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용은 죽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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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후폭풍은 예상했다. ‘그 곳’은 그런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이크를 잡고 TV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지으며 노래한 건 이율배반의 극치였다. 어머니ㆍ형ㆍ누나가 차례로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 이상이었다. 끌려갔다는 건 곧 죽음을 뜻했다. ‘이 곳’ 신촌의 27평(89.1㎡) 짜리 빌라는 또 다른 상처의 공간이었다. 정착금으로 마련한 집이지만,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탈북자’라는 꼬리표도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더 쏟을 눈물이 없을 정도로 울었다. 낮엔 웃음을 팔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선 곡(哭)을 했다. 궁상맞게 살 사람이 아니었다. 북에서도 권력층만 타는 벤츠를 굴렸다. 주위의 만류에도 남한행을 택했다. 녹록지 않았다. ‘탈북자’ 출신 가수로, 냉면집 ‘모란각’ 사장으로 인식됐다. 딱 거기까지다. ‘모란각’ 사업이 망해 종적을 감췄다는 소문에도 시달렸다. 2000년대 들어선 딱히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진 인물이었다. 김용(54). 그를 경기도 일산에서 만났다. 안색이 좋았다. 노란 빛이 도는 염색에 파마머리가 잘 어울렸다. 양복 맵시도 호리호리한 체격을 잘 살렸다. 저음의 목소리. 말만 하지 않는다면 탈북자인 줄 알아채기 힘들다. 억양은 DNA와 같은 것일까. 귀순한지(1991년) 20년이 넘었지만 북한 말투는 남아 있었다. 김용 (주)한아홈쇼핑 회장.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iframe frameSpacing="0" height="50" marginHeight="0" src="http://cadvv.heraldm.com/nbiz/view/imad_photobot_001.html" frameBorder="0" marginWidth="0"></iframe> 베트남에서 홈쇼핑 사업을 한다고 해서 마련한 인터뷰 자리다. 전엔 미처 몰랐다. 그가 북한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청소년 국가대표를 했고, 평양국립교향악단 바리톤 솔로 가수였으며, 중앙당 간부까지 지냈다는 걸. 남한에 와선 대중 가수, 냉면집 사장, 유통회사 대표를 한 경력까지 있다. 여기에 홈쇼핑까지 더하면 김용은 ‘인생 7막’을 살고 있는 셈이다. 듣는 입장에선 스펙터클했다. 모든 이의 인생이 드라마겠지만 김용이 헤쳐나온 길은 말 그대로 다큐멘터리였다. 5시간 마라톤 인터뷰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부침(浮沈)이 심했고, 변화무쌍한 삶이 김용을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험재배 텃밭’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온 김용이라는 ‘종자(種子)’가 남한에 뿌려져 얼마나 잘 살 수 있는가를 해외 언론이 먼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 ‘종자’는 이제 베트남에서 과실을 딸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비빌 언덕 없이 맨 손으로 버텨온 그는 ‘인생의 로또’에 당첨됐다고도 했다. ‘로또’는 무엇이고, 그 비결은 어떤 것인지, 경영자로서의 김용은 담담하게 풀어나갔다. ▶욕심많은 북한 엘리트의 탈북기=이미 알려진 게 많지만, 그의 성장기ㆍ탈북과정 등을 직접 듣고 싶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가 미래를 지배하기도 하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김용은 그 굴레에 어떻게 순응하고 대처했는지 알아야 했다. 1991년 10월 귀순했다. 스위스로 망명을 한 뒤 한국을 택한 것이다. 스위스. 북한의 보통사람과 다른 삶의 궤적이었을 것이란 점을 짐작케 하는 단어다. 통상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통해 귀순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것과 차이가 많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해 집안 신분이 대대로 좋았다”고 했다. 김용이 탈북하기 전 작고한 아버지는 당 간부였고, 매형은 김일성 고급당학교 간부인 조직비서였다. 자강도 강계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 양봉이 300봉 정도였고, 양도 50~60마리 정도 키웠다고 그는 설명했다. 가만히 있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혈통을 타고난 것이다. 