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북한군 탈출(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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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빼앗긴 조국
긴 한 숨과 함께 전신의 힘이 한 순간에 빠져 달아났다.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밤하늘은 그저 내 앞으로 노랗게 보였다. 거기에 샘 솟듯 뿜어져 나오는 땀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몸 전체는 그저 땅속으로 깊숙이 잦아들었다.
돌먼지들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최대의 위험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두 팔다리를 활짝 펴고 주변의 우듬지를 찾아 벌렁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단지 그 시간만큼은 모든 만사를 제쳐놓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수갑이 말썽을 일으켰다. 독재의 쇠사슬은 손과 팔을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억지로 팔기지개를 펴듯 머리위로 힘을 썼다. 그렇게나 널브러져 드러누웠지만 말 못할 무력감이 새벽안개처럼 밀려들었다.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살며시 눈을 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이어나야 하는데?’
생각은 빤하고 조설해도 도무지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래서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내친 김에 아예 땀까지 말짱 들이려 했다. 눈을 다시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생사운명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체감하던 상황을 그려보았다.
지금껏 나는 긴장으로 돌덩어리처럼 몸이 뭉쳐 웅크러져 머리카락마저 꼿꼿이 세우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줌을 쌀 정도로까지 몰고 갔던 상황은 그야 말로 벼랑 끝 접전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까닭이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살며시 경찰서를 내려다보았다. 경찰서는 내가 있는 지점에서 거의 250여 미터나 아래 위치에 있었다. 한동안 자리에서 땀과 숨을 돌리는 나에게 어쩐지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경찰서가 어쩜 먹이를 노리는 무서운 호랑이굴처럼 보였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눈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지 아님 비정상적인 사람이 해야 할 일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었다. 그래서 울분 절반, 기쁨 절반에 넘친 울음으로 폭소를 터뜨렸다. 손에 쥐어져 있는 버럭 덩어리들을 와락, 와락 쥐어뿌리고 손칼로 피터지게 두드리며 마음을 풀어보려 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가슴 펴고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쩐지 화가 치밀었다. 결국 쫓겨 다니는 도주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상의 뼈가 묻혀 있고 태가 묻혀 있는 이 땅,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첫 걸음마를 떼며 꿈을 키운 이 땅이다. 그 땅이 하도 소중해 귀중한 조국이라고 생각하며 이 손에 총을 잡고 전호에서 피땀만 바쳤다.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폭우 속에서 팬티만 입은 채, 사병의 몸으로 평양-개성고속도로 건설장의 암벽공사에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싫던 좋던 무조건 해야 했던 군사임무수행이어 아무 군소리 없이 이를 악물고 했다. 또, 어느 날에는 포 기동 훈련으로 이동하던 중, 견인 봉을 메고 있던 다른 사병이 겁에 질려 급경사에서 도망을 치는 통에 포와 함께 뒤집혀 피를 흘리며 쇼크까지 먹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보름이나 연대 군의 소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지 않았는가?
어쨌거나 미운 정, 고운 정 다 쏟으며 뼈를 깎고 살을 저미던 조국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잘 먹고 잘 살았다면 더 말하지도 않겠다. 정말 어느 하루, 어느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앉아보지 못했으며 누워보지도 못했던 그 조국이었다.
나에게 있어 이 조국은 피어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꽃을 선사하지 않았고 맺어보려고 그렇게나 발버둥 쳐도 실하고 영근 열매를 안겨주지 않았다. 짓밟힌 이 땅은 한마디로 말해 간부들이 사는 내 고향이었다. 또, 나중에는 나 같은 인간에게 자기가 대소변을 본 장소까지 외우라며 쇠뇌 시키려는 김 부자가 판을 치는 내 조국이었다. 그러던 조국이 오늘 날에는 살아도 살 곳 없고 죽어도 함부로 묻힐 데 없는 곳으로 되고 말았다.
