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과 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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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과 의리 지구촌의 유일한 공산국가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한 마디로 폐쇄된 국가,인권이 열악한 불모지라고 인식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대체 그들에게 초보적인 인간의 기본이 갖추어져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의리와 양심은 무엇인지나 알고 있는지 만일 안다면 어느 정도인지 그 가지 가지한 사연을 알자면 무엇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 나는 오늘 그 물음에 대답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00년2월 중순 어느 날. 매섭게 불어오는 강추위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며 한 시골마을의 굴뚝들에서 하얀 연기들을 분출시켰고 그 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괴롭히지 말라며 찬 공기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북한에서 강아지 두 마리를 도강으로 가져와 팔고 중국 돈으로 70위안을 받고 다음날 이른 새벽에 떠나기로 하고 머물기로 했던 중국 길림성 왕청현 XX향 XX촌의 조선 족 주인집으로 하루 일을 끝내고 동네 어르신들이 마실 이를 와서 입담을 늘여 놓고 있었다. 주인집 부엌에는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펴 구들장을 뜨겁게 달구어 훈훈한 방안의 온도가 얼어붙은 창문의 서리꽃을 녹여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티브이에서 나오는 윤도현의 노래는 힘들게 하루 일을 마친 인간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약이 되어 서로의 마음을 각이하게 파고들었다. 하얀 회칠을 한 벽에는 여러 모델들의 포즈를 취한 모습을 담은 CF사진들이 붙어 있어 북한의 우리 집과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그런 곳에 14살의 어린 더벅머리 총각이 40대 아줌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14살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작은 체구에 뽀얀 피부를 가지고 머루 알 같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누워있는 그를 나는 그 아줌마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다. “삼춘, 내일 조선으로 간다고 하던데 진짜로 가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조선족 아줌마가 나에게 물어 보았다. “네, 내일 아침 일찍이 떠나려고 합니다.” 나는 아줌마가 느닷없이 물어보는 것이 궁금하였다. “그러면 이 애를 두만강까지만 같이 건네다 주면 안되겠소?”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잠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러니 그 아줌마가 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사실은 이 애가 내 아들이 아니라 조선에서 먹을 것이 없어 두만강을 건너 온 애라오. 이 불쌍한 것이 글쎄 아버지가 굶어 죽는다고 만나려 가겠다질 않소. 나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나 있는지?” 그 아줌마는 근심절반 기대절반이 담긴 어조로 조용히 말하였다. 옆에 있던 어르신들도 혀를 찼고 모두가 나의 행동과 말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싶었다. “야, 너 진짜 강 건너에서 왔니?” “네” 그 애가 아줌마의 무릎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대답하였다. “집은 어데냐?” “고무산입니다.” “그래 엄마는 없냐?” 내가 재차 물어보자 갑자기 그렇게 당돌하고 초롱초롱하던 그의 눈에는 수정보다 맑은 이슬이 맺혀지며 목이 메어 부르다시피 하는 소리가 나의 가슴을 허볐다.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혼자 계시는데 나는 이렇게 이밥에 고기 국을 먹어도 날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울자 그를 거두어주던 조선족아줌마도 같이 울면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동네 어르신들도 손등으로 눈 굽을 찍으셨다. 모두가 김정일이 죽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고 나도 어쩐지 그 모습을 보고 있을러니 너무도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아빠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호소하는 그 앞에 뭐라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업고서라도 데려다주고 싶었다. 