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아래 압박 없는 곳에서 그녀는 살고자 하였다. |
---|
1.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며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남녀간의 貞操(정조)를 고정관념의 사슬로, 因習(인습)의 굴레로 보려는 노력을 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자들에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인권의 死角地帶(사각지대)로 피해자 여성만 있고 가해자 남성만이 있는 곳이 된다. 거기서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곧 모든 인습에서의 여성해방이라고 보려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抑壓(억압)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타락한 성품과 악마의 충동에 넘어지는 인간은 부득불 억압이라는 고통 속에 빠지게 하거나 빠지게 된다. 남편의 억압도 있고 아내가 남편을 억압하는 것도 있다. 이런 억압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으로 인해 둘이 될 뿐 한 몸이 된 삶을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경우가 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억압으로부터 탈출은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고 사회적인 弱者(약자)라고 강조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아주 당당하게 요구되고, 그것이 어느 정도는 이 사회의 貫徹(관철)로 가고 있는 것 같다. 2. 여성만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은 기준치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그런 기준치를 김정일의 주구들이 提示(제시)한다면 그것은 偏向的(편향적)인 것이 된다. 그런 것으로 인해 기준의 混沌(혼돈)은 오고 있고, 그런 혼돈으로 인해 그들이 말하는 억압의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부담을 갖게 한다. 김정일은 오랜 세월동안 북한주민을 억압해 왔다. 그런 억압은 부부간의 억압을 떠나 강자의 억압인데,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廣暴이라는 말로 담아내고 있다. 광폭정치가 그의 발걸음마다 따라다니고 그것에 눈빛 하나라도 저항하는 누구든지 반드시 상호 감시하여 즉결처형을 하는 곳을 만들어낸다. 즉결처형의 의미는 억압의 최고압력을 의미한다. 그런 것을 가지고 정권을 유지하는 그는 지금 심각하게 병마에 시달리고 있고, 그 대신 그 곁의 여인들이 문고리 연결을 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다. 이것이 현재의 김정일이고 그가 가려는 길에 그 여인들의 소리가 한몫을 하게 되는 경우가 된다. 이제 그 여인들의 의미는 김정일의 殘忍(잔인)한 폭정억압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될 것 같다. 과연 그녀는 김정일에게서 억압을 받고 있는 것인가? 하는 심리적인 문제이다. 3. 김정일은 잔인한 독재자고, 모든 영역에 그의 권한에 도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만일 그런 기준에서 시작된다면 김정일은 어느 정도 여인들의 자유를 束縛(속박)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남한 여인들의 수준 곧 남편과 대등한 가정사의 개입이나, 그보다 더 높은 가정의 권력을 점유한 것이나, 남편을 억압해서라도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김정일 가정에 대비하여 본다면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만일 그녀의 위치가 김정일과의 대등한 위치로 구축되어 있다면 그녀는 지금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가지는 노력의 의미는 김정일의 병중을 기회로 김정일의 억압에서부터 탈출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힌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 대한 기대 반 우려 반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런 막 뒤에서 돌아가는 내용들을 공기의 냄새로 알아내려고 하는 노력의 의미가 상존하고 있다. 그런 여러 가지의 입장에서 그녀도 역시 악마적인 통치자인가? 아니면 악마에게 압제 당하고 있는 여성인가의 구분을 가지게 될 것으로 본다. 만일 그녀가 그런 억압에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또한 무엇일까를 두고 생각하게 된다. 4. 여성의 억압의미는 사회적인 약자라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성이 사회적인 弱者라는 것에서부터 탈출하면 이는 권력을 갖는 이어야 하는가? 그런 권력을 당연직으로 사회적인 강자로 대우받아야 하고 그런 구조가 되어야 하는가이다. 결국 약자 강자의 의미가 거기서 발생하게 된다면 사회적인 강자는 곧 사회적인 권세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있다. 사회적인 권세는 남녀평등을 말하는 헌법에서 정해져 나오는 것인데, 결국 사회적 약자라고 우기는 여성들의 눈에 의해 그런 것이 가늠되는 주관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말함인가? 개인의 주관으로 인해 사회적인 약자 운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만의 주관일 뿐이다. 그런 주관으로 인해 생기는 논리들을 가지고 악플을 단다면 그것은 곧 이 사회의 또 다른 악마의 혀가 된다는 것에 비극은 있게 된다. 이 또한 타인을 압박하는 행동이다. 