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딸린과 자식들 |
---|
그루지아인 스탈린과 자식들 -가족들에게도 냉정했던 스탈린 원수 정복을 입은 스탈린 -------------------------- 요시프 비싸리오노비치 쥬가슈빌리( 1878 ? 1953) -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 그는 요새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끄러운 그루지아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후에 조셉 스탈린으로 바뀐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러시아의 냉혹한 철권 독재자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슬라브족이 아니라 러시아의 영토였던 그루지아 출신이었다. 여기서 먼저 그루지아에 대해서 알아보고 넘어가자. 그루지아는 이번 러시아의 침공으로 유명해졌다. 인구는 500만 미만, 흑해와 카스피 해의 중간에 위치하고 흑해로 입구가 열려져 있다. 자신들을 Kartvelebi 민족, 국가를 Sakartvelo 부른다 자신들의 언어는 물론 문자도 가지고 있다. 아래의 괴상한 문자가 그루지아 문자이다 იოსებ სტალინი, ნამდვილი გვარი ჯუღაშვილი, 스탈린의 그루지아 이름을 쓴 그루지아어- 그루지아라는 이름의 기원은 여러 설이 있는데 성 죠지에서 왔다는 설이 있고 옛 통치자 페르시아에서 부르던 구르잔 지역 이름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오토만 터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오랫동안 회교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곳은 코카서스 일대에서 이미 AD 300년경에 기독교가 제일 먼저 들어온 지역으로 그루지아 정교를 믿는 신도가 다수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뒤 3년간의 짧은 독립 국가를 맛보다가 소련이 보낸 군대에 의해서 다시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아서 그렇게 긴 세월 타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용케도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로 써서 Georgia라고 쓰는데 미국 남쪽 조지아 주와 영어 글자가 꼭 같다. 다시 첫 글머리로 가보자. 스탈린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으로서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가족에게 폭력을 자주 행사했다. 처음에는 살만한 소시민이었으나 술 때문에 재산을 다 탕진하고 여러 곳을 이사 다녔다. 그러나 스타린의 어머니는 신앙심 많은 여인이었다. 그는 스탈린이 정교회 신부가 되기를 열망하여 간난신고 끝에 그를 10살 때 예비 신부 학교에 넣었다. 그는 열 살 때 들어간 신부 예비 학교에서 비로소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는 평생 러시아의 철권 통치자로 군림했지만 그루지아 액센트가 강한 러시아 어를 썼었다. 운명이 그를 평범하게 이끌었으면 그는 수염을 기르고 그루지아의 한 정교회 신부로 살다가 끝났을 것이다 주정뱅이 아비는 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를 자기처럼 구두 수선공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예비 신학교에 진학한 스탈린을 강제로 퇴학시켜 구두 수선공의 수련생으로 끌고 가기도했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신학교 선생과 같이 가서 그를 다시 신학교로 데려왔지만 그의 격노한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송금을 끊기도 했다. 스탈린은 적어도 어렸을 때는 미래의 잔혹한 냉혈한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는 대단히 머리가 좋고 학업 성적도 좋았을 뿐더러 그 지역에서 이름도 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번 지역 신문에 기고해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더 못 믿을 일은 그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주 노래를 잘해서 교회의 성가대에서 활약 했을 뿐더러 아는 결혼식에도 자주 초빙되어 축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작은 비밀이지만 그는 어렸을 때 마마를 앓아서 얼굴이 얽은 자국을 선명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도 마마를 앓아서 잘 보면 흔적이 있지만 스탈린의 사진에는 그런 자국이 없다. 독재자로 절대 파워를 흔든 그의 얼굴 마마 자국은 전부 사진 수정 작업을 해서 없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6세 때 정식으로 신부가 되는 신학교에 입학해서 4년간 공부했다. 그러나 20살 때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신학교에서 퇴학당하자 새로 생긴 신종 사이비 종교에 입교했다. 공산주의라는 교조적 이데오르기이다. 100년 뒤 그간 허다한 잘못된 모순과 문제점이 발견되어서 용도 폐기 된 이데오르기다. 이 조직에 들어간 그는 신학교에서 배운 러시아어로 교주 레닌에 접근하여 그의 신임을 받게 된다. 그는 주간으로 발행하는 비밀 조직인 공산당 내부 기관지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을 하면서 스탈린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강철로 만들어진 -- 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레닌이 직접 작명해주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루지아인 요십 쥬가노비치는 러시아인 조셉 스탈린으로 다시 태어났다. 더하는 소리지만 프라우다라는 명칭은 스탈린이 명명한것이다. 