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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Republic of 퍼나르샤 0 486 2016-04-27 19:02:27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 베트남 패망(1975년 4월 30일)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l승인2016.04.27l수정2016.04.27 16:47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dragon0033@hanmail.net

박정희 대통령, 사이공 함락 전날 특별담화 통해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끝까지 수도 서울 사수(死守), 대통령도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사수” 선언

1975년 4월 30일 오전. 월남의 수도 사이공((現 호치민 시)을 포위하고 있던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6개 방면에서 시내로 진격을 개시했다. 오전 11시 30분, 소련제 T-55 전차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의 철제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월맹 깃발을 게양했다.

사이공 시내 곳곳에는 백기와 베트콩 깃발이 내걸렸다. 평소 반미 시위에 열중했던 사이공 시민들은 그제야 이것이 본격적인 월맹군의 침략이란 사실을 알고 미국 대사관으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옹 반 민 월남 대통령은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대표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무조건 항복하여 월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사이공을 점령한 공산군은 헌법을 폐지하고 경찰과 군인들의 무기를 회수했다.

▲ 월남 패망 전날인 1975년 4월 29일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탄손누트 공항이 포격을 당하고, 교민들이 철수선을 타고 사이공을 빠져나오던 4월 29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박정희는 “만약에 북한 공산 집단이 전쟁을 도발해 온다면, 전 시민이 이 자리에 남아서 사수해야 합니다.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끝까지 수도를 사수할 것입니다. 대통령도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사수를 할 것입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4월 30일 월맹 공산군 탱크가 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월맹 깃발을 올리고 있던 시각, 박정희는 중앙청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월남 패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남이 무조건 항복하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을 줄 압니다. 그동안 월남에서 반(反)정부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지금 피난길을 걸으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산군은 처음에는 티우 대통령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니 후임인 후옹 대통령도 물러나라고 했고, 그런 뒤 민 대통령이 들어서자 그와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월남의 반정부 인사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지금 피난길을 걷고 있으면서 그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공산 치하에서 그 반정부 인사들이 지금까지 했던 인권과 자유를 달라는 그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지켜봅시다.”

파리 휴전회담

5년여의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역사적인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여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키신저는 이것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한편 월맹에서는 인질 형식으로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이것도 믿지 못해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파리 휴전협정은 총 12개국(4+4+4)이 참여하여 휴전을 약속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미국은 월남을 달래기 위해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즉 미군이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군력과 공군력을 투입하여 북폭(北爆)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부칠 때는 협상 테이블에 앉고, 유리할 때는 전투를 계속한다. 당시 월맹이 휴전협상 테이블로 나온 이유는 미군의 강력한 폭격과 경제봉쇄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도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전략은 변한 것이 없었다.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명백한 엉터리였다. 월남 내의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휴전을 체결함으로써 월남 정부는 총 인구의 90.5%를 지배했고,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지역, 나머지 4.5%는 공산 측 지배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베트남 휴전협정 내용 보고 크게 우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1972년 10월 16일, 유양수 주베트남 대사가 긴급히 서울로 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협정 초안에 북월맹군의 철수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침략군인 북월맹군은 그대로 베트남에 남아 있으면서 외국군만 철수하게 되고 국제 감시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은 전쟁터에서 얻지 못한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얻으려 하고 있다. 이 협정안 그대로 휴전하게 되면 베트남은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트콩은 1968년 대대적인 ‘구정 공세’를 통해 주도권을 쥐었다. 대규모 공세를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린 월남의 일부 좌경 지식인과 전직 관료들은 사이공에서 이른바 ‘월남 민족·민주·평화세력연합’을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에 나섰다.

이로써 농촌이라는 한정된 지역에만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베트콩이 도시 지역에 활동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고, 1969년에는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미국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베트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말았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공산 간첩으로 침투하여 월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때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 후면 상세히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1967년 9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차점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를 비롯하여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좋았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앞세워 정부 공격

이 와중에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승려 등이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의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대규모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했다. 여기에 종교인 대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가, 인권단체 등 거의 모든 단체들이 총집결하여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외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좌익 운동단체들이 수많은 언론사를 설립하고 월남 좌경화 공작을 전개했다.

이들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 즉 정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앞세워 반정부 시위를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월남 정부는 곳곳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설쳐대는 공산세력들의 반정부 시위와 선전 선동전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월남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가 벌어질 때마다 국론 분열과 반정부 운동이 극렬해졌다. 그들은 반공 우파 인사인 티우의 당선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극렬시위에 나섰다. 1973년 파리 휴전협정 이후 베트콩의 공세가 가열되자 월남 정부는 학생들을 징집할 수 있는 병역법 제정에 나섰다. 학생들은 “우리는 군에 갈 수 없다”면서 시위를 벌였다.

언론도 좌경화되어 공산당 선전선동의 도구로 이용됐다. 베트콩 대표였던 고 아 단이란 여성은 “파리 휴전협정에 의하면 공산주의를 선전할 수 있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데, 티우 정부가 이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월남 정부가 언론의 이적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법률안을 제정하자 좌익 언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언론 탄압”이라고 맞불작전을 전개했다.

1975년 9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선을 앞두고 분열하여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 등 혼란상을 연출했다. 이 와중에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외치는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840명이 암살을 당했다.

월맹 지도부, 대남 총공세 결정

대남 적화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월맹 지도부는 1974년 12월부터 1975년 1월 8일까지 북월맹의 수도 하노이에서 노동당 정치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월맹 측은 국제정세 분석을 통해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월맹이 남침해도 월남에 대한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했다.

첫째, 1975년과 1976년까지 2년 이내에 전 국토를 무력 해방시킨다. 둘째, 우기(雨期) 전인 4월 하순에 총공세를 개시한다. 병력은 5개 군단 15개 사단 27만 명을 투입한다.

이 결정에 따라 1975년 1월 8일, 월맹군 병력의 배치가 개시되었다. 남침 총공세를 현장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극비리에 하노이를 떠나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 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 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하여 프레이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기습 점령했다. 3월 16일에는 고도(古都) 후에를 월맹군이 점령하자 월남 정부군은 중부 고원지대를 포기했다.

창졸간에 월맹군에게 기습을 당한 티우 대통령은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중부 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반독재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월남 정부군은 지리멸렬하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도주하거나 공산군에게 투항했다. 3월 26일에는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5개 사단은 사이공을 향해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쾌속 진격했다. 4월 8일에는 월남 공군 조종사가 공산군을 폭격하기 위해 이륙했으나 기수를 돌려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하고 재야 정치인 두옹 반 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을 때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도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어던진 다음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주했다.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했고,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샌들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다. 이런 거지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 군대를 단 50일 만에 붕괴시킨 것이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을 비롯하여 공무원과 사회 지도층 인사,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종교인, 학생, 민주 인사들까지 모조리 체포되어 인간 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했던 월남 사람들도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하여 제거했다. 이 와중에 26만 명이 학살되었고, 350만 명이 수용소에서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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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원 ip1 2016-04-27 19:59:37

    - 도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6-05-16 01: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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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원 ip1 2016-04-27 20:04:47

    - 도원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6-05-14 19: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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