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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탈출(10)
Korea, Republic o 백심 1 1235 2010-12-22 01:19:19

5. 선택

 

나는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결코 이번 사건은 조용히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더구나 내가 주모자라서 죄가 제일 엄중하다. 영웅이 되어 부모님께 제대되어 가려던 꿈을 더는 이룰 수가 없다. 저 넓은 하늘로 억세게 날아보자던 어릴 적 꿈을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

소중히 간직했던 꿈마저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로는 지나온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하나하나 떠올랐다.

.....

무엇보다 먼저 7형제를 둔 어머니가 모자라는 식량을 해결하려 봄이면 산으로 올라가 종일토록 땀 흘리며 나물을 뜯어 오시고 여름이면 뙈기밭에서 잡초를 매시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자라나는 사내자식들 때문에 가난은 절대적으로 피할 수가 없는 우리 집었다. 거기에 앉으면 책으로 세월을 보내는 선비와 같은 아빠의 모습에 늘 밤마다 혼자 옷고름만 적시던 나의 어머니다. 그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5살 되던 해, 나는 너무도 쌀밥이 먹고 싶어 남의 집 밥상 밑을 기어 다니며 방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다가 간염에 걸려 병동에서 10여 일 동안이나 입원하며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오늘이면 올까? 내일이면 올까? 고사리 같은 손을 입에 물고 눈만 뜨면 어머니를 찾아 병동 울타리 대문에 기대여 면회 오기만을 눈물로 손꼽아 기다렸다.

 

또, 밥 가마에서 어머니가 그릇에 밥 담을 때면 배추시라 지를 넣은 옥수수밥이 먹기 싫어 쌀밥인 아버지 것을 먹겠다고 생떼만 썼다. 그러던 철부지가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밖으로 놀려나가면 사탕 한 알 변변히 먹어보지 못해 친구들의 사탕을 얼려 먹으려 온갖 감언이설로 설쳐댔다.

 

초등학교 때에는 기계공장 사장의 아들인 석철과 친구가 되어 학교로 갈 때면 간부집인 그의 집에서 아침마다 쌀밥에 굽은 생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먹는 것이 부러워 눈요기라도 하려 찾아다니던 나였다. 그러면서 가끔 특별 식이 있으면 석철의 엄마가 조금이라도 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아편중독처럼 그 버릇이 떨어지지 않아 석철의 집으로 가는 걸음을 멈출 자신마저 없었던 내가 아니가? 어쩌다 석철의 엄마가 넌지시 뿌려주는 색다른 음식을 받는 날이면 너무도 좋아 속으로 나풀거리며 춤을 추군 하면서도 한 쪽으론 잘 먹고 잘 사는 그들의 모습에서 꼭 나도 커 간부가 되겠다는 야망으로 불타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아버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효자의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길로 가는 방법과 방향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물에 뜬 공기방울처럼 허구한 날, 멀쩡한 허우대를 가지고 허황한 공상에 꿈꾸어 왔다.

 

사실 초등학교로 다닐 때부터 간부선거에서 반장 자리 하나 얻지 못하면 통분하여 그 울분을 어머니에게 하소연하군 하던 나였다.

물러터진 건 그래도 홀아비의 무엇이라고 어머니밖에 스트레스를 풀 상대는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사내가 그만한 것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나는 네가 간부가 되지 않아도 아버지,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는 기본이 된 아들로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한 숟가락의 옥수수밥도 소중히 건사했다가 덜 배가 부른 자식을 찾아 입에 몰래 넣어주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선발된 우수한 상대들을 모두 물리치기도 했다. 그리고는 시에서 1년에 두 번 씩 진행되는 학과경연에 출현하여 1등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신분이 낮고 뇌물을 줄만한 것이 없어 당선된 도 수재학교에서도 밀려났었다. 그래서 도중에 포기했다.

공부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더럽게 어질러진 그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날 수가 없었다.

 

사회의 모순을 부모님의 성분으로만 거론하며 군대로 방향을 바꾸던 날, 어머니는 역전까지 나와 떠나는 나에게 꼭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 어머님의 모습에 각인되며 어쩐지 가슴은 더 미어져 버렸다.

