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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개망신당한 네가지 사건"
Korea Republic of 알수없는북 0 557 2009-04-03 09:52:03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가끔 싸움질을 하기도 한다.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승패는 '누가 힘이 세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깡이 세느냐'도 무시 할 수 없다는 것을 싸움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특히 눈빛에 살기를 띠고 있다면 눈빛만 봐도 주눅이 들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를 잘 기억해야 한다.



국가 간의 문제도 인간이 하는 행위이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힘이 센 나라이고 전쟁 경험도 많지만, 겁 많은 나라로 보여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가? 지금부터 알아보자.



첫째… 미국의 똥궁뎅이를 발로 차버린 '푸에블로호 사건'



1967년 12월 2일 함장 로이드 부커(Lloyd M. Bucher)를 비롯한 미 해군 장교 6명, 병사 75명, 민간인 2명을 합쳐 모두 83명을 태운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한 척이 첩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본 사세보(佐世保)항의 미 해군기지를 떠났다.
그 첩보함의 이름은 푸에블로호(USS Pueblo)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19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 북한은 피(P)-4 초계정 네 척과 미그기 두 대를 동원하여 원산 앞바다에서 해상 첩보활동을 벌이던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였다.


나포과정에서 미 해군 병사 한 사람이 죽었다.

나포작전에 해병으로 참가했던 북한 군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 우리가 국적을 밝히라고 하자 놈들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성조기를 띄우며 거만하게 나왔습니다. 아마 미국이라면 감히 어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천만에, 놈들은 오산했습니다. 우리 7명의 해병들은 번개같이 배에 날아들어 순식간에 80여명의 적들을 모두 체포했던 것입니다.'



미국 해군 함정이 외국군에게 나포된 것은 미 해군역사 106년 만에 처음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격노하였다. 그들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미국에 대한 전쟁행위로 간주하고 핵공격으로 보복하려고 생각했다.



미 국방장관 클락 클리포드(Clark Clifford)에 따르면, 나포사건 보고를 받고 나서 미 행정부에서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평양을 핵무기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핵공격 주장은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철회되었다.



미국 대통령 존슨(Lyndon B. Johnson)은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미국이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소련에게 북한이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도록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부탁을 받은 소련은 북한에게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무원들을 돌려보내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우리나라 영해에 들어와 정찰행위를 감행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법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올 때에는 제마음대로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절대로 제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소련의 압력을 분명히 거절해버렸다.



그때 북한의 한 당국자(김정일)는
'미국 놈들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절대로 석방하지 않겠다. 그리고 푸에블로호는 우리의 전리품이므로 그놈들이 항복서를 낸다 해도 돌려주지 않겠다. 우리 인민군대가 나포한 미제 무장 간첩선을 먼 훗날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후대들에게 이것은 우리가 미국 놈들에게서 빼앗은 간첩선이라고 말해주겠다'라고 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에 대해 충격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미국은 다음과 같은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① 미국이 북한에 대해 실질적 또는 잠재적 군사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음을 비공식 통로로 알려준다.
② 비무장지대 이북 80킬로미터 지역까지 공중정찰을 강화한다.
③ 첩보함 배너호를 동원하여 해상 첩보활동을 계속한다.
④ 소해정과 소형 잠수함을 동원하여 푸에블로호에서 바다에 버린 암호관련 장비를 수거한다.
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발진한 에이(A)-6 항공기가 기뢰 83개를 원산 항에 떨어뜨려 봉쇄한다.
⑥ 북한 함정을 나포한다.
⑦ 전폭기 92대가 원산 공군기지와 문평리 해군기지를 공습한다.
⑧ 군사분계선을 넘어 기습 공격하여 비무장지대 이북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북한군 제6사단 지휘부를 점령·파괴한다.
⑨ 원산 항을 12해리 안에서 봉쇄한다.
⑩ 경제봉쇄, 특히 곡물수출을 차단한다.



