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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에 근거한 만주에서의 민족운동에 대해~~(역사) <한자가 인식이 안됨>
Korea, Republic of 돌통 0 751 2023-03-27 20:11:07


전시체제에서 민족운동은



●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성립과 한인들의 활약은



1930년대 초 중국공산당은 소위 리립삼  노선과 왕명(王明) 노선으로 불리는 잘못된 방침을 채택하여 당시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좌경화된 전술을 채택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면 만주지역에서 ‘한인자캄나 ‘간도독립’·‘한인 소비에트’ 등의 독자적 요구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중국공산당 중앙은 이를 반대하고 관내지방과 마찬가지로 민중자치정권인 소비에트 정권과 홍군(紅軍)을 세우라고 무모하게 지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이 고양되는 정세하에서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는 각종 항일부대를 적대하고 모든 지주나 자본가를 타도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그릇된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자신의 적을 만들어 입지를 약화시켰고, 곤란한 정세를 자초하였다.☆ {《참조》김동화,<중국조선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력사적 고찰>(≪당대 중국 조선족연구≫, 연길:연변인민출판사, 1993), 15쪽.}



그러나 이러한 잘못은 1933년 1월 말부터 어느 정도 시정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 위원회에 지시한<만주의 각급 당부 및 전 당원에게 주는 편지-만주의 상황과 우리 당의 임무에 대하여>에서 노동계급의 영도권 견지를 전제로 한 반제통일전선의 형성을 제기했던 것이다.☆{《참조》 ≪동북항일련군사료(東北抗日聯軍史料)≫편사조(編寫組) 편(編), 앞의 책, 41∼57쪽.}



중공당 만주성위는 이에 따라 좌경오류의 시정, 모든 반일역량을 연합한 반일반제투쟁의 전개, 선출된 민중정부 및 인민혁명군의 건립 등을 긴급한 당면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분투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에 있던 반일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이 강화된 ‘동북인민혁명군’을 건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공당 만주성위의 이 같은 방침에도 불구하고 ‘좌경’의 오류는 1935년 경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다. 특히 동만(연변) 지역에서 전개된 ‘반민생단 투쟁’으로 1932년 말부터 1935년 중반까지 이 지역에서 무고한 한인 독립운동가 431명이 밀정혐의를 받고 희생되는 참변이 있었던 것이다.☆{《참조》 김동화, 앞의 글, 16쪽.}



한인들은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는 것을 통해 ‘조선혁명’, 즉 조선(한국)의 독립과 민족해방이 이룩된다는 신념으로 반제투쟁에 참가했으나, 이 시기에는 중국인들의 배타주의와 중공당 만주성위 내부의 좌편향으로 자신들의 궁극적 이상인 ‘조선혁명’을 제기할 수조차 없었다. 


그 결과 성립 초기 중공당계 무장조직의 핵심을 이루었던 한인 세력은 민생단 사건 이후 현저히 위축되고 영도간부의 다수가 한족(漢族)으로 교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무렵 상당수의 한인들이 박해를 피해 도주하거나 변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중공당 만주성위는 이러한 사정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을 건립하고 만주 각지에서 봉기한 항일의용군 등과 연합작전을 추진하였다. 그 사례가 바로 앞에서 밝힌바 한국독립군도 참여한 1933년 가을의 동녕현성 전투이다. 이 전투에는 왕청·훈춘유격대원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중국공산당 반석현 위원회와 남만유격대는 항일투쟁이 점차 격화되고 유격대의 역량이 성숙함에 따라 1933년 8월 남만유격구와 유격대 대표자 회의를 열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건립키로 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만주침략 2주년이 되는 그 해 9월 18일 반석에서 이 부대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참조》 손계영(孫繼英)·주흥(周興)·송세장(宋世章), 앞의 책, 46∼47쪽.}



이 무장세력은 만주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중공당 계통의 정규군인 셈이었다. 때문에 성립선언과 정강, 사병우대 조례, 각종 선언문 등을 발표하여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 문건 가운데 한국(조선) 독립(해방)이나 혁명의 지원을 직접 표방한 내용은 없었다. 사실 1931년 5월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는<만주 한국민족문제 결의안>을 통과시켜 한국혁명을 원조해야 한다고 했지만,☆{《참조》 양소전(楊昭全)·리철환(李鐵環) 편(編), 앞의 책, 733쪽.}


1930년대 초의 좌경화된 분위기하에서 위의 원칙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1군 독립사는 1934년 11월에 2개 사로 분화·발전하였다.


