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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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어떤 모양으로든 살아남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2010년 03월 25일 (목) 14:14:16 뉴스코리아 qor829@naver.com 어떻게 그토록 친절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 가난에 시달리고, 당장 내 입에 넣을 것도 없어서 타인에게 물 한 모금 제대로 권해본 적 없는 나는 중국에서 만난 몇몇 친절한 분들을 신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움을 품고 또 다시 떠났다. 끝이 없지만 걸어야 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우린 계속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의 세 번째 목적지는 조선족 형제가 살고 있는 산골 집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추수와 여러 가지 집안일들을 도울 것이고, 돈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약초도 캐고 장작도 장만하게 될 것이다. 열심히 걷고 또 걷고 어느덧 한 낮이 지나고 석양을 등진 저녁이 되었다. 이젠 사실 더 이상 지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몸은 지치고 발바닥이 부어서 땅을 디딜 때 마다 간질간질하다가도 아프기를 반복했다. 주름이 많이 늘어 보였던 엄마 얼굴에는 차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마음이 어려 있었다. 힘내라는 말,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그리고 꼭 함께 살아남기를 원한다는 수많은 마음들이 내가 본 몇 가지의 표정에 그대로 어려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이었지만, 살아내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고, 괴로움이고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어린 동생은 먼지가 뽀얗게 들어 찬 귀 바퀴를 만지작거리면서 아직 멀었냐고 중얼중얼 거리면서 힘겹게 걸었다. 눈동자에는 오래 참아 온 13살 아이의 힘겨운 눈물이 보일 듯 말 듯 고여 있었다. 잠시 안아주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 보였던 사랑하는 동생의 힘들고 지쳤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지치고 힘들었지만 동생의 힘겨운 걸음걸이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한창 어리광 부릴 동생, 따뜻한 온돌방에서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할 동생, 탈북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나 어린 동생이었다. 그래도 한 번도 투정부리지 않고 잘 걸어주고 견뎌 주는 게 고맙고, 참아내는 눈물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다리가 뒤틀리고 수번을 넘어질 뻔 하고, 신발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멀리 보이는 불빛이 어서 오라고 반겨주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하루가 그렇게 힘겹게 지나갔고, 이젠 어색함 없이 느껴지는 중국 조선족 아저씨 두 분이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가족은 하루 종일 걸어서 흉하게 부은 다리들을 보면서도 또 하루를 살아낸 것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다리가 쑤시고 골반은 어디에 맞은 것처럼 아파왔다. 가족들은 진통제를 먹고 한참이 지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아직은 고향에 대한 마음이나, 두고 온 친척, 가족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하룻밤 머물 곳이 필요했고, 우리 가족의 한 끼 식사를 위한 일감이 필요했다. 우리에게는 어떤 모양으로든 살아남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무섭고 으스스한 골짜기에 짙은 어두움이 덮이고 오른쪽 팔에 느껴지는 엄마의 체온과 왼쪽 팔에 느껴지는 사랑하는 동생의 체온이 나를 안심하고 잠들게 했다. 그날 밤 나는 멋진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신기한 나라에 내가 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온통 아름다운 조명들이며 도로에는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고, 여기저기에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본적 없는 곳이었지만 꿈속에서는 내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꿈 인줄도 모르고 이젠 걱정 없이 살아갈 것 같아서 행복해 했다. 아침이 되어 꿈에서 깨었을 때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도 또 다시 자유롭게 걷고 싶고, 꿈에서처럼 누군가와 재밌게 얘기하고 싶었고, 따뜻하게 새어나오는 불빛 중에는 우리 집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한번만 더 꾸고 싶은 행복한 꿈을 꾸었다. 뉴스코리아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코리아(http://www.newskorea.info)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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