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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옛날에는 어려웠다.
Korea, Republic o 한림거사 1 519 2009-12-09 12:41:43
저는 80년대 5공시절 대학시절을 보낸 소위 386세대입니다.70년대 박정희 정권때는 워낙 반공교육이 철저하여 저는 그때 북한사람은 머리에 뿔이라도 달린 도깨비가 사는 나라인줄 알았습니다.저만 그랬는게 아니라 그때 제또래 애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한국도 제가 어렸을때는 물론 제 윗세대는 더했겠지만 지금보다,훨씬 가난했습니다.제가 자란곳은 시골 면단위로 면소재지에서도 한참 멀었습니다.그래서 전기도 제가 국민학교(현재초등학교)들어가기전해 72년도에 마을에 들어왔습니다.그때는 그게 그렇게 신기할수가 없었습니다.매일 호롱불에 생활하다가 ,백열구의 그밝음 그때는 그게 너무 신기했습니다.나중에 안사실이지만 군대에 가서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산간벽촌은 75년도 까지 전기가 안들어 온곳도 있었다고 했습니다.주지하다 시피 전기가 없는 생활 지금은 상상이 안가겠지만 지금의 생활과는 거의 다른 19세기적 삶을 불과 우리는 40년전 한국의 대다수 사람이 그렇게 살아다는것입니다.저는 어릴때 국민학교 빨리 들어가고 싶었습니다.왜냐하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그것은 우리나라가 못살아서 미국에서 원조해주는 구호식량 이었던것입니다. 누나들이 학교에서 그걸 받아먹느걸 보고 어린마음에 너무 부러웠던것입니다.그러나 73년도에 제가 국민학교 입학하자 빵을 주지않았습니다.그때는 미국이 이제 한국이 구호식량을 줄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모양입니다. 그러다가 74년 8월15일 문세광의 육영수여사 저격암살사건이 터졌을때 TV를 보기위해 TV있는집에 모두몰려가서 보았는데 입추의여지가 없을정도로 많았습니다.우리마을이 60호쯤 되는데 TV있느집은 그때 3호 정도 였습니다.그때 우리집에도 TV가 없어 저녁때쯤 친구들과과 같이 마을에 TV있는집을 돌며"테레비 좀 보여주이소" 하며 외치며 다녔다.그러다가 그해 74년도 12월 우리집도 TV를 가지게 되었다 .그당시 TV한대 가격이 황소 한마리 가격이었다.그때 큰황소 한마리가 10만원정도 했는데 TV도 그정도 주고샀다,참고로 그때 당시 근로자들 한달 임금이 2만원 정도 했는걸로 안다.그러니까 당시 근로자들이 두세달 한푼도 안쓰고 모아야 TV한대 마련할수있는 정도였다.TV 들어올때즘 마을에 경운기도 이제 막들어 오기 시작했다,그래서 종전에 소들이 하는일을 경운기들이 하기 시작하면서 소들의 역할이 하나둘씩 줄어들었다.제어릴때는 경운기가 보급되기전에는 가을에 벼를 낫으로 모두베어 내어 말리고 그다음 모두 짚으로 한움쿰씩 묶어 소가 끄는 달구지에 모두실어 집 마당에 실어 옵니다. 그다음 바로 밟는 탈곡기가 있는데,이걸 성인 두사람정도가 발로 밟으며 탈곡 합니다.우리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볏단을 날라 줍니다.그러면 벼낟알은 마당에 떨어지는데 이걸 주어서 또 풍구에 넣어 나락과 돌을 어느정도 골라 냅니다.그래서 다음해 종자벼와 한해 먹을 거 빼고는 정부에 판매합니다.당시에는 벼도정이 지금과 같이 기술이 좋지 못해서 밥에 돌이 많았습니다.그래서 어머니들이 밥할때 항상 복조리로 쌀을 이어 했지만 그래도 가끔 돌이있었습니다.그리고 그때는 쌀이 부족해서 정부에서 절미운동 하라고 하고 해서 어머니들이 쌀을 조금씩 단지에 모으도록 정부에서 독려했느것같았습니다,그리고 위생상태도 좋지않았는지 학교에서 변을 채취해오라고 해서 변검사후 회충 요충 약을 학교에서 주었는데,당시는 충이 몸속에서 녹아나오지 않고 죽어 그데로 변에 섞여 나오는데 허연 지렁이 같이 내 배속에서나오는게 신기했습니다.그리고 목욕을 자주하지않아서 학교에서 때검사도했습니다.목욕시설이없으니 당연히 못하지요그리고 쥐들이 많아서 위생상 그리고 우리의 식량을 먹어 치운다고 해서 학교에서 1인당 쥐꼬리를 2개씩 가져오라고도 했습니다.또 학교에서 잔디씨를 가져오라고도 했고,겨울에는 난방용을위해 산에 학생들을 나무하러 보냈습니다.