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혁명군 의 진실 |
---|
◇  조선혁명군과 조선인민혁명군 국내외의 어떤 학자나 연구자를 막론하고 대체로 북한에서 주장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이나 동북항일연군의 한 부대로서 활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 독자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부대명칭의 자의적 사용을 지적하곤 했었다. ☆☆☆ [참고]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비교적 객관적 연구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화전춘수 교수도 조선인민혁명군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독립사의 성립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신화로 보고 있다. 화전춘수, 「김일성 만주항일무장투쟁」, 『사상』 7월호, 1985. 또 미촌수수도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측·중국측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 활동의 시기와 의의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미촌수수, 「1930년대만주における항일투쟁にたいする일본제국주의の제책동」, 『일본사연구』 94, 1967, 36쪽).☞ >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찾은 자료에는 조선독립혁명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다음과 같이 조사되었다.
일.요녕성방면(밑줄은 원저자) ●   1.) 명 칭   2.)인수   3.)활동지대 1.)항일반만의용군   2.) 15,000   3.)동변도일대
●   1.) 명 칭   2.)인수   3.)활동지대 1.)왕덕림부왕덕림부   2.) 50,000   3.)길림 동부 1.)조선인민혁명군   2.) 3,000   3.)간도 1.)농군농군   2.) 6,000   3.)납빈랍빈연선연선
●   1.)명 칭   2.) 인수   3.)활동지대 1.)동북군구부동북군구부   2.)1,000   3.) 흥안령흥안령삼림 기타   3,500   산재 전성각지산재전성각지 ☆☆☆ [참고] < 우위, 「삼년래동북의용군투쟁적총검열」, 『동방잡지』 제32권 제6호(1935. 3. 16 상해 상무인서관 발행), 58쪽. 여기에 실린 내용은 1981년 대북에서 출판된 『동북의용군(제2차중일전쟁각중요전쟁사료휘편』에도 수록된 것 같다. 이 책 465쪽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언급되고 있다 한다(허동찬, 『김일성평전(속)』, 북한연구소, 1988, 265~266쪽 참조). 이 글의 필자 우위는 여기에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조선독립당, 운동가들을 조선혁명 전사라고 부르고 있다.☞ >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조선독립혁명군& 은 활동지대가 압록강 연안으로 된 것으로 보아 양세봉이 지휘하는 민족주의계열의 조선혁명군이 틀림없다. 그러나 활동인 수가 5,000명으로 된 것은 물론 과장된 것이다.
☆☆☆ [참고] < 이러한 사실은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던 주보중의 회고 에서도 증명된다. 한준광·권오근·남대명 편역, 『주보중문선』, 연변인민출판사, 1987, 51쪽에도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기도 하였다. 제2군은 재만조선인 조국광복회의 민족혁명군중 활동의 기초상에서 창건되고 발전 장성되었다.기타 각군의 지도간부와 전사들중에는 상당히 많은 재만조선인 조국광복회의 성원이 들어있었다. 항일유격전쟁 중에서 중조인민은 공동의 사업을 위하여 붉은 피를 같이 흘렸다. …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 1939년 8월 3일자 중경 『대공보』는 「동북조선혁명군 진입선경여격극」이라 하여 김일성 최현 등의 활동을 보도하였다(추헌수, 『자료 한국독립운동』 4(하), 1594~1595쪽).☞ > 따라서 위의 기록을 통해서 입증되는 바와 같이 조선혁명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은 전혀 별개의 무장집단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북한의 대부분 역사서적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재와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 관련을 무시하고 과장 서술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참조] < 『Communist International』 1935년 12월 1일호에 실린 한 논문에는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지배를 타도하고 간도 조선민족자치구 건설을 위해 반만항일투쟁을 강화하라는 지시와 조선독립을 임무로 하는 조중민족항일련합군의 결성, 항일민족혁명당 결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한·중 양민족 연대의 무장군 강화와 조국광복회의 창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동경력사과학연구회사부회보고자집단, 「1930년대동アジアにおける통일전선の형성」, 『력사평론』 257, 1971, 77쪽). 또 수야직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국광복회의 성립과정은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과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와의 관련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수야직수, 「コミンテルン제칠회대회と재만조선인の항일투쟁」, 『력사평론』 423, 1985, 48~56쪽).☞ > 북한에서 간행되는 통사류에 언급되는 조선혁명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은 이 분야에 깊은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혼동과 오해의 소지가 있 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혁명군은 북한에서 주장하듯이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었다기 보다는 일부 대원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그 산하 제2방면 군장이 김일성이었음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