 

그 누구보다도 불쌍하게 살아오셨던 나의 어머니, 고단한 인생길에 남은 것은 온 몸에 노련한 백정이 재주껏 솜씨를 발휘해 살을 발라도 몇 근 발라내기 힘들 정도로 뼈와 가죽만 남은 속 빈 수숫대처럼 깡말라 든 것이다.

 

나는 살아생전 어머니가 한 번이라도 쌀밥으로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더는 근심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한 갖 쇼에 불과하고 군대에 나와 2년도 못되어 출세의 길을 찾아 집으로 갔다.

 

집에서 어머니의 헐벗은 손으로 힘겹게 마련한 돈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여기며 중국산 가죽 잠바를 사 뇌물로 장교학교에 가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그렇게 갔다가 구실도 못하고 추방되어 내려왔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분으로 하여 팔자 탓으로만 여기며 앙갚음조차 모르는 채 죽는 날까지 자리만을 지켜야 하는 태성적인 운명계의 별이 되어 이 땅에서 신분의 부당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래서 부모님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또, 간부라고 우쭐대던 석철의 부모님들을 놀라게 하고 고향동네마저 놀라게 하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언제나 불안하게 밀려오는 미래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살아 온 발자치가 널브러져 허우적거리며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서민들인 우리네 삶이었다.

 

결국 지금에 와서 차례진 것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벼랑 끝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래도록 틀고 앉아 이런 생각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은 어쩐지 더 기가 막혔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뒤집어 놓은 거북이 같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개천에서 용 날 놈은 따로 있다더니 문득 나 같은 녀석은 올라갈 나무가 정해져 있다고 꼬집어 말하던 포병장교학교 8대대 보위지도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내가 미처 그의 말에 비친 모든 것을 읽지 못했었다. 그때라도 그의 말을 새겨듣고 시키는 일이나 하는 군인이 되었으면 아마도 오늘 같은 일이 없었을 거 아닌가?

 

누가 그랬던가? 부모님이 마음은 고생을 해보아야 그 소중함을 깨닫고, 사회악은 피부로 직접 부딪쳐보아야 그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어쩜 그 말들이 나를 두고 한 말들 같았다.

 

정녕 우리어머니가 바란 것은 간부가 아니었다. 그 것도 모르고 바보, 등신처럼 나는 이 순간까지 너절하고 허접한 간부가 되려 동분서주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통한의 장면, 장면마다 참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지나간 운명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순 없었다. 의지할 수 없는 위기상황을 과연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그러니 어떻게 하나 최후발악이라도 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할 때, 갑자기 이 세상이 더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다. 어차피 더러운 세상에서 더럽게 길들어진 인생, 어디한 번 더럽도록 반항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를 사려 물었다.

 

친구들도 외면한 마당에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오직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 것이 무엇이냐? 탈출이다. 그 것만이 기로에 선 내 운명을 건지는 길이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하면 새로운 세상을 내 힘으로 찾아 갈 수 있을까?

과연 간부와 상놈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저 대양너머에 있을까?

 

잠시 긴가민가해졌다. 하지만 이때 나의 머리로 문득 한국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어보이는 적국이 떠올랐다.

사실 대한민국은 나에게 있어 적국으로부터 더는 적이 아닌 한 민족으로 부각되던 때였다.

 

1988년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장에 동원되어 삐라를 받아보고 적국이면서도 가난과 굶주림의 나라로만 여겼던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페니실린보다 10배는 더 강한 항생제에 대한 소식도 그렇지만 삐라로 뿌려진 수많은 물자를 받아보고 눈과 손으로 직접 체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한국에서 뿌려준 비누와 치약 같은 기초생필품이 어느 날부터 군인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값어치로 등장했다. 그래서 모두가 몰래 감추어 놓고 썼다. 그러던 찰라 1986년4월26일 1시23분(모스크바 기준), 소련의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폭파에 대한민국 정부 급 인사들이 위문을 전달하는 삐라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소련으로 말하면 북한에서 국민 모두가 사회주의 왕초로 떠받들고 있던 나라였다.

 

1917년11월7일 페트로그라드의 니콜라예브스키 다리에 정박한 순양함 <오로라(러시아 발음: 아브로라)>호의 포성과 함께 동궁을 습격, 함락하고 러시아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레닌의 의해 지구촌에는 공산사회가 들어앉았다. 그런데 그 사회가 인류의 예상을 뒤집고 자기들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려 힘으로 나섰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후 지구촌에는 미국과 대등한 냉각구조가 형성됐다.