결국 김 부자를 비롯한 악질 빨갱이들에게 하나에서 열까지 나는 완전히 빼앗겼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이름 모를 풀이라든가, 아님 벌레까지도 이 자연과 더불어 선대에서 물려받았고, 후대에게 고이 돌려주어야 할,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는 유산이 아닌가. 이 정권에서 물려받은 성분의 깊이로 하여 내가 겪어야만 했던 수난이 너무도 커 모조리 불사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이 땅에 새 봄을 맞이할 그날이 왔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의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언제인가부터 움트고 자라고 있던 조국,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으로 하여 심장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조국의 반쪽 땅이 없었더라면 나 같은 인간에게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조국이 당당하게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언제나 영광처럼 생각되었다. 한국은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 온 나에게 그야말로 눈을 튀어준 은인이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무지렁이 같은 인간인 나의 희망을 지켜 준 이 나라 반쪽의 조국, 백두 정기를 한 몸에 안고 사는 대한민국이 눈물 나도록 고마워 지구덩어리가 꺼지도록 무릎 꿇고 엎드려 절을 하고 싶었다.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는 북쪽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시는 나의 어머니! 이아들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진리를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그 작은 입에 따뜻한 쌀밥을 한 번도 먹여 드리지 못해 가슴만 끓던 이 녀석이 그 원인을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수갑을 찬 범죄자로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기로에 서고 있지만 지켜봐 주십시오. 이아들이 어머님의 그 바람, 그 소원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일어서보렵니다. 그래서 내 조국의 반쪽 땅, 대한민국으로 가렵니다. 지금은 도망자의 신세로 어머님께 마음이 담긴 나의 심정을 이렇게밖에 전하지 못하지만 언제인가는 떳떳한 승리자가 되어 빼앗긴 조국을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어머니! 정말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걱정만 하실 어머님의 생각에 눈물은 더 쏟아졌다. 그래서 마음을 잡으려고 알찐거렸다. 삶의 핍진함으로부터 아득하고 포근함을 얻기 위해서는 따스한 시선과 기도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다. 이는 자기 성찰의 확인이며 삶의 척박함을 스스로 닦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이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이 단두대에 선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우선 자신과의 싸움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한국으로 가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사실, 내가 있는 지점에서 직선거리로 한국의 백령도는 180여리밖에 되지 않았다. 바다만 없다면 걸어서도 하룻길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 180여리의 구간에는 엄청난 병력이 나와 같은 인간들을 막으려 물리적 기재까지 가지고 설쳐댔다. 더욱이 수갑을 찬 범법자의 신세로 그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은 어쩜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미욱한 짓이었다. 그래서 중국국경을 택했다. 만만한 곳은 그래도 개혁, 개방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중국국경밖에 없었다. ‘삑, 삑’
호루라기 소리가 경찰서마당의 도처에서 들렸고 플래시불빛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 얼핏 보아도 아수라장이 된 것 같았다. ‘잘은 논다! 미친 새끼들! 퉤’
나는 경찰서방향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태껏 아무렇게나 움직인 탓에 수갑은 더 조여져있었다. 그럴수록 손목은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런 아픔에 순간이라도 포로 될 순 없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끈적거릴 만큼 무척 더운 밤이었다. 다행히 내가 있던 지점은 그 높이가 있어 조금은 더운 공기가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이때, 내가 집고 선 돌덩이 짬 사이로 질경이가 밟혔다.
자연이 하늘을 숭상하는 믿음의 순종처럼 늦음도 더는 빠름도 없이 멈칫멈칫 수줍게 아우러져 오늘도 더위로 허덕이던 질경이들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는 밤이 되자 질경이이파리들은 눈부시게 밝은 연초록으로 금세 당당한 모습의 몸피를 다시 찾아보려고 요동치는 것 같았다. 틈만 나면 멀리 바람의 요람을 손짓하고 팔랑거리는 질경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비로웠다.
