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삐라를 날리기 시작한 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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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삐라를 시작한 동기 처음 할 때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대북풍선이 이제는 단골뉴스로 되고 남북관계의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역으로 부각 되었다. 민간인으로서 삐라를 처음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2003년 10월, 그러나 삐라를 보내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훨씬 이전, 북한에 있을 때부터이다. DMZ 가까운 고향에서 여름비속에 남조선삐라가 나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자주보군 하였다. 그럼에도 기억나는 내용은 별로 없고 단지 마을 할머니가 편지형태로 보낸 삐라의 주소가 북한이 맞는 가 물으시던 기억이 날 뿐이다. 그 남아 중학교 초기 평양근방으로 이사를 가 볼 수 없었다. 성인으로 다시 본 것은 1990년 8월 철원군 대전리 에서였다. 난생처음 홀딱 벗은 처녀도 그때 보았다. 솔직히 대부분 삐라는 북한정서에 맞지 않아 별로 감동이 없었다. 오히려 역 후과, 즉 나체사진은 끌리지만 대신 사상적 결과는 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확신시켜주는 꼴이었다. 또한 실례로 등 영어식발음은 미국식민지가 틀림없어보였다. 북에서 흔히 쓰는 웽그리아, 뽈쓰까 라는 단어하나 생각지 못하고 더구나 민족혼도 없는 자들이 우리를 설득해?! 하면 벌써 재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초보를 모를 수 없겠는데 아마 그 속에 분명 우리사람(북 간첩)이 있는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의심은 탈북 후 남한에 와서 금방 풀렸다. 대북심리전단에 간첩은 고사하고 정보심리학의 수재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치명적 문제는 북에서 살아본 탈북자를 한 명도 쓰지 않는데 있었다. 남조선삐라가 다 한심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인생을 바꿀 만큼 깊은 의문점을 남긴 것도 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 6.25전범자가 뒤 바뀐 것이다. 비교할 수없는 폐쇄사회임으로 흐르쇼브 회고록이나 귀순인민군장교 이학구대좌의 증언소리는 안 들어와도 왜 3일 만에 서울 먹히었겠는 가고 한 것이 뇌리에 박힌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거짓말 할 가?! 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의 진실은 내 절로 간단히 연구해냈다. 전쟁초기참가자와 3.8선주민에게 조용히 물어보면 될 것이었다. 정말 물어보니 남조선삐라가 사실이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더 놀랍도록 충격은 남조선사람들이었다. 왜 이런 진실을 분단반세기동안 한마디로 깨우쳐주지 못 했을 가 이다. 간단히 만 반복해 보냈더라면 북한악령의 기주인 증오의 철학, 혁명주의 근간이 무너지겠는데 말이다. 또 하나의 중추 수령숭배도 마찬가지이다. 만화로 김 부자 혹 달리고 배 튀어 나오게 하는 식보다 고 반복 또 반복하여 보냈다면 저렇게 눈물 흘리며 만세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과 문제도 간단한 것이다. 당시 삐라에서 본 한강시민공원의 자가용차 가족사진을 보내서 해결할 수 없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폐쇄 하의 공산당 선전술을 도무지 이길 수 없다. 저것은 부자 몇 놈들 사진이야 하면을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한마디로 해결, 내가 남조선에 가서 할 일은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4개나라 국경을 넘나들며, 3개나라 감옥을 거쳐 찾아갔지만 북을 자극 않기 위해 탈북자 받을 수 없다는 남한정책 하에 탈북한지 6년째 되던 해에 절로 UNHCR 개척, 제1호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 정말 나는 국방부심리전단에 찾아가 딱 6개월만 일해주고 싶다고 간청했다. 지인을 통해 99%받아졌다고 알고 있었으나 결국 딱 1% 때문에 무산되었다. 사명이 내 기득권, 내 밥 탁보다 더 셀 수없는 정서가 아직 남한이었다. 그 남아 더 심각해진 것은 2000년 4월이었다. 첫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간청에 김정일 정권의 첫 요구조건, 대북삐라와 방송중단을 기꺼이 들어주고 김정일 만나러 간 것이다. 