그리고 혼분식 장려운동이라고 해서 쌀밥을 도시락 사오지 못하게 했습니다.안그래도 평소에는 쌀밥먹기가 어려웠는데 그운동하니까 모두동참했는데,점심때 선생님이 도시락검사를 해서 쌀밥사온 아이들은 벌을 받았습니다.당시 도시락을 보면 빈부를 알수있었습니다.부자집아이는 보리보다 쌀비율이 높았지만 못사는 아이들은 밥이 거의보리밥이였습니다.그래서 아예 까많게보였습니다.그래서 우리끼리 오늘은 얼마나 하얗게 밥싸왔니 했습니다.쌀비율이 높을수록 하얗니까요.하여튼 당시에박정희정부때는 정부의 지도 감시 간섭이 많았습니다 당시 형님이 읍내에 갔다가 경찰에게 잡혀서 머리를 깎이고 왔습니다. 경찰의 두발단속에 걸린것입니다.또 난방은 70년대들어오면서 시골도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엇는데 연탄가스로 많이 죽었습니다,그때는 보일러가 아니라 그냥 나무때던 온돌아궁이에 연탄으로 교체했는것이였는데 부실한 아궁이로 인해 내주위에도 많이 죽었습니다.그래도 70년대 까지는 시골에 연탄때는것보다 나무로하는게 많았습니다,그래서 항상 산에 나무가 부족하여 면에선 산에 나무 못하도록 감시하고 단속했습니다.그러다가 저는 78년도에 대구 유학왔는데 당시 우리반에 집에 전화있는사람 손들어라고 하니까 반정도가 손들었습니다.그러니까 대구가 대도시인데도 전화 보급은 반정도 밖에 안됐다는것입니다.참고로 우리집 시골에는 85년도에와서야 전화가 들어왔습니다.그러니까 우리집 을 기준으로 볼때 72년도에 전기가 들어오고 74년도 TV 경운기샀고 75년도 전기밥솥 선풍기 연탄 사용 마을버스 78년도 냉장고 사용 85년도 전화설치 화물차 입식부엌 칼라TV 89년도 상수도 기름보일러사용 92년 삐삐사용 95년한옥에서 양옥2층집으로 휴대폰사용 2000년 컴퓨터구입및 인터넷 승용차 2002년 고속인터넷 도시가스 2009년 LCD40인치 디지털TV및 5.1홈시어터 노트북 1000만화소급디카 네비게이션 제삶이 이렇게변햇습니다.전기가 안들어오는 어릴때 소년이 지금은 노트북으로 이렇게 글을쓰고있습니다,즉 제나이 44세인데제가 경험한 한국이 이정도인데 제아버지 세대는 말해 무었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밥은 굶어본적은 없습니다,보리밥이지만 그래도 양껏먹었습니다.아마 우래세대 는(저는 촌에서 자라서 도시는 다를수도 있습니다)아마 저와비슷했을겁니다.우리 아버지는 제일싫어 하는게 죽이라고했습니다.젊었을때 너무많이 죽을먹어서랍니다. 아버찌때는 식량이 부족해서 항상 배를 골았다고 했습니다.참고로 제 아버지는 1929년생입니다.그리고 제주위 선배와 형들 이야기를 종합해볼때 한국의군대도 80년대 초까지만해도 일부 부대는 충분한 밥을 군인에게 제공하지않았다고 하더군요,80년데초에 군에 있었는 제선배는 군대에서 제일 참기 힘든게 배고픔이라고 했습니다.저는 86년도에 군에 갔는데 그런일은 없었습니다,제친구들도 그런얘기가 없는걸 보면 한국도 80년대초까진 군대도 식량이 좀 모자란것 같군요.참고로 한국이 쌀 완전히 자급 달성했던해가 78년도 입니다. 제가 경험했던것인데 북한의 동포들도 이글을 읽고 용기를 내었으면 합니다.제가 알기론 70년대 초까지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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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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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둘기야 2009-12-09 13:45:50
    한림거사님...살아오신 길을 차분히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북한동포들을 걱정해주시는 마음도 더없이 고맙구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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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겐 2009-12-09 16:22:36
    요며칠 같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림거사님은 저보다 한해 빨리 군에 입대 하셨고.