이 대응책에 따라 미국은 세 개의 항공모함을 북한 연안으로 출동 시켰고 전략폭격기를 서태평양에 배치하였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앞세운 미 해군 구축함과 전함 16척이 울릉도 남쪽 50마일 해상에 정박하였고 미 공군기 3백72대가 출격태세를 갖추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표하여 공군 예비역 1만5천명에 게 긴급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은 당시 재래식 무장력 밖에 없었지만 미국의 살벌한 핵전쟁 위협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주한미군을 공격하였다.


1968년 4월 14일 밤 11시 판문점 남쪽 대성동 입구에서 북한군 병사들은 주한미군과 남한군 병사들을 수송하던 미군 군용트럭을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 공격하여 미군 병사 두 사람을 죽이고, 다른 미군 병사 두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처럼 북한군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에서 네 차례나 미군을 습격하여 모두 11명을 죽였다.



당시 북한의 표현을 빌리면,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이것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광란적인 전쟁소동을 일으켰을 때 우리의 대답이었다.'



결국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벌인 끝에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Gilbert H. Woodward)가 '미 합중국 정부를 대신하여' 북한의 요구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포로가 되었던 승무원 82명과 시신 한 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았다. 1968년 12월 23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오늘도 푸에블로호는 북-미 대결의 상징물로 남아있다. 그 동안 원산 항에 있었던 푸에블로호는 1998년 12월초에 대동강으로 옮겨졌다. 북한은 1866년 9월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격침 당한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호 격침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대동강 기슭, 바로 그 기념비 옆에 전시되어 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호를, 20세기에는 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으며 앞으로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고 주장하면서, 전리품으로 전시된 푸에블로호를 담은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미제야 함부로 날뛰지 말라'



2차 대전 승전 후 거만한 미국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었다.












사진 / 프에블로호



















둘째… 미국의 옆구리를 한방 먹여버린 '정찰기격추 사건'



1969년 4월 15일 일본 아츠기(厚木)에 있는 해군 항공기지를 이륙한 미국의 전자정찰기 이씨(EC)-121에는 미 해군 장교와 병사 서른 명과 미 해병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이 정찰기는 동해 상공에서 북한 연안을 따라 비행하면서 공중 정찰임무를 수행하였다.



청진 동남방 바다 위를 비행하던 이 정찰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는 보고가 미 해군기지에 들어온 때는 오후 두 시쯤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 55분이 지난 시각 평양방송은 북한군이 지대공 미사일로 이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발표하였다. 정찰기는 물론,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서른 한 명은 시체도 찾지 못한 채 동해에 가라앉았다.



바로 얼마 전 존슨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한 바 있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은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자마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정찰기 격추사건을 겪게 되었다.



닉슨은 두 개의 항공모함 선단을 동해에 출동 시키고, 에프(F)-4 전폭기들을 남한에 긴급 배치 하였다. 또한 미국은 이미 3월 중순에 시작한 포커스 레티나 군사훈련을 이 정찰기 격추사건과 연계하여 실시했다. 이 군사훈련은 미국 본토에서 남한까지 미군 공정대원을 직접 공수하는 첫 훈련이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뒤로 물러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세적으로 나왔다.



미 해군 정찰기가 동해에서 격추된 때부터 넉 달이 지난 8월 17일 한강 하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한군이 미군 헬리콥터(OH-23)를 격추한 것이다. 거기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세 사람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1969년 12월 3일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



자만심에 빠져있던 미국으로서는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세째… 미국의 귀싸대기를 갈겨버린 '미류나무 사건'



1976년 6월 미국이 북한을 겨냥한 핵전쟁 연습인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Team Spirit military exercise)을 처음 실시했다. 북한은 이 훈련으로 말미암아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에 이르러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 때부터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은 8월 18일 미군 장교 세 사람과 미군 병사 일곱 사람이 남한 노동자 다섯 사람을 거느리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다리 부근에 있는 커다란 미류나무가 미군 경비병의 관측시야를 가린다고 하면서 벌목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8월 6일에도 그 나무를 자르려고 현장에 나타났다가 북한군 경비병에게 제지 당한 바 있었다.