김용은 그러나 욕심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싶은 욕구가 꿈틀댔다. 시작은 운동선수였다. 12살에 자강도 실업체육단에 들어갔다. 스케이트(5000ㆍ1만m)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로 7년을 뛰었다. 10년 터울의 친형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 친형인 고 김풍씨는 이후 국가대표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김용의 변신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스케이트화를 벗었다. 그는 “형님이 사는 모습을 봤는데, 밤낮으로 고생하지만 잘 살지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김정일 예술대학 2ㆍ16 전문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지인들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운동선수하던 ‘놈’이 무슨 음악이냐고 했다. 죽기살기로 노래를 배웠다. 2ㆍ16 전문대를 최고학점으로 졸업해야만 발탁된다는 평양국립교향악단에 바리톤 솔로가수로 스카우트됐다. 막상 하고 싶은 걸 해보니 성에 차지 않았다. 인민배우로 불리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니 영 마땅치 않았다. 김용은 “운동할 때는 인민배우들이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국가대표 감독하는 우리 형님보다 못사는 거예요. 가수를 그만두고 1982년 김책공업대 기업경영과에 입학하게 됐다”고 했다. 성공을 향한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김책공대 재학중에 중앙당 면접 시험을 봤다. 시쳇말로 ‘끗발’있게 살고 싶어서였다. 그는 “중앙당에 들어가려면 산자와 죽은자의 12촌까지 캔다고 합니다. 과거 검증이죠. 당에서는 순수 노동계급, 순수 농민계급 등 원하는 출신 계급 토대까지 다 확인하죠. 중앙당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완전 빨개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대학 재학 중 남녀 관계도 확인하고 도덕생활도 체크합니다. 술 마시고 싸웠다는 기록만 있어도 입당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곳에 김용은 김책공대 재학 중 들어갔다. 힘있는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중앙당 해외파트를 맡았다. 해외파트는 예산이 부족할 때 해외자금을 북한에 대는 일을 담당한다. 러시아,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 현지인들과 회사를 만들고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그는 중앙당 산하 105호실 ‘책임지도원’이었다. 자금 담당이어서 돈이 되는 일은 뭐든 했다. 1980년대 후반의 김용은 이렇게 화려했다. 그는 “중앙당에서 일할 땐 벤츠를 타고 제가 선수 생활을 했던 중앙선수촌에 가면 동료들이 ‘야, 김용이 성공했구나’ 말할 정도였다”며 “북한의 중앙당이면 남한에서 박정희ㆍ전두환 전 대통령 때 청와대라고 보면 됩니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죠 ”라고 했다. 문득 남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공산주의를 시작한 러시아도 고르바초프가 들어서며 흔들리고 체코, 루마니아도 공신주의를 포기하고 동ㆍ서독이 합쳐지고 중국도 개방을 했다”며 “남은 건 쿠바랑 북한 뿐인데 오래 못가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당시 러시아 마피아 멤버였던 김용의 친구는 극구 말렸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여서 반대했다. 러시아에서 함께 사는 게 낫다고 했다. 김용은 “러시아의 친구는 자신의 공장에 철도가 들어올 정도로 괜찮게 사는 마피아 두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체코에 머물다가 9개국을 거쳐 스위스에 도착해 망명했다. 이제까지 북한 국적의 사람이 여권을 갖고 귀순한 건 김용이 유일하다. ▶북에서 바람에 날아온 ‘인간의 장난감’, 풍파에 맞서다=인터뷰 중 그는 점심을 먹고 하자고 했다. 어느덧 시침은 오후 1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모란각’으로 향했다. 이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한 건 엄살이었다. 스치는 사람마다 그에게 먼저 안부를 물었다. ‘모란각’은 그에게 사업가로서의 첫 길을 열어준 보배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망했다는 소문 때문이다. 김용의 설명은 세간의 평가와 딴 판이었다. 그는 “현재는 ‘모란각’ 체인점을 모두 없앴어요. 제 판단에 따라 체인점 재계약을 일괄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일산 본점과 미국 오렌지카운티점만 있습니다. 