창건 당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300여 명 규모였는데, 사장(師長)겸 정치위원은 한족 양정우였다. 


반면 참모장 이홍광과 소년영장 박호(朴浩), 3단 단장 한호(韓浩) 등 주요간부가 한인이었다. 이 조직의 1/3 가량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군 독립사는 1933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많은 전투를 치렀으나, 이 가운데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공략전과 량수하자(凉水河子)·팔도강(八道江)전투 등이 유명하다. 특히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이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한 전투는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 국내진입작전으로 유명했다.☆{《참조》 ≪조선일보≫, 1935년 2월 15일.}


이는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 세력 최초의 대규모 국내진입작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34년 동만주에서 한인 주진(朱鎭)을 사장으로 성립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안도현과 왕청현 일대에서 한 해 동안 900여 회의 전투를 치르며 유격근거지를 방어하였다. 이른바 일제의 ‘제3기 치안숙정계획’을 무산시킨 것이다. 


2군 독립사는 1,200여 명의 병력과 980여 정의 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 병력의 2/3가 한인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이 항일부대는 조선혁명군이나 한국 독립군과 같은 민족주의계 독립군과 이념을 약간 달리할 뿐, 일제타도라는 목표와 그를 위한 역할의 수행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중공당 반석현 위원회는 1934년 3월 경 신빈일대에서 강고한 세력을 형성하며 완강히 일제와 싸우고 있던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에 사람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연대공작을 진행하라고 1군에 지시했고,☆{《참조》 <중공반석중심현위원회급인민혁명군제(中共磐石中心縣委員會給人民革命軍第)1군독립사전체당(軍獨立師全體黨)·단동지적신(團同志的信)>(≪동북지구혁명력사문건(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집(集)≫갑(甲) 36), 195쪽.}



이후 양 부대는 일정한 연대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북만주의 밀산에서는 1934년 3월 40여 명의 밀산 반일유격대가 조직되었는데, 역시 한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유격대는 그 해 9월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편성되었다. 또 1932∼1933년 경 탕원현에서 발족한 탕원유격대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러 차례 전투를 거치며 그 대원이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이 유격대는 1936년 초 주변의 자위단·경찰 등을 흡수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편제되었다.☆{《참조》강만길, 앞의 책, 101쪽.}



이상에서 서술한 것처럼 남만지방을 활동기반으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동만지방을 근거로 하는 2군은 한인이 주력을 이루었고, 사실상 이 시기 중공당계 산하부대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재만 한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많은 어려움을 수반했다. 더욱이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에 일제는 자체의 무력과 괴뢰 만주국 군경·관헌을 동원하여 혹심한 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은 적의 포위공격을 돌파하기 위해 남만과 북만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전술을 모색하게 되었다.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민당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쫒겨가고 있던 도중에 소위<8·1선언>을 발표하고 내전중지와 거국적 국방정부의 구성을 제안했다. 


또 이듬해 12월 장학량이 장개석(蔣介石)을 구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하여 관내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8·1선언>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는데, 각 당파와 민족, 모든 계층을 망라한 항일연합군의 조직을 명시했다.☆{《참조》 일본국제문제연구소중국부회(日本國際問題硏究所中國部會) 편(編),≪중국공산당사자료집(中國共産黨史資料集)≫7(경도(京都):경초서방(勁草書房), 1973), 521∼526쪽.}



이 선언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은 1936년 1월 회의를 소집하고 각 항일부대를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성키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종래의 동북인민혁명군과 여러 항일부대가 결집되고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이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이 제1군부터 11군까지 결성된다.