북한군 경비장교가 다가와서 벌목작업을 그만두라고 제지하자 북한군과 미군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 때 미군이 판문점에서 북한과 협의하지 않은 채 미류나무를 자르려고 한다는 긴급보고를 받은 북한 군부는 '조선사람의 본 때를 보여줘라. 한국 노동자들은 놔두고 미군 놈만 골라서 본때를 보여주라. 총은 쏘지 마라'고 지시했다.



현장에서는 미군이 북한군의 제지를 무시하고, 남한 노동자들에게 나무를 자르라고 명령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북한군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잘 싸서 주머니에 넣고 나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미군 경비책임장교에게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때려눕혔다.



그러자 다른 미군이 남한 노동자가 들고 있던 도끼를 북한군에게 던졌다. 이를 피한 북한군은 그 도끼를 집어 들고 쫓아 가서 미군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미군 경비책임장교인 대위 한 사람과 중위 한 사람이 현장에서 맞아죽었고, 다른 미군 여덟 명은 부상을 입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주한미군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진 미군 경병병 관측소에 미리 설치해놓은 망원렌즈 촬영기로 이 사건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주한미군이 사건현장 부근에 기동타격대(U.S. Quick Reaction Force)를 대기시켜 놓고서도 즉각 출동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은 사건현장을 촬영한 영상자료 가운데서 북한군이 미군을 죽이는 장면만을 언론에 넘겨주어 전세계에 알리도록 하였고 이 사건은 '도끼만행사건'으로 우리에게 알려졌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일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주한미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은 보고를 받고 어찌나 급했던지 전투기 뒷자리에 타고 남한에 날아갔다.



그런데 초강대국 미국은 북한에 대한 보복은 할 엄두도 못내고 겨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자르기 위해서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를 동원했다는 웃지 못할일이 벌어진다.
미국은 미류나무 자르기 작전을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고 불렀다.



이 작전에서 미국은 에프(F)-111, 에프(F)-4 비행대대를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했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앞세운 전투선단을 동해에 출동시켰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1천8백명이 포함된 미 지상군 1만2천명에게 한반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은 한·미연합군에게 완전 경계태세를 명령했고, 부사령관 쿠쉬맨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포대를 북한군에게 잘 보이도록 비무장지대를 따라 배치시켰다.


1976년 8월 20일부터 핵무기를 실은 비(B)-52 폭격기가 괌의 앤더슨 제13공군사 공군기지에서 출격하여 한반도 상공에서 전속력으로 북상하면서 평양을 향하다가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급선회하는 살벌한 위협비행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핵전쟁 위협에 대항하여 북한도 전면전 태세에 들어갔다. 그 당시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관한 정보를 접한 북한 당국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즉각 전쟁 준비상태로 돌입했다.



8월 21일 아침 일곱 시 정각, 주한미군과 남한군 특수부대의 호위를 받는 미군 공병대원들이 미류나무를 자르기 위해 현장에 접근하였다.
중대병력을 태운 헬리콥터 20대가 무장 헬리콥터 7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임진강과 비무장지대 사이를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자 북한군은 '폴 번연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미군 소장 브래디가 타고 있는 헬리콥터에 사격를 가했다. 그 헬리콥터는 두 발을 맞고 겨우 비상착륙했다.



같은 날 정오 비공개 회합에서 북한군 대표는 주한미군 대표에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미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통지문을 읽어주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핵전쟁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갈 수 있었다.



북한의 당국자(김정일)는 이렇게 말한다.
'적들의 침략전쟁에는 혁명전쟁으로 대답하고 적들의 기만적 술책에는 혁명적 원칙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 인민의 입장입니다. 만일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체 조선인민은 단호한 반격으로 대답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일 것입니다. 조선에서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 미제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



대제국 미국으로서는 충격이었고, 얼굴 붉어지는 사건이었다.