그런데 보다시피 나에게도 사랑하는 처자식이 배고픔에 허우적거리며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고 또 내가 가는 도강 길은 중국 변방대의 검문소를 피하며 백두의 험준한 산발을 60킬로미터나 타야 했으며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얼지 않는 샘물줄기가 많은 압록강지역을 넘어야 하고 조밀한 국경수비대의 총검의 숲을 헤쳐야하는 사선의 길이었으니 대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이렇게 눈물로 세월을 보냅네. 그 아버지를 데려 왔으면 한 시름 놓으련만.” 아줌마의 한 숨이 섞이고 떨리는 목소리. 이런 근심까지 하며 서로의 의견을 터놓는 그 자리를 보고 나니 그 아이와 아줌마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은 참 좋은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런 좋은 분들에게 기쁜 결심을 내리지 못하는 나의 무능한 처지를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들어가고픈 생각뿐이었다. “안됩니다. 내가 가는 길은 장담 못하는 길이어서 책임을 지지 못하겠습니다. 가다가 잡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이 많아 경비대 녀석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좋으련만 그러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 애에게 말을 하였다. “사내 녀석이 눈물이 많으면 안 돼? 그리고 좋은 아줌마와 집을 만났으면 여기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공부도 하고 열심히 살아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때 아버지를 만나러 가자. 아직은 너무도 어려.” 나는 이내 결심을 그치고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그런데 그 녀석은 나의 말에 가슴이 더 아팠는지 소리 내어 크게 울며 끝내 집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가 문을 열자 쌀쌀한 밤의 찬 공기가 방안의 더운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뜬 김이 되어 우리들의 얼굴을 때렸고 하고 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나는 그 다음날 나의 결심대로 움직였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다시 그 곳으로 가보니 조선족 아줌마는 나의 팔소매를 부여잡고 울면서 말하였다. “삼춘, 불쌍한 XX이를 살려 줄 수 없소? 그 애가 삼춘이 가고 며칠 있다가 계속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여 돈 양백원(2백 위안)에 사탕, 과자, 등 14근(7킬로 그람정도)을 배낭에 메어 보냈는데 여태 소식이 없질 않소. 어떻하면 좋소.” 아줌마는 나의 잔등을 손으로 때리면서 마치 자기의 잘못인양 울부짖었다. 사실 그 아줌마의 살림에 200위안은 큰돈이었다. 자그마한 왕청의 산골에서 농군들이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농사를 해도 1만 위안을 손에 쥐기가 쉽지 않았으니 더 말해 무어하랴? 그런데 그 돈을 200위안씩 주었다니 나도 놀랐다. 나도 사실 수 십 번 밀수를 하였다만 그렇게 큰돈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못 죄책감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가 어리광으로만 그때 나에게 한 말 같았다. 나는 부모가 새끼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쳤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새끼가 부모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쳤다는 얘기는 별로 듣지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보고 싶었다. 또 그 어린 것이 제발 무사하기만을 마음속으로 학수고대하였다. 나는 조선 족 아줌마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지 아무런 말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이 아줌마도 그러고 보니 마음 하나는 비단이었다. 남의 자식을 그렇게 몇 년을 키워온 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살아 온 25년의 역사가 말해주었다. 그 아줌마에게는 자식도 있었고 남편도 있었다. 그러면 과연 그 어린 것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가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가다가 국경경비대 녀석들에게 잡혀 돈도 다 빼앗기고 배낭에 메고 갔던 2킬로 그람의 쌀과 아빠의 입에 자기 손으로 직접 넣어 주겠다던 사탕, 과자도 다 빼앗기고 자동소총의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머리가 두 곳에나 터졌으며 보위부와 안전부 유치장에서 인간이하의 천대를 받다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관대히 용서받아 집으로 석방되었으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빠는 그리운 새끼를 잃은 설음에 심화병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고 그의 집에는 밥그릇 몇 개와 숟가락 몇 개 그리고 먼지만 소복이 쌓이고 겨울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소를 기르는 것과 같은 방이 전부였다. 