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했고,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북한을 공산주의로 만들려는 소련군은 8.15 이전에 일찌감치 북한에 진격해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자주적인 주권을 찾을 때까지 남한의 국민들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기로 한 것이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구실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38선’이란 분계선을 설정한 것이다.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었다. 그 후 1945년 9월 2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시 제1호’에 명시되면서 38선이 확정된 것이다. 즉 지시 1호에는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있는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사령관에게, 그리고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합중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시한 것이 바로 38선을 분단선으로 고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군사적 업무분담을 위해 일시적으로 지정한 분계선이었으나 세계적화를 노리는 소련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남북 분단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바뀜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는 더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 것이다.
남북한이 각기 민주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체제로 맞서게 됨으로써 한반도는 격화되는 동서냉전의 최전선이 되었고 급기야는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인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또 휴전선이 현재와 같은 위치에 책정된 것은 군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기존 38선을 의식한 국제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38선은 자립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가 주변 강대국에 의해 강제로 분할된 비극의 상징이다. 우리가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제2, 제3의 38선이 그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국력신장에 힘써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