넷째… 미국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린 '북핵위기 사건'



핵전쟁 위협은 부시(부시 아버지 부시) 정권이 제기했던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클린턴 정권에 이르러 더욱 심각해지는 가운데 몰려왔다.



1993년 1월 26일 주한미군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Robert W. Riscassi)는 제17차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3월에 재개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이번 훈련에는 핵무기를 실은 최신예 전략폭격기 비(B)-1비(B)가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시 정권 마지막 해였던 1992년 봄에 미국은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중단한 바 있었는데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에 북한은 다시 준전시체제로 돌입할 수 밖에 없는 비상 상황이었다. 훈련을 빙자로 평시보다 훨씬 많은 미군 병력과 무기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는 위협이었다. '저러다 갑자기 쳐들어 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 솔직한 북한의 입장일 것이다.



미 국무부 동북아시아 정보조사담당관 로버트 칼린(Robert Carlin)은 이렇게 말했다.
'그와 같은 결정은 대화를 중단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북한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것과 같으니까요. 팀 스피리트 훈련의 개최 여부는 원래 12월이나 1월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10월에 그것을 발표한다는 것은 시기를 잘못 선택했거나(사실이 그랬지요), 아니면 북한을 자극하기 위한 것입니다. '


미군이 훈련을 할 때면 북한에서는 비상을 걸어 대응 훈련을 해야 하고 극도로 긴장된 상태가 된다. 그런데 그보다 더큰 이유는 미국을 정치협상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이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북한이 강도 높은 비난을 내 뱉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북한을 화나게 할 것이라는 이러한 명분하에 정치대결 계획은 즉각 북한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이 재개되기 하루 전날인 3월 8일 북한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전신명령'을 발표하면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다.


3월 10일 김영남 외교부장은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를 앞세워 강요하고 있는 '특별사찰'을 거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3월 12일 오전 10시 50분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ty)을 탈퇴한다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선언은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은 기습 공격이었으며, 핵전략에 기초한 미국의 세계지배구도에 강타를 날린 것이었다.
팻 부캐넌(Pat Buchanan)의 말대로, 그것은 '실로 민주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자아도취적 환상이 끝나는 순간' 이었다.



이날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망했는데 그 발언이 나온 뒤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핵확산금지조약 체제가 생겨난 뒤 23년 동안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의 보복이 두려워 탈퇴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북한이 처음으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자 워싱턴 정가는 충격과 혼란으로 들끓었다.



이때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보복공격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1993년 12월 10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미 국방부는 북한과 넉달 동안 고강도 전투(very high-intensity combat)를 수행하는 '작전계획 5027'을 클린턴에게 제출하였다. 이 작전계획은 전쟁을 염두에 둔 준비 단계였다.

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조치 추진 뿐만 아니라, 1994년 3월 16일 또다시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 계획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맞서서 북한은 만일 미국이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조치를 취한다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완전히 탈퇴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경고는 말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1994년 5월 13일 북한은 또다시 강력한 공세조치를 취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도착하기 전에 영변에 있는 5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에서 사용한 연료봉을 전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연료봉 꺼내기 작업을 전격 강행함으로써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이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은 미국의 허를 찔렀고, 미국은 또다시 외교적 패배를 맛보아야 했으며, 이에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1994년 6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였고. 6월 10일(북한이 연료봉 꺼내기 작업을 마친 날)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제재 결의안이 나오자 북한은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즉각 탈퇴하고, 어떠한 사찰도 더 이상 받지 않겠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며 맞섰다.



이처럼 북한에게 연속적으로 허를 찔린 미국의 대북 적개심은 터지기 직전 상태에 이르렀고, 워싱턴은 핵전쟁 보복전략으로 들끓고 있었다.