그렇게 꿈결에도 부르고 부르며 달려가 안겨 온갖 설음을 다 토로하고 싶던 사랑하는 아빠의 시신이 묻혀있는 믿기지 않는 묘소 앞에서 사실 아닌 참담한 현실 앞에서 그 어린 것이 고사리 같은 주먹으로 아빠를 두드리며 피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만 하는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도 모두가 눈물을 흘렸었다. 모든 탈북자들이 알다시피 함경도에서도 고무산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고장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무산령과 차령이 동쪽과 북쪽을 가로 막았고 땅이 척박하며 시멘트가루밖에 날아다니는 것이 없는 그 곳은 힘없고 가난한 인민들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철창 없는 감옥이었다. 그러니 그 어린 것이 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높고 높은 함경산맥의 정상에 올라서서 저 멀리 바라보아도 도무지 그가 살아가야 할 고향집은 보이지가 않았다. 엄마 손 잡고 아빠어깨에 목마타고 노래 부르며 뒹굴던 하얀 백 살구꽃이 피던 그 집은 더는 그에게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린 것이 다시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어 조선족아줌마에게 찾아 왔으며 끝내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게 되는 행운을 안았다. 작년에 그 조선족아줌마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큰 병원에 입원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기로의 갈림길에서 헤맬 때 그 어린 것이 미국에서 중국 돈으로 2만 위안을 보내 아줌마남편의 심장병을 수술하고 병을 완쾌시켰다. 그 아줌마가 그의 아빠에게 주라고 하던 200위안이 2만위안이 되어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미국은 북한 사람들을 받으나 대한민국처럼 정착금이나 다른 혜택이 많이 없다. 그런데 그 어린 것이 자기의 생명의 은인을 잊지 않고 스스로 아르바이트로 식당일을 해가며 모은 돈을 보냈을 때 조선족 아줌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세계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 들이여! 어디 한번 대답 좀 해보시라. 과연 이런 사람들이 부모에게 바치는 효성과 의리가 없어보이시는지. 그런 사람들이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쓰레기들인지를. 지금 그 더벅머리 총각이 오늘은 키가 1미터 75센티미터를 넘어선 미남으로 미국의 시민으로 억세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북한 땅에서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의 기본이 무엇인지는 안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은 의리도 없고 신용도 없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북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리와 신용에 대하여 알고 싶고 물어보고 싶거들랑 이 나라의 압록강과 두만강에 가서 물어보라.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오늘도 그 자태와 위용을 만천하에 과시하며 넓고 넓은 대양으로 거침없이 흐르는 한 반도의 장강들은 거짓을 모른다. 그 장강을 한갓 흥취로 보지 말고 물가의 조약돌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의리와 양심, 신용을 느껴보시라. 그 장강으로 어제는 영철이가 자기의 여자친구를 데려오려고 하다가 국경경비대 군사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오늘은 영옥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과 형제들을 먹여 살리려고 서슬 푸른 두만강에 자기의 몸을 밀어 넣었다가 식량을 멘 배낭을 그대로 지고 저 멀리 대양으로 떠내래갔음을 자자구언 다 말해줄 것이다. 한 번은 우리 동네로 함흥에 사는 30대의 아줌마가 1월의 강추위를 뚫고 압록강을 넘어왔으나 험준한 산발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경비대 녀석들에게 잡혀 가져 온 식량과 옷가지들을 다 빼앗기고 반 주검이 되어 안전부유치장에 실려 왔는데 발에는 동상까지 입어 피부내하 괴사 병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경험이 없다보니 맨발로 강을 건너오다가 강기슭에 얼어붙은 얼음을 발로 밟은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물속에서는 강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피부는 절대로 얼지 않는다. 그러나 그 피부를 노천에 드러내고 얼음판을 딛고 서면 피부가 얼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급한 마음으로 그냥 나오면 그 순간부터 동상이 온다는 것을 초보 도강 생인 그 아줌마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한쪽에서는 총을 든 건강한 사내들이 이리떼처럼 먹이 감을 노려보고 있는 양육강식이 존재하는 삶과 지옥의 현장에서 적수공권의 여성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물어보지 않고도 빤한 일. 