냉면 등 식자재 유통을 위해서 체인점 사업을 접은 겁니다. 이 때문에 김용의 ‘모란각’이 망했다는 소문이 난 거죠”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96개까지 늘어났던 ‘모란각’이 하루 아침에 간판을 바꿔 달았다. 김용은 억울하다고 했다. 그는 “여기 일산 본점만해도 하루에 손님이 1000명정도 온다”고 강조했다. 김용은 ‘모란각’으로 돈을 꽤 만졌다고 했다. 2000년에 ‘모란각’ 체인점을 다 없애고 2개만 남겼지만 투자금은 충분히 뽑았다. 가장 돈을 많이 쓴 지점이 분당점으로, 16억원을 투자했는데 사업 1년만에 돈을 다 회수했다. 회사의 총 매출이 연 340억~360억원이 됐기에 가능했다. 일산과 부산에 공장도 갖고 있고, 공장 1곳당 120억~1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도 했다. 김용은 ‘모란각’외에 2003년, 냉면ㆍ만두 등 식자재를 유통하는 모란봉물산이라는 회사도 만들었다. 홈쇼핑에서 날개돋친 듯 팔리는 냉면이 모란봉물산에서 나온 것이다. 김용은 “모란봉물산의 냉면이 올해 국내 6개 홈쇼핑에서 1위를 했습니다. 7번 방송해서 5번이 매진됐죠. 방송 한 번에 11만~13만인분 정도 판매됩니다”라고 했다. ‘모란각’은 건재하다고 강조한 김용이 냉면 사업을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남한으로 귀순한 게 운명이었다면, 냉면은 그에게 예비된 사업 아이템이었다. 남한에서 가수로 나선 초창기, 그는 방송국PDㆍ기자들에게 밥을 많이 얻어 먹었다. 밥값을 낼 돈이 없어서였다. 귀순 뒤 2년간 외국인 대우를 받았다. 방송 출연료로 받은 돈의 30~35%가 세금으로 나갔다. 남들은 방송 잘 나온다고 했지만, 돈이 궁했다. 만날 얻어먹을 순 없었다. 큰 마음 먹고 지인들을 신촌의 빌라로 초대했다. 가수 노사연씨 등이 찾아왔다. 김용은 김치 2~3종류, 반찬 10가지 정도를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다. 여기엔 그가 직접 뽑은 면을 활용한 냉면도 포함돼 있었다. 음식 맛에 대한 호평이 줄을 이었다고 했다. 그는 “집들이 온 손님들이 너무 맛있게 먹고 음식을 싸가기까지 한 거예요. 한 PD는 저에게 ‘냉면사업을 해도 되겠다’고 해 진짜로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요리 실력엔 자신이 있었다. 북한에서 스케이트 대표 선수 생활을 한 덕분이다. 스케이터와 요리는 잘 연결되지 않는 조합이지만, 사연은 이랬다. “북한에서 운동할 때 요리사 할아버지를 도우며 배웠어요. 대표 선수 발탁을 노리는 선수가 30여명이 됐는데 할아버지 한명으론 부족했죠.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항상 요리를 했어요. 4년간 배웠죠. 여름에 냉면을 만들면 직접 면 뽑는 것부터 육수내는 법까지 모든 것을 익혔습니다. 할아버지가 언제 고기를 빼면 고기가 맛있고, 육수가 맛있는지를 다 알려주셨어요.” 사업자금 마련이 문제였다. 무작정 신한은행 무교동지점을 찾았다. 당시 지점장인 이재우 현 신한카드 사장이 대출이 안된다고 했단다. 보증인이 필요했기 때문. 그는 “이재우 지점장에게 말했죠. 난 북한에서 내려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사정했다. 나를딱하게 여긴 이 지점장의 도움으로 결국 5000만원을 빌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일산 장항동에 중고테이블 7개를 마련해 장사를 시작했다. 사채도 7500만원을 빌렸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리 날리기를 거듭하자 빚은 8개월만에 1억5000만원까지 불었다. 명색이 가수ㆍ방송인이었지만 전파의 힘을 빌리긴 싫었다. 김용은 “실향민들 사이에서 ‘김용이 음식점 냈다더라’는 소문이 나면서 약간 유명세를 탔어요. 하지만 방송에선 창피해서 장사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움이 안됐어요.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야간업소 행사를 뛰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부끄럽게 소문이 날까봐였죠. 중앙당 간부까지 하던 김용이 생계를 위해 밤업소까지 나간다고 알려지면 돈을 벌지라도 남한과 제 망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은 북한의 원로배우들이 받는 대우와 남한의 원로배우들간의 차이를 비교하면 남한을 비하하는 언론보도를 많이 했어요”라고 말했다. 고전하던 김용은 결과적으론 방송의 힘으로 고비를 넘겼다. KBS ‘6시 내고향’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탔고, 사업이 번창해 사채 빚을 1년 7개월만에 청산할 수 있었다. ‘탈북 가수’ 김용으로서의 생활도 궁금했다. 대표곡으로는 ‘아, 평양아!’, ‘고향’이 있다고 했다. 패티김의 ‘이별’, 현철의 ‘앉으나서나 당신 생각’ 등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리바이벌한 1집을 서울음반에서 내곤 끝이었다. 안기부에서 많이 협조해줬다. 귀순자 관리를 1년간 안기부를 통해 받은 뒤엔 경찰청 정보보안과가 김용을 담당했다. 그는 “경찰에서 2명이 지원나왔었죠. 