1994년 5월말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모든 지역의 야전사령관들과 4성 장군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조·미 전쟁계획을 검토하였다.
미 군부는 1993년의 전쟁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순항미사일과 에프(F)-117 스텔스 전폭기를 동원하여 영변 제2원자로와 관련 핵시설들을 강습(强襲)으로 파괴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한반도에 전쟁의 암운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위기는 6월 15일 미국의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판문점을 거쳐 방북하여 이상한 쑈를 벌임으로서 끝을 맞게 되었고,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는 '전쟁피해 등 군사행동의 결과를 생각하여 일단 무력공격은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의 한 우익논객은 이렇게 말했다.


'제재를 하여 전쟁판을 벌이든지, 한 발 물러나 협상판을 벌이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김일성은 클린턴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 각오만으로 족한 도박판이었지만 심약한 클린턴은 그 각오를 할 수 없었다. 흉내나 내보려던 제재마저 거두어 들였다. 격이 맞아보이는 선배, 카터에게 기대어 출구를 찾았다'



세계 제패를 꿈꾸는 미국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사건이었다.



## 2. 자신감이 넘치는 북한 ##



정전 이후 북·미 사이의 대결구도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핵전쟁 보복전략이 북한을 위협하는 구도 속에서 이어져온 전시적(戰時的) 대결이라는 데 있다.



한반도의 전략균형은 핵공격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놓고 있는 미국이 전쟁위협을 몰고 올 때마다 심하게 요동쳤고, 여러 차례 전쟁위기를 가까스로 비켜가야 했다.



리영희 교수의 말대로, '핵군사력을 갖지 않은 약소국가에 대해 세계 최강 핵군사력이 일방적으로 핵전쟁 위협을 25년이나 계속하는 행위는 어떤 구실이나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사실상의 공격행위'인 것이고 '미국의 횡포와 '힘의 오만'의 표시'였다.



이에 대해 남한은 미국이 북한을 핵전쟁 보복전략으로 압박하고 있는 현실을 '핵우산의 보호'라고 착각하면서, 핵전쟁 위기에 거의 둔감한 상태에 있었다. 반면, 북한은 '군사적 포위환' 속에서 긴장감과 경계심을 한 순간도 풀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었다.


다른 한편, 미국인의 정신구조 속에는 자기 영토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조그만 반도에서 핵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하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문제로 삼는 것은 남한에 있는 미군과 미국 민간인들을 어떻게 보호하면서 전쟁에 이기느냐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제 한쪽(미국)의 일방적인 위협은 있을 수 없는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고 자신하고 있다.



부시 정권 때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와 미 국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는 『워싱턴 포스트』 1994년 6월 15일자 공동 기고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나중에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북한이 일정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김일성 정권의 몰락과 함께 북한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북한이 알게 하여야 한다. 이 싸움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있다. 우물쭈물할 때는 이미 지났다. '



그때 북한을 공격했어야 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었다는 뜻으로 보여지는데, 과연 그럴까?



클린턴 정권이 1993년 3월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세계 최대의 전쟁급 실전훈련으로 재개할 준비를 시작하였을 때, 평양에서는 군 지휘관 회의가 소집되었다.


'걸프전에서 이긴 미국이 첨단무기를 총동원하여 북한에 쳐들어오면 과연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이냐?' 하는 김일성 주석의 질문에 대해 북한군 지휘관들은 쉽사리 답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 우리가 이깁니다. 만일 우리가 지게 될 때면 지구도 깨어져 나갈 것입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고 답변하고, 미국의 공격에 맞서기 위하여 강력한 타격수단을 실전에 배치하였음을 밝히면서 미국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의 시나리오를 설명하였다고 한다.



위의 일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북한이 미국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승전을 위한 전쟁시나리오를 수립해놓았다는 사실이고, 타격수단을 실전에 배치하였다는 사실이다.



1998년 12월 2일에 나온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은 미국에 대한 북한의 압박외교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성명의 한 부분을 옮겨 적으면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작전계획이 있다. 타격이요, 이요 하는 것들은 결코 미국만의 선택권이 아니며 그 타격방식도 결코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다. 우리 인민군대의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타격을 피할 자리가 이 행성 우에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줄임) 미제가 와 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정세를 전쟁접경으로 끌어가고 있는 오늘의 엄중한 사태에 대처하여 우리 혁명무력은 미제 침략군의 도전을 추호도 용서치 않고 섬멸적인 타격으로 대답할 것이라는 것을 주체조선의 존엄을 걸고 엄숙히 선언한다.'