그 어떤 고난도 뚫고나가는 완강한 힘을 가지고 구태여 누가 가꾸어주지 않아도 이 땅위에 자기의 아름다움을 활짝 꽃펴보려는 질경이. 악착스레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그런 질경이가 어쩜 나 같은 운명을 무섭게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흙 한줌 제대로 없는 이 높은 돌산에 살아남아 있는 그 자체도 의문스러웠지만 뻗혀 사는 그 인생살이에 제대로 된 관심을 가져보기도 나에겐 처음이었다. 그렇다. 말 못하는 질경이라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
나는 조용히 몸을 숙이고 질경이 이파리 한 개를 뜯어 코에 가져가 쉼 호흡을 해봤다. 그렇게나 질경이의 따스한 향기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러자 중학교 5학년 때, 한문 시간에 배운 남의 장군의 시가 생각났다. 그때 나는 그 시가 너무도 좋아 머릿속에 기억하였다.
북정가 (北 征 歌) 백두산석 마도진 (白頭山石 馬刀盡) 두만강수 음마무 (豆滿江水 飮馬無) 남아이십 미평국 (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수칭 대장부 (後世誰稱 大丈夫)
1469년 회령부사를 지낸 이시애가 조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으로 이 일대를 장악했을 때, 17세의 나이로 대궐에 뛰어든 미친 호랑이를 왕이 보는 앞에서 때려잡아 세조가 지극히 총애하는 신하로 되었던 남이 장군이 아니었던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진압군의 우 대장으로 반란군을 3개월 안에 평정하고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청 관까지 되었던 남이장군이다. 그 이후 백두산에 올라 이 시를 쓰고 간신 유자광의 모해로 <평>자를 <득>자로 쓴 역적이 되어 28세의 어린나이에 처형을 면치 못하였지만 남의 장군의 애국 충정은 후세에 아직도 길이 남아있다.
북에 적을 치려가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남자가 20대에 나라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남이 장군이 생각하는 그런 대장부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 100분의 1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자신감에 충만 되어 자그마한 버럭 산을 두개나 더 넘고 북쪽으로 향했다.
중국 국경으로 나가자면 이곳에서 30리 떨어진 황해남도 송화군 수교까지 는 가야 했다. 그 곳에는 장연-만포 행 열차도 있었고 과일군에서 오는 열차도 지나갔다. 그러니 그 곳으로 가야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점점 마음의 무게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까부터 발바닥이 따가워 났다. 경찰서를 탈출하여 4킬로미터의 긴 구간을 지금껏 맨발로 달려 발바닥 껍질은 다 벗겨져 버렸다. 피멍이 든 발로 아픔은 무섭게 뒤쫓아 왔다. 더 이상 그대로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수갑을 푸는 것보다 발부터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산을 내려와 어느 한 광산마을로 지나면서 어떻게 하나 신발 한 세트만은 해결하고 싶었다. 마침 술판과 카드놀이로 주정을 부리는 어느 한 집이 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 중 나의 발에 맞는 것을 골라 신고 나는 누가 볼 세라 정신없이 달렸다.
옥수수 저장고인 탈곡장과 배급소를 습격하였어도 개인들이 살고 있는 집을 도둑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서인지 신발 한 세트를 훔치는 것이 진짜 도둑질로 죄를 지운 죄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래도 신발을 신어서 그런지 아픔은 덜했다. 발이 새털처럼 가볍기 시작했다.
시간은 저녁 9시를 훌쩍 넘긴 것 같았다. 이제는 수갑을 풀어야 했다. 사람들 속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범법자로, 도망자로 살자면 수갑을 차고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어떤 방법으로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버리겠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방조를 받는 것이었다. 계속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수교 기차역이 있을 것만 같은 동쪽으로만 향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앞을 향해 계속 달리던 나에게 갑자기 옥수수 밭이 나타났다. 돌과 미광 먼지로만 쌓여있던 지금껏 지대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광산지역을 거의 벗어난 것만 같았다.
수갑 풀 방법만 고민하며 이런 저런 생각으로 모대 기던 그때, 나의 앞으로 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긴 한숨이 절로 나갔다. 이 밤중에 낮선 곳으로 다니는 사람은 서민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민이 옮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뒷모습을 따라 갔다. 발걸음을 재빠르게 옮겼다. 가까이 가보니 나보다 2살 이상 많아 보이는 젊은 친구였다. “형님! 말 좀 물읍시다.”