    이글에 제가 더하고 싶은것은 지금 북한의 현실입니다. 어릴적 동네 사람들 그리고 우리집도 날잡아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가서 나무도 해오고 각종 풀들을 해가지고 오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저녁이면 방에 불을때면서 감자도 구워먹고 메투기도 구워먹고 개구리 다리도 구워먹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북한의 생활을 알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산에 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방 근방에서도 사람이 닿을만한 곳은 산에 나무가 없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전방뿐만이 아니라 전지역이 산에 나무가 없습니다.

    중국 국경지역에서도 만찮가지로 산에 나무가 없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현재 북한의실상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북한동포들은 겨울에 어떻게 살까요????

    지금 북녁동포들은 남쪽에서 경험하지못한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우리가 3백만이 굶어죽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경험해 보지 않는이상 알수 없습니다.

    캄보디아의 폴포트라는자가 킬링필드의 주역입니다. 킬링필드 150만 학살입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저들의 경제는 무너졌습니다.

    북의 군대가 그나마 온전하다고 보는데 그 군인들이 일어나야 할것 같습니다. 3대멸족 조선시대에도 3대멸족이 있었지만 지금 북한과 같을까요?
    아. 북의동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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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 2009-12-09 17:05:30
    한림거사님의 글이 지난 제 어릴적 추억을 고스란히 옴겨노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아픔이 아닌 추억은 지금의 풍요 때문이겠죠.
    아버지하고 소나무 갈비(소나무 잎)를 지게에 한 짐 지고 집으로 올 때의 뿌듯함이란....ㅎㅎ
    지금 보다 오히려 그 때(70년대)가 정신적으로는 지금 보다 더 풍요로웠다는 생각입니다.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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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로주점 2009-12-10 01:47:59
    밀가루도 아닌,밀방아 찧고 나온 밀껍질(밀기울)빵이 별미인지 알았습니다.
    미국의 원조분유를 물에 개서 밥솥에 얹어 쪄낸,이빨도 안들어가는 돌같은 것도 별미로 알았습니다. 지금은 강아지도 먹을까 싶지 않은 한 주에 2번 나눠주는 옥수수빵도 차마 먹지 못했습니다. 집의 동생들 생각에 귀퉁이 야금야금 떼 먹고 집에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마저도 귀가 길 타동네 앞을 지날 때 힘센 '노상강도(중학교 진학하지 못한 선배들)'들에게 몇 명은 빼앗길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한참 성장기에 원조 밀가루,옥수수,분유가 아니었다면 키가 지금보다 반뼘쯤은 덜 컸을 것 같습니다. / 우리들의 넉넉한 식량을 저 너머 북녘 어린아이들에게 고루 나눠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슴이 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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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웅 2010-03-09 19:57:45
    남한과 북한의 차이는

    단하나 박정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지

    ~ 나도 국민학교 다닐때 북한 사람을 뿔달린 사람처럼 그렸지만

    사람이 실제 그렇게 생겼다고는 생각 안했는데?

    북한 사람들이 뿔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었는데? ~~국민학생들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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