이후 만주지역 무장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중공당 만주조직은 항일투쟁을 위해 각계 각층과 연대하는 것은 물론, 재만한인들의 조국광복운동 직접원조와 자치구 건설, 한인을 위한 항일전쟁의 원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참조》 김동화, 앞의 글, 19쪽.}



이에 따라 한인으로만 조직된 독립부대의 창설도 고려되었지만, 한인 간부들 스스로 활동상의 어려움을 들어 이를 반대하고 종전처럼 중국인과 함께 혼합부대를 편성·유지키로 하였다.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한인이 많았던 1군과 2군, 특히 2군은 한·중 양 민족의 연합을 실현한 ‘독립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는 일본 관헌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3개 사(師)와 교도대, 기타 연계세력을 합쳐 2,000여 명으로 추정되던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경우 절반 가량이 한인이었고, 특히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제3사 병력의 대부분이 한인이었다는 점으로 뒷받침된다.☆{《참조》강만길, 앞의 책, 103쪽.

리홍문(李鴻文) 저, 양필승 옮김,≪만주현대사≫(대륙연구소출판부, 1992), 120∼121쪽. 길림성(吉林省)?안관(案館) 편역(編譯),≪동북항일운동개황(東北抗日運動槪況)(1938∼1942)≫(장춘(長春):길림문사출판사(吉林文史出版社), 1986, 41∼42쪽).}


그러나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자 동북항일연군 1군과 2군은 1936년 7월 통합되어 양정우를 총사령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이 때 제2군 1·2·3사는 각각 4·5·6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가운데 한인이 많은 6사(사장 김일성)와 4사는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백두산 일대로 진격하여 유격구를 건설하였다. 그 뒤부터 장백현(長白縣) 등 백두산 일대는 1940년 경까지 재만한인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고,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을 표방하며 조직된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건설 및 국내진입작전의 근거지가 되었다.☆{《참조》 1930년대 중반 중국 동북에서 추진된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서의 ‘조국광복회’는 추진주체도 다양했고, 그 명칭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즉 동만(東滿)과 남만(南滿)·북만(北滿), 혹은 조선 북부지방 등지에서 (반만(反滿))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한인 지도자들은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여 여러 경로와 조직, 인물을 통해 광범한 항일투쟁 세력을 결집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우선 명칭에서도 ‘재만(동만)조선인조국광복회’(동만, 중국공산당 문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남만), ‘재만조선민족광복회’(북만), ‘한인조국광복회’(국내), 기타 한인민족광복회, 조국광복회, 조선조국광복회 등의 용례(用例)를 찾아볼 수 있다.

(주보중(周保中),≪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북경(北京):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 1991, 136·139·142쪽;중앙(中央)·료녕성(遼寧省)·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안관(案館) 편(編),<중공길동성위보청순시원급최희형동지적신(中共吉東省委寶淸巡視員給崔希亨同志的信)-관우목전형세급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군중운동(關于目前形勢及在滿朝鮮人祖國光復會群衆運動), 공작등문제(工作等問題)>,≪동북지구혁명력사문건(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집(集)≫갑(甲) 28, 1989, 259∼261쪽;내무성경보국(內務省警保局) 보안과(保安課),≪특고월보(特高月報)≫1939년 8월호, 110∼111쪽). 또 발기인으로 참여하거나 회장으로 추대된 인물에 대해서도 몇 가지 다른 기록이 있는 실정이다. 남만지역에서는 주지하듯이 오성륜(吳成崙)(가명 전광(全光))·엄수명(嚴洙明)(본명 엄필순(嚴弼順))·리상준(李相俊)(가명 리동광(李東光)) 등이 발기인으로 나서 이 조직을 주도하였다(≪사상휘보(思想彙報)≫14호, 63∼64쪽). 그러나 동만지역에서는 김동명(金東鳴)(김일성의 가명)·이동백·려운형(呂運亨) 등이 발기인으로 되어있고, 김일성이 회장에 추대되었다는 설도 있다(장덕순 외,≪조국광복회운동사≫, 지양사, 1989, 109쪽). 또 북만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책은 1942년에 ‘북만조국광복회’ 회장의 이름으로 선전물을 살포하기도 했다(<대담:중국 연변, 민족해방운동사 연구의 고민과 과제>,≪역사비평≫1993년 겨울호, 273쪽 }



특히 6사는 1937년 6월 80여 명의 병력으로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보를 기습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 이후 동북항일연군내 한인 부대의 활약이 국내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참조》 강만길, 앞의 책, 104쪽.}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광복회의 조직이 일제에 탄로되어 붕괴되는 손실을 초래했고, 일제 군경의 집요한 추격을 촉진하는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했다.