젊은이가 멈춰 섰다. “왜 그러시까?”
전형적인 황해도 사투리다. “형님! 이곳이 지금 어딘지 몰라 그러오.” “군대 맞시까? 말씨를 보니깐 황해도 말씨는 아닌데?”
젊은이는 나의 말투와 옷차림을 보고 의아해했다. 태권복은 수많은 우여곡절로 몇 시간 내에 말이 아니었다. 하단내의 가랑이는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거렸고 땀에 절어 나의 몸 근육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는 슬며시 수갑을 찬 손을 숨겼다. “맞소. 형님! 제가 송화군 구탄 리에 있는 21항공 육전대 여단 지휘부에 있는데 체육훈련을 나왔다가 자유주의를 하는 바람에 길을 잃어버렸소. 그래서 부대로 가려는데 길을 잘 몰라 물어보는 것이오.”
첫 대면이라 거짓말을 쳤다. 지역과 군부대를 제대로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시까? 저 앞으로 조금만 나와 같이 가면 큰 길이 나올거시까.” 그는 나를 믿었는지 방향을 가르쳐 주며 밤중에 제대로 찾아 가겠는가고 근심까지 했다. “형님은 이 밤중에 어디로 가오?”
나는 그의 신분이 궁금했다. 도와줄 수 있는 인간인지 아님 다른 사람인지 테스트를 쳐야 했던 것이다. “작업반 농장 옥수수 밭 경비를 서러 가시까. 요즘 군대들이 어찌나 갈 개는지 하룻밤 경비를 잘 못서면 밭이 모조리 도적 맞힌다시까.”
알고 보니 8월 중순에 접어들며 익어가는 옥수수 밭 경비를 서려 가는 농장 원이었다. 그래서 기뻤다. 나와 같은 처지의 서민이라 도와줄 것만 같았다. 일단 그에게 믿음을 사야했다. “그래 낮에도 일을 해요?” “안 그러시까. 밤 근무를 서는 것이 하루 일이라 낮에는 놀 아유.” 직업하나는 정말 제대로 잡은 젊은이었다. 이 비상시국에 젊은 녀석이 낮엔 놀고 밤에 경비만 서다니? 사실 이런 직업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서민들의 직업이었다.
그와 나는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10분정도 걸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믿는 것 같아 대뜸 그에게 물어 보았다. “형님! 날 좀 도와주실 수 있겠소?” “무엇시까?” “사실, 내가 사람을 때린 잘못하여 광산 안전부 구류장(유치장)에 있다가 도망쳤는데 아직도 손목을 묶인 몸이요. 이 수갑을 좀 까주시오”
내가 손목을 추켜들었다. 밤하늘의 별빛에 수갑의 도금칠은 유별나게 반짝거렸다. 그러나 내 손목이 올라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젊은이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와 나 사이는 1m이상으로 벌어졌다. 젊은이는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난 못하시까. 무서워서 절대 못하갔시까. 다른 사람하고 부탁해 보시까.”
젊은이는 커다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몸마저 바르르 떨었다. 완전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알았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형님 볼일이나 보시오.”
믿는 도끼 발등을 찍는다고 그렇게나 믿고 속을 주었는데 단번에 거절당하자 속이 울컥했다. 하지만 더 이상 감정을 살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앞으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일정한 격차를 벌리고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 젊은이가 신고할 것만 같아 정신없이 달렸다. 숨은 다시 턱에 닿아 견물 내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나 10분 정도 달렸다. 그런데 이때 나의 눈앞으로 칠흑 같은 밤이 환하게 밝혀왔다. 백열등을 켜 놓은 불빛에 사방 100미터주위는 대낮같았다. 그 곳은 방앗간이었다. 북한의 방앗간은 농촌의 각 리마다 그리고 광산에는 구역별로 몇 군데 설치해 놓았다. 대체로 방앗간 건물에는 높은 촉수의 전등을 달군 하였다.