거대한 감방에서 눈귀입 막히고 사지와 정신까지 묶인 불쌍한 이들에게 비치던 가느다란 빛과 소리마저 막아버린 것이다. 갈수록 태산, 2004년에는 남한 땅의 전광판마저 치우는 것에 합의해주고. 정권도 갈수록 태산, 를 더 한 술 뜨는 . 이제 더 바라 볼 것 없는 상황에서 백수라도 나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2003년10월부터, 당시 명칭인 기독탈북인연합 성원들과 시작한 것은 어린이 장난감인 고무풍선에 삐라 한 장씩 달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3년째인 2005년 6월까지 아무리 날려도 반응은 없었다. 100개 이상 만 고무풍선을 만들어도 손 고락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난다. 바위 돌에 맨 손치기였지만 그 피 속에서 대형풍선 개발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와 지혜가 생겨났다. 물론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정부가 매해 30억씩 쓰며 하던 것을 맨주먹인 탈북자가 한다는 것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격이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믿음대로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내 집을 못 찾아 갈 정도로 몰입하고 미치니 마침내 백수도 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 산물, 화학식 대형풍선을 개발한 것이다. 대형풍선개발의 반응은 너무 빨리 놀라울 정도로 왔다. 불과 몇 개 날린 것 같지 않은 데 8월부터 북의 공식항의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증기기관 발견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원자력 발견이 역사를 바꾼 것처럼 풍선개발기술이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빨리 가져 올 줄을 몰랐다. 다른 대북단체에 전수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봄부터이다. 처음 북한민주화운동 거기서 나온 자유북한운동연합에 이어 일본납치자구출단체, 올해부터 탈북인단체총연합, 북한민주화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 전수된 다각적인 구조. 누구 하나 막는다고 못할 구조가 아닌 것으로 되어 더욱 안정적이고 희망적이다. 풍선기술개발은 계속되어 현재는 정부기술을 초월하고 더 이상 개발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최신기술로 날리기 시작한지 불과 한 달이 지났다. 이번에는 회담 요청할 분위기 아닌데도 그 자존심 높은 북한이 제 발로 나와 최후통첩 식으로 항의한다(도합 20차례로 알고 있다) 그 만큼 내부의 반응이 크고 급하다는 반증이다. 김정일 와병설을 담아 갑자기 그렇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여론몰이이다. 그 어떤 대북운동에도 끄떡없던 강성대국이 이렇게 비명소리 하듯 항의 많은 것은 풍선삐라 뿐이다. 왜 그럴 가?! 폐쇄가 최우선, 최후의 통치수법이기 때문이다. 뚫리면 죽기 때문이다. 3차 대전 같은 사변의 6.25 역사진실도 뒤집을 수 있고, 기껏 소대규모 부대장이 천만 일군을 패망시킨 해방자이고 그 아들은 21세기태양이라고 하는 수령숭배와 굶어죽는 유일나라. 테러와 핵개발로 세계를 교란하는 모든 악행은 폐쇄 하에 가능한 것이다. 그 폐쇄를 자유롭게 뚫는 유일한 수단이 풍선이니 저리 놀랄 만도 한 것이다. 개방하면 곧 죽기에 필사적인데 이미 풍선으로 뚫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진실로 풍선을 보내고 어떤 내용을 매다는 가가 결정할 것이다. 마치 평범한 미사일에 핵을 담을 때 양상이 달라지듯이- 기독북한인연합 대북풍선단장 이민복 전 북한과학원연구원 1995년 서울입국 010 5543 2574 www.nkc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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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이 참으로 지혜로운 민족이란 것이 이민복님의 풍선삐라 사업을 통해서도 증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님들이 북한에 보낸 삐라들이 조국분단 60년을 통털어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평양시있는 김일성광장에 또 만수대 언덕에 명중하는 풍선을 개발했으
면 더욱감사하겠습니다 이민복님 화이팅 선진투사 화이팅
ksm-1969@hotmail,com 효과만점화이팅 암흑 사회의 등대가 되여주길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