1936·1937년 경 동북항일연군은 동·남·북만 등 각지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재만한인들도 여기에 대거 참가하여 많은 활약하였다.


이무렵의 주요 한인간부 현황을 살펴보면<표 3>과 같다.☆{《참조》신주백,≪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1925∼1940)≫(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6), 392쪽. }



<표 3>1936·1937년 경 동북항일연군내 주요 한인 간부 현황



부 대, 결성날짜, 주요 한인 직책과 명단



{ 제1로군 1군 1936. 7 참모장 안광훈(安光勳), 1사 참모장 리민환(李敏煥), 2사 참모장 리희민(李希敏)·리(李)

흥소(興紹), 정치부 주임 전광(全光)(본명 오성륜), 8단장 현기창(玄基昌) 3사

정치부 주임 류만희(柳萬熙)

2군 1936. 3 정치부 주임 전광, 4사 사장 안봉학(安鳳學), 참모장 박득범(朴得範), 1단장

최현(崔賢), 정치위원 림수산(林水山), 제6사 사장 김일성, 7단장 김주현(金周賢),

정치위원 홍범(洪範)·김재범(金在範), 독립려 1단장 최춘국(崔春國)

제2로군 4군 1936. 4 정치부 주임 황옥청(黃玉淸), 정치주임 강산(康山), 2사 부사 장겸 4단장

리학복(李學福), 정치부 주임 최영화(崔榮華), 참모장 최용건(崔庸健), 4사 정치부

주임 박덕산(朴德山)

5군 1936. 2 2사 4단 정치위원 김광협(金光俠), 5단 정치위원 박동화(朴東和), 3사 8단

정치위원 강신태(姜信泰), 경위려 1단 정치위원 강신일(姜信一)

7군 1936.11 대리군장 최용건, 군장 이학복, 군·당 위원회:집행위원

김철우(金鐵宇)·특별위원 김품삼(金品三), 1사 정치위원 리일평(李佾平), 3단장 김창(金昌)

해(海), 2사 참모장 김탁(金鐸), 4사장 김세창(金世昌)

8군 1937. 7 1사 정치위원 및 3사 정치부 주임 김근(金根)

제3로군 3군 1936. 8 군장 허형식(許亨植), 정치부 주임 김책(金策)

9군 1937. 1 정치부 주임 허형식

11군 1937.10 정치부 주임 김정국(金正國) }



1938년 경 동북항일연군의 규모는 1,850명 정도였다. 여기에는 중국공산당 계통 직속부대 외에도 다수의 각종 항일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상당수의 대원이 희생되었고, 일제의 탄압과 회유공작이 극심해짐에 따라 차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의지가 굳지 못한 일부 참가자들이 변절하거나 도주·투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여 항일연군 제1로군은 경위려(警衛旅)와 3개 방면군으로 편제를 바꾸어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이 가운데 4사와 5사가 통합되어 편성된 제3방면군은 60% 정도의 대원이 한인(조선인)이었고, 역시 종래의 제6사가 개편된 제2방면군은 대부분의 구성원이 한인이었다. 


이 부대는 남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이 1937년 초·중반 일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결국 1938년 2월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인이 다수를 이루는 이 시기의 항일연군 제2·3방면군은 사실상 독립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본 관동군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한인 영도간부가 많고 특히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주의 성향이 농후하다고 평가하였다.☆{《참조》길림성(吉林省)?안관(案館) 편역(編譯), 앞의 책, 86쪽. }



이 때문에 한국인(조선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도 가끔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나 ‘조선혁명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참조》우(于)위(偉),<삼년래동북의용군투쟁적총검열(三年來東北義勇軍鬪爭的總檢閱)>(≪동방잡지(東方雜誌)≫32-6, 1935년 3월), 58쪽.

≪중경대공보(重慶大公報)≫, 1939년 8월 3일.

추헌수(秋憲樹) 편(編),≪자료(資料)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4(하(下))(연세대출판부, 1975), 1594∼1596쪽. }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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