메이크업 코디와 매니저 대행을 해줬어요. 그 분들이랑 농담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죠. 제가 지방공연을 가도 그들은 항상 저와 붙어 있어야 했거든요”라고 했다. 북한에서 가수를 했었다고 귀순 기자회견 때 밝히는 바람에 ‘탈북 가수’로 활동했지만,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방송할 때 동료들이 놀리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당시에 대해 “바람에 날려온 이북의 장난감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의 비보를 접하고는 주저 앉고 싶었다. 김용은 “제가 귀순한 뒤 형은 훈련도중에 수용소로 끌려갔고, 어머니도 그렇고 누나는 7년 뒤 수용소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누나의 아들은 김정일호위국에 있었는데 강제 전역당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자마자 숟가락을 삼키고 자결했고, 어머니도 6년만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족을 죽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나라의 체제가 나쁜 것이지 그 곳에 사는 사람은 잘못이 없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의 사무실 책상 뒤엔 앳된 모습의 교복을 입고 있는 소녀 사진이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무 의미없는 사진입니다. 가족 사진입니다. 누님입니다. 13년 차이가 나는 누나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렁였다. 피의 대가로 얻은 인생이어서 허투루 살 수 없었다고 했다. ▶베트남에서의 홈쇼핑 사업, ‘인생 로또’에 당첨되다=화제를 베트남 홈쇼핑 쪽으로 돌렸다. 인터뷰 시작 때 건네받은 그의 명함엔 홈쇼핑베트남(HSV) 회장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그는 ‘개미가 수박을 굴리는’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홈쇼핑 사업을 표현했다. 어차피 방송으론 최고가 될 수 없으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내 사업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배낭 하나 들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자존심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를 생각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서 도전한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베트남을 택했다”고 했다. 2009년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고도 했다. 그가 홈쇼핑 업체의 회장에 오른 건 인복(人福)이 8할 이상 차지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처음엔 식당을 운영하려다 베트남의 소스 등을 국내에 들여오는 사업을 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현지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한인의 도움을 받아 HSV의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국내 유력 대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낸 인물. 이 회장은 김용에게 HSV의 주주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다. 김용은 “꿈같은 일이지만, 회장께서 HSV 지분 52%를 넘겨줬습니다. 북한에서의 경력, 홈쇼핑 사업의 경력을 인정한 거죠. 지난해엔 모 대기업이 갖고 있는 HSV의 지분 29%마저 인수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HSV는 베트남 호치민에 본사가 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건물에 직원 80여명이 일한다. 김용은 일산의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호치민 본사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다. HSV는 현지 홈쇼핑 업계 2위를 달리고 있다.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1위 CJ홈쇼핑과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지만 김용은 전망을 밝게 보고 있었다. 그는 “매달 7%씩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홈쇼핑은 채널 싸움이죠. 지난 5월, 한국으로 치면 KT와 같은 베트남 채널과 계약을 맺고 지난달부터 방송을 시작했어요. 또 곧 베트남 전역으로 방송되는 케이블채널에서 HSV를 볼 수 있게 됩니다”라고 했다. HSV는 2015년까지 매출 3000억원이 목표다. 