그는 레닌의 사후 정적 레온 트로츠키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멕시코로 망명했던 트로츠키에게 자객을 보내 그를 도끼로 찍어서 목숨을 빼았았다. 레닌마저 죽으면서 걱정했던 그의 잔인함과 냉혹함은 소련의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감옥과 시베리아 유배를 선사했다. 그렇다면 피의 독재자 스탈린은 아버지로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탈린의 가정 생활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가는 두 번 갔지만 역대 독재자들이 가진 특징, 즉 호색의 버릇이 비교적 옅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뒤 얼마 안 되어 Ekaterina Svanidzefkfk라는 한 그루지아 여인을 알게 되고 1906년 이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둘 사이에 야코프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두 부부 생활동안 스탈린은 소위 혁명 자금을 마련한답시고 은행 강도질을 했다. 북한의 인민 무력부장을 지낸 최현이가 은행 강도 행각을 하고 8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공산주의자로서 강도질을 한 것은 스탈린이 대선배이다. 수배를 받자 스탈린은 가족을 이끌고 유전지대인 바쿠로 도주한다. 이 살기가 나쁜 유전 도시에서 스탈린의 첫 부인은 병에 걸려 죽었다. 티프스에 걸려 앓다가 사먕한것으로 전해져 온다. 스탈린에게서 그루지아의 한 자락이 사라진 것이다. 스탈린은 첫 와이프를 상당히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너무 상심을 해서 자살을 염려한 그의 동료가 그가 가진 권총을 몰래 감추었었다. 스탈린은 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첫 사랑과 함께 사라졌다-- 뭐, 해보는 소리겠지만 --- 첫 아내와 사이에서 얻은 첫 아들은 여덟 살까지 그루지아에 살면서 그루지아 말만 하다가 아버지가 러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뒤 러시아로 이주를 하고서야 러시아어를 배웠다. 스탈린은 어미 없이 자란 이 야코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이 아들을 구두 수선공 수준 녀석이라고 불렀다. 야코프는 성인이 되자 한 유태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들의 결합에 동의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야코프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총알이 급소를 빗나가는 바람에 목숨을 부지하였다. 아들 자살 시도의 급보를 받은 스탈린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 그 칠칠맞지 못한 놈은 총도 제대로 못 쏘는 구나.” 이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야코프는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중위를 달고 전선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했는데 스모렌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나의 학생 시절 야코프의 포로 때 사진이 외신을 타고 국내 언론에 소개 된 일이 있었다. 텁수룩한 얼굴에 더러운 외투에 손을 넣고 분노와 수치감에 굳어진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야코프의 주변에 너 덧 명의 독일 장교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구경하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그 사진을 아무리 검색 해 봐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독일은 그와 스타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파우루스 원수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비웃었다. “중위를 원수와 바꾸자고 ? 웃기는 인간들이군.” 내가 앞서 말한 사진을 흰둥이 아버지 아이디 쓰시는 분이 구해 보내 주셨다- 포로가 된 야코프, 베를린 근교 수용소 ------------------------------------------------ 오랫동안 그의 행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디. 단지 나치스의 포로수용소에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떠돌 따름이었다. 그러나 종전 후 미군의 비밀 조사에서 사실이 들어났다. 성질이 급한 야코프는 포로 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모양이었다 . 그는 내무반에서 다른 포로와 언쟁을 벌렸고 격분한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철조망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자세를 취하면서 망루의 독일 경비병의 사격을 유도했다. “쏴 봐! 쏴 봐! ” 경비병은 그의 머리를 쏴서 사살했다. 그의 죽음으로 스탈린의 그루지아와의 가족적 연결 고리는 끊어진 상태가 되었다. 종전 후 스타린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아들의 행방을 수색했다는 말이 있긴 하나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스타린은 1919년 Ekaterina Svanidze와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바실리와 딸 스베틀라나를 낳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을 싫어했을 뿐더러 두 자식들에게도 애정이 없었다. 아내는 냉혹한 스탈과 불화하다가 의문의 자살을 했다. 두 번째 아들 바실리도 문제 투성이었다. 학교 다닐 때 낙제를 밥 먹듯이 했지만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공군에 입대했고 1947년도에 중장까지 진급하는 말도 안 되는 초고속 진급을 했다. 