그 아줌마가 4살 된 아기를 업고 중국으로 건너가 어느 한 산골 막에서 7명의 중국인들의 성 노리개로 하룻밤 온갖 치욕을 다 겪고 그 곳에 아기를 인질로 맡기고 간신히 얻은 몇 킬로 그람의 식량과 옷으로 두고 온 남은 북의 자식과 남편을 먹이겠다고 강을 넘어왔다가 그 길이 결국에는 아기는 아기대로 잃고 매는 매대로 맞고 가져온 물건은 다 빼앗기고 자기 고향에 두 다리 없는 범죄자로 쇠고랑을 차고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의 뼈에 사무친 원한에 압록강의 산천초목도 자기의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보위부 녀석들이 그 아줌마의 얘기를 하면서 “갈보 같은 년” “더럽고 너절한 인간쓰레기 같은 년” “조국과 민족반역자년”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개기름이 번질번질한 낯짝에 흉물스러운 웃음을 띠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여리고 여린 그 불쌍한 아줌마에 대한 동정심에 가슴속에는 피눈물이 흘렸었다. 그러면 그 아줌마는 과연 법관이라고 자처하는 보위부 녀석들의 말대로 의리도 신용도 양심도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북한 사람들이 김정일에게 다 빼앗기고 가진 것이 빈주먹밖에 없다고 의리와 신용까지 하나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최고 극치에 달하고 있는 북한 회령 시 사월 리에 있는 제 2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자행된 독가스실험 현장을 우리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하자. 3평도 안 되는 유리관 속에 나체의 몸으로 4명의 가족을 가두어 놓고 천정 위 파이프 관으로 독가스를 살포하자 불과 2분도 못되어 사람들을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빠가 아들을 엄마가 딸을 부여잡고 자기들의 마지막 산소마저 새끼들에게 불어 넣어 주었다. 실신해가며 하나하나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사, 박사, 학사라고 하는 자들은 “나쁜 놈들도 새끼에 대한 정은 있구나.”하면서 서로 혀를 차며 기겁을 하였다. 비록 칼날을 부여잡은 그들이 온 몸이 베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 참다운 의리와 항거 앞에 인간 식인종들도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자기를 가동시켜 어두움을 몰아내는 해 빛, 온 우주를 찬란하게 비쳐주어 생명을 자라게 하는 햇살, 불덩어리의 에너지로 오늘도 새날을 밝혀주는 저 하늘의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어리석은 김정일 악당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릴 그 위대한 신념과 의리, 항거의 힘을 세상은 그 무엇으로도 꺾지는 못할 것이다. 그 힘을 우리의 후손들은 역사에 두고두고 기록할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대답하고 싶다. 사람들이여. 쉽게는 말하지 마시라. 의리와 신용에 대하여. 그 것이 북한인들에게는 얼마나 비싼 대가를 바쳐 얻을 수가 있는지를 감히 말하지 마시라. 수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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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4-22 14:14:54
그들을 하루빨리 구원해야겟다는 결심을 굳혀주어 감사
앞으로도 이런 좋은 글이 많이 올라 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의미 있게 읽고 또 읽어 봅니다..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4-22 14:14:01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해서 모르는게 아닙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또 살아서 나온 사람들도 몇십명이나 됩니다.
글쓴 사람이 돈이 없어 썼을까요??
친척이 22호 관리소장이래서 당신도 다 아는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인권유린 국가의 한 수전노 일 뿐이에요
사람을 돈으로 치부하면 아니되지요
왜 글쓴이에 대해 분노하세요 혹 사람을 수용소에서 죽여본 경험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면 봤어요??
같은 민족으로써 돈으로 사람을 치부하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라와 불쌍한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민족과 그 사람들도 사랑하고 궁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참고로 그 곳에서 경비병을 하던 안명철씨가 쓴 책 "완전통제구역"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북한 간첩은 아니시겠죠. 부디 몸 건강하시기를
이거 국정원에서 아이디검사해가지고 아직도 국민들 세금으로 살아가는 빨갱이 새끼들은 선별해서 배때기 꺼지게 만들어줘야 하는데.
참 자유민주주의 좋다. 빨갱이 새끼들이 간이 부어 돌아다니니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0-04-16 23:10:51
대중이 숭배하는 라도것들.
기필코 다가올 그날에는 면상에다가 가래침을 뱉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