권력을 가진 여자들이나 남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헌법의 기준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을 따라 자기생각의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애매하다고 해서, 애매하게 만들고 나서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이웃의 생명을 파괴시키는 짓을 하고 있다면 이는 사람을 압박하는 행동인 것이다. 5. 이번에 희생당한 최진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는 것에 그 압박의 의미를 고찰하게 한다. 최진실 씨는 한 여인의 독설 같은 압박에 무너진 것이었다. [경찰은 최씨의 매니저인 박모(27)씨로부터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이틀 전인 지난달 30일 '사채관련설'을 인터넷에 올렸던 모 증권사 여직원 백모(25·여·불구속 입건)씨와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조선닷컴은 보도했고 그 제목에는 ["최진실씨, 루머 유포자와 통화 후 격분"]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 악풀러에 대해 자살이라는 죽음으로 자기의 진실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것이 된다. 죽음으로 억압에서부터 탈출하려고 했던 최진실의 아픔을 생각하면 이 사회의 피난처는 없다는 것이 되는 셈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그의 직업상에 이런 문제는 결국 자기 삶의 터전의 死活(사활)이 걸려있는 셈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수많은 루머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거기서부터 탈출하려는 그녀의 선택은 충동적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치밀하게 연구하고 법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준비하고 그런 것의 억압에서 탈출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 절박했다는 말일 것이다. 6. 그것이 우리 사회의 社會病理的(사회병리적)인 아픔이다. 그로 인해 [최진실법]의 의미가 발생하고 있고, 그것의 필요가 존재하게 되었다. 문제는 자기주관을 정당화하는 법적인 능력이 탁월한 자들의 행동적인 의미가 더욱 교활할 수가 있다. 법을 다 꿰고 앉아 자기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자기의 권력을 높이려는 행동은 타인을 압제하는 것이 된다. 그녀를 궁지로 모는 壓制가 최진실 씨를 따라다녔다는 것에서 그녀는 죽음으로 그것에서부터 탈출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의 허물을 만들어 교묘하게 남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분명하게 剔抉(척결)되어야 한다. 우리사회의 권력을 가지려는 여자들의 목표가 김정일 적화공작에 맞물려 있다면 그런 여자들의 의미는 결국 최진실類의 압제를 해방하기 위해 최진실法을 만들자고 소리치지 못할 것이다. 그녀들은 헌법에 도전하여 거기서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 곧 헌법의 해석권리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들이 해석이 곧 헌법이라고 하는 등식으로 절대 義라고 하는 자리에 앉아 타인을 罪人으로 몰아 압박하는 것이다. 7.권력을 가지려는 것이 여자가 압제에서 탈출하려는 의도라고 본다면, 주관에 의한 법적인 강자가 되어 절대적인 자리에 앉아 타인을 압박하려는 것은 결코 분수에 넘치는 행동이 된다. 그런 것은 또 하나의 압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남편을 압제하고 사는 것이 남녀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남녀평등의 성경적인 해석은 그 기준을 제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 이 수직적인 관계의 의미가 남녀평등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수직적인 平等이라고 해야 옳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이 수직적인 관계가 곧 여성의 있어야 하는 자리이고, 그곳이 곧 그녀들의 자유의 영역이다. 그런 자유의 영역을 侵害(침해)받게 하는 것의 의미는 결국 이런 질서를 거부하려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은 수직적인 평등을 거부하려는 반항에 있다. 남편에게서 벗어나는 자유를 통해서 남자가 주는 성의 속박이나 또는 남자가 가지는 비헌법적인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같은 표시를 한다. 8. 사실은 욕망이고 하나님이 주신 질서에 대한 거부적인 반항의 행동이다. 그녀들이 또 다른 면의 사회에서 김정일의 주구가 되어 압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해야 한다. 그런類들로 인해 우리사회의 압제라는 것의 의미는 더욱 많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성해방의 결과로 만들어진 새로운 가족법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르는 것에 최진실은 동참하였다. 이는 그녀가 그 법을 찬성하고 있고,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더 깊이 생각한 모양 같은 것이다. 