그는 사실 HSV 인수에 큰 공을 들였다. 한국에서 번 돈 가운데 매달 수십만 달러씩 베트남에 투자했다. 그래서 애착이 크다.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김용은 “대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요. 자금이 필요할 때 대주지 못하면, 자식이 공부하고 싶다는데 시켜주지 못하는 가난한 아버지가 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자살충동을 느낀 적도 있어요. 대기업과 경쟁하는 저를 보고 중견기업이 많이 와서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큰 채널을 갖고, 큰 물류회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예요. 지금이 신화 창조의 길에서 마지막 날개라고 생각합니다. 대기업만 참여하는 홈쇼핑 사업에서 제조ㆍ유통 구분없이 중소기업이 뭉쳐 같이 가자는 겁니다. (베트남 홈쇼핑 업계에서) 1위를 하는 회사도 대기업, 3ㆍ4위로 쫓아오는 회사(GS샵, 롯데홈쇼핑을 의미)도 대기업이지만 열심히 뛸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용은 HSV로 베트남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베트남엔 일본 기업 2만여개, 한국 기업 4000여개가 진출해 있다. 곧 한국보다 더 큰 시장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홈쇼핑, 택배 사업에 이어 카탈로그, 모바일 등의 사업도 준비 중이다. 김용은 경영의 첫째 신조로 신뢰를 꼽았다. 기존 HSV의 회장이 자신에게 지분을 넘긴 것도 믿음이 바탕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자신은 인생의 로또를 맞았다고 표현했다. 김용은 ‘모란각’이 번창할 때 탈북자들에게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 그 과정에서 돈을 떼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저는 누굴 미워하지 않아요. 내 돈을 떼어 먹은 사람, 감사를 모르는 사람, 거짓말한 사람을 모두 미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들을 욕하면 속된 말로 ‘돈잃고 바보되는’ 것이죠. 돈을 잃어도 사람을 챙기면 돈만 잃게 됩니다. 언젠간 그 사람도 뉘우칠 것이고, 제게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했다. 김용은 덧붙였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탈북자들을 돕지 않는다고. 이유는 ‘모란각’ 단골 손님 중 한 분이 “바닥이 보이는 물에서 인심을 써봐야 더 크지도 못하고 많이 주지도 못한다. 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사업을 키운 다음에 도와줘라”라고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귀순한 이후 단 한 번이 실패도 없었다고 자부하는 김용은 사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팁 하나를 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말했다. “제 회사는 절대로 여자가 나오는 술집과 골프장에서 비즈니스를 하지 않습니다. 금지입니다. 파트너가 원하더라도 정중히 거절하는 편이예요. 대신 사무실, 커피숍에서 맨 정신에 농담을 하며 친해집니다. 처음부터 술로 비즈니스를 하면 습관이 돼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정말 신세를 졌다면 술 대신 그 사람의 직책, 성격에 맞는 선물을 나중에 줍니다” 글=홍성원 기자/hongi@heraldcorp.com 대학생 인턴=홍석호(고려대 한국사학과 3학년)ㆍ김지희(연세대 법학과 4학년)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김용이 살아온 길> 1960.05.17. 평안북도 강계 출생 1971년~1978년 자강도 체육단 소속 빙상 선수(1972년부터 7년 동안 청소년 국가대표) 1979년~1982년 김정일 예술대학 성악과 입학 및 졸업 1982~1984 3년 동안 테너 가수로 활동 1984~1987 김책공업대학 기업경영학과 다니면서 중앙당 입당, 중앙당 일하면서 대학 졸업 1985~1991 중앙당 보조지도원, 지도원, 책임지도원 1991년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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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근데 이력에서 신기하게 왜 대학을 다닌 기간들이 3년씩 밖에 안되는지?
북한에서 대학들은 주로 5년이상인데요. 4년제는 주로 단과대학(한국에서 전문대학)급들인데요.
글고 그투지와 인내와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중국에 있을 때 tv로 방송되는것을 보았는데 자식1명이라고...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