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대사관에 들어간 첫 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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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개나라 국경과 세개나라 감옥을 거쳐 수천만리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 도착, 희망과 생명의 등대 남조선 대사관! 들어가니 정치구호는 하나도 없고 한가하게 느껴지는 전통 그림들. - 이미 탈북벌목공이 세명이나 들어 와 있었다. <나가지 못하겠어! 경찰을 부를 거야> 한 탈북자가 나가면 죽으니 여기서 죽겠다고 칼을 꺼내니 발길을 날려 칼을 뺏고 <나가서 죽어!> - 그들을 내쫒고 우리에게 온다. 나는 캐나다국적한인목사와 함께 들어갔었는데 행색이 여지없이 한국사람. <아!북한놈들때문에 골치아파죽겠어요.> 목사가 당황하여 이 사람도 북한사람이라고 하자 안색이 달라진다. 이어<북한에서 태어난 죄이지요. 위에서 받지는 말라지> - 그때부터 나는 풍찬노숙,생사고비를 넘기면서 나라없는 설음속에 통일이 안되는 것은 북 만은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 고생속에 그래도 거처하고 안식할 수있었던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그래도 사람을 반가워하는 편이라 감사하였다. 그 속에서 탈북벌목공들을 규합하여 <로씨야 탈북망명자협회>를 조직, 탈북자의 인권과 통일을 생각하는 남한언론(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 미국 월스트리스 저널 기자와 연계하에 탈북벌목공 문제를 이슈화시켜 마침내 유엔고등판무국(UNHCR) 제1호로 등록 모두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외탈북자는 유엔법으로 데려온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실망에 또 실망은 조사란 명목으로 탈북자들을 개처럼 두두려패고 폭언 <판문점으로 보내버리겠어, 신분증도 없어 죽여 훌 불어버려도 되> - 탈북자의 인권을 위해 1998년12월13일 자유북한인협회를 뭇고 투쟁한 결과 폭행,폭언 즉시 중단 그 다음해부터 정착금3배인상되었고 탈북자관리도 조사위주 6개월이 아니라 정착위주로 전환 3개월 하나원이 탄생. 이 운동에 시초에 허광일 등 탈북자들이 함께하였고 감옥과 불이익을 당하면서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한창권,유재희,홍진희,엄명철,장철봉 등 등의 동지들의 수고를 잊지말아야. 그 다음 투쟁목표는 해외여행자유화, 단순여권쟁취, 3년후 복수여권완전 쟁취, 그 다음투쟁은 해외탈북자 무조건 받아라!. 그 결과가 한국대사관에 들어온 탈북자는 무조건 받는다. - 31명의 표류민들 초미의 문제로 대두, 그 밖의 북한주민 인권보호를 위해 우리가 나서자는데 적극 호응합니다. 개떡같은 탈북자같에도 그들을 위해 눈물흘려줄 사람은 우리입니다. 탈북자들이어서 보수우익을 좋아하는데 역사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안나가면 경찰을 부를 거야 했던 모스크바한국대사관 때가 보수적인 노태우정권(1992년7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위해 받을 수없다고 한 것이 당시 진보적인 김영삼정권(1994년3월) - 인권은 좌우익에 치우칠 수없는 인류보편적가치입니다. 좌우익에 기댈 것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 응당한 권리를 위해 나서야 합니다. 법조계의 세계적 명언 <권리위에 자는 자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말은 내가 남한에 와서 배우고 체득한 인권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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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품어준 대한 민국에게 감사하면서 잘 못된 것은 고쳐 나가야지
받아주고 국적 주고 했는데 지들이 잘해서 된것처럼 말씀 한다면
탈북사회와 국가 정부 국민 사이에 이간하는 것 밖엔 안되네요
그렇다면 2004년 까지 정착금 3천 만원 주던 것 투쟁해서 6백이 되었남 ?
무슨 되지 않을 소리 이빈복님은 그래서 욕을 먹습네다
고쳐요 놈 잘난체 마쇼유
난 그래서 보내라구그랬어. 그랬더니 정착금 갂는다구 하더구만.ㅉㅉㅉ
그래서 정착금 필요없다구 당신들 다가지구 나 내보내서 일할수 있게 해달라고 했음.
마지막 하나원 나올때 나 따로 하나원 원장실 불려가가지구 밖에나가 아무말 하지말라구 했음.
명망있는 단체장님들, 탈북단체 대표님들, 운동가들, 박사,,선생님들.
시간이 촉박합니다.
3명의 생명을 구원하지 못하면 당신들은 영원히 입을 벌릴 자격이 없습니다.
어떻게 적극적인 대책 없을가요?
그들이 죽움으로 가는걸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진보 좌파가 아니라 이 역시 보수우익의 정권이 꽃피던 시절입니다.
항상 글을 쓰실 때는 바른 팩트를 적시하고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 당시 까지만 해도 귀순자라면 거의 영웅급이었는데..
물론 당시 미묘한 외교마찰 문제 때문에 신중했을 수는 있을 것이라 본다.
독일통일후인 1991년부터 책상머리 학자들의 독일통일의 부정적효과 떠듬에 정부도 일맥상통하여 즉 대량난민우려하여 내적으로 제한적 즉 정보가치있는자만 받는다로.
좌우익을 떠나 정치란 이런 것입니다.