고 단독주택이나 아빠트는 거의다봅니다
군대들도 교양실에 않아 밤에 봅니다 여럿이않아 보면서도 그게 남조선 채널아닌가고 말하는사람 한명도 없지요
말만 안하고 보면 근거가 없어집니다
저도 평양출신이고 대동강변에서 나서 자랐는데요.
반갑습니다.
남한생활 4년이 지났어요
언제면 고향가보련지...
북한의 기자들이 서울 도로 연변에 늘어선 환영하는 시민들 보고, 차로 빨리 지나가며 흐릿하게 일부러 찍어, 나중에 북한에 올라가 인민들에게 방송하며 이렇게 북조선에 흠모하고 열렬한 환호를 남조선 사람들이 해줬다고 방송하는 걸 본ㄴ적있어요.
카메라의 각도를 위의 빌당들은 일부러 피해 도로에 늘어선 관중들만 그것도 흐릿하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왜 이북 사람들은 모를까? 하며 답답했었죠.
의심이나 문제점을 갖고 보면 너무나 뻔한 것도 대부분의 백성들의 막연한 눈으로 보면 깨닫지 못할 수도 있구나.....
님의 글을 읽으며 느꼈읍니다.
남한이 당국의 선전대로 매항목마다 문제가 많다면 방송으로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클 것을... 왜 TV를 못보게 할까?라는 생각도 님의 부친님처럼
다소 의식이 깨있는 분들만 가능하다는 게 안타깝네요...
하기사 백성들 대부분이 그럴 정도면 아마도 벌써 테러가 나서 나라가 뒤집혀졌겠죠....
글 잘 봤읍니다.
그런데 영국은 이민을 받아주나요? 아니면 유학가신 건가요? 궁금해서요....
아무튼 멀리 그곳에서 소원성취하시고 머지않아 북한에 유로 횡단 열차로 자유북한에(최소한 정일 가계 타도된 중국형태의 사회주의 정권만이라도)
머지않아 들어가시길 바래요....
그들에게 대동강변에서 평양소주와 옥류관냉면을 대접하리라.
마지막 부분의 이 글이 대단하군요. 감동적으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