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기자의 20년 추적記 '이수근은 역시 간첩이 아니었다!' 發刊
趙甲濟(조갑제) 기자가 <月刊朝鮮> 1989년 3월호에서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지 20년 만에 再審(재심)에서 無罪(무죄)판결을 이끌어낸 ‘위장간첩 李穗根 사건’의 20년 추적記 <李穗根은 역시 간첩이 아니었다!>가 조갑제닷컴에서 發刊(발간)됐다. 이 책에는 金炯旭(김형욱)이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李穗根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으며, 그런 李穗根의 그늘에서 스러져간 처조카 裵慶玉 씨의 逆戰 드라마가 담겨 있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 걸린 20년
1967년 3월22일 오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李穗根 씨가 판문점을 통하여 극적으로 탈출, 남한에 귀순하였다. 1969년 1월27일 콧수염으로 변장한 李穗根 씨는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처조카 裵慶玉 씨와 함께 남한을 탈출, 홍콩으로 갔다. 그는 1월31일 월남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착륙한 여객기 안에서 李大鎔(이대용) 공사 팀에게 붙들려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해 3월22일 서울형사지법은 李穗根, 裵慶玉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외삼촌인 李穗根의 탈출을 도운 혐의로 구속되었던 金世埈(김세준·당시 연세대 합격생)씨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정보부, 검찰, 법원은 李穗根이 위장귀순한 간첩이고, 북한으로 복귀하려고 탈출하였다는 판단을 내렸다.
李穗根은 사형이 선고되었는데도 항소를 포기, 그해 7월2일 오전 11시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李穗根은 죽기 직전 최후 진술에서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하여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주범이 사형된 뒤에 從犯(종범)들에 대한 항소심과 상고심이 진행되었다. 1969년 12월23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裵慶玉은 무기징역, 金世埈은 징역 5년이 확정되었다.
裵慶玉씨는 무기징역에서 징역 20년으로 減刑(감형)되었다. 그가 出所(출소)한 것은 1989년 12월22일이었다. 裵씨는 이듬해 3월호 <月刊朝鮮>에 ‘나는 간첩이 아니었다’는 手記를 썼다. 당시 月刊朝鮮 편집장이던 趙甲濟 기자는 1991년 10월호에 <亡命 북한 노동당 간부의 폭탄證言/李穗根 처형 직후 노동당 비밀 강연 내용: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탈북자 金正敏(김정민)씨가 증언한 내용의 요지는, “이수근의 가족은 북한에서 숙청되었고, 그가 남한에서 처형된 후 노동당 간부들에게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제목의 강연이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再審에서 無罪선고
裵慶玉씨는 出所 후에 李穗根과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裵慶玉씨는 2005년 7월13일에 이 사건의 재심을 법원에 신청하였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裵慶玉씨는 2005년 12월2일 진실규명 신청을 냈고, 위원회는 이듬해 4월25일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개시를 의결하였으며, 2006년 12월19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위와 같은 조사결과, 위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이수근이 귀순하였을 당시 행한 전략신문 결과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이수근을 중앙정보부의 판단관으로 채용하여 국민승공 계몽 사업에 활용하였으나, 이수근이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在北 가족의 安危(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피고인 배경옥과 함께 한국을 출국하자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인 이수근의 생명권이 박탈된 비인도적, 反민주적 인권유린사건으로 결정한다>
비로소 국가기관이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2007년 2월26일 서울고등법원은 裵慶玉, 金世埈 두 사람이 신청한 再審(재심)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 12월29일 서울고등법원 제6 형사부(재판장 박형남, 판사 박선준 김상규)는 이 재심 사건에 대한 선고를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수근이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서 反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라는 점과 관련하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없는 것이어서, 위 각 증거들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원심판결 중 피고인들에 대한 부분을 파기한다. 피고인 배경옥을 징역 1년6월에 처한다. 원심판결 선고 전의 구금일수 99일을 피고인 배경옥에 대한 위 刑에 산입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 배경옥에 대한 각 국가보안법위반의 점, 반공법위반의 점 및 피고인 김세준은 각 무죄”
“검사님, 연극을 그만합시다”
李穗根은 진정으로 귀순하였으나 남한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였다. 그를 체포한 金炯旭 정보부장은 ‘이수근은 처음부터 위장귀순이었다’고 조작하는 수사를 하고 재판도 거기에 맞추는 바가 되었다. 19년 만에 재심 판결은 공식으로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고 선언한 셈이다. 검찰은 이 판결에 대한 상고를 포기하여 高法의 판결은 확정되었다.
李穗根이 1969년 7월2일 서울구치소에서 絞首刑(교수형)을 당할 때 집행인들이 머리에 용수를 씌우려 하자 검사를 향하여 “검사님, 연극을 그만합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는 목격담도 전한다. 李穗根은 정보부의 말을 믿고 끝까지 사형집행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형집행 절차를 하나의 쇼로 본 것이란 뜻이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抗訴(항소)를 포기하는 것은 자살적 행위이다. 生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는 흔적이 없는 李穗根이 그런 자살적 행동을 한 데는 “항소를 포기하면 살려 주겠다”는 정보부의 회유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李穗根을 간첩으로 몰아 죽인 金炯旭 정보부장은 그 10년 뒤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國情院(국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벌여 “金載圭 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당시 駐佛한국 대사관의 정보부 파견 공사가 연수중이던 中情 직원을 시켜 제3국인에게 청부하여 살해한 사건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金載圭는 김형욱이 실종된 20여일 뒤 朴正熙 대통령을 弑害(시해)하였다. 李穗根-金炯旭-金載圭-朴正熙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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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글_ 진실이 밝혀지는 데 걸린 20년
1_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
2_ “나는 간첩이 아니었다”
3_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
4_ 裵慶玉의 出所 뒤 삶: 李穗根의 그늘에서 스러져간 人生
5_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통지서
6_ ‘위장귀순’ 李穗根 사건 재심 개시 결정문
7_ 재심판결문(全文)
에필로그_40년 만의 무죄: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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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趙甲濟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전 13권)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