 

약삭빠른 김일성은 그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그들의 힘을 빌려 무분별한 6.25전쟁까지 일으키며 민족의 분열마저 고착시켰다. 그러던 소련을 가난한 국가가 원조품까지 주며 화해하는 모습은 나에게 있어 경악, 그 자체였다. 점차 이 나라의 운명은 남한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결국 북한이 하늘처럼 믿던 소련은 붕괴되고 한국의 위상은 더욱 부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삐라를 통해 모처럼 대한민국의 애국가와 태극기에 관심을 가졌다.

 

적국이라는 그 나라의 깊이를 알기위해 남몰래 머릿속으로 그려 넣고 말았다. 그때는 어쩐지 태극기의 깊이에 대해 다는 알지 못해도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의 전통상징인 흰색바탕이 밝음과 순수함으로 제 모습 당당히 찬연한 빛까지 눈부시게 뿌려주는 것에 마음이 들었다.

 

또, 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화한 4괘는 음과 양의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하늘과 땅, 물과 불로 상징하여 높뛰는 심장을 더 한층 격동시켰다.

 

지난날 가난하고 암매하여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되었던 우리 민족이, 그들의 의사와 기호에 따라 웃고 울던 한반도에서 힘이 없어 항상 불안하고 위험에 떨며 눈치만 보아왔던 약소국가의 설움을 안고 살던 우리 민족이, 내 머릿속에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모진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끝끝내 세계최고의 선진국대열로 들어섰다는 생각에 가슴이 다 아려왔다.

 

그래서인지 언제인가부터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돌리며 살아왔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그러던 속에 대한민국의 국민가요 “당신은 모를 실거야”가 흘러들어와 군 복무하던 우리에게까지 왜곡되어왔다.

비록 가사는 다르게 왜곡돼도 서민들의 널브러진 삶을 반영한 것으로 하여 나에게는 짧은 시간에 흥얼거리는 콧노래로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오팔 년에 객사

                                      어머니는 그 뒤따라 재가

                                      내 동생은 물에 빠져 꼴깍

                                      형님은 달구지와 뽀뽀

                                      참으로 망할 놈의 집안

                                      나도 크면 놀세가 되리

 

                                      라- 라-라- 내가 제일 사랑하는 마마

                                      아버지를 여이시고 홀로

                                      눈물 없이 나를 키우셨네.

                                      이다음에 크면 훌륭한 가수가 되라 하셨네.

                                      에-헤 에-헤 에-헤

                                       내가 제일 사랑하는 마마

그 노래를 부르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와 같은 운명을 제대로 점친 것만 같아 부르고 또 불렀다.

 

노래를 통한 사상 문화적 침투의 위험성을 북한군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열혈 청춘들의 민감성을 물리적 장벽으로는 막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때로부터 더 이상 대한민국은 나에게 있어 사실상 북한 정권이 부르짖는 적국이 아니었다.

 

결국 오늘처럼 위기의 마당에서 나의 사상을 대변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욕망에 나는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 곳에서 두 다리를 펴고 마음 편히 한 번이라도 자 보았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또, 지금까지 이 땅에서 받아왔던 얼룩진 수모와 천대의 한을 제대로 풀어 보고 싶었다.

한 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은 나에게 있어 복수실현의 기둥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그렇다. 내가 선택한 길은 이 땅에서 간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이다. 그 선택의 빌미는 내가 아니라 북한 정권이 나에게 쥐어주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잠시, 왜서인지 북한 김일성 정권이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어루숙한 이 놈을 더 늦기 전에 일찍이 철들게 한 것만 같아 더 그랬다.

 

그런 것으로 하여 이 시각부터 내가 의지 하여 할 버팀목은 다름아닌 대한민국이었다. 버팀목도 여느 버팀목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삼각버팀목처럼 생각댔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가슴은 한없이 부풀러 올랐다. 하여 짐승취급을 하며 눈에 피발까지 세우고 날뛰는 경찰관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설쳐대는 그 어떤 위압감보다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배짱이 생겨났다.