훤한 불빛에 군복을 입은 두 명의 사병이 보였다. 방앗간 문 앞에는 60kg정도 되는 쌀 마대와 가볍고 튼튼하고 깨지지 않는 신소재의 커다란 알루미늄 다라가 놓여 있었다.
2일만 지나면 8월 15일 명절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명절을 앞두고 부대에서 떡을 하려 방앗간을 찾아 온 것만 같았다. 군복과 영장은 사회 안전부(경찰서) 소속 공병 국 군인들이었다. 두 명 다 한 줄을 가진 사병들이였다. 그들과 불과 10m 거리에서 마주치고 보니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났다. 그래도 아까 젊은이보다 군인들이 내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야! 상등병, 나 좀 볼 수 없어?”
나는 마음을 다잡고 소리 질렀다. 그들은 나의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서로 지들끼리 한참이나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상급인 듯 한 키가 크고 몸집도 좋은 상등병이 나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요?”
그들에게만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4군단 28사단에 있는 군인인데 체육 조에서 훈련 하다가 안전부(경찰서)새끼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니 날 도와줄 수 없냐?” 나는 나보다 어려보이는 그에게 초보적인 설명을 하였다.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수갑을 돌로 쳐서 풀어주렴.”
의외로 사병은 나의 말에 동정의 눈빛을 던졌다. “아. 그거야 못 하갔시오. 내가 제꺽 풀어주겠시오.”
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돌을 찾아보았다. 역시 군대가 군대였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 것 군대밖에 없었다.
나는 속으로 ‘군대가 군대다.’라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어디서 나타났는지 웬 손 전지불빛이 나타났다. 오른쪽 구석에서 군인 3명이 플래시를 켜들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야! 명천이. 그곳에서 뭐해?”
전지를 잡은 특무상사가 고함을 질렀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관 장 동지!” 도와주려던 사병이 말을 더듬었다. “뭐야? 야 이 새끼! 너 무슨 나쁜 짓을 하지 않아?”
사병이 손에 들었던 돌을 버리자 특무상사는 손에 들고 있던 플래시로 나와 사병의 아래 우로 비쳤다. “너 이 새끼! 뻥까우리한테 쌀을 팔아먹으려 한겻 아냐?” “아닙니다. 사관장동지!” “그럼 이 사람은 뭐야? 이 밤중에 왜 사민과 접촉하는 거야?”
특무상사는 나에게 신경을 쓰며 플래시불로 아래위에 비추었다. 그러다가 나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발견했다. 그는 플래시를 집어 던지고 나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위생지도원! 빨리 오라”
뜻밖에 상황이 발생했다. 그들을 그저 같은 사병으로 착각했던 나였다. 하지만 나의 순간적인 방심이 그들을 원수격멸에로 불러주었다.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으로 하여 나는 커다란 곤경에 빠졌다. 어이없게도 그들의 손에 아주 쉽게 잡히고 말았다.
공병국은 군복은 입었어도 총이 없다는 것으로 하여 인민군은 늘 그들을 무시하군 하였다. 그런데 그들도 나름대로 젊은 청년집단이다 보니 무시하는 인민군을 아니꼽게 보았다.
나는 자못 태연한 척 하였다. 하지만 이대로 끌려 갈수는 없었다. 사관 장은 나의 손목에 묶인 수갑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끌려 20분정도 언덕길로 올라가자 10m 근처에 부대 보초소가 나타났다.
그들의 병실이었다. 그제 서야 나의 손목에 채운 수갑을 쥐고 앞장서 가던 사관장이 손을 놓았다. 수갑은 당기면 당길수록 조여들었다. ‘때는 이때로다. 너희들에게 반편처럼 잡힐 내가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도망가야 한다.’
더 이상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해이되어 앞서 걸어가는 사관 장을 확인하며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왜 그러시오?”
다시 한 번 그를 꺾어버릴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신발이 벗겨져서 그래요.”