남편에게서부터 아니 남편의 性(성)씨로부터 자유를 가지는 자녀를 갖고 싶었던 그는 아마도 이제는 자신의 결백을 위해 자살의 충동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모든 곳에 있는 압제를 위해 합법적으로 싸우는 그녀가 되었더라면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녀는 그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충동적인 자살을 통해 압박을 벗어나려는 것과 자기의 진실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다만 최진실法(법)의 필요성을 이 땅에 강하게 던져주고 가는 선택만을 한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선택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충동적인 것은 참으로 그녀가 달리 어떻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9. 法을 마구잡이로 해석하여 자기들이 편리할 방법으로 구사하고 편법 위법 탈법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이 능수능란한 법 적용에 혀를 내두른다면 주관이 결국은 법이 되는 셈이고, 그때에 법을 모르는 자들은 어느새 죄인이 되어 그들이 주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不幸은 시작되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사는 모든 영역의 압제, 그것이 무엇이든 다 찾아내고 그것을 모두 다 제거하려는 노력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런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남북에 걸쳐 있는 상상할 수 없는 압제가 있고, 그것을 무너지게 하려는 노력이 微塵(미진)한 것은 분명하다. 가정에서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의 압제에서 자유를 구가하려는 노력은 다분히 주관적인 견해가 개입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압제하려는 것의 의미는 속박이고 그 속박의 의미는 자유로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표현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노력의 의미로서의 법의 제정은 참으로 잘하는 것이다. 인간의 세상은 언제든지 법으로 다 고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본다면 인간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 하다고 본다. 10. 그런 노력이 없는 세상은 언제든지 그런 일은 발생할 것이라고 본다. 오늘 지혜의 말씀에 나오는 음녀, 그녀는 아주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그 시대에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여기저기 또는 세상의 유행의 중심에 서서 보편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여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신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교묘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미화시키려는 자들의 모습을 娼女(창녀) 및 기생의 옷을 입은 음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대의 성적인 방황의 의미는 남편이나 사회로부터의 압제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여자남자들의 반발이 거기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壓制에 대해 분명한 거부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운 세계에서 산다는 말이다. 以北에는 눈빛 하나라도 그 압제를 거부한다면 그대로 수용소로 끌려가게 하는 虐政(학정)이 있다. 남편과 사회 및 많은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압제들의 손에서 자유를 찾고 그것에게서 벗어나 타인을 압제치 않는 자유를 구가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가득해지는 이런 저런 類의 압제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법적인 노력과 사랑이 시급하고 필요하다. 11. 무엇보다 더 먼저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김정일의 압제가 너무나 커서 인식치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헌법 3조에는 분명하게 이북의 주민들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한다. 북한주민이 당하는 압제는 반드시 종식되어져야 할 내용들이다. 남에게 폭압을 당한 자는 마땅히 暴壓(폭압)을 당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또한 이 시대의 無感覺(무감각)이라고 본다. 타인의 아픔에는 일절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주민의 고통을 전혀 무감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병든 모습이다. 그런 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없고, 또한 그것을 병으로 여기라고 소리치는 자는 적다. 따라서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아래 압박 받는 곳에 主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찬송가 515장이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의 미래를 참된 자유 해아래 압박이 없는 세상을 열기 위해 예수의 지혜를 따라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자. http://onlyjesusnara.com http://www.korea318.com 부제목: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