그가 초고속으로 장군이 되어서 해놓은 최대 업적은 패전국 독일에서 해댄 무자비한 약탈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젊은 나이에 술에 젖어 사는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스탈린은 한 때나마 김일성이가 김정일이를 후계자로 만들듯이 자식을 자기 사후 후계자로 키울 구상도 했던듯하다 그러나 그가 커가면서 하는 꼴을 보고 일찌감치 그 꿈을 접었다. 바실리 - 스베틀라나 -------------------- 그리고 바실리를 거의 잘 만나 주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죽자 날개 꺾인 새가 된 그는 교도소에서 여러 해 살다가 나와서 낭인 생활을 하며 알콜 중독이 더욱 심해졌다. 바실리는 소련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중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해서 더욱 주변 사람들의 천시를 받다가 알콜 중독의 후유증으로 1962년 사망했다. 자기의 주정뱅이 할아버지, 즉 스탈린 아버지의 유전적 요소가 농후했던 모양이다. 스탈린은 그의 딸 스베틀라나에게도 정을 베풀지 않았었다. 후르치쵸프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댄스 파티에서 어린 그녀의 머리채를 끌고 나와 강제로 춤을 추는 냉혹한 장면을 여러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두 번 결혼에 두 번 이혼했다가 인도 시크 교도로서 공산 주의자가 된 인도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67년 그가 죽자 그녀는 그의 뼈를 간지스 강에 뿌린다고 인도로 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자기 아버지가 다스렸던 소련을 망신시켰다. 그 녀는 84년 소련으로 돌아가 아버지 고향 그루지아에서 살다가 다시 영국과 미국을 전전하며 살았다.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미국 생활 중에 아버지와 그의 정권을 비난하는 회고록을 출간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었다. 자신에게 냉정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 심리가 엿 이는 책이었다. 소련인들은 국가 망신을 시키는 그녀에 큰 적대감을 보였다. 스탈린은 세 번째 결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하여튼 그는 주변에서 여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호색한 모택동이나 김일성과는 조금 다른 면모이다. 스탈린이 그처럼 지독한 숙청과 제거 작업을 무자비하게 자행 했던 것은 소수 민족인 그루지아 출신으로서 거대 다수의 슬라브 민족을 통치해야 했었던 그의 지배 기반의 취약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통치기간 그가 숙청과 처형으로 죽인 사람만 3000만 명이다 (일화 한 가지 : 사실 의심 암귀처럼 살기가 번득이는 그의 눈길을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남한에서 월북한 이태준의 해방 수년 뒤에 소련을 방문하고 쓴 ‘소련 기행’을 보면 기막힌 잠꼬대 같은 대목이 보인다. 그는 스탈린의 초상화를 보고 - 후덕(厚德)한 인상의 스탈린 원수가 어쩌고 저쩌고 --- 그 때 남한에서 공산주의에 현혹되어 북한으로 간 상당수의 문필가, 예술가, 정치가들이 이렇듯 눈에 콩깍지가 씌였던 것이다. 스타린을 보고 후덕하다고 했던 그는 후덕한 스탈린이 만들어 놓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에게 1956년경 숙청되었다.) 스탈린은 그가 승인하고 지원했던 한국전쟁 이 진행되던 1953년 3월5일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는 생전 그의 모국 그루지아가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간 독립국이 되고 러시아와 총구를 맞댈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의 공산 혁명은 순수한 슬라브 민족이 아닌 타민족들이 주역을 하게 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아버지는 몽골계 교육자였다. 레닌의 얼굴을 잘 보면 위로 가늘게 째진 눈매가 아버지의 몽골계 혈통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루지아인 스탈린이 있고 그의 경쟁자였었고 소련군을 창설한 레온 트로츠키는 유태인이었다. 그루지아에서 소련 통치 때 러시아 정치 중앙 무대 까지 진출한 중요한 인물이 한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부기해둔다. 고르바쵸프 대통령 밑에서 소련 외상을 지낸 쉐바르드나제가 그루지아 출신이다. 소련 와해후 그는 그루지아로 돌아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었다. 타 민족으로서 국정을 쥐고 흔들었던 사람으로서 프랑스의 나폴레온이 있다. 그는 프랑스가 빼앗은 이태리의 제노아 영토였던 콜시카 섬 출신이었다. 그의 성 보나파르트는 이태리계의 이름이었다. 톨스토이는 프랑스 민족도 아닌 나폴레온이 프랑스 군대를 몰고 러시아를 침공한 것을 아니꼬운 심정을 토한바있었다. 요즘 러시아의 늙은 공산당 퇴물들 사이에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복고풍이 분다고 한다. 스탈린이 급진적인 신경제 계획으로 소련을 산업국가로 만들었다거나 독일의 침공에서 소련을 잘 영도했다거나 또는 전후 세계의 2대 강국으로 만들어 미국과 대결했다거나 하는 것은 그의 업적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통치 중에 저지른 수없는 정적을 비롯한 죄 없는 사람들의 학살과 인권침해 행위는 만년이 흘러도 역사는 결코 이 인간을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자식이라도 사람됨을 보고 후계물림 않한것 보면,
김일성은 자식놈이 고중학교,대학교시절부터 여색에 미쳐난봉군으로 살아온것을 주위눈도 두려워 안하고 대를 물린 희세의 독재자아닌가.
앞으로도 좋은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