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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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이 허망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현실은 사악했다. 2010년 03월 30일 (화) 11:22:41 뉴스코리아 webmaster@newskorea.info 눈을 뜨니 벌써 한적한 골짜기에 아침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지내야 될 거라고 주인아저씨가 무겁게 입을 여셨다. 밤이든 새벽이든 공안대가 마구 들이닥친다고 하셨다. 글쎄...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도록 등골이 오싹했지만, 갑자기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무섭고 긴장되지만 우리는 정작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주인아저씨는 또 한 번 무겁게 입을 여셨다. 우리 가족을 집에 들였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처벌이 있을 수도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어디 갈 데도 없는 사람들을 내보내기도 딱하고, 언제까지라도 데리고 있자니 본인도 위험하고, 정말 마음이 어렵다는 속사정을 얘기해주셨다. 우리는 곡식을 넣는 창고에서 잠을 자더라도 당장은 어디로 나갈 곳이 없다고 통사정을 했다. 사실 엄마와 새 아빠가 중국에서 알고 지냈던 분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그곳에서 나가면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위험을 무릎 쓰고 우리가족을 집에 들여놨으니 열심히 추수를 도와달라고 했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몰랐던 우리가족은 당장 어디가려고 해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런 식으로라도 우리를 머물게 해주는 주인아저씨에게 감사하기만 했다. 우리는 주인아저씨가 혹시라도 우리를 떠나라고 할까봐 채 밝지도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집안일이고 들일, 그리고 텃밭이며 곡식밭의 모든 일들을 도맡아 했고, 13살 어린 동생까지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송아지 방목을 도맡아 했다. 잡초사이에 움츠리고 앉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꼬맹이 동생은 며칠 사이에 손톱사이에 까맣게 가득 찬 때는 아랑곳 않고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밝고 신난 표정이었다. 동생은 자기가 왜 갑자기 학교로 갈 수 없는지, 왜 종일 송아지를 돌보고 있는지, 가족들이 왜 하루 종일 허리한번 못 펴보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동생은 그곳이 우리 집이라고 착각 했을 것이다. 하루 이틀은 열심히 일하고 힘든 줄도 몰랐지만, 하루에 4시간씩 자는 것, 식사하는 시간 말고는 종일 일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옥수수 밭에는 하루 종일 입들을 꾹 다물고 일만 하는 우리 가족뿐이었고, 언제쯤 그 밭의 추수가 끝날지 의심스러웠다. 종일 일을 해도 별로 티도 안날만큼 엄청난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딱히 소망할 것도 꿈 꿀 것도 없는 힘겨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언젠가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도, 의사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희망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날이 밝았을 때 주인아저씨에게 떠나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스럽게 느꼈다. 열심히 추수를 도와드렸지만 주인아저씨의 불안은 날마다 더해만 갔고, 날씨도 제법 쌀쌀해지는데 가끔씩은 불편한 심정을 표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엄마는 손끝이 다 갈라지도록 일 하시면서도 밝은 표정을 유지하시느라 애쓰셨다. 그 누구보다 엄마의 표정은 힘겨웠지만 참고 있는 슬픔과 힘듦이 애써 지어보이는 미소에 다 어려 있었다. 새벽에는 주인아저씨들과 가족의 식사를 위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셨다. 가끔씩 불이 켜지지 않은 방에 힘들게 일어나는 엄마 몸이 푸르스름한 창문 빛에 비쳐 보였다. 해보진 않았지만 그때 엄마의 등을 꼬옥 안아드리고 싶었다. 엄마의 좁은 어깨가 감당하기에는 타양에서 우리 가족의 삶이 너무 많이 무겁지 않았을까 싶다. 주인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혹은 원하는 것 이상의 일들을 했다. 가축이며 가사며 농사일까지 하느라 엄마는 눈물이 날 정도로 지쳐보였다. 언제쯤이면 이 고생이 끝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우리 엄마가 남의 집에서 눈치 보면서 아침밥을 하는 날이 끝날 수 있을까, 나는 새벽녘 엄마의 뒷모습에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날이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이 허망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현실은 사악했다. 관련기사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1)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2) · 17세 소녀의 탈북이야기(3) · 17세 소녀의 탈북이야기(4)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5)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6)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7)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8)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9) · 17세 소녀의 탈북 이야기(10) 뉴스코리아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코리아(http://www.newskorea.info)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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