‘저 녀석들과 싸우는 길은 오직 이곳에서 탈출하여 남한으로 가는 길이다. 그 것이야 말로 저들에게 당한 곤욕을 복수하는 길이다.’

 

갑자기 힘과 용기가 불쑥 솟아났다.

탈출에 성공하여 적국인 남한으로 가면 어쩐지 이루지 못한 꿈, 잘 먹고 잘 살아 부모님을 호강하게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정리하고 결심을 세웠다. 갑자기 솟구치는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성철과 모든 동료들, 그리고 우리를 감시하는 간수경찰관의 말과 행동도 나에게는 보이지가 않았고 듣기 지도 않았다. 보태지 않고 감방안과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작아 보였다.

 

운명의 스위치를 과감히 눌러야 할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은 다름아닌 간수경찰관의 방심에 있었다. 일단 간수경찰관에게 속을 주는 것처럼 쇼로  그의 마음을 해이시킨 다음, 역으로 멱을 조이는 방법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래서 부르기도 싫은 존칭어로 목청을 돋히며 쇼를 부렸다.

“선생님, 한 가지 제기 할 수 있습니까?”

“뭐이야?”

 

간수 경찰관은 예상치 않았던 첫 질문에 조금 긴장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선생이라는 표현에 나는 애절함을 담고 말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금방 낯빛을 폈다.

어깨와 허리를 가죽벨트로 연결하여 오른쪽 옆구리에는 권총을 찬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시끄러운 듯이 물었다.

“배가 갑자기 아파 대변을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있습니까?”

 

아까부터 감방안의 약점을 대변기가 없는 것으로 나는 잡았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렸고 어둠만을 기다렸다. 언제나 어둠은 나에게 새로운 변수를 불러오곤 하는 중요한 열쇠였으니 더 그랬다.

“아, 그 자식 시끄럽게 구네. 원래 이 시간이면 변소 칸에 나갈 수가 없어. 이 자식아. 하도 인민군 군인이라 한번만 봐주는 거야. 알았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속으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나의 꾐임에 완전히 넘어 간 간수경찰관의 행동에 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인마! 손 내대!”

 

내가 손을 내밀자 간수 경찰관은 수갑을 채우더니 쇠살창에 같이 붙어있는 조그마한 쪽문의 문을 열어 놓았다.

“나 왓!”

 

나는 새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쪽문 틀을 살짝 넘기며 감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성철이와 정권호 그리고 이철호가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들 중에서도 정권호 에게 만은 나의 결심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눈짓으로 웃음을 지어 보냈다.

 

스산한 쪽문이 닫히고 나는 어질러진 소음으로 귀청을 째는 소리를 뒤로 남기며 간수 경찰관의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밖으로 나왔다.

 

결전의 순간은 이제부터였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은 바짝 차려야 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결정이어 나에게는 한 보도 물러 설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음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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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ㅎㅎ ip1 2010-12-22 01:57:58
    언제나 연재를 잘 보고 있읍니다.
    오늘도 역시 흥미진진하군요.
    아 그랬었군요.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 했다가 중도에 사정상 공부를 계속 못한 거군요.
    어쩐지 무슨 운동 선수가 이렇게 글을 잘 쓰나했지요.
    운동과 공부 이둘을 함께 잘하는 자는 지구상에서도 드뭅니다.

    다음을 기대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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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쾅쾅쾅 ip2 2010-12-22 09:59:18
    문장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가 직접체험하고 있는 느낌마져 듭니다.
    하여간 정일이 ,정은이놈들은 때려 죽여야 할 놈들이니 우리모두 힘모아 개새끼들 때려잡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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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인 ip3 2010-12-22 11:38:41
    이 글을 쓰신 분도 대단하십니다만
    대체로 탈북자를 비롯한 북한 분들이 글 솜씨가 다 좋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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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동대 ip4 2010-12-23 04:08:50
    선생님... 지금 탈북해서 남한에 계신거지요? 이정도면 남한에서는 영화로도 손색없을정도입니다. 정말 잘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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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림이 ip5 2011-01-27 03:07:06
    님은 지금 한국에서뭔일을 하고계시는지요? 글을 넘 잘쓰셧습니다.
    여기서 작가로 활동하셔도 괜 찮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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