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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인민군 내려오면 없어질 나라" 대한민국 무효화운동
United States 원조종북김구 0 285 2013-05-31 06:06:45
이승만시대(36) 김구 "인민군 내려오면 없어질 나라" 대한민국 무효화운동

  • 최종편집 2013.05.23 18: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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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영 건국대명예교수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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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협상파의 5.10선거 무효화 운동

       평양에서 돌아 온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회의가 실패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 기간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6월초에 북한측이 평양에서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의했을 때, 두 김씨는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두 김씨는 5.10선거를 계속 비판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에 김구는 선거가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제헌국회가 열린 자리에서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그 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기자가 질문하자, 김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대답했다.  
       즉,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의 대한민국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양에 간 김구(왼쪽)를 안내하는 김일성.(1948.4.)
    ▲평양에 간 김구(왼쪽)를 안내하는 김일성.(1948.4.)

       이처럼 신생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김구와 김규식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장개석의 중국정부였다.
       장개석은 독립운동 기간에 자기가 도와 준 임시정부 세력이 해방후에 세워질 새로운 나라에서 집권하기를 희망했다.
       게다가 장개석은 모택동의 공산당과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김구와 김규식은 자기를 도와 반공전선에 서 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한 장개석의 뜻을 받은 중국공사 유어만(劉馭萬)이 1948년 7월 11일 김구를 방문해 이승만의 건국에 협조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한 권유에 대한 김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가 이번에 북한에 가서 보니 공산군은 남한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가 강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남한을 공격해 쉽게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남한에 정부가 세워져도 곧 인민공화국이 되고 말 것이므로 건국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 점에서는 김규식도 생각이 같았다.
     
       그러므로 두 김씨는 건국 무효화 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벌이기 위해 7월 21일에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했다. 당시 두 김씨는 명성을 지닌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신생국 대한민국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았다.  
       두 김씨는 통일국가의 건설을 희망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정부수립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비난이 북한정권에게는 아무 타격을 주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남한정권에게만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탄생을 세계에 알리다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은 해방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 수립 국민 축하대회를 열었다.
       일본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부부도 참석했다.
    경축 행사가 시작되기 전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어깨를 안고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게 되면 캘리포니아를 지키듯 방위에 나설 것이라는 감격적인 말을 했다. 

       축사에서 이승만은 제일 먼저 북한 지역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못한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뚜렷이 밝혔다.
       새 나라는 양반 계급만을 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평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 제도를 구현해 갈 것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양반과 상놈,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이 모두 똑같이 대우받는 평등주의의 나라가 될 것임을 언명했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가지고, 개인의 신분을 존중하고, 노동을 우대하며,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게 보호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나중에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내용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말부터 마음 속으로나마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의 방식을 모방하여 공화주의의 사상과 관습을 조용히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 동안 개신교회 안에서 민주주의적인 방식이 뿌리를 내려 온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또한 신생 대한민국은 국민 스스로가 자기들을 위해 세운 자기들의 정부라는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이 정부는 소련군이 방해하는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실시된 총선거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므로,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권리 장전’의 이름으로 보장하고 있는 언론과 집회,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호할 것임을 강조했다. 
    노동자와 농민을 사랑한 서민기질의 이승만. 한복차림 대통령.
    ▲노동자와 농민을 사랑한 서민기질의 이승만. 한복차림 대통령.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도 인정한 자유주의자

       그러면서도 이승만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을 감안하여 사회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복지 입법을 약속했다.
       그는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법에 따라 농지개혁을 시행할 것을 약속했다.
    그 목표는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농민에게 자주성을 부여하고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은 지주에 대한 적당한 가격이나 현물보상의 방식으로 농민에게 분배하는 유상매수?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를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에 대해서는 헌법의 정신에 따라 “이익균점의 권리”를 인정하고 사회보험제도를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농지개혁법 공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1949년5월22일) ⓒ네이버
    ▲농지개혁법 공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1949년5월22일) ⓒ네이버

       실제로 이승만은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에 아주 동정적이었다.
    그 자신이 가난한 선비집안에 태어나 어렵게 자랐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도 항상 가난한 교포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자기가 늘 선동가로 살아 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나중에 1951년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 명칭을 노농당(勞農黨)으로 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당시는 6?25전쟁 중이었으므로 공산당과의 혼동을 염려하여 그러한 당명이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의 체질은  그처럼 서민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의 집권기간에 노동자를 위한 사회보험은 착수조차 못했다.
    나라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재원도 6·25전쟁으로 파괴되고 그것을 복구하는 데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농지개혁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인 변혁은 한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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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조종북 ip1 2013-05-31 06:13:56
    김구는 대한민국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원조종북인거야....그렇게 투철한 애국자였으면 북한에 가서 반김일성 운동을 벌여야지 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까대며 난리래?? 김구가 해방정국에서 한 일은 김일성 만난것 하고...자기랑 생각이 다르다고 장덕수나 송진우 같은 애국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 것 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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