1998년 12월 『로동신문』에서는 여러 논설을 통하여 북한은 '전쟁사에 일찍이 없는 섬멸적 보복타격을 가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언급하였고
'우주적인 타격수단을 갖추고 있으며, 미국 땅덩어리도 불바다로 될 것'이라는 살벌한 위협 발언들을 워싱턴을 향해 맹렬히 퍼부었다.



『연합뉴스』 2001년 4월 19일자에 실린 북한의 성명서에는
'만약 미국이 깡패식 논리에 기초해 조미 기본합의문을 파기하고 조선반도의 평화과정을 파괴한다면 그로부터 초래되는 모든 후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핵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무기의 힘이 결코 미국의 고유한 독점적 특허권으로 존재하기 않으며 미국의 핵기지 또한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아직까지 조선은 미국 땅에 포탄 한 발 던진 적이 없지만 이제 다시 미국이 조선을 건드리고 전쟁으로 도전해 온다면 조선 인민은 지난 전쟁시기의 복수까지 합해 미제 침략자들에게 천백 배의 보복타격을 가할 것이다.'
라고 밝혔다.



미국으로서는 그냥 듣고 흘리기에는 아무래도 섬뜩하다.



## 3. 북한은 '뭔가'를 보여 줄 수 있다. ##



미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있는 북한군의 단호한 태도를 실제로 입증해주는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이 있었지만,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3년 3월 1일 오전 일본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기체가 매우 큰 미군 정찰기 알씨(RC)-135에스(S) 코브라 볼(Cobra Ball) 한 대가 동해의 상공을 보란 듯이 비행하고 있었다. 그 정찰기는 북한이 동해안의 발사장에서 미사일 발사를 예상하고 그 활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투입된 것이다.



그 정찰기가 북한의 해안으로부터 1백93km 떨어진 동해의 상공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북한군의 미그-29기 2대와 미그-23-기 2대가 고속으로 돌진해왔다. 북한군의 전투기들은 조종사들이 서로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거리인 16m까지 접근하여 국제공인 수신호로 따라오라고 지시하면서 미군 정찰기를 끌어가려고 하였다.



이것은 미군 정찰기를 강제착륙 시켜 승무원들을 체포하려는 것이었다. 공포에 빠진 미군 정찰기는 필사적으로 기수를 돌려 그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미군 정찰기가 북한군 전투기를 발견한 시각부터 가데나 공군기지로 달아나려고 기수를 돌린 뒤에 북한군의 전투기들의 요격비행에서 벗어난 시각까지는 약 22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군의 대담한 작전이다.



북한군은 함경북도 동해안에 있는 어랑 비행장에 전투기들을 미리 배치해놓고 미군 정찰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고속으로 돌진하였다. 북한의 전투기들은 미군 정찰기가 비행하고 있었던 상공까지 약 2백km를 날아가서 22분 동안이나 요격비행을 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북한의 전투기들이 약 2백km를 날아가서 접근할 때까지 미군 정찰기는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을까?

북한의 전투기들이 어랑 비행장에서 발진하여 약 2백km를 날아가고 미군 정찰기의 주위에서 22분 동안이나 요격비행을 하였는데도, 미군기지들에서는 요격기가 단 한 대도 발진하지 않았다. 미군 정찰기는 위험을 느낀 순간 미군의 지상관제소에 비상연락을 취했을 텐데, 왜 아무런 비상조치가 없었을까?



북한의 전투기들이 미군 정찰기를 기만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다는 미군의 영공방어체계에서 치명적인 허점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만일 북한이 격추명령을 내렸다면 북한군 전투기들은 미군 정찰기를 격추한 뒤에 미군 요격기가 지상에서 이륙하기도 전에 유유히 돌아갔을 것이다.