나는 몸을 숙였다가 일어서면서 앞에 서있는 사관 장을 오른 발로 급소부위에 타격을 가했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뒤에 서있는 위생지도원이 달려 들 것만 같아 옆 도랑으로 냅다 건너뛰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여서 나의 뒤에서 따라오던 2명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오른쪽 비탈진 버럭덩어리 산으로 정신없이 톱아 올랐다.
신발은 오른쪽이 벗겨져 달아났다. 그때까진 정신이 올돌했다. 그렇게나 5분 정도 뛰어 올랐지만 갑자기 나의 눈앞으로 넓은 운동장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높은 촉수의 전등에 의하여 운동장은 대낮같이 밝았고 200m쯤 되는 건물에서 20여명의 군인들이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그들이 보초 소를 이용하여 비상벨을 울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공교롭게도 내가 보초막의 오른쪽 비탈로 도망간 것이 그들의 부대 운동장오른쪽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너무도 황당하여 다시 방향을 바꾸고 올라오던 곳으로 내려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밝은 곳에 있다가 갑자기 불빛이 없는 곳에 정신없이 도망친 것도 문제지만 앞뒤 분간을 하나도 하지 않은 무분별함에 내리막 비탈은 도저히 보일 리가 없었다.
그냥 10m정도 굴러 내려갔다. 먼지와 땀투성이를 뒤집어쓰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 나에게 밑에서 쫒아오던 사관장과 위생지도원이 막아 나섰다. 결국 그들에게 다시 잡히고 말았다.
나는 반항을 하지 않았고 그들도 왜서인지 나를 때리지 않았다. 그들의 병실 한 끝에 있는 대장 방으로 끌려갔다. 문 밖에는 수 십 명이 나의 도주를 저지 시키려고 대기하였다.
조금 시간이 흘러 대위 계급의 장교가 들어왔다. “내가 이곳 보위지도원인데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더는 속일 수가 없었다. 알아보면 금방 드러날 것이어 거짓말은 성이 오를 대로 오른 수십 명의 대기 군인들에게 뭇매만 맞을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더는 빠져 나 갈 구멍수가 없었다.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독안의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낙연 광산 안전부(경찰서)에서 탈출하였습니다. 4군단 28사단에 있는 체육조입니다.”
책상위에 놓여있는 전화통을 수동으로 돌리는 보위지도원은 험상한 얼굴에 웃음보를 띄우며 기뻐했다. 팽팽한 긴장감은 15분 정도 계속되었다.
나는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 다가 올 또다른 위기를 맞이하려 했다. 어찌나 정신없이 달렸는지 얼굴과 몸에는 소금기와 먼지투성이로 가득 찼다. 그리고 땀으로 얼룩졌다. 왼 발에 한 짝의 신발만 신었고 바짓가랑이는 찢어져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돌과 나무들에 긁혀 종아리는 여기저기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빼앗긴 조국에서의 첫 삶은 이처럼 가긍했다. 순간의 방심도 허용이 안 되는 그야말로 빼앗긴 조국이었다.
(다음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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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정신적인 고생,육체적인 고생을 하셨을까요! 정신력이 대단한 분이신것 같군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님을 돕지 않았다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찌 살아 나오셨나요! 아무튼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만일 당신의 삶이 책이나 영화로 나온다면 제일먼저 볼것입니다. 힘내시구 다음내용을 얼른 올리세요!
너무나 좋은 필력이라 책으로 내야합니다.
이건 출판사를 잘 선택하여 (좌편향 출판사들이 너무 많으니 잘 알아보고)
원고를 갖고 가기만 해도 오케이일겁니다.
물론 여러가지 북한 생활이나 성장기 등등.. 살을 좀 붙여서...
필자님도 새해도 복많이 받고 소원성취하십시오.
자유를 향한 백심님의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을 보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죽음도 그의 발걸음을 멈츌 수 없었던 강인한 정신력! 그것이 당신에게 자유의 낙원을 선물했군요.
정말 축하드리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