둘째, 북한군은 공해상의 미군정찰기를 요격하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다른 나라의 항공기들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국제적 공중은 해안선에서 19km 떨어진 바다의 상공이다. 물론 미국은 자기 영토의 해안선으로부터 3백70km나 떨어진 바다의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에 대해서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만약 이를 거부하면 요격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도 해안선으로부터 2백km 떨어진 동해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미군 정찰기를 요격하려 하였다. 공해상의 미군 정찰기를 2백km나 달려가 요격비행을 하면서 강제착륙으로 유도하였던 북한군의 대담한 작전은 뭔가 일을 내기에 충분하다.



셋째, 북한군은 우유부단한 중국군과 다르다는 것이다.



2001년 4월 어느 날 미국 해군 정찰기 이피(EP)-3이(E) 한 대가 중국 해군의 소브르메니급 구축함 상공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그 구축함은 미7함대의 항공모함을 공격할 수 있는 위력적인 함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최첨단 구축함이었으므로, 미군 정찰기가 따라 붙었던 것이다.



미군 정찰기는 시속 2백50km의 저속으로 무려 1시간 동안이나 원을 그리며 비행하면서 마음껏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도, 중국인민해방군은 뒤늦게 에프(F)-8 전투기 2대를 출격시켰을 뿐 아무런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장에 날아간 중국 공군 편대장 조종사는 미군 정찰기에 바짝 붙어서 근접비행을 하다가 실수로 정찰기와 충돌하는 바람에 기체가 두 동강으로 쪼개져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중국 해안선으로부터 1백4km 떨어진 바다의 상공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미군 정찰기들은 중국 해안선으로부터 80-112km 떨어진 선을 따라 정찰비행을 계속해 오고있으므로, 중국군 전투기들이 미군 정찰기에 접근하여 비행하는 일은 거의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국군 전투기의 근접비행은 미군 정찰기에 대한 요격비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군 정찰기와 충돌하여 사망한 중국 공군 편대장 조종사는 몇 달 전에도 미군 정찰기에 바짝 붙어서 근접비행을 하다가 미군 정찰기의 사진에 찍혔는데, 그 사진에는 편대장 조종사가 자신의 전자우편주소를 큰 글씨로 적은 종이를 미군 정찰기에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촬영되었다.


그는 적기를 요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전자우편으로 미군들과 사적인 연락이나 주고받으려는 생각에서 무리하게 근접비행을 시도하곤 하였던 것이다.



자기 편대장의 전투기가 추락하는 현장을 목격한 다른 전투기의 조종사는 급히 지상관제본부에 연락하였다. 미군 정찰기에 대한 격추승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 지휘부는 격추승인 요청을 거부하였다. 미국에 대한 전투의지가 없기는 전투기 조종사나 지휘부나 마찬가지였다.



전투기와 충돌한 미군 정찰기는 하이난섬에 있는 중국군 공군기지에 허락도 받지 않고 불시착하였다. 그로써 중국은 자기 해군 함정을 정찰하다가 자기 공군의 전투기를 추락시키고, 자기 영공을 불법침범하고, 자기 영토에 불법착륙한 미군 정찰기를 압수하고 승무원들을 체포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토록 유리한 조건도 외면한 채 미국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중국이 자기의 눈치를 살피고 있음을 간파한 미국은 중국을 되레 압박하는 극히 오만한 자세로 나왔다. 미국은 하이난섬 부근 해역에 구축함 세 척을 출동시키고 나서, 중국에게 3만4천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요구하였다. 미국과 대결하려는 의지가 애초에 없었던 중국은, 미국의 사과도 받지 않은 채 정찰기에 탔던 미군 24명을 불과 11일만에 풀어주었고, 기체도 서둘러 반환하였다.



미군 정찰기가 자기 영공을 침범하였는데도 우물쭈물하다가 충돌하여 피해를 입고 위신이 추락한 중국인민해방군의 한심한 작전과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미군에 대한 북한군의 전투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북한군은 치밀한 작전 아래 대담하고, 강력한 전투의지를 보여 주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999년 미 국방정보국 국장 패트릭 휴즈는 '북한은 앞으로 다섯 해 안에 미국을 대규모 광역전쟁의 행동계획(large-scale regional war scenario) 안에 끌어들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로 남아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미국에 대한 대규모 광역적 재래전을 벌이려는 위협은 거의 제한되어 있지만 오로지 북한만이 예외가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북한군의 동해상의 미군정찰기 요격비행은 이라크 침략 개전 19일 전이었는데, 미국에게는 간담이 서늘한 경험이었고, 이라크전에 몰두하기에는 아무래도 뒤가 불안한 사건이었다.



분명 북한은 뭔가를 보여줄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최근 미국은 기를 쓰고 미 2사단이 후방배치 하려 한다. 우리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후방 배치하려는 이유는 북한이 뭔가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2사단은 북한의 좋은 표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2사단이 후방배치 한다고 해서 모든 표적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타격력은 미국본토에 까지 이르는데 그깟 후방배치로 모면하려 하고 있으니 미국이 얼마나 다급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현재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른바 '맞춤형봉쇄정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정책이 오래 갈것 같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이 정책이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끊임없는 북한의 크고작은 위협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이 한계에 다다르면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북미대륙이 파괴되는 대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는 군사권이 없는 관계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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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대수리 2009-04-03 11:14:00
    맞긴 맞는 얘기인데 빨리 화다닥 긑내버리구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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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놈 2009-04-03 14:34:20
    멍청아 글을 쓸려면 짧게 읽을수 있게 써라. 보지 않고 대충 댓글 달고 간다. 그렇게 할소리가 없냐? 시간이 그렇게 많아? 그럼 나가 일이나 해라. 그냥 국가에서 주는거 타먹을 궁리만 하지말고...북한은 그럴 능력도 없는 사회이거던. 괜히 꼼수를 써보는거고 잃을게 없으니 막나가보는것이고.
    너 말고 떠는 사람 아무도 없어. 북한이 뭐가 두려운게 있어? 뭐 지원해줄까 해서 미사일쏘겠다 핵무기가 있다 하면서 철없이 노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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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군조선 2009-04-03 18:52:27
    이글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05-01 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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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소문 2009-04-03 19:52:50
    별놈/보지않았다면서 왠욕? 좀 솔직하시지,원..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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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목 2009-04-03 21:15:54
    미국놈들은 망신을 해도 그게 망신인지 모르는게 제일 탈이거든.
    지금도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망신인줄 모르는겨.

    헌데 그런 망신을 대를두고 하면서도 나라를 견지 하니까 팔딱거리던 상대가 지능겨.
    김정일두 팔닥대다가 제김에 화가나서 뒈져 버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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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ㅋㅋㅋ 2009-04-03 23:01:47
    그냥 건드리지 말구 내버려 둬!~ 알아서 망하게!~
    망할 날도 멀지 않았다!~ 진짜로~
    괜히 꼴갑 떨면서 북한 몸값 올려주지 말구!~
    장문으로 북한에 대해 뭔가 썼어도 북한은 거지나라구 정권은 양아치정권이거든!~
    북한이 중국이나 쏘련에 쩔쩔 매는 것 봤음?
    못봤으면 말하지마!~
    미국과는 아직도 전쟁을 마무리 못한 적국이니까 그렇지 중국이나 쏘련에도 그럴까? 풋!~ 절대 못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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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Sandman 2009-04-04 11:16:15
    글쎄요. 제가 보기엔 북한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바퀴벌레가 자신 때문에 애먹는 집주인에게 이겼다고 의기양양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아무리 뭐라 해도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는 엄연한 현실이죠.
    다만, 대북 주민용 자위수단으로는 유용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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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하하 2009-04-04 17:03:34
    샌